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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柳氏 永賀公 墓下碑文 解說(전주류씨 영하공 묘하비문 해설)
○ 公의 諱는 永賀이시니 성은 柳氏요, 貴鄕은 全州이시다. 柳氏는 新羅에서 비롯하여(始初 車姓) 高麗朝를 거쳐 왔으니 大丞公(車達, 高麗開國功臣)이 儒州(黃海道 文化縣)에서 일어났으며(高麗 太祖가 柳氏 姓을 賜姓) 掌令公(濕)에 이르러 完州(현 全州)에서 興盛하였다.
(全州本貫創始) 諱 濕께서는 慶兆가 쌓인 家門에서 五子一婿가 모두 文科에 合格하시니 기쁜 徵兆가 뚜렷하였다. 司憲府 掌令을 贈하시고 完山伯으로 封爵되시니 妃 全州 崔氏는 三韓國大夫人(三韓甲族의 으뜸가는 부인에 내리는 品階)이시니 이 내외분이 公의 始祖이시다.(墓:始祖 完州郡, 始祖妃 全州). 自後로 높은 벼슬과 德望과 큰 분이 대대로 이어 내려왔다. 7代祖 諱 克恕께서는 高麗 文科에 오르시고 寶門閣 直提學을 지내셨다(1388년졸, 墓 安東). 6代祖 諱 濱(1382年 朝鮮朝 太宗 同榜進士 1386년 孟思誠 文科 同榜)께서는 나라에 忠誠한 經歷이 높이 드러나고 淸廉하심이 뚜렷하였으니 永興大都護府使를 지내시고 吏曹參判에 追贈되시었다(墓 榮州 鍾凌). 5代祖 諱 末孫께서는 司憲府 執義 벼슬을 지내시고 吏曹參判에 追贈되셨다(墓 南原). 高祖 諱 季漳(1435年生, 1515年卒)께서는 (1460年 武科 合格)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使를 지내셨다(墓 安養). 曾祖 諱 軒(號 駱峯, 1462年生, 1506年卒)께서는 (1489년 文科 合格) 大司諫 등의 벼슬을 지내시고 吏曹判書에 追贈되시었다. 駱峯께서 燕山君의 荒政을 直諫하심에 罪로 몰려 제주도로 流配되어 1506年 中宗反正으로 伸寃(신원)되어 歸還 도중 倭賊船의 被害를 받아 돌아가시니 (1506年 中宗1年 45歲卒, 墓 楊洲) 淸白吏로 기록되고 자손을 敍用하게 되었다. (中宗 9年, 1514年) 祖 諱 世麟(號 活灘, 1490年生)께서는 (1516年 司馬試, 1521年 文科 合格) 吏曹參判을 지내시고 贈左贊成이시다(墓 楊洲). 考 諱 儀(1518年生, 1576年卒)께서는 文昭殿 參奉을 지내시고 贈領議政 全陵府院君에 追贈되시었다(墓 南楊洲郡 德松里). 이 어른은 屢次 科擧에 應試해서 오르지 못하셨으나 항상 讀書를 즐기시고 文行이 있으셨다. 어른을 섬기기에 誠心을 다하셨고 말씀이 적으셨다. 動靜에 한결같이 옛 聖賢의 法道를 따르셨다. 僉正 벼슬한 盧僉의 딸을 취하시니 바로 領議政 盧思愼(1498년졸)의 5대 孫女이다. 세 분 아드님이 있으신대 長男 諱 永吉(1538年生, 1601年卒, 號 月篷)께서는 科擧에 壯元(中宗 17年 當 22歲)하시고 벼슬이 禮曹參判에 이르셨다. 初授 工曹佐郞으로 비롯해서 三十餘年間에 二十餘 職責을 經歷하시는 가운데 黨爭을 忌하사 牧使 監司 등 外職에 많이 머무셨다. 文章이 卓越하시니 月篷文集을 남기셨다. 次男 諱 永慶(1550年生, 1608年卒 號 春湖)께서는 1572年 宣祖5年 別試 文科에 合格하시고 吏曹 兵曹 判書 등 職으로 壬辰倭亂, 丁酉再亂 平定에 功勳이 크시다. 領議政을 지내시고 (戰亂後의 疲弊한 國政을 再建하심) 全陵府院君으로 封爵되시었다. 三男 諱 永賀(1553年生, 1626年卒)公이 바로 이 어르신이다. 벼슬은 工曹 正郞, 玄風 縣監을 지내시고 (倭亂 當時의) 扈聖原從과 宣武原從功臣이시다. 光海君 集權 初年에 逮捕되셨으니 그 까닭은 議政公(永慶)께서 奸黨의 捏造된 謀陷(宣祖 41年 王崩 光海君 卽位 王位繼承紛爭이 黨爭과 結付됨)을 받아 畢竟에 極禍 賜死하기에 이르렀고 公은 1612年 金直哉 獄死 때 大北派 賊臣들의 誣告로 慶南 巨濟島에 流配(光海 4年부터 仁祖 元年까지)되시고 仁祖反正으로 朝廷에서 伸寃하여 歸還하신 후 三年되는 해에 돌아가시니 年歲가 74이시다. 主山峰 큰 능골에 葬禮 모시고 配位 恭人 密陽 朴氏도 公과 한자리에 모셨다. 二男三女를 두셨는데 長男 汴(1574年生, 1606年卒, 當年 33歲)께서는 扈聖原從功臣錄에 오르시고 通德郞이시다. (子 廷益公 幼時에) 槐山(外祖 平山人 縣監 申景禎 鄕里)으로 移徙가시고 (忠北 一圓에 後孫 繁昌), 次男 忔(1579年生, 1659年卒, 當 81歲)께서는 扈聖原從功臣錄에 오르시고 世子翊衛司 洗馬(王世子輔弼 文官職, 正九品)로 있으시다가 (光海4年 金直哉 誣獄時 父 永賀公과 동시에) 全南 興陽(現 高興)으로 流配되시고 (光海4年 當 34歲부터 仁祖 元年 當 45歲까지 滿 12年間) 풀려나신 후 대대로 墓下 部落에 사시게 되었다. 門中이 모두 禍를 입으니 멀리 漢陽을 떠나 華城郡 楊甘面 蓼塘里에 定着하게 되었다. 임금께서 세차례나 벼슬 길에 부르셨으나 辭讓하시고 나아가지 않으셨다.
끊임없이 子孫들이 繁昌하니 이루다 적지 못한다. 公의 墓에 예전에 刻石한 記錄文이 없음으로 宗孫 璋熙 등(玄風公 宗親會 任員 諸位)이 論議하여 돌을 다듬고 墓道를 修築(莎草)할 새 碑銘을 나에게 委囑하니 義理에 辭讓치 못하여 譜牒에 依據하여 大略을 記述하니 앞에 적은 바와 같다.
檀紀 4325(西紀 1992)年 3月 일 12代孫 靘秀 글 짓고 文學博士 韓相甲 글씨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