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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7.png 9세 현풍공(휘 영하) 및 10세 세마공(휘 흘)의 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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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風公과 洗馬公 父子께서 落鄕하신 世居地


○ 全州柳氏 九世이신 玄風公은 贈領議政 全陵府院君과 贈貞敬夫人 交河盧氏의 三男三女 中의 三男으로 明宗8년 癸丑年(1553년) 6월 30일에 출생하시니 成長하시면서 文體가 더욱 빛나고 處世 또한 自重하여 金公斗南과 鄭公孝誠과 交遊하여 時稱三傑이라 전하고 있다.

 

蔭仕로 官職에 出仕하시어 內職으로 要職을 歷任하시고 外職으로 玄風縣監으로 나아가 治積을 남기셨다.

 

光海4年 壬子(1612)士禍에 連累되어서 巨濟島로 流配되셨다가 仁祖反正(1623)으로 伸寃이 되어 歸京하셨으나 門中의 患亂을 겪은 상처를 위안할 곳이 없어 家率과 함께 落鄕하신 곳이 京畿道 華城郡 楊甘面 蓼塘里이다. 地域의 變遷史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玄風公(諱 永賀)과 洗馬公(諱 忔) 父子분이 落鄕하시어 部落을 創建하시기는 1623년으로 추정되나 문헌상으로 1831년 華城留守府에서 發刊한 地理誌인 「華城誌」에 처음 蓼塘里라는 地名이 登場한다.

 

玄風公의 墓所는 마을 북쪽 主山峰 南麓 大陵谷 子坐에 계시고 남쪽으로 德智山을 향한다. 廣州山脈이 水原 光敎山에서 높이 솟았다가 南으로 七十里 낮게 뻗어내려 蓼塘里 主山峰에서 멈추었다가 마을 앞 海拔 二十m의 낮은 허리에서 德智山(138m)이 다시 솟아 남으로 五十里를 다시 이어내려 牙山灣에서 바다로 臨한다. 德智山 東邊 기슭에 魚沼里와 網浦가 있고 西邊 기슭에 늘언(堰)과 「닻꽂이」가 있어 양쪽이 모두 갯골이므로 潮水가 드나들었으니 산의 남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七個 面의 넓은 땅은 마치 섬과 같다. 山頂에 오르면 北으로 水原 光敎山, 南으로 西山半島, 東으로 振威 平澤, 西로 南陽灣의 島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사위 申應枓(1592∼1653)의 後孫들이 楊甘面에 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玄風公께서 落鄕地를 택하실 때 신응두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申應枓의 三堂叔인 副司果 신강(申橿)은 현풍공의 당숙이신 판서공(諱 훈(塤))의 서(婿)이기도 하다].

 

春湖公이 壬辰, 丁酉 大亂에 功이 커서 領相의 位에 올라 영화를 누릴 사이도 없이 宣祖王이 戊申年(1608)에 昇遐하고 光海君이 卽位하자 王位繼承을 둘러싼 奸黨의 捏造된 謀陷으로 議政公이 極禍를 입으니 大小家人이 連坐되어 賜死 또는 遠惡島로 流配刑을 받았다.

 

永賀公은 扈聖과 宣武原從功臣으로 直長을 거쳐 玄風縣監으로 在職中이었으니 二男二女가 모두 成娶하였다. 公이 巨濟島로 流配가던 당시 長子 汴(변, 錄扈聖原從 通德郞)은 二年前인 1606년 33세에 別世하였고 三兄弟를 남기셨는데 廷益은 17세, 廷卨은 13세, 廷祥은 8세이었다. 長孫 廷益이 어린 나이로 祖父 玄風公을 陪從하여 祖母와 더불어 巨濟 謫所에서 奉養하고 餘力을 모아 學問에도 힘썼다 하니 孝誠이 지극하였다 전해온다.

 

汴의 配位는 平山人 縣監 申景進의 따님인데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忠淸道 槐山郡 佛頂面 四倉里에 있는 親庭으로 가서 依支하다가 후에 一家를 創設하여 三兄弟를 訓育하고 曾孫 以壁의 後孫을 보시고 82세로 天壽를 다하시니 賢婦라 하고 後孫이 繁昌하니 현재 槐山 柳姓이 근 七百人을 헤아린다.

 

次子 忔은 1606년 28세 되는 丙午年 司馬試에 登第하여 進士가 되니 世子翊衛司 洗馬의 職牒을 받았다. 30세 되던 해 議政公이 禍를 당하게 되니 光化門 밖에서 席藁待罪한 보람 없이 興陽(지금의 高興郡)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公의 夫人 長興金氏는 夫君을 따라 謫所에서 사시다가 45세의 나이로 恨 많은 生涯를 마치시니 그곳에 假葬하였다가 후에 從孫 全平君 심(淰)이 慶尙 觀察使로 任地에서 손수 모시어 還鄕하여 蓼塘里 主山峰麓에 安葬되었다.

 

仁祖反正이 있은 1623년에 朝廷의 議決로 伸寃되어 謫所에서 歸還한 門中 側近 生存者 中에 恒(前職 禮兵 佐郞, 侍講院 正言)은 兵曹正郞으로 昇級復職되었는데 玄風公은 「名利謝絶」「京師晦述(경사회술)」이란 譜冊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辭讓하신 듯 하며 洗馬公은 「三徵固辭」하였다고 지금까지 後孫에게 口傳되어 왔다.

 

돌이켜보건대 無故한 斷罪를 報償하려는 朝廷의 議政이 있었고 仁祖의 生父 定遠君(追尊王 元宗)은 貞徽翁主와 同母所生으로 春湖公의 長孫 廷亮(全昌尉)에게 下嫁하였으니 情理로 보아서도 復職을 종용하였을만 하다.

 

그러나 玄風公은 이미 70세가 넘었으니 十二年間의 謫所의 辛困으로 心身이 衰弱하였을 것이고 洗馬公은 幼兒를 기르다 謫所에서 病死한 夫人의 恨을 잊지 못하였을 것이니 黨爭으로 살벌한 당시의 政界를 忌避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결국 京師에서 晦述(회술)하실 뜻을 품고 漢陽 百里 밖인 水原府屬인 西海岸 楊甘面 蓼塘里로 下鄕하게 되었다.

 

玄風公은 下鄕한지 3년만인 1626년에 74세를 一期로 波瀾 많은 一生을 마치시니 前記한 바와 같이 蓼塘里 主山峰 大陵谷에 安葬하고 아드님 洗馬公은 山麓에 茅屋을 어리고 侍墓하였으니 지금은 그 공터를 「낡은 터」라고 부른다.

 

洗馬公은 流謫時 여섯 살 났던 廷彬(35세졸)을 앞서 보냈으나 두 孫子를 成家시키고 81歲壽를 마치셨다. 時享은 매년 음력 10월 12일이다.

 

洗馬公 十一代孫 靘秀 謹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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