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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이름은 영경이요, 자는 선여이며, 춘호는 호이다.
선조5(1572)년에 정시(庭試)에 급제하고 선발되어 괴원(槐苑, 승정원)에 들었고 전적에 올라 사간원 미단, 사헌부 백부를 출입한지 약 10년만에 1583년 서장관으로 차출되어 연경에 다녀온 후에 고산 찰방 직책을 받으니 대개 조정에서는 새로운 규칙을 세워 찰방으로 하여금 북역로의 람상(濫觴)의 폐해를 규찰하도록 함이었다.
공은 법도와 준칙이 지극히 엄정하였고 풍채가 있어 인품이 당당하다는 말이 많았다. 선조24(1591)년에 홍문관 수찬, 교리를 하고 자리를 옮겨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선조25(1592)년에 섬의 오랑캐가 광란적으로 처들어와 도성(서울)에 육박해오므로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함에 공도 임금을 모시니 중도(中道)에서 사간에 임명되었고 관서지방에 이르니 승지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황해도 순찰사를 명 받으니 그 선임(選任)은 중요하였다.
공은 정성과 사려(思慮)를 다하여 적을 헤아려 적절히 대응하니 일에 부합됨이 많아 왕이 더욱 융숭하게 대하였다. 선조26(1593)년에는 품계가 가선대부(종2품)로 승진되었고 선조22(1594)년에 들어와 대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병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조30(1597)년에 총관사로서 영남을 안절(按節)하니 때는 명나라의 원병이 와서 국경에 주둔하자 사기(事機)가 매우 급하여 공이 대책을 주선허고 대응하여 일이 모두 다 좋은 결과를 얻으니 명나라 장수도 기뻐하고 칭찬하였다. 이로서 품계가 자헌대부(정2품)로 승진되었고 이어서 좌도를 순찰하라는 하명이 있었다.
선조32(1599)년에 특별히 병조판서로 되었다가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대사헌 및 형조판서가 되었을 대 옥에 갇혀있는 죄수가 넘쳐 공이 이치로 헤아려 척결하므로서 옥 안이 거의 비워지게 되었으니 늙은 아전이나 졸개들 까지도 탄복하였다. 선조35(1602)년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오래지 않아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으니 이것이 공의 관직을 대략으로 기술한 것이다.
공은 젊어서 엄하면서도 도량이 넓었으며, 의연하면서도 추진하는 역량이 있었다. 내각(內閣)을 차례로 역임하니 명망이 드높았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충성심이 더욱 간절히 요망되었다.
그 때 명나라의 석상서(石尙書)는 많은 군사를 우리나라에 주둔시켜 통제하면서 당당했는데 명나라에서는 작은 나라와 견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강화를 목적으로 호택(胡澤)을 보내 한마디로 완벽한 의전(儀典) 철차를 우리나라에 요구하고 원병(援兵)을 해제시키기를 바라면서 굴레를 씌우니 공이 의(義)를 근거로 이를 물리쳐 끊었다. 사간원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견제(牽制)의 실언(失言)이 법도에 어긋났슴을 힘써 간(諫)하는 말이 매우 곧고 강직하였다. 그후 명나라가 왜국을 봉(封)하는 조칙(詔勅:명나라 황제의 말) 중에 과연 조선이 있으나 너희들을 위하여 봉하게 되었다는 말이 원수놈들에게 퍼지고 있었다. 공이 동궁을 추대하니 동궁은 바로 광해군이다.
그 때 명사(名士)들이 많은 죄를 지었으나 임금이 공에게만 벌하되 다만 직책을 바꿨을 뿐이다.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붕당을 파하고 인재를 수습하라고 청하니 식자(識者)들은 옳다하고 부박(浮薄)한 자들은 비방하는 말이 떠 돌아서 공은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을 빌었으나 임금이 답하기를 경은 정직한 사람이다. 때에 따라서 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보아도 권세에 매혹되지 않고 조정의 대계(大計)가 전도(顚倒)됨을 당하여는 항상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주 대하여 꾸짖고 분연히 자신을 돌보지 않았는데 하물며 간사한 무리들에게 흔들려 굴복하란 말인가 하였으니 그 말씀이 엄준하고 정론을 폄이 이와 같았다.
재상으로서 사진(仕進)하는 날에 공의 뜻은 무너진 기상을 엄숙하게 바로 잡고 도당의 큰 모임에 무례함을 규정(糾正)하려는데 있었으니 명관(名官)으로서 일을 이와 같이 처리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헐뜯는 자가 더욱 많아졌고 선조 임금이 병으로 눕게된 때 공은 영의정으로 있었는데 아첨하는 무리가 은근히 정인홍을 부추겨 글을 올려 공을 모함하여 이르기를 동궁(광해군)을 모해하여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하니 임금께서 공의 사퇴 상소에 답하기를 소인들 무리중에 영의정을 모함하려는 자들이 거짓과 무고한 말을 지어 남중(南中)에 전파시키니 정인홍이 주어모아 상소를 한 것이며, 지친 사이이기에 부득이 이로 인하여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하교하여 말하기를 경이 무고(誣告)를 입은 정황과 정인홍이 상소한 글은 천일(天日)이 하림(下臨)하는 바이나 더욱 통탄하는 바는 사람이 모래를 입에 물고 그림자를 쏘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허무맹랑한 계책을 좋아함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그 말이 전해지고 전해져 군부(君父)에 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참으로 임금도 없는 반역의 무리들이다.
임금이 어찌 이 간사한 인간들을 용서하겠는가 하였으나 대개는 임금이 항상 광해군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하였고 영창대군은 적자(嫡子)로서 강보에 쌓여 있으니 여러 간신들이 화를 선동함이 날로 더해갔으며, 공은 오래동안 의심되고 위태로운 곳에 처하여 있으니 앞을 처다보고 뒤를 돌아보아야 하는 태세가 능치 못하여 아첨하는 무리들이 동궁이 공을 모함한다는 제목으로 삼아 처음에는 추대한다고 하고 나중에는 모위(謀危)한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해치고 난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이 때 천문(天文)의 변고(變故)도 있고 태성(台星)이 파멸도 하여 하늘님이 우리나라에 크게 화를 내리어 선조가 서거(逝去)하니 빈청(賓廳)에서 염을 할 사이도 없이 요사한 망령이 빈측(殯側)에서 고무(鼓舞)하여 칼이 되고 살이 되어 막을 수가 없었다.
상국 이덕형은 공이 반드시 간신들의 손에 해를 당할 까 염려하여 상소하고 힘껏 구하는데도 살육으로서 임금을 이끌겠다는 말까지 하였고 도헌(都憲), 한강(寒岡) 정술(鄭述)도 상소하고 그 상소문에 선왕조의 대신들을 돌연히 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으나 광해군은 이미 신기(神氣)가 혼미(昏迷)에 빠졌으니 어찌할까.
처음에는 경흥으로 귀양을 갔고 화가 참혹하여 마침내 자진하라는 명이 있어 곁에서 모시던 자제(子弟)들과 더불어 말을 하며 평상시와 같이 밤이 새도록 편안하게 주무시고 다음 날이 밝으니 관대(冠帶)를 갖추어 입고 침착한 안색으로 조용하게 죽음에 나가니 이 때 나이 59세이다. 만약 평상시에 진실함을 보고 얻은 바가 없었다면 이와 같이 태연할 수 있겠는가. 그 해에 선영(先塋) 곁으로 반장(反葬)하였다. 그후 5년동안 간신들은 독을 더욱 뿌려 화가 화가 황천(黃泉)에 까지 미치어 합문(闔門)하고 해를 만났다. 아! 슬프고 슬프구나. 계축년 9월에 양주의 도봉산 서남향 산기슭에 이장(移葬)을 하였다.
애통하구나 천도(天道)도 가히 믿을게 못되고 철인(哲人)도 가히 추측하지 못함이 이와 같은가. 가히 알지 못하겠구나. 다행이 천도(天道)가 촣게 돌아와 인조임금께서 요란한 세상을 평정하니 정인홍의 간사한 무리가 저잣거리에서 죄에 따라 처형되니 공의 원통함이 밝게 설욕되고 관작도 회복되고 특별히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였으며, 넓은 제전에 미치는 바가 애통과 영광 두가지를 다하였으니 이 또한 천도(天道)를 어기지 못함이었다.
공은 나라의 대절(大節)을 따름은 높고도 높았으며, 그 개요는 이와 같고 한편 직위가 더욱 높아져도 집에는 반묘(半畝:50평)의 밭도 없었으니 이것이 공의 남은 일이었다.
공의 배필은 창원황씨인데 바로 동지중추부사 황응규의 따님이다. 부인은 온량(溫良)하고 화순(和順)하여 좌우에서 어김없이 그 성경(誠敬)을 다하였으며, 공보다 26년 후에 별세하니 수(壽) 84세이다. 계유년 4월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자녀는 5남3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열(悅), 흔( ), 업( 業 ), 제(悌), 선( )인데 열은 사마로 현감을 하고 우찬성 전평군으로 증직되었으며, 흔은 학생이고 업은 장원으로 생원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이며, 제는 무과로 현감을 하였고 선은 학생이다. 장녀는 장령 유수증, 차녀는 감사 이핵, 3녀는 한소일에게 시집을 갔다. 열은 1남3녀가 있는데 정양은 정휘옹주에게 장가가서 1품에 오르고 전창위가 되었으며, 시호는 고정공이다.
○신도비명에 이르기를 구정(九鼎:주나라 때의 보물로서 중요한 지위를 비유하는 것임)과 여물(呂物)은 물건 중에서 더 클 수가 없으니 그의 큰 기국(器局)이 어찌 사직(社稷)을 보좌하지 않겠으며, 깊은 산 숲속에 호랑이와 표범이 활동하기 어려움은 그를 수호하는 역량이 큼이 아니겠는가. 도량과 역량이 남아있었으나 능히 모남을 끊어 둥글게 못하니 세상에서 부앙(俯仰)할 수 있겠는가.
성덕(聖德)은 날마다 융성하고 국은(國恩)은 더욱 무거워지니 참고 편안하게 결별하지 못하고 마침내 법망(法網)에 걸려 음해자들은 하늘이 그를 귀양보내 죽게하였으나 지하에서 선조 임금을 도울 것으로 나는 알고있습니다. 무릇 양덕(良德)의 보답이 완전치 못하니 진진한 자손들은 영화가 빛나소서. 조카인 가선대부 강원도 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류항이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