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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19/10/28(기미)
주서(注書) 류세린(柳世麟)이 아뢰기를, “두 일이 서로 같으므로 이 일만을 의논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근래 정원의 일은 시비가 분명치 못하다. 상산의 일은 이제 이미 지난 것이기는 하나 그 시비를 사람들이 오히려 모르므로 아울러 추핵할 것인지를 대신에게 의논한 것이다. 어찌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도 회계(回啓)하지 않을 때가 있는가?”하였다.【원전】 16 집 349 면
중종19/11/01(신유)
전 승지(承旨) 윤지형(尹止衡)이 아뢰기를, “헌부(憲府)의 계사(啓辭)는 가주서(假注書) 이임(李霖)이 써서 아뢰고, 간원(諫院)의 계사는 주서(注書) 류세린(柳世麟)이 써서 아뢰었으니, 이 말은 이임이 기초(起草)할 때에 쓰는 것을 빠뜨렸을 것입니다.”하고,
이임이 아뢰기를, “헌부가 아뢴 것은 신(臣)이 쓰고 간원이 아뢴 것은 류세린이 썼는데, 당초에 간원의 계사까지 신이 빠짐 없이 기초하였으나, 양사(兩司)가 아뢴 말이 한 초책(草冊)에 있었으므로 간원이 아뢴 것은 신이 다른 종이에 베껴 써서 류세린에게 줄 때에 우연히 빠뜨렸으니, 이것은 신이 잘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하였는데,
정언(正言) 김희열(金希說)에게 전교(傳敎)하기를, “어제 간원이 아뢰기를 ‘전 간원이 정원의 일은 헌부가 바야흐로 추고하므로 아뢰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합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전일에 내가 듣지 못한 것이므로 전일 아뢴 단자(單子)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과연 이 말이 없었다. 상시에 출납(出納)하는 일이라도 승지(承旨)·사관(史官)이 잘 들어서 빠뜨리지 않게 해야 할 것인데, 이 말은 승지·사관이 다 듣고 사관이 또 초책에 썼으나 입계(入啓)할 때에 쓰는 것을 빠뜨렸으니, 대간이 아뢴 일을 어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윤지형·이임은 파직(罷職)해야 하겠으나, 그 정실(情實)을 물어야 하겠으므로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무릇 입계하는 일은, 사관이 빠진 것을 보면 무슨 말이 빠졌다고 말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사책(史冊)에만 쓰고 말았으니, 이것도 추문해야 한다.”【검열(檢閱)은 안인(安麟)이었다.】하였다. 【원전】 16 집 351 면
중종24/03/04(기해)
권예(權?)를 사간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교리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105 면
중종24/04/07(임신)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유여림(兪汝霖)·부응교(副應敎) 김희열(金希說)·교리(校理) 심광언(沈光彦)·류세린(柳世麟)·부교리(副校理) 황헌(黃憲)·박사(博士) 엄흔(嚴昕)·저작(著作) 이명규(李名珪)·정자(正字) 정유선(鄭惟善)·홍춘경(洪春卿)이 아뢰기를, “조침(趙琛)은 무상(無狀)하여 죄가 진실로 징계되어야 마땅한데 마침 사면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쾌하지 않으니, 간원이 아뢴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뒤미쳐 공초(供招)한 말을 적발하여 반드시 죄를 주어 한때를 쾌하게 하는 것은 상법(常法)을 크게 훼손할 뿐더러 뒷날의 폐단이 이로부터 열리므로 임금이 백성에게 신의를 보이는 데에 매우 어그러집니다. 헌부의 뜻은 뒷폐단을 염려한 것인데, 서로 어긋나서 여러날 동안 인혐(引嫌)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할 형세이니, 간원을 체직시키소서.”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뜻이 매우 마땅하다. 간원이 조침을 별도로 치죄(治罪)해야 한다 한 것이 지나치게 중한 듯은 하나 일을 논한 것이기 때문에, 사헌부도 간원을 그르다 하지 않고 분명히 해석하여 아뢰었다. 다만, 여러날 동안 인혐하니, 나도 그 형세가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을 알지만 일을 논한 것 때문에 문득 체직시킬 수 없으므로 아직 체직시키지 못하였다. 이제 이렇게 아뢰었으니 사간원을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지평 남세건도 뜻을 같이하여 사직하니, 아울러 체직시키라.” 【원전】 17 집 109 면
중종24/05/10(갑진)
홍문관 교리 류세린(柳世麟)이 지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김양진(金楊震)이다.】에게 줄 교서(敎書)를 내리면서 일렀다. “지금 이 교서를 보건대, 감사(監司)가 해야 할 일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란 뜻을 들어 반복해서 말했으니, 이는 참으로 아름답게 지은 글이다. 전에 교서를 짓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상세하게 갖추어 지은 것을 못보았었다. 다음에 짓는 사람들은 모두 이 예에 의해 짓는 것이 매우 좋겠다. 승정원은 이런 뜻을 알아두라.” 【원전】 17 집 118 면
중종24/05/15(기유)
김희열(金希說)을 겸 세자 시강원 필선(兼世子侍講院弼善)에, 류세린(柳世麟)을 문학(文學)에, 김치운(金致雲)을 겸사서(兼司書)에, 엄흔(嚴昕)을 겸설서(兼說書)에 제수했다. 【원전】 17 집 119 면
중종24/11/26(무오)
이항(李沆)을 병조 판서에, 조계상(曺繼商)을 공조 판서에, 윤은보(尹殷輔)를 사헌부 대사헌에, 이사균(李思鈞)을 충청도 관찰사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교리에, 김치운(金致雲)을 수찬(修撰)에, 김언(金헜)과 한두(韓솈)를 부수찬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174 면
중종24/11/30(임술)
남세준(南世準)을 사헌부 대사헌에, 남효의(南孝義)를 사간원 대사간에, 조종경(趙宗敬)을 집의(執義)에, 심언광(沈彦光)을 사간(司諫)에, 김탁(金鐸)·김희열(金希說)을 장령에, 심광언(沈光彦)을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이억손(李億孫)을 부응교에, 이찬(李澯)을 헌납(獻納)에, 황헌(黃憲)·류세린(柳世麟)을 지평(持平)에, 민제인(閔齊仁)을 부교리(副校理)에, 채무역(蔡無쪝)·김미(金쭯)를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174 면
중종25/01/24(을묘)
대사간 남효의(南孝義), 집의 조종경(趙宗敬), 장령 김탁(金鐸)과 심광언(沈光彦), 지평 황헌(黃憲)과 류세린(柳世麟), 헌납 김면(金沔), 정언 김미(金쭯)와 채무역(蔡無쪝)이 아뢰기를, “이제 홍문관의 상소를 보니 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앞 사람의 얘기만을 되풀이하고 공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입을 다물고 앞 사람의 의견에만 찬동하기 때문에 정직한 기개는 없고 교사(巧邪)한 기풍만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대간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신들은 직임(職任)을 잘 수행하지 못하여 직에 있기가 송구하므로 감히 사직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홍문관은 대간이 그르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범범하게 말한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17 집 188 면
중종25/01/27(무오)
집의 조종경, 장령 김탁(金鐸)과 심언광(沈彦光), 지평 황헌(黃憲)과 류세린(柳世麟), 헌납 김면(金沔), 정언 김미(金쭯)와 채무역(蔡無쪝)은 아뢰기를, “여러날 사피(辭避)하였으나 상의 분부가 분명하셨습니다. 번거롭게 계달하기가 미안하니 물러가 여론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남효의에게 전교하기를, “1년토록 사피한다 해도 체직할 수 없다.”하였다. 【원전】 17 집 188 면
중종25/03/06(병신)
지평 류세린(柳世麟)은 아뢰기를, “사치에 관한 일은 여염(閭閻) 사이에서 서로 ‘모든 왕자군(王子君)의 집이 모두 그렇다.’ 합니다. 모름지기 상께서 몸소 검소로써 솔선하신 다음에 아랫사람들이 스스로 보고 느껴, 본받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일렀다.“왕자군의 집이 과연 그러한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그리고 사치의 일은 한 가지가 아니다. 각 관사(官司)의 음식이 또한 호화롭고 사치스러움을 숭상하고 있으므로 아랫사람들의 생활이 기우는 원인은 오로지 이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외방에도 그러하다는 것을 매양 경연에서 들었다. 먼저 인심을 감화시키는 것이 바로 그 근본이 되는 것이나 법이란 보치(輔治)의 기구이므로 또한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것은 법사가 마땅히 규찰할 일이다.” 【원전】 17 집 199 면
중종25/03/27(정사)
김공예(金公藝)를 홍문관 직제학에, 정언호(鄭彦浩)를 전한에, 류세린(柳世麟)을 사헌부 지평에, 윤풍형(尹?亨)을 교리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208 면
중종25/04/06(을축)
사헌부 집의 조종경(趙宗敬), 장령 심광언(沈光彦)과 박수량(朴守良), 지평 류세린(柳世麟)과 송순(宋純) 등이 아뢰기를, “삼성 교좌(三省交坐)할 경우 사중(司中)에서는 번갈아가며 참여하는데, 재일(齋日)에 박호가 참여한 것은 사중에서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또 금부의 관리 및 색승지 등을 본부(本府)에서 추고하고 있으니, 이것은 더욱 온당치 못한 것이기에 감히 피혐(避嫌)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이 실수는 모두 금부와 색승지 등이 잘못한 것이다. 정해년에 대신이 계품했던 것은 숨겨둔 채 말하지 않고서 금년 2월에 취품하기를 ‘대제를 섭행할 때는 재의가 없다고 하였으니, 형문(刑問)하는 일도 할 수 있을 듯하다.’ 하기에, 내 또한 정해년의 일은 잊고 아무 생각없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던 것이다. 그리고 금부에서 참여해줄 것을 청하였고 보면 대사헌도 피혐하는 것이 부당한데 더구나 그 자리에 참여하지도 않은 대간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속히 금부의 관리와 색승지 등을 추고하라. 그리고 금부 당상 등을 형조가 추고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을 대신이 아뢰자, 집의(執義)도 그 말을 들었으면서 왜 꼭 사양하는가?”하였다.
조종경 등이 또 아뢰기를, “죄인의 추문은 재일(齋日)에도 할 수 있지만, 형신의 경우는 정해년에 대신이 아뢴 것뿐만이 아니라, 대전(大典) 금형조(禁刑條)에 ‘대제사(大祭祀)의 치재일(致齋日)에는 고문이나 처벌을 하지 말라.’ 하였는데도 대사헌 박호와 정언 박세웅 등은 재일인데도 금부에 가서 국문에 참여하고 형신까지 하였습니다. 이들은 일을 자세히 살피지 않아 크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모두 체직시키소서.”하니,
전교하였다. “《대전》을 누군들 보지 않았으랴만 마음에 없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이제 아뢴 말을 듣고 나서 다시 《대전》을 보니, 과연 그러했다. 따라서 금부가 취품한 것도 잘못이다. 정해년에 대신이 입법한 일이 있고 없음은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대사헌과 정언은 체직하라.” “조강에 나아갔더니 우상(右相)이 ‘월과시(月課試)에서도 차작(借作)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우상이 만일 차작한 자들의 명단을 열거해서 아뢰었더라면 당장 추고하였을 터인데 범연하게 논계하였기 때문에 못하였다. 그러나 대신이 어찌 우연하게 듣고 본 것을 아뢰었겠는가? 집의도 그 말을 들었으니 사중(司中)에서부터 자세히 살펴서 적발해 내도록 하라.”하니,
장령 박수량이 아뢰기를, “적발해 낼 길이 없으니 부득이 월과 제술원들에게 빠짐없이 공함(公緘)을 낸 다음에야 적발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사중의 장령 심광언(沈光彦)과 지평 류세린(柳世麟)은 나이 40이기 때문에 제외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제술에 참여한 자들은 집의 조종경과 지평 송순 및 사간원과 홍문관의 관원 등이 모두 월과 제술인들이므로 추고받을 사람이 많아서 몹시 소란스러울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앞으로는 과차(科次)를 정할 때에 차작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뽑아내도록 별도로 절목을 만들어 놓으면 좋을 듯하기에 감히 아룁니다.”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 한 말이 옳다. 대신이 아뢴 뜻은 사중에서는 들은 바가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추찰(推察)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면 소란스러울 뿐만이 아니라 논박받은 대간은 공무를 행하지 못할 것이니, 다시 대신에게 물어서 답하겠다.”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기를,“주서(注書)를 시켜 우상(右相)에게 묻기를 ‘우상이 아뢴 월과 제술(月課製述)을 차작한 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알 수 없지만, 어떤 사람이 감히 이런 행위를 했단 말인가? 이는 작상(爵賞)이 있는 일이라 가벼운 일이 아닌 듯하니 만일 그 사람을 알면 적발하여 아뢰라. 즉시 추고하겠다.’고 하라.”하였다. 【원전】 17 집 211 면
중종25/05/25(갑인)
김근사(金謹思)를 대사헌에, 심언광(沈彦光)을 대사간에, 조종경(趙宗敬)을 집의에, 박수량(朴守良)을 사간에, 조인규(趙仁奎)와 심광언(沈光彦)을 장령에, 류세린(柳世麟)과 송순(宋純)을 지평에, 주세붕(周世鵬)을 헌납에, 김미(金쭯)와 엄흔(嚴昕)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225 면
중종25/06/01(기미)
정원에 전교하기를, “양사(兩司)가 ‘김극픽이 대신의 집에서 신공제의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른바 대신이 누구인지 성상소(城上所)에 물어서 아뢰라.”하였다. 류세린(柳世麟)이 회계하기를, “이른바 대신은 바로 영의정 정광필입니다.”하니, 전교하였다. “내일 영상을 불러서 물어보겠다.” 【원전】 17 집 227 면
중종25/06/02(경신)
대사헌 김근사, 대사간 심언광, 집의 조종경, 사간 박수량, 장령 조인규와 심광언, 지평 류세린과 송순, 정언 김미와 엄흔 등이 아뢰기를, “김헌윤은 상께서 묻지도 않은 일을 상지(上旨)라고 사칭하여 위복을 과장하였으니 이는 국가에 관한 죄이므로 여기에 해당하는 정률(正律)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상교(上敎)에는 매번 ‘이미 사유(赦宥)되었으니 의논치 말라.’ 하셨으니, 과연 조지(詔旨)를 사칭하여 국가에 관계되는 죄인을 어찌 사유의 예(例)에 넣을 수 있단 말입니까. 금부가 ‘제서(制書)를 위조하려다가 시행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조율하여 사면(赦免)할 것을 논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서(制書)란 문서(文書)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조지(詔旨)란 언어(言語)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 이제 ‘제서를 위조하다.’로 조율한 데 있어 그 이른바 서(書)라는 것은 무슨 문서이며, ‘시행하지 못했다.’로 사면을 논한 데 있어 그 이른바 ‘시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가지고 이미 시행했거나, 시행하지 못했음을 나누었단 말입니까. 정률을 두고도 사곡하게 가벼운 조항으로 조율하였으니 금부도 큰 실수를 범하였으니만큼 법사(法司)가 의당 추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김헌윤은 모름지기 정률에 의거하여 죄를 정한 다음에야 왕법이 시행됨은 물론 당시와 후세에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극픽은 성질이 경조하고 흉독한 자로서 날마다 정직한 사람 배척하는 일을 자기 소임으로 삼아, 육경 지위에 있는 사람까지도 배척하여 제거하려고 하니, 그 조짐은 장차 나라의 인물이 공허한 데 이를 것이요, 나라에 인물이 공허해지면 차마 말할 수도 없는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김극개는 성질이 음흉하고 사특한 자로서 항상 박씨(朴氏)를 기화(奇貨)로 삼아, 그 음흉하고 비루한 행동을 하던 꼴은 입에 담을 수도 없습니다. 과거 작서(灼鼠)의 변(變)이 일어났을 때 그 흉모의 원인을 상(上)과 자전(慈殿)께서 이미 밝게 살피시어 종사(宗社)를 위해 죄를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극개는 왕실과 인척이 된 관계로 박씨(朴氏)를 극력 변명하여 구해 주고 심지어는 ‘대간이 이 일을 논하다가 끝내 어디에다 몸을 두려는가.’라고까지 하였으니, 이 말 한 마디가 충분히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김극개가 그 사이에 손을 썼더라면 사류(士類)가 섬멸되어 화가 매우 잔혹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공론에 죄를 얻음으로써 조정이 그들을 곁눈질한 지가 오래입니다. 상교에는 ‘헌윤의 일 때문에 그의 아비와 숙부를 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셨습니다마는, 이는 헌윤에게서 발생한 일이 아니고 각기 제 죄를 가지고 논한 것입니다. 한 집안의 세 사람이 교활하게 세 굴[三窟]이 되어 위복을 크게 과장하여 권세를 부리고 은혜를 팔아서 방자한 행위를 꺼림없이 하니, 끝내는 반드시 사직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대간이 이 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구중궁궐에 계신 전하께서 어디서 이런 사실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빨리 귀양보내소서.
전 대간 등은 이들의 치성한 권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을 거짓 모른 체하고, 그 사실이 이미 언급되었는데도 입을 다물고 침묵만 지켰습니다. 특히 정언호와 김의정은 경연에 입시하여서도 거짓 차자의 뜻을 모른 체하였으니 지극히 무상합니다. 한두는 처음부터 이미 함께 알고 의논하였으면서도 상차(上箚)하던 날에는 도리어 참여하지 않기 위해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으니, 그가 피하려고 꾀하는 정상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것입니다. 모두 파직시켜 사습을 바로잡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김헌윤의 말이 참으로 ‘상(上)이 신석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기에,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하였다면, 그 죄를 어찌 다시 논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추안을 가지고 보니, 신석간·허자·김헌윤 등의 초사(招辭)에 모두 이 같은 말이 없다. 그런데 만일 그들에게 무거운 형전을 논하려면 어떤 사간(事干)의 말에 의거해서 논할 것인가. 이는 반드시 들은 자가 있을 것인데, 만일 그 진상을 끝까지 추문하면 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추문하는 즈음에 사림(士林)을 크게 상하겠기에 끝까지 추문하지 않은 것이다. 유사(有司)가 조율하는 일과 임금이 죄를 결정하는 일은 추안에 의해서 할 뿐이요, 사람들이 서로 전파할 말을 가지고 죄를 정할 수는 없다. 작은 죄도 이러는 것인데, 더구나 무거운 형전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김헌윤이 위복을 과장한 일에 대해서도, 시행한 것이 있으면 시행했다고 해야 할 것이요, 시행한 것이 없으면 시행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니, 금부의 조율은 여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다 율(律) 밖의 율을 가중시킨다면 옳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김극픽이 신공제를 배척하여 제거하려 한 데 대해 그 내막은 모르겠다. 만일 참으로 배척하려 했다면 반드시 그 내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광필의 말로 본다면 역시 이야기하던 가운데 우연히 나온 말이었을 뿐이지, 나라의 인물을 죄다 없애려 했을 리가 있겠는가. 김극개가 한 말에 대해서는 내막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에 그 일을 논한 사람은 대간뿐만 아니고 온 나라 사람이 다 논하였는데, 유독 대간에게만 허물을 돌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전 대간은 반드시 들은 데가 각기 달랐기 때문에 아뢰지 않았던 것이다. 정언호 등은 비록 잘못이 없지 않지만, 그 실정으로 말하면 홍문관 차자의 뜻을 자세히 들으려고 했던 것인데, 어찌 파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한두는 자기가 독단한 일이 아닌데, 상차(上箚)할 때에 참여하고 안 하는 것이 자기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고 굳이 병을 칭탁해서 기피하려 했겠는가. 이는 실정에 가깝지 못한 말이니,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그후 네 차례나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17 집 227 면
중종25/07/13(경자)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집의 조종경(趙宗敬), 장령 심광언(沈光彦), 지평 류세린(柳世麟)과 송순(宋純)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 사간원이 군직 승강의 개정에 대하여 아뢰었습니다. 이는 바로 본부(本府)에서 상세히 규찰해야 될 일인데도 미처 규찰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대간이 ‘규찰하는 관원이 있는데도 전혀 꺼림이 없으니 나라에 기강이 없음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아뢰었는데, 이는 신들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신들은 이런 논박을 받고서 직에 있기가 송구스럽습니다. 속히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그것은 군직에 붙여진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나도 헌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김근사 등이 물러가서 명을 기다리니,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은 이미 날이 저물었다. 내일 아침에 대관을 패초(牌招)하여 사직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라.” 【원전】 17 집 236 면
중종26/02/22(정축)
김섬(金섬)을 사간원 사간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교리에 제수하였다.【원전】 17 집 285 면
중종26/05/25(무신)
홍문관 부제학 권예, 전한 김섬, 응교 남세건, 부응교 송인수, 교리 류세린, 수찬 최연, 부수찬 소봉, 박사 정유선, 저작 구수담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이달 23일 밤 세 군데다 화살을 쏘았고 또 네거리에다 방을 붙였으므로 이 소식을 들은 중외(中外)의 사람들은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궐문에다 쏜 것은 더할 수 없는 흉역으로 난적이 아니고는 차마 할 수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리고 듣기로는 방문(榜文)에서 지적한 것은 모두가 근래 일을 논한 사람들이요, 그 내용도 시사(時事)를 비방하고 조정을 원망하는 등 못할 말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 ‘이들을 쏘아 죽이기 위해 엿본다.’는 말이 있었고, 그 아래의 글도 무뢰한의 솜씨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흉측한 간계는 일조 일석에 계획된 일이 아니니, 이것을 익명서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일을 논한 사람들을 살해하려 한다면 끝내 종묘 사직을 어느 곳에 두려는 속셈이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한심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옛부터 소인이란, 집권하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휘둘러 당여를 모아 기반을 굳혀 흉계를 부린 반면, 권세를 잃으면 늘 분심을 품고 틈을 노려 음모를 시험해 왔습니다. 근래 조정에 죄를 얻은 자들은, 권세를 잃게 되자 독사 같은 독을 품고 조정에 일이 있는가를 엿보아 술수를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침 한재가 절박하여 상하가 걱정하고 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흉계를 부리려 획책하고 있으니, 신들은 종묘 사직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고 전하를 위하여 두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저 국가에 화패(禍敗)가 있으면 반드시 하늘이 먼저 재이(?異)를 발생시켜 알리는 법입니다. 지금 가뭄에다 지화(地火)까지 발생했고 우박과 서리가 내리는 재변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으니, 하늘의 뜻을 알 만합니다. 아마도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숨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우려됩니다. 현명한 사람은 화가 발생하기 전에도 아는 법인데 더구나 이미 조짐이 드러났지 않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성심(聖心)을 더욱 굳게 지니시고 간사한 정상을 명백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의혹을 진정시키고 은밀히 자라나는 화를 없애소서.”하니,
전교하였다. “전에도 간혹 대궐 문과 대부(臺府)의 문에 쏜 때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극도로 흉악하게 한 적은 없었다. 근래 언관(言官)과 시종(侍從)이 논한 일은 모두가 공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내가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간사한 무리들이 신원(伸寃)시키자는 대신들의 말을 믿고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늘 위와 사림(士林)을 원망하고 있었으나 분을 풀 수가 없었으므로 화살을 쏘고 방을 붙이는 일을 동시에 거행했다. 그리고 그 말이 모두 근시(近侍)를 가리킨 일이었다. 그러나 익명서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에 드러내어 추문하지는 않았지만 그 본심을 살펴보면 원인이 없을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한심스럽다.
더구나 지금 가뭄이 극심하여 상하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이때 감히 음흉한 계모를 부려 상으로 하여금 의혹스럽게 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더욱 비호하게 하고 있다. 또 언관으로 하여금 위축되게 하고 조정의 기강을 확립시키지 못하게 했으니, 그 간사한 계모와 품고 있는 화심(禍心)이 난적보다도 더 심하다.
인심의 야박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천재(天災)가 일어난 이유를 알 만하다. 평시라면 대신들이 죄인을 비호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런 때에는 의당 태산 반석처럼 힘써 진정시켜야 된다. 그런 다음에라야 간계를 품은 자들이 절로 위축되어 조정이 편안하게 될 것이다. 내 마음은 시비를 더없이 굳게 정하고 있다. 따라서 화살을 쏘고 방을 붙이는 등등의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더욱 통분함을 금할 수 없다.” 【원전】 17 집 305 면
중종26/07/26(정축)
이지방(李之芳)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에, 송순(宋純)을 의정부 검상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교리에, 이명규(李名珪)를 수찬에, 홍춘경(洪春卿)을 정자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315 면
중종26/10/23(계묘)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황사우(黃士祐), 직제학(直提學) 김섬(金첎), 응교(應敎) 남세건(南世健), 교리(校理) 류세린(柳世麟), 부교리 성윤(成倫), 수찬(修撰) 김만균(金萬鈞)과 최연(崔演), 부수찬 이명규(李名珪)와 소봉(蘇逢), 박사(博士) 정유선(鄭惟善), 저작(著作) 구수담(具壽?), 정자(正字) 홍춘경(洪春卿)이 아뢰기를,
“김안로의 일은 정부와 육조가 어찌 범연하게 생각하여 그와 같이 아뢰었겠습니까. 신들은 시종(侍從)의 직에 있으면서 미처 아뢰지 못한 것이 미안합니다. 그러나 정부와 육조가 이렇게 아뢰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니 공론을 따르소서.” 하고, 황사우는 홀로 아뢰기를, “신의 처가 김안로와 이성(異姓) 사촌간이지만, 동료들과 행동을 같이해야 하였으므로 감히 피혐하지 못하고 함께 아뢴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김안로의 일을 어제는 정부가 아뢰었고, 오늘은 또 육조가 아뢰었기 때문에 이미 판서에서 체직하였다.” 【원전】 17 집 320 면
중종26/11/24(갑술)
시독관(侍讀官) 류세린(柳世麟)은 아뢰기를, “그 당시 홍문관에서 모일 때 김섬이 수좌(首坐)였는데 부제학은 김안로의 사촌이기 때문에 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었습니다. 김섬이 맨 먼저 육조를 따라 김안로의 일을 아뢰자는 의논을 냈습니다. 좌중에서 어떤 사람은 ‘그 일의 시말을 잘 모르니 아뢰어서는 안 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보고 들은 다음에 하자.’고 하였습니다. 신 역시 그렇게 말하였는데, 좌중에서 거듭 의논한 결과 마침내 김섬의 의견에 따라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발단되어서야 그 까닭을 알았으니 시종으로서 잘못됨이 매우 심합니다. 또 요즈음의 재변에 대해서는 이미 차자(箚子)에서 대강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올해는 재변이 여러번 겹쳐 일어나고 있는데 그 중에도 태백이 경천(經天)하고 혜성이 나타나고 겨울에 우뢰와 지진이 발생한 것은 더없이 큰 재변입니다. 모름지기 대신은 국정에 힘을 다해야 하고 상께서도 마땅히 성념(省念)하셔야 합니다.”하고,
허항은 아뢰기를, “신이 현재의 일들을 보니 번복이 심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심정과 이항이 혹시 되돌아와서 난을 꾸미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임금께 참소하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성림(成霖)이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있을 때, 도적을 잡아 추문한 결과 그 가운데는 전일 심정이 살려 준 자가 많았다 합니다. 그래서 성림이 놀라 ‘심정이 이런 도적들과 교통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였답니다. 신은 심정이 이들 도적과 교통한 일을 보고서 진(晋)나라 난영(欒盈)의 화(禍)가 오늘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여겼습니다. 이런데도 이행 등은 심정의 처벌이 너무 무겁다고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잘못되어 오늘의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름이 대간이라 하더라도 그 주장이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정언호(鄭彦浩)와 김의정(金義貞) 등은 전에 환히 드러난 일을 가지고 상 앞에서 거짓 놀라는 척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심정의 하수인입니다.”하니, 임금이 일렀다.
“조정의 일이 이렇게 된 데는 그 까닭이 있다. 처음에 심정과 이항에게 죄를 줄 때에 대간이 논계하였는데, 아랫사람들이 이의(異議)를 제기하기를 ‘지금 상의 뜻은 그렇지 않고, 대신의 뜻 역시 그렇지 않다.’고 하는 등 매우 시끄러웠기 때문에 사특한 의논들이 그치지 않게 된 것이다. 만약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한다면 의논은 저절로 확정될 것이다. 지금 확정하지 않는다면 뒷날 큰일이 발생해도 구제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심정과 이항은 지금 서북 지방에 있는데 끝에 가서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원전】 17 집 343 면
중종26/12/12(신묘)
조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류세린(柳世麟)이 아뢰기를, “전에 금은(金銀)에 대한 일을 아뢴 자가 있어 즉시 금부 낭관을 보내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궁벽한 시골의 백성이 요행히 금은 보화를 얻어 성심으로 가지고 와 바친다면 이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신(使臣)을 보내어 찾게 했다가 끝내 찾지 못한다면 후세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일렀다. “아뢴 말이 옳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원전】 17 집 348 면
중종27/03/02(신해)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좌의정 장순손, 우의정 한효원, 호조 판서 홍숙(洪淑), 우찬성 윤은보, 공조 판서 안윤덕(安潤德), 좌참찬 조원기, 병조 판서 홍언필(洪彦弼), 이조 판서 김근사(金謹思), 형조 판서 박호(朴壕), 예조 판서 손주(孫澍), 대사헌 황사우, 대사간 권예, 부제학 심언광, 승지 허흡(許洽), 사간 양연, 전한 남세건(南世健), 응교 강현(姜顯), 장령 임백령과 송인수, 교리 상진(尙震), 지평 채무택, 헌납 김미, 교리 류세린(柳世麟), 지평 허항, 부교리 성윤(成倫), 정언 신거관, 수찬 하계선(河繼先), 박사 구수담(具壽聃), 정자 이준경(李浚慶)과 홍섬(洪暹)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종익의 상소를 보니 부도스런 말이 많이 있다. 이는 조정과 임금을 무시한 말이다. 매우 놀랐다. 이는 평상시의 상소에 견줄 것이 아니어서 쾌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국법에 있어 부당하다. 이 때문에 조정의 의논을 들어서 특별한 죄로 다스리려고 한다.”하니,
장순손이 아뢰기를, “이종익이 죄를 받고 귀양가 있으면서도 감히 상소를 올려 시비를 변란(變亂)시키고 조정을 탁란시켰으니, 그 죄를 거론한다면 절로 해당되는 율(律)이 있습니다. 그리고 ‘군하(群下)를 핍박하여 위엄과 형벌만을 숭상한다.’는 말은 곧 조정을 무시한 말입니다. 이렇게 패역스런 말이 매우 많으니 그 죄를 통렬히 다스려야 한다는 데에는 진실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상소한 뒤에 취죄한다는 것이 사체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하고, 한효원, 홍숙, 윤은보, 안윤덕의 아룀도 같았다. 【원전】 17 집 360 면
중종28/05/25(정묘)
심언광(沈彦光)을 사헌부 대사헌에, 상진(尙震)을 사건원 대사간에, 김희열(金希說)을 집의에, 허자(許磁)를 사간에, 허항(許沆)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류세린(柳世麟)과 채무택(蔡無擇)을 장령에, 이임(李任)을 홍문관 응교에, 안현(安玹)과 김미(金쭯)를 지평에, 권응창(權應昌)과 이해(李瀣)를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431 면
중종28/07/20(신유)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에 나아가 신하들을 만나보았다. 영중추부사 정광필, 영의정 장순손, 좌의정 한효원, 우의정 김근사, 좌참찬(左參贊) 조원기(趙元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김안로(金安老)와 손주(孫澍), 동지사(同知事) 심언경(沈彦慶), 대사헌(大司憲) 심언광(沈彦光), 대사간(大司諫) 상진(尙震), 집의(執義) 김희열(金希說), 사간(司諫) 윤풍형(尹?亨), 장령(掌令) 류세린(柳世麟)과 채무택(蔡無擇), 지평(持平) 안현(安玹)과 김미(金쭯), 헌납(獻納) 임붕(林鵬), 정언(正言) 정종호(鄭從濩)와 최보한(崔輔漢)이 입시하니, 상(上)이 상전(尙傳) 김연손(金連孫)을 불러 패서를 가져다가 모든 대신에게 보이게 하고 또 전의 추관들도 모두 나가서 보게 하였는데, 보고 나서 모두 아뢰기를,
“간혹 자체(字體)가 매우 같은 것은 있으나 전의 패에 쓰인 글씨와 서로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패의 글씨를 보면 그 글자 수가 많기 때문에 간혹 전의 패와 같은 곳도 있고 같지 않은 곳도 있으니 어떠한 것인지 모르겠다. 만일 전의 패에 쓰인 글씨와 서로 같다면 그 사람들은 모두 이미 자복하고 죽었는데, 지금 이 패가 어찌 전의 패와 서로 같을 수 있겠는가. 조정의 의사는 알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일은 익명서(匿名書)와 다를 것이 없다. 전에는 동궁에다 걸어 놓았기 때문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추문하자 마침 그 사람들이 자복하였다. 이번에도 추문하여 그 진범을 잡는다면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범을 잡지 못하고 엉뚱한 다른 사람만 추문하게 된다면 진범이 숨어서 보고 있다가 조정을 시험하려는 변괴를 계속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정이 도리어 모욕을 받을 것이니, 이 일을 추문하는 것이 옳은가, 소각해 버리는 것이 옳은가? 나의 생각에는 소각해 버리면 조정이 저절로 안정되고 그 사람도 기대가 끊어질 것으로 여겨진다.”하였다.
-中略- 류세린(柳世麟)은 아뢰기를, “그 패(牌)는 차마 보지 못할 것이었는데 억지로 보았더니, 쓰인 내용이 전의 것 보다 더욱 해괴하였습니다. 통분한 마음을 어떻게 다 상달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의 글자는 새기기까지 하였고, 그 아래에 쓰인 글은 전번의 것에 비해 더욱 심하였는데 그것을 대간청(臺諫廳)의 벽에 건 것은 대간이 쉽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외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필시 대궐 안에 익숙한 자의 소행일 것입니다. 전번 흉모를 꾸몄던 일당 중에 아직 빠진 자들이 있어, 밤낮 원독(怨毒)을 풀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을 요동시키려 한 것입니다. 위에서 조금만 요동하시면 조정을 크게 혼란하게 하려고 한 것이니, 그 계획이 어찌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겠습니까. 예부터 언제 이같이 흉역스러운 일이 있었겠습니까. 국가에 위망(危亡)의 화가 언제 닥칠지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큰 옥사를 일으킨다면 무고한 사람이 잘못 죄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성상의 의사가 지당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일을 어찌 익명서(匿名書)의 예로 취급하여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만일 추궁하여 심문한다면 극악한 대죄(大罪)가 응당 나올 것입니다. 만일 단서가 있어 진범을 잡아서 법대로 시행한다면 그 몰래 틈을 엿보는 무리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변이 그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위에서 더욱 살피신다면 자연 요동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간계를 부리는 자가 있으면 일체 단절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채무택(蔡無擇)은 아뢰기를, “신은 아뢸 일이 있어서 왔었는데 아래 관리들이 ‘벽에 수상한 물건이 있다.’ 하기에 신들이 보았더니, 패의 곁에 하얀 물건이 있었습니다. 놀라서 가져다 보니, 전일 동궁에 걸린 것과 꼭 같았습니다. 어찌 이처럼 통분할 일이 있겠습니까. 전번 동궁의 변은 이미 죄인을 잡아 정법(正法)을 쾌히 보였습니다마는, 지금 또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패(牌)를 꼭 양사(兩司)가 보는 곳에 건 것은 형적을 혼란시키려는 것임이 명백합니다. 그 수직(守直)하는 군사에게 ‘오늘 걸렸던가, 어제 걸렸던가?’ 물었더니 ‘어제 입번(入番)할 때 이미 있었는데 예사로 보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흐리멍덩한 말은 저와 같았지만, 그러나 걸려진 지가 이미 오래였다면 대간이 날마다 대궐에 들어오는데 어찌 보지 못했겠습니까. 그것을 걷었다가 다시 걸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위에서, 그것이 전일의 패서(牌書)와 서로 같다고 의심을 하시는데, 신은 전일 것과 지금 것에 쓰여진 글씨를 자세히 보았더니, 그 자체의 서투름과 익숙함이 전연 같지 않았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체가 서로 같다는 말은 모두가 전의 패서와 같다는 것이 아니다. 간혹 서로 같은 곳이 있기 때문에 의논하게 한 것이었는데 말이 잘못 전해졌을 뿐이다.”하였다. 【원전】 17 집 450 면
중종28/09/23(임술)
류세린(柳世麟)을 시강원 필선에, 안현(安玹)을 홍문관 수찬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472 면
중종28/12/24(임진)
윤풍형을 사헌부 집의에, 김공예를 사간원 사간에, 류세린과 김기를 장령에, 신석간과 김수성을 지평에, 소봉을 헌납에, 정종호와 이몽량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17 집 493 면
중종29/02/29(병인)
류세린(柳世麟)을 사헌부 집의에, 김기(金紀)를 장령에, 한숙(韓淑)을 사간원 헌납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05 면
중종29/04/11(정미)
김안로 등이 아뢰기를, “시강원(侍講院)과 홍문관은 다름이 없습니다. 한숙(韓淑)은 전 대간으로서 지금 이미 문학(文學)이 되었고, 류세린(柳世麟)도 전 대간으로서 승진하여 사도시 정(司도寺正)에 제수되었으니, 이들도 아울러 체직시켜야 할 것인지를 취품합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한숙은 체차하라. 류세린은 그 직이 청요(淸要)한 것이 아닌데다가 앞서의 정사 때에 이미 승진한 것이니 체직시킬 것 없다.” 【원전】 17 집 509 면
중종29/05/19(을유)
채소권(蔡紹權)을 형조 참판에, 황사우(黃士祐)를 사헌부 대사헌에, 김광철(金光轍)을 승정원 우승지에, 오결(吳潔)을 사간원 대사간에, 류세린(柳世麟)을 집의에, 허자(許磁)를 사간에, 황효공(黃孝恭)을 장령에, 권응창(權應昌)을 지평에, 김수성(金遂性)을 헌납에, 허온(許溫)과 정희렴(鄭希廉)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18 면
중종29/06/25(경신)
대사헌 권예(權혲), 집의 류세린(柳世麟), 장령 황효공(黃孝恭)과 김광진(金光軫), 지평 권응창(權應昌) 등이 아뢰었다. “신들은 예조가 거론한 공사(公事)를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예조를 잘못 되었다고 여기시어 판부(判付)하신 것을 바꾸지 않으시니, 신들의 과오가 예조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법사(法司)의 위치에 있으면서 과오를 저질렀으니 이 직책에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원전】 17 집 522 면
중종29/08/06(경자)
윤은보를 호조 판서에, 심언경을 사헌부 대사헌에, 박홍린을 사간원 대사간에, 류세린을 집의에, 채무택을 홍문관 전한에, 송겸(宋?)을 사간에, 이몽필을 헌납에, 홍덕연(洪德演)과 오세우(吳世佑)를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28 면
중종29/09/16(기묘)
부제학 허항이 아뢰기를, “칠덕정(七德亭)에서 친열(親閱)하는 일은, 이미 전교하였습니다. 이는 구경하러 다니는 일이 아니고 습진(習陣)하는 행사이나 대신이 졸한 지 열흘도 안되었는데 습진을 거행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큰일인 경연(經筵)도 폐지했는데 하물며 습진같이 그리 급하지 않는 일을 거행합니까? 신들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中略- 또 전 대관(臺官)이 사좌(仕坐) 중인데 밖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나므로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수서리(首書吏)가 나장(羅將)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저자 사람 중에 범금자(犯禁者)를 놓아주기를 청했는데 나장이 들어주지 않자 그를 때리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헌부 수서리가 범금자를 놓아 달라고 사사로이 부탁한 일 자체도 옳지 못한데 더구나 매를 치는 일이겠습니까. 곧 형문(刑問)하고 제하(除下)하니 이 때문에 수서리는 분한 마음을 품고 전 대관을 갖가지로 헐뜯고 욕하면서, 아무개는 류세린(柳世麟)의 당이요, 아무개는 신석간(申石澗)의 당이라고 떠들었습니다. 당류(黨類)에 대한 말을 상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틀림없이 믿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위를 능멸하는 풍조는 다 이런 데서 말미암는 것이요, 일조 일석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류세린은 그 말을 들었는데도 그렇게 추국할 때 모르는 척하고 피혐하지 않았으니 대관의 체모를 크게 잃었습니다. 세린도 그 직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칠덕정에서 친열하는 일은 병조가 전례에 따라 입계한 것이므로 19일에 할 예정이었는데, 급한 일이 아니니 시행을 미루라. 예인충을 포박한 일 및 헌부 서리 등의 일은 매우 놀랍다. 금부에 내려 추국하라. 류세린은 체직시키라.” 【원전】 17 집 533 면
중종29/09/26(기축)
채세영(蔡世英)을 사헌부 집의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전한에, 하계선(河繼先)을 사간원 사간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36 면
중종29/11/06(무진)
오준(吳準)을 사헌부 대사헌에, 윤풍형(尹豊亨)을 사간원 대사간에, 류세린(柳世麟)을 집의에, 황효공(黃孝恭)을 사간에, 정세웅(鄭世雄)과 황기(黃琦)를 장령에, 이이(李?)와 권응창(權應昌)을 지평에, 임필형(任弼亨)을 헌납에, 허온(許溫)과 조사수(趙士秀)를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44 면
중종29/11/18(경진)
대사헌 오준(吳準), 집의 류세린(柳世麟), 장령 정만종(鄭萬鍾)과 황기(黃琦), 지평 이이(李?)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홍문관에서 올린 차자를 보니 ‘논의를 담당한 이가 적합한 인물이 아니면 공의(公議)가 도리어 경시된다.’ 하고, 또 ‘인사 행정이 용잡하다는 비난이 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므로 지적하여 논박한 것입니다. 언관(言官)으로서 논박받고 재직할 수가 없으니, 속히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답하였다.
“홍문관의 본의를 모르겠다. ‘논의를 맡은 이가 적합한 인물이 아니면 공의(公議)가 도리어 가볍게 된다.’는 말은 대간을 중히 생각하여 이른 것이며 ‘인사 행정이 용잡스럽다는 비난이 있다.’고 한 것은 근자에 대간들이 빈번히 체직되었으므로 그 사이에 혹 합당하지 않은 인물이 인사에 섞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대간 전부를 논박한 것은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 【원전】 17 집 548 면
중종29/11/22(갑신)
집의 류세린(柳世麟), 장령 황기(黃琦), 지평 권응창(權應昌)이 아뢰기를,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의 추고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제 정사(政事)에서 이사균(李思鈞)을 이조 판서에 주의(注擬)하였고, 김안로도 우상(右相)에 주의했는데, 이미 하비(下批)하였습니다. 평소에 추고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헌부가 당연히 이조와 병조에 이보(移報)해야 되는데, 어제는 그저께 정사할 적에 이미 이보했기 때문에 다시 이보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다시 이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조(銓曹)에서는 추고가 끝났다는 문서를 보지 못했다면 마음대로 주의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이렇게 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자세히 살펴서 다시 이문(移文)하지 못하였기에 대죄(待罪)합니다.”하니, 답하였다.
“이사균을 이조 판서에 주의했으나 제수하지 않았고 김안로는 이미 우상(右相)에 하비하였다. 안로의 경우는, 대신이란 지체시킬 수 없기에 하비한 것이다. 보통 때는 추고하는 일이 긴요한 것은 아니고, 맡은 임무가 매우 중요하다며 때에 따라 하비할 수가 있다. 이조가 망각하고 그랬을 것이다. 헌부는 이미 한 차례 이보하였으니 대죄하지 말라.” 【원전】 17 집 549 면
중종29/11/26(무자)
대간들이 모두 들어와 아뢰기를, “나세찬(羅世纘)의 일을 여러날 논계(論啓)하였으나 의논해 결정했다고만 미루시고, 윤허를 하지 않으니 신들은 실망이 큽니다. 세찬의 흉악하고 간사한 정상(情狀)은 이종익(李宗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계책(計策)을 내게 한 뿌리를 소상히 자복(自服)받아 그 악을 징계하고 그 근원을 막아야 할 것이요, 죄를 동과(同科)로 돌려서 곧바로 사실을 실토하지 않은 사람에게 조율(照律)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옥사를 다스리는 것은 사실을 얻어내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니, 처벌할 법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법을 운용하는 데 있어 한갓 율에만 근거하고 사실을 조사하지 않는다면, 죄를 받는 자들이 그 죄보다 가벼운 율을 받고 사실을 숨긴 것을 다행하게 여길 것이니, 국가에서 율을 운용함이 이로부터 무너지게 될 뿐만 아니라 죄인 또한 징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간교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방관(傍觀)하다가 남 몰래 웃으면서 조정의 상태를 엿보는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는 기관(機關)이 매우 중한 일인데 신들이 어찌 허술히 헤아려서 아뢰겠습니까. 사실을 찾아낸 다음에 조율하여 그 죄를 결정하소서.”하니,
답하였다. “내 생각도 그가 처음 승복(承服)한 공사(供辭)는 교묘하게 둘러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의도를 새로 추고하여 반드시 취복(取服)한 뒤에 조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대신들이 이미 의논하기를 ‘사대부가 형장(刑杖)을 맞고 죽는다면 성치(聖治)에 누가 될 듯하다.’ 하였다. 만일 많은 형벌을 더하다가 목숨을 잃는다면 임금의 형벌을 신중히 하려는 뜻에 어긋남이 있을 것이므로 다시 문의하여 추고하게 했으나, 대신들의 의논이 또다시 저와 같아서 형장을 더이상 가할 수 없었기에 조율시켜 죄를 결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일개 세찬의 일 때문에 조율하는 것을 수차에 걸쳐 변경하고 있으니 명령이 한결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체에도 어긋날 듯하다. 대신들의 논의가 저와 같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마땅히 형벌을 신중히 다루어야 할 입장이니 내린 명을 바꿀 수가 없다. 묘의(廟議)를 따름이 무방하다.”
【들어와 아뢴 대간은 다음과 같다. 사간 허항(許沆), 사간 황효공(黃孝恭), 장령 안현(安玹)·황기(黃琦), 지평 권응창(權應昌), 헌납 신석간(申石澗), 정언 이문건(李文楗)·박충원(朴忠元)이다. 그때 대사헌 권예(權예)는 고향에 있을 적에 제배(除拜)되었기 때문에 오지 못했고 집의 류세린(柳世麟), 지평 이이(李?)는 근친(覲親)으로 하향하였다.】 【원전】 17 집 551 면
중종29/11/27(기축)
대사간 허항(許沆), 집의 류세린(柳世麟)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형(刑)에는 정해진 율(律)이 있으니 반드시 사실에 근거해야만 처벌의 경중(輕重)이 뒤따라 정해집니다. 사실을 끝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가벼이 율을 가하게 되면, 형률이 죄인을 처벌하는데 합당함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를 입은 자도 징계되는 바가 없을 것이며,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에게도 또한 후일에 변명거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앞뒤를 어지럽게 바꾸는 것은 간사한 사람의 정상(情狀)인데, 그 거짓된 초사(招辭)를 취하여 도리어 승복(承服)한 것이라고 한다면 저 간악한 사람의 술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세찬은 근시(近侍)의 직책에 있으면서 직접 성상의 책문(策問)을 받들게 되자 평소 품고 있던, 남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글로 썼으니 그 흉악스럽고 패려(悖戾)한 정상이 모두 드러나 엄폐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작된 근거를 찾아보면 뿌리가 반드시 깊을 것인데 추국(推鞫)함에 미처 사실을 감추고 실토하지 않아 근거 없는 것으로 증거를 삼아 옥사를 처리할 수 없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 스스로 꾀함이 비록 교묘하나 누가 그의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 보지 못하겠습니까. 의당 소상히 캐묻고 끝까지 힐책하여 흉악한 꾀와 숨겨진 계책을 모두 실토시켜, 숨긴 것이 없게 한 뒤에 율에 따라 죄를 정한다면 법의 적용이 합당하게 될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도 경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형벌이란 사실을 알아내는 데 있으니 진실로 형벌을 삼가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뜻에 손상됨이 없는 것이요, 일이란 올바르게 처리함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니 어찌 여러 번 고친다 하여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시비가 있는 곳에 기관(機關)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옥사를 다스릴 적에는 힘써 그 사실을 밝혀내시고 간인을 징계하실 적에는 반드시 그 근원을 막으소서.” 【원전】 17 집 552 면
중종29/11/27(기축)
상께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의정부(議政府)·양사(兩司)·홍문관(弘文館)을 인견하시고 나세찬의 사건을 의논하는데, 좌의정 김근사(金謹思), 우의정 김안로(金安老), 좌참찬 손주(孫澍), 우참찬 류보(柳溥), 대사간 허항(許沆), 집의 류세린(柳世麟), 사간 황효공(黃孝恭), 장령 안현(安玹)과 황기(黃琦), 헌납(獻納) 신석간(申石澗), 지평(持平) 권응창(權應昌), 정언(正言) 이문건(李文楗)과 박충원(朴忠元), 부제학(副提學) 채무택(蔡無擇), 전한(典翰) 채세영(蔡世英), 응교(應敎) 김미(金쭯), 부응교 김수성(金遂性), 수찬(修撰) 채낙(蔡洛), 박사(博士) 박종린(朴從鱗), 저작(著作) 임열(任說), 동부승지(同副承旨) 송겸(宋?), 주서(主書) 이팽수(李彭壽), 검열(檢閱) 원계검(元繼儉)과 박붕린(朴鵬鱗)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세찬이 간교하게 논변한 뜻에 대하여 끝내 그 진의를 알아내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세 번이나 형신(刑訊)을 받았다. 사대부가 운명(殞命)하게 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교사(巧詐)한 실정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승복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지난번에 받은 공초(供招)로 곧장 조율하게 되면 다시금 형신할까를 문의한 일이 헛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에 대해 물론이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가?” 하니,
근사가 아뢰기를, “세찬의 대책은 필시 유래된 곳이 있을 것이요,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계획한 지가 오래되어을 터이니 반드시 함께 꾸민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간특한 정상(情狀)이 명백하니 모름지기 사실을 밝혀낸 다음에 조율(照律)한다면 사람들도 옳다고 여길 것입니다.
근자에 이번 일을 의논할 때, 나세찬이 정상의 대체적인 것은 이미 승복(承服)하였으니 이미 승복한 초사(招辭)로써 조율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건을 귀일시키기 위하여 형벌을 더한다면 반드시 운명하게 될 것이니, 조정의 관원(官員)이 형장(刑杖) 아래서 운명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때문에 이 사건을 의논할 적에 이와 같은 뜻을 상달(上達)하였던 것이요 세찬을 아끼려는 뜻이 아닙니다. 형장을 더하다가 운명하게 된다면 성상의 정치에 누(累)가 될까 두렵습니다.
대간과 시종(侍從)들이 ‘세찬의 대책에는 필시 유래한 곳이 있을 것이다.’고 아뢴 것도 합당한 의견이며 ‘사대부(士大夫)가 형장 아래서 운명하게 될까 염려스럽다.’는 상의 분부도 지당합니다. 대체적인 정상은 상께서 이미 환히 아시고 계시니 모든 것은 성상(聖上)께서 재량할 나름입니다.”하고, -中略- 세린(世麟)은 아뢰기를, “나세찬(羅世纘)의 대책에 ‘만일 불공하고 부정한 자의 마수에 걸리면 한산한 지위에서 한을 품고 있던 자가 다른 날 치란(治亂)의 기틀이 될 지도 모른다.’ 하였으니, 음흉한 꾀와 간사한 술책이 일조 일석에 이루어진 계책이 아니요, 필시 유래된 근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침 대궐의 뜰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만일 날씨가 춥다고 하여 형장을 더할 수 없다고 한다면 죄를 받는 자가 불복할 터이니 그 폐단이 매우 클 것입니다.
대저 정상과 법이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국가에서 법을 응용하는 뜻이 온당하게 됩니다. 만약 철저히 추고하지 않고 곧바로 조율(照律)한다면 법을 적용하는 뜻이 어찌 합당하게 되겠습니까. 부정하고 불공한 일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말이니 형장을 가하여 철저히 신문하면 어떻게 그 사실을 모두 숨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비록 조그마한 죄를 받더라도 죄준 것을 시기하고 원망하기 때문에 일을 말하는 사람이 스스로 위험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조정에 간사한 의논이 날로 많아지고 여염(閭閻)에서도 간사한 의논이 떠돌고 있습니다. 상께서는 그 간사한 정상을 환히 살피시어 끝까지 추고한 뒤에 조율하여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 번에 걸쳐 형장을 받고 난 뒤에 다시 형장을 가하자고 청했을 때, 나는 세찬이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있으니 형장을 가한다면 반드시 운명하게 될 것이며, 운명하게 된다면 사실을 밝혀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대궐 뜰에서 친히 문초하여 그 사실을 알아낸다면 좋겠다.”하였다. 【원전】 17 집 552 면
중종29/12/03(을미)
대사간 허항(許沆), 집의 류세린(柳世麟), 사간 황효공(黃孝恭), 장령 안현(安玹)과 황기(黃琦), 헌납 신석간(申石澗), 지평 권응창(權應昌), 정언 이문건(李文楗)과 박충원(朴忠元) 등이 아뢰기를, “송세형이 그때 쓴 초책(草冊)을 보여주소서.” 하니, 보여주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허항과 집의 류세린 등이 대간청(臺諫廳)에 모여 앉아 세형이 기록한 10월 23일의 초책을 펴 보니, 끝에 검열 나세찬의 대책이라 기록하고, 그 밑에 과차(科次)하는 날 시관 김안로가 ‘입론 부정(立論不正)’이라고 하였다고 두 줄로 주를 냈다. 또 상께서 곧 봉한 것을 열어 보게 하니, 바로 세찬이 지은 글이었다고 쓰고, 그 밑에 세찬의 책문 전편을 썼다. 10월 24일의 초책에는 시관이 책문을 읽고 입론이 부정하여 가작(佳作)이긴 하지만 취할 수 없다고 주초하였는데 ‘책문을 개봉하여 보라’고 전교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좌승지 오결(吳潔)에게 전교하기를, “10월 23일은 책문을 지은 날이고 24일은 과차한 날이니, 24일에 상세히 썼다면 옳겠지만 23일에 상세히 썼다면 모순이 된다. 정원이 혹 잘못 기록한 것은 아닌가?” 하니, 오결이 회계하였다. “한 책으로 연일 기록한다면 혹 잘못 기록될 수도 있지만 날마다 기록하는 것이 각각 다른 책인데 어떻게 잘못 전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원전】 17 집 557 면
중종29/12/03(을미)
대사간 허항과 집의 류세린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송세형의 사초를 보니 10월 24일 초책에는 시관이 책문을 읽고 가작이긴 하지만 취할 수 없다고 주초(朱草)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조덕수의 계사(啓辭)와 서로 같습니다. 작자(作者)와 시관의 성명을 쓰지 않아 증거가 없게 한 정상이 판연하여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세형의 공초에는 ‘그뒤 사실을 기록할 때에 일일이 다 써넣었었다.’고 했으나 이것은 23일의 초책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23일은 책문을 지은 날이요 24일은 과차한 날인데, 입론이 부정하다고 한 말과 상께서 열어 보라고 명한 말이 모두 과차한 날에 있던 일입니다. 그런데 세형이 어떻게 미리 알고 23일의 초책에 기록할 수가 있겠습니까? 24일의 초책은 이미 그때의 가주서(假注書) 정희등(鄭希登)에게 주어 정서(正書)하게 하였습니다. 일이 발각되어 다시 추록(追錄)하려 하였으나 초책이 벌써 희등에게 가 있어 도로 가져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기에게 있는 23일 초책에 추서(追書)하고 또 그 곁에 다 ‘잘못을 여기에다 기록하니 차례를 확인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참으로 24일 기록해야 될 것을 23일의 초책에 잘못 기록하였다면 추가로 기록한 표지에 어찌하여 23일이라고 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기의 술책을 공교롭게 숨기려 하였으나 간사한 마음이 절로 나타나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신들도 이미 그 말을 들었고 이제와서 보니, 경악스러워 타매(唾罵)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간사한 술책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을 상께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사국(史局)의 일은 지극히 삼가고 근엄하게 해야 합니다. 사필(史筆)을 잡은 자는 보고 들은 것은 마땅히 사실에 따라 직서(直書)해야 될 뿐만 아니라 여항(閭巷)의 작은 일까지도 후세에 전하여야 할 것이 있으면, 빠짐없이 자세히 기록해야 합니다. 더구나 상의 앞에서 시관이 대책(對策)을 논하면서 입론이 부정하다고 한 것을 어찌 아뢰지 않은 것이라고 핑계하여 성명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사실대로 기록하지도 않았고 얼굴빛까지 붉히면서 김안로의 이름을 쓰지 말게 하였으니, 불쾌한 안색을 지으면서 꾸짖어 금한 정상이 더욱 분명합니다. 곡필(曲筆)로 간사한 자를 비호하여 사실(史實)을 속였고 또 속임수를 부려 거듭 위를 속였으니, 즉시 철저히 힐문하여 그 실정을 적발해 내야 합니다. 따라서 나세찬의 추국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여론이 온당하지 못하게 여기고 있으니 속히 추국하소서.”하니,
답하였다. “이 일기(日記)는 나도 보았다. 24일에는 대략만 썼고 23일에는 자세히 기록하여 날짜의 앞뒤가 전도되었으므로 나도 이상히 여겼다. 이것은 뒤에 잘못된 것을 듣고 다시 기록한 것이 아닌가? 만약 잘못된 것을 듣고 다시 기록하였다면 어찌하여 23일의 초책에 기록하였는가? 반드시 25일이나 26일 뒤에 기록되어 있었어야 한다. 23일에 기록한 것으로 본다면 세형의 술책을 알 수가 없다. 이 일은 이미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한 것이다. 그러나 대간이 오늘 아뢴 뜻은 대신들이 미처 모를 것이니 이 뜻으로 대신과 함께 의논하라.” 【원전】 17 집 557 면
중종29/12/04(병신)
대사간 허항, 집의 류세린, 사간 황효공, 장령 황기(黃琦)와 안현(安玹), 지평 권응창(權應昌), 정언 이문건(李文楗)과 박충원(朴忠元) 등이 아뢰기를, “송세형의 간사한 정상은 상께서 이미 환히 아시는데도 이렇게 망설이시니 서운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만약 잊지 않기 위하여 자세히 기록하려 하였다면, 마땅히 정희등에게 보내어 정서(正書)하여 아울러 넣어야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궤 속에 저장한 채 두어 달씩이나 지체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희등이 이미 세형의 24일 초책에 따라 정서하였다면, 세형이 말한 23일의 초책에 자세히 기록하였다는 것은 어디에 쓰려고 한 것입니까? 그의 간사한 정상은 추국하지 않아도 절로 드러났습니다. 일이 사국(史局)에 관계된 중죄인을 즉시 추국하여 실정을 자백하게 하지 않고, 번거롭게 누차 의논만 함으로써 옥사(獄事)를 지체시켰으니 지극히 온당하지 못합니다. 속히 추국하소서.”하니,
답하였다.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대저 추국하는 일을 대신들과 상의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대신들의 의논이 이와 같은데도 물의(物議)가 매우 의심스러워하고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을 추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정상을 알 수 있겠는가. 당연히 추국해야 한다.” 【원전】 17 집 557 면
중종30/01/10(신미)
허항이 아뢰기를, “박홍린이 옳으면 송순이 그르고, 송순이 옳으면 박홍린이 그른 것입니다. 오늘 위에서 결정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정광필의 일이 옳은지 그른지도 역시 쾌히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요즈음 조정의 기강이 당당하지 못하므로 바깥 사람들이 언론을 맡은 사람을 가리켜 ‘아무는 허항의 무리이고 아무는 신석간의 무리이고 아무는 류세린의 무리이다.’ 합니다. 대저 위복(威福)의 권세는 위에 있는 것이므로 본디 임금에게 여쭈어야 마땅한데, 이제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를 사사로이 논하여 ‘아무는 옳고 아무는 그르다.’ 하며, 과감하게 말하고 행실이 훌륭한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고 죄를 입고 귀양간 자를 공정하다 하니, 이는 위복이 위에 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제 신과 채무택이 죄다 말하였으므로, 바깥 사람들은 반드시 ‘이 두 사람이 한 짓이다.’ 할 것이니, 신도 민망할 뿐입니다. 신이 신묘년에 대간이었는데, 그때에는 지금처럼 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좌우에 입시한 자는 다 은혜를 받은 것이 지극히 중하고 편안히 부귀를 누리는 신하인데 조정의 큰 의논을 도외시하고 말을 다하지 않습니다. 입시한 때에도 오히려 이러하니, 외정(外廷)에 있어서는 알 만합니다. 폐습이 이에 이르렀으니,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신도 전에 입시하여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죄다 아뢰지 못하였는데, 이는 임금을 속이는 것입니다 홍섬은 성품이 본디 경망하고 잗달아서 부형의 세력을 믿고 와서 신의 뜻을 탐지하고 겁을 주어 동요시키려 한 것이니, 그 죄를 논한다면 분경(奔競)으로 다스리더라도 절로 그 율문(律文)에 적용됩니다만 그 시작된 곳을 끝까지 힐문하여 뿌리를 없애는 것이 옳겠습니다.”하였다. 【원전】 17 집 562 면
중종30/01/10(신미)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권응창(權應昌)을 교리(校理)에 채 낙(蔡洛)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67 면
중종30/01/12(계유)
채세영(蔡世英)을 사헌부 집의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전한에, 황기(黃琦)를 응교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68 면
중종30/03/02(임술)
윤임을 의정부 우참찬에, 김인손(金麟孫)을 예조 판서에, 류관(柳灌)을 병조 판서에, 채소권(蔡紹權)을 한성부 우윤에, 이억손(李億孫)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직제학에, 황기(黃琦)를 전한에, 김미(金쭯)를 부응교에, 이이(李?)를 교리에, 김기(金祺)를 수찬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74 면
중종30/03/19(기묘)
홍문관 부제학 채무택(蔡無擇), 직제학 류세린, 박사 임열이 아뢰기를, “유경인과 진우 등의 일은, 신들이 이달 10일에 책을 교정(校正)하는 일로 관내(館內)에 모였는데 의논이 나왔으므로 신들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즉시 계달코자 하였으나, 들은 말이 흉악하고 관계된 바가 중대하므로 소문의 출처와 전말을 자세히 살피고자 아직 아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관계되는 바가 중한 일을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으면서 즉시 논계하지 못했으니, 매우 송구스러워 대죄합니다.”하니, 전교하였다. “관계되는 바가 중대한 일을 듣고 전말을 자세히 살핀 뒤에 아뢰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중대한 일을 듣고 즉시 아뢰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대죄하지 말라.” 【원전】 17 집 578 면
중종30/03/20(경진)
진우을 형추하니, 형장 13대에 이르러 복죄했다. 그 초사는 다음과 같다. “저는 유경인·한용·장임중·이운손(李雲孫)·민기문(閔起文)·김희년(金禧年)·정사현(鄭思顯) 등과 혹은 한용의 집, 혹은 유경인·민기문 집에서 항상 모여 상의하기를 ‘김안로는 각처에 건축을 하고, 홍언필(洪彦弼)은 침묵을 지키면서 자리를 굳히고, 소세겸(蘇世謙)은 고향에 돌아가 여러 고을의 뇌물을 많이 받았고, 윤임(尹任)은 권세가 중하여 외척 세도의 조짐이 있고, 심언광은 처음에는 매우 강직하더니 지금은 처음만 같지 못하고, 허흡은 내가 장임중을 방문하는 일로 그의 집에 이르렀다가 사람들에게 목화를 많이 받는 것을 보았고, 심언경은 그 첩이 밖에서 오는 뇌물을 많이 받았으며, 류세린과 김미는 조관(朝官)으로서 항상 기생집을 드나들고, 김기(金祺)는 경박하기 때문에 늘 마음속으로 나쁘게 여기고 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뒷날 입신 출세하여 조정에 나아가면 언관(言官)이 될 수도 있으니 혹은 윤대(輪對)에서 계달하여 제거시키자고 의논했습니다. 이 의논이 있었던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지난해 7월 사이에 장옥(張玉)이 국장 도감(國葬都監)의 골목 어귀의 길 뒷집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가서 만나 서로 대화했습니다. 장옥이 ‘사군자(士君子)는 마땅히 입지(立志)를 크게 해야 한다. 만일 마음속에 불평이 있다면, 뒷날 뜻을 얻으면 비록 권세가 중대한 재상이라도 제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들었으며, 위의 사람들은 허물이 많으니 제거해야 된다고 의논했었습니다.” 【원전】 17 집 579 면
중종30/03/20(경진)
유경인을 형추하였는데 형장 7대에 이르러 복죄하였다. 그 초사는 다음과 같다. “진우·한용·김희년·이운손·민기문·정사현 등과 함께 저의 집에서 모이기도 하고 한용의 집에서 모이기도 하면서 조정 인물의 진퇴(進退)의 당부(當否)에 대해 항상 여럿이 의논했습니다. 하루는 진우가 ‘지금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여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하니, 한용은 ‘지금은 조관(朝官)이 서로 교대로 출입하기 때문이다.’ 하고, 김희년은 ‘지금 권력자는 허항·권예·채무택·김미·이이(李?)·권응창(權應昌)·이임(李任)·김기·류세린·황기 등인데, 이들이 인물을 공박하고 또 장옥으로 하여금 죄를 입게 하였다. 우리들은 장옥에게 수업하였으므로 우리들이 급제(及第)하면, 마땅히 위의 사람들을 공박하여 그들을 귀양도 보내고 파직도 시키면 제거할 수 있다. 이같이 제거한다면 조정이 화합할 것이다.’ 했으므로 듣고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처음 시작한 것은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지난해 가을 사이에 진우가 장옥을 찾아가 보았는데 옥이 ‘자네들이 급제한다면 지금의 권세 있는 자들을 공박하라.’고 했다고 진우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듣고서 위의 사람들을 제거할 일을 의논했습니다.” 【원전】 17 집 579 면
중종30/03/21(신사)
김희년을 형추하였는데, 형장 30대에 이르러 복죄하였다. 그 초사는 다음과 같다. “진우와 유경인은 장옥에게서 수업하였으므로 장옥이 죄입은 것을 원망하여, 한용·장임중 등과 모여서 서로 ‘글로 친우를 모은다는 것이 진실로 허사(虛事)이다. 지난달 장옥이 심사순과 서로 친하게 상종하더니, 사순이 사간(司諫)이 되어서는 재주있는 자를 시기한다고 장옥을 논박했고, 지금도 장옥과 교유하는 자 또한 많으나 옥은 그래도 죄를 면하지 못했다. 심언광과 채세영(蔡世英) 등은 일찍이 장옥과 상종하였으나 죄를 입을 당시 구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또 ‘채무택(蔡無擇)·류세린(柳世麟)·박홍린(朴洪鱗)·양연(梁淵)·정만종(鄭萬鍾)·신석간(申石澗) 등은 대간을 출입하면서 인물을 논박함이 너무 심하였으니, 우리들이 만약 뜻을 얻으면 공박하여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제가 ‘이것은 유자(儒者)로서는 알 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모사를 꾸민 것은, 유경인과 진우 등이 장옥의 집을 왕래하였으므로 의논은 장옥에게서 나왔다고 생각됩니다.”
민기문(閔起文)을 추국하였다. 그의 공초에, “저는 진우 등과 서로 알기는 하나 상종하지 않았으므로, 모여서 의논한 일은 전혀 모릅니다.”하더니, 형신을 가하려 하자 복죄하였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지난 계사년 12월 사이에 명례방(明禮坊) 외조부(外祖父) 댁에서 회강(會講)하였는데, 그때 진우·유경인·정사현·김희년·이운손(李雲孫)·한용 등이 이웃집에서 독서하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위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갔는데, 유경인이 ‘채무택·이임(李任)·황기(黃琦)·임붕(林鵬)·김희열·류세린·채세영·김수성(金遂性)·소봉(蘇逢)·김미 등은 대간을 출입하면서 인물을 논박함이 너무 지나쳤다. 우리들이 뜻을 얻으면 이 사람들을 공박하여 제거해야 한다.’ 하였고, 또 ‘이 말들은 장옥에게서 나온 것 같다.’고 하기에 저 또한 동의했습니다.
정사현을 추국하였다. 공초에, “지난해 가을에는 사촌 진우와 함께 거처하였으나 추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하더니, 형추(刑推)하여 형장 12대에 이르러서 자복하였다. “지난 2월 초승에 진우·한용·김희년·민기문·이운손 등과 유경인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경인이, ‘대간을 출입하는 허항·류세린·채무택·임붕·김수성·박충원(朴忠元)·채낙(蔡洛) 등은 인물을 공박함이 너무 심하다. 우리들이 뒷날 언관(言官)이 되면 계달하여 공박, 제거해야 한다.’ 하기에, 저도 동의했습니다. 모계(謀計)는 장옥이 냈다고 유경인이 말했습니다.” 【원전】 17 집 580 면
중종30/04/19(기유)
전교하기를, “대사헌 허항은 처음 2품에 올랐으니 제조(提調)에 의망(擬望)해도 된다. 다만 상의원(尙衣院)과 내의원(內醫院)은 출납하는 일이 잗달아서 풍헌(風憲)을 맡은 관원으로서는 할 바가 못되지만 타사(他司)의 제조라면 시켜도 된다.”
하고, 또 전교하였다. “류세린(柳世麟)은 직제학이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3품의 반열에 있은 지는 오래 되었다. 대체로 사람을 쓰는 도리는 한갓 자격(資格)에만 따를 수는 없는 것이므로 특별히 병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조윤손(曺閏孫)을 의정부 좌참찬에, 손주(孫澍)를 우참찬에, 윤임(尹任)을 공조 판서에, 권예(權혲)를 호조 참판에, 윤풍형(尹豊亨)을 이조 참의에, 류세린(柳世麟)을 병조 참지에, 하계선(河繼善)을 홍문관 전한에, 신영(申瑛)을 교리에, 정희렴(鄭希?)을 사간원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84 면
중종30/05/06(병인)
원계채(元繼蔡)를 병조 참의에, 김광철(金光轍)을 장례원 판결사에, 류세린(柳世麟)을 사간원 대사간에, 신석간(申石澗)을 의정부 사인에, 신영(申瑛)을 사헌부 장령에, 김기(金祺)를 사간원 정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86 면
중종30/06/03(임진)
대사간 류세린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임금이 기강을 총람하고서 위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유사(有司)는 아래에서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임금은 사소한 일에 간여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자기의 마음대로 하지 않게 된 뒤에야 체통이 존엄해지고 상하의 질서가 정돈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진소(陳訴)하고 백료(百僚)들이 직무에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해사(該司)에서 변별하고 규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백성을 다친 사람 보살피듯이 하는 인자함 때문에 원망을 풀어주는 데에 간절하고, 자신을 삼가는 엄함 때문에 기강의 진작에 솔선하십니다. 그리하여 소장(訴狀)을 친히 판부(判付)하고 백료의 죄를 규찰하는데도 스스로 기한을 정하십니다. 다친 사람 보살피듯이 하는 마음은 사소한 데에 빠지기 쉽고 자신을 삼가는 덕은 잗단 데에 가까운 것입니다. 형부(刑部)에서 판부를 숨겨두고 법사(法司)에서 여러가지로 계품한 것은 진실로 그 죄를 변명한 길이 없습니다. 임금의 존엄함으로 유사의 직임을 행하고 있으니, 또한 기강을 총람하여 단정히 앉아 있는 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간섭을 하게 되면 신하가 게으르게 된다는 것은 당우(唐虞) 때의 조정에서 서로 경계하던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 송사와 여러 금령을 감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은 문왕(文王)이 지치를 이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힘써 대체를 지니시어 성덕을 훼손하지 마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힘써 대체를 지니라는 말은 매우 좋다.” 【원전】 17 집 589 면
중종30/06/26(을묘)
대사헌 허항과 대사간 류세린 등이 아뢰기를, “권간의 죄는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니, 그 서얼이 조정의 반열에 끼인 것에 대해서는 이미 물의가 있었습니다. 우의정 윤은보는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 인물을 진퇴(進退)함에 있어 마땅히 물정(物情)에 맞게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시종을 뽑을 때 조계상의 아들 광원에게 권점을 주어 참여시킴으로써 이미 정해진 국시(國是)를 요동시켜 간당(奸黨)들에게 엿볼 마음을 열어주었으니, 이것이 어찌 대신으로서 공적이고 국가를 위하는 자세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우러르는 지위에 있을 수 없으니 체직시키소서. 그리고 광원의 이름 밑에 또 하나의 권점이 있었습니다. 현감(縣監) 나익(羅瀷)은 전에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행동이 간사스러워 물의에 용납되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권점이 셋이나 되었으니, 공론을 꺼리지 않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더욱 놀랍습니다. 다만 어느 관원이 했는지를 자세히 묻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 현재 나타난 것만을 먼저 아룁니다. 무릇 아뢴 말의 출처에 대해 위에서 하문하시면 언로(言路)에 해로움이 있으니, 하문해서는 안 된다고 아뢴 말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어제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린 일은 바로 위에서 누구의 소행인지를 환히 알아 호오(好惡)를 명백하게 보이기를 바란 것이니, 하문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정원에서는 즉시 일일이 물어서 아뢰어야 하는데, 잘못 전례가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하문을 가로막았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소서.”하니, 답하였다.
“홍문관의 차자는 매우 놀라왔다. 마땅히 누구의 소행인지를 하문한 다음에 호오와 시비를 보이려 한 것이다. 때문에 시종에게 하문한 것인데, 이는 말의 출처를 하문하는 유가 아니다. 대저 정원이 후설(喉舌)의 지위에 있으면서 시비를 살피지 않고 이렇게 가로막는다면 어찌 뒤 폐단이 없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윤은보는 조정의 물의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감히 이런 일을 하였으니, 매우 그르다. 나익의 이름 밑에 권점이 셋이나 되었다니, 또한 잘못된 일이다. 삼공을 체직하는 것은, 다른 직과는 다르니 마땅히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겠다.” 【원전】 17 집 592 면
중종30/07/18(정축)
김선(金璇)을 승정원 좌승지에, 윤안인(尹安仁)을 우승지에, 류세린(柳世麟)을 장례원 판결사에, 황기(黃琦)를 세자 시강원 보덕에, 신석간(申石澗)을 의정부 사인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97 면
중종30/07/26(을유)
윤풍형(尹豊亨)을 이조 참의에, 이공장(李公檣)을 장례원 판결사에, 채무택(蔡無擇)을 사간원 대사간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부제학에, 원계채(元繼蔡)를 성균관 대사성에, 이몽필(李夢弼)을 헌납에, 채낙(蔡洛)을 교리에 제수하였다. 【원전】 17 집 598 면
중종30/09/06(갑자)
홍문관 부제학 류세린(柳世麟)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번 제릉에 친제(親祭)를 드리는 것은 참으로 조상을 추모하는 지극한 정성입니다. 다만 환궁하실 때에 석벽(石壁) 아래 배를 띄우는 일은 유람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이곳은 전대의 황란(荒亂)했던 임금 연산군이 놀이하던 곳이므로 여기에서 어가가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나루에는 이미 부교(浮橋)까지 가설해 놓았으니 편한 곳을 버리고 위험한 곳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또 과거는 국가의 대사이니 인재를 시취(試取)할 때에는 신중해야 하는 것인데 이번에 차중(次中)을 모두 선발에 들게 했으니, 이는 요행의 길을 터놓은 것일 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법도가 이로부터 가벼워질 듯합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람하시는 일을 정지하시고, 과거의 법도를 중하게 하소서.”하니, 답하였다.
“석벽 아래서 주정(晝停)하는 것은 세종조(世宗朝)의 고례(古例)이다. 이번 행행은 유람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며, 정자선(亭子船)이 또한 무슨 위험할 게 있겠는가. 그리고 환궁할 때에 지나는 길목에서 하는 일인데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또 서울과 지방을 통틀어 4명 만을 뽑는다면【삼하(三下) 이상이 4명 뿐이었다.】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인재를 뽑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대들 말대로 한다면 과거가 번거롭게 자주 시행되어야 할 뿐 아니라 널리 인재를 뽑는 뜻과 전혀 달라진다. 더구나 차등(次等)을 뽑는 것 역시 고례에 있는 일이요, 새로운 예가 아니다. 대체로 인재를 뽑는 것은 과거를 자주 보이려는 것이 아니고 청선(淸選)의 지위에 등용하려는 것일 뿐이다. 4명만을 뽑는다면 등용한다고 한들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구례(舊例)에 따라 차등도 아울러 뽑은 것이다.” 【원전】 17 집 603 면
중종30/09/15(계유)
홍문관 부제학 류세린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들으니, 오는 17일에 박연에 행행하려 하신다 합니다. 이번 제릉의 친제에 대하여 신들은 진실로 성상의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다만 제사를 거행하신 직후에 박연을 관람하시겠다는 명이 있으시니, 저 우매한 백성들과 무지한 군졸들이야 어찌 상의 본의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상의 성덕(盛德)이 훼손됨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전조의 임금 가운데 이곳에 유람한 임금이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황란(荒亂)한 임금의 행위였으니, 결코 그것을 취하여 예로 삼을 것은 못됩니다. 아조(我朝)의 선왕들께서는 제릉을 배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박연에 행행한 일은 없었습니다. 이곳은 지나는 길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곳을 행행하는 것은 유람하며 관광하는 일에 가까우므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즘에 천변(天變)이 있었으나 능침을 배알하는 일은 성심에서 나왔기 때문에 중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람하며 관광하는 데에 관계되는 일은 공구 수성할 시기에 결코 거행해서는 안 됩니다.”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17 집 605 면
중종30/09/15(계유)
부제학(副提學) 류세린 등이 차차를 올리기를, “제왕(帝王)의 몸가짐은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허물이라도 있게 되면 성덕(盛德)에 누가 될 뿐만 아니라 후왕(後王)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지금 능을 배알하는 일을 마치자마자 박연을 가서 구경하려 하시는데, 이곳이 비록 명승지라는 이름은 있으나 유람하는 일이 어찌 제왕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상의 하교로는 고적을 탐방하여 그것을 거울삼아 경계로 삼는다 하십니다만, 전대의 흥패를 거울삼아 경계할 만한 것에 지난날의 역사에 밝게 나타나 있는데, 하필 그곳에 친히 가셔야만이 거울삼아 경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일이 잘못되었다면 열 번 결정하고 나서 열 번 바꾼다고 하더라도 옳은 것인데 어찌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핑계하여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편하게 놀기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들은 익히 아는 바이지만 후왕들이 이것을 예로 삼을 경우 말류(末流)의 폐단이 절대로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속히 이 행차를 정지하시고 작은 행실도 힘써 삼가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17 집 605 면
중종30/09/25(계미)
홍문관 부제학 류세린(柳世麟) 등이 상소를 올렸는데, 첫째 성지(聖志)를 안정시킬 것, 둘째 유람하고 편히 지내는 것을 경계할 것, 셋째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넷째 호령을 한결같이 할 것, 다섯째 조옥(詔獄)을 중히 여길 것, 여섯째 내외의 구분을 엄히 할 것이었다. 【원전】 17 집 606 면
중종30/10/05(계사)
대사간 채무택은 아뢰기를, “홍문관은 공론의 뿌리가 되는 곳으로 한때의 정론(正論)이 나오는 곳이니, 누가 감히 그것을 비난하겠습니까. 한때 상의 잘못된 거둥의 책임을 다 대간에 돌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절개를 지켜 의에 죽고 옷자락을 당기고 고삐를 자르는 일을 신들에게 요구한다면 이는 지나친 일입니다. 신 같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中略- 그러나 신이 듣기로는 이 상소(上疏)를 올릴 것을 의논할 때 류세린(柳世麟)은 행행에 수행한 혐의가 있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좌중의 한 사람이 ‘이는 송세형(宋世珩)이 소두(疏頭)로 기록한 자기 이름을 잘라버린 일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모욕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로 협박하면서 모여 앉은 자리에서 드러내어 말하였다 합니다. 신은 이말을 듣고서 이와같이 중요한 관서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매우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중종30(1535)년 10월 15일(계묘)
부제학 류세린은 아뢰기를, “근래의 인심이 분수에 편안하지 못하여 틈을 타 일을 만들기에 힘을 써서 거리에 방문(榜文)을 써 붙이기도 하고 남의 집에 투서(投書)를 하기도 하는데, 모두 조정 사람들을 지목합니다. 인심이 이처럼 흉악하니 하늘의 뜻인들 화평할 수 있겠습니까. 형옥(刑獄)의 일 역시 적지 않습니다만 조정의 인심이 중대한 것입니다. 상께서 마음을 굳게 정한 연후에야 간사한 모책을 스스로 환히 통찰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사람의 사정(邪正)을 분변할 수 있고 말의 시비를 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중종30(1535)년 12월 8일(갑오)
참찬관(參贊官) 류세린이 아뢰기를, “양제를 간선하는 것은 곧 종묘 사직을 위한 큰 계획으로서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다만 세자께서 혈기가 완숙되지 않았고 춘추도 아직 젊으신데, 전번에 벌써 양제를 간선하여 들였으니, 이번에 또 더 간선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록 후사를 위함이기는 하나, 어찌 후궁의 소생으로 후사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이 본시 우연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그 사이에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이처럼 서둘러서 간선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옛 사람의 말에 ‘보호한다는 것은 그 몸을 보호함인데, 요점은 먼저 그 성정(性情)을 보양하는 데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후궁이 비록 아들을 낳는다 하여도 그 아들로 후사를 삼지는 못할 것입니다.”하고,
동지사 심언광은, “이번의 일은 조정이 함께 의논한 것으로, 잉(媵)이 적(嫡)을 앗아 도리에 어긋나는 것과 같은 일은 아니며, 잉첩도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기만 한다면 적과 잉의 구분이 엄격하여 높은 자는 높은 자대로 낮은 자는 낮은 자대로 스스로의 직분을 지켜 서로 맞서거나 핍박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사헌부가 상소한 뜻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자집의 자식은 신분이 낮은 자일지라도 적과 첩을 두는데, 더구나 세자의 귀하신 신분으로서 후사가 없어 양제를 간선하는 것이 무어 나쁘겠습니까. 세자께서 나이가 젊다 하지만 춘추가 벌써 20을 넘었으니, 후사의 번성을 추구하는 성상의 염려가 지극히 당연합니다.”하고,
김근사는 아뢰기를, “류세린이 ‘측실(側室)에서는 아들이 난다 하여도 그 아들로는 후사를 삼을 수 없다.’고 한 말은 매우 잘못된 말입니다. 후사를 넓히려는 도리에 있어서는 그저 후손이 많은 것만을 추구할 뿐입니다.”하고,
심언광은 아뢰기를, “세린의 말은 매우 그릅니다. 후손이 많은 것만을 추구할 뿐이지, 어떻게 그 아들로 후사를 삼을 수야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일렀다. “세린의 말도 양제를 더 간선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세자가 아직 나이 젊으니 원손은 자연 보게 될 것이므로, 서서히 간선하는 일이 옳을 듯하다는 말이다. 끝까지 간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적실과 잉첩의 신분을 엄격히 밝혀서 문란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니, 지극히 당연한 의논이다.”
중종31(1536)년 3월 3일(무오)
홍문관 부제학 류세린(柳世麟)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한 생각의 잘못이 만 가지 일을 그르치고 한 일의 잘못이 만 가지 화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시종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시(是)와 비(非)를 정하고 사기(事機)를 분명히 살펴 화의 뿌리를 두절시켜야 합니다. 근래 군흉이 축출되고 국시가 정하여진 것은 다 명확한 성단(聖斷)과 한결같은 성심(聖心) 때문입니다. 상하가 일덕(一德)이 되어 조금도 갈라짐이 없어졌습니다만 저번에는 간당이 기회를 엿보아 감히 은유를 노리고 있을 때 양이와 방면의 명이 갑자기 물론에 어긋나게 내려졌으니, 듣고 본 모든 사람들이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는 한 가지 일의 잘못일 뿐 아니라 기미에 관계가 있는 것이어서 앞으로의 화환(禍患)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이므로 의당 통쾌히 호오(好惡)를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대간이 여러 차례 아뢰어 윤허를 받았으나 이는 마지못해 나온 조처이므로 신들은 군사(群邪)가 기회를 타서 더욱 조정의 사정을 엿볼까 염려됩니다. 예부터 화(禍)는 은미한 데서 일어나고 간(奸)은 소홀한 데서 생기는 법입니다. 삼가 전하께서 성심(聖心)을 더욱 굳건히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였다.
“지금 차자를 보니 논한 바가 당연하다. 정세호 등의 죄상에 대하여 나는 먼저 확정된 죄만을 알았을 뿐이고, 요사이 대간의 의논을 몰랐기 때문에 방면하는 일을 잘못 판결하였는데 요사이 그들의 죄상을 자세히 알고 즉시 윤허하였다. 이는 화복(禍福)의 기미에 관계되는 일이니 앞으로 한층 더 유념하겠다.”
중종31(1536)년 4월 21일(을사)
승지 류세린(柳世麟)이 금부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돌지가 지금 형문하려는데 자복하였고 오여정도 어제 이미 승복하였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하니, 전교하였다.
“오여정의 죄는 천지(天地)가 용납치 못할 것이다. 어찌 경각이라도 머물러 둘 수 있겠는가. 마땅히 날이 저물기 전에 조율(照律)하여 도성의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하라.”
중종31(1536)년 4월 21일(을사)
류세린이 아뢰기를, “돌지의 죄는 대명률(大明律)로 따진다면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하나 율학해이(律學解頤)에는 첩이 자식이 있는데도 그 남편의 자식과 간통하면 참형에 처하고 자식이 없으면서 간통하면 한 등급을 낮춘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돌지는 장 일백에 유 삼천리로 조율하였습니다.”하니, 아뢴 뜻은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세린이 금부의 뜻으로 아뢰기를,“이런 사람이 살던 곳은 으레 읍호(邑號)를 강등시키고 집을 헐어 못을 파며 처자들은 노비로 만듭니다. 그리고 사지를 사방에 전시(傳示)하고 효수(梟首)하는 일 등은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하니, 전교하였다.
“살던 읍호를 낮추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황간(黃澗)【오여정이 살던 고을.】은 본디 현감이 다스리는 고을이라 읍호를 강등시킬 필요가 없고, 집을 헐어버리는 일 등은 모두 법에 의거하여 처리토록 하라. 또 돌지는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니 10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오늘 형신을 가하라.”
중종31(1536)년 5월 28일(임오)
임금이 이르기를, “사피할 만하면 사피하고 사피할 만한 것이 아니면 자세히 살펴 조처해야 한다. 무단히 대궐을 들락날락해서 되겠는가?”하였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집의 이하가 체모를 잃는 일을 홍문관에서 아뢰었는데, 결원이 많으니 오늘 정사(政事)를 시행하라.”하고, 또 전교하였다.
“대저 사람을 잡아오는 일은 말로 통지한 뒤에 잡아와야 한다. 법사(法司)의 하리라 하더라도 어찌 남의 집에 마구 뛰어들 수 있겠는가. 저번에 헌부의 하리들이 제 마음대로 지목하여, 이는 허흡(許洽)과 류세린(柳世麟)의 무리라고 하므로 그때 죄주었는데, 아직도 이처럼 외람되다. 하리로서 왕자군(王子君)의 딸을 저처럼 끌고 왔으니, 그밖의 일도 알만하다. 익양군이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반드시 법사를 어렵게 여겨 아뢰지 않은 것이리라. 풍속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리들을 즉시 금부에 가두고 추국하라.”
중종31(1536)년 6월 1일(갑신)
채무택(蔡無擇)을 사헌부 대사헌에,【특가(特加).】허항(許沆)을 홍문관 부제학에, 성윤(成倫)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류세린(柳世麟)을 사간원 대사간에, 김미(金亹)를 집의에, 황기(黃琦)를 사간에, 김광준(金光準)과 안사언(安士彦) 등을 장령에, 정대년(鄭大年)과 이몽량(李夢亮)을 지평에, 원수장(元壽長)을 헌납에, 박종린(朴從鱗)과 노한문(盧漢文)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중종31(1536년 6월 25일(무신)
대사간 류세린(柳世麟) 등이 아뢰기를, “김순고가 범한 죄를 신들이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해서 논계하여 추고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대신들이 의논하기를, 떠도는 풍문에서 나온 것이지 실지를 지칭한 것은 아닌 듯하다고 했다 합니다. 신들은 간관(諫官)의 반열에 있으므로 범상한 소문이 있어도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드린 일이 도리어 부실한 데로 돌아갔으니, 신들은 무안하여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답하기를,
“대신은 대간들이 들은 것이 부실하다고 한 것이 아니라, 지방의 풍문이 부실한 듯하다고 한 것이다. 학비의 초사(招辭)에도 주군(州郡)을 누비고 다녔다고 하였고 순고의 초사에도 주군을 누비고 다녔다고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대간이 아뢴 것은 부실한 것이 아니다. 사피하지 말라.”하였다.
류세린 등이 다시 아뢰기를, “대신의 의논에는, 풍문이요 실지로 그런 것을 지적한 것은 아닌 듯하다는 등의 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애당초 드러난 흔적이 없었는데 풍문만으로 문득 옥리(獄吏)에게 내린 것은 경솔한 실수라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신들이 아뢴 것이 부실함을 말한 것이며, 잡아다 추고하기를 청한 것을 그르게 여긴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의가 있으니 무릅쓰고 간관의 반열에 있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속히 신들을 체직(遞職)시켜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이 풍문만으로 선뜻 옥리에 내렸다고 한 말은 지방관의 임무를 중히 여겨서 말한 것이며, 대간을 그르다고 한 것이 아니다.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중종31(1536)년 7월 27일(경진)
대사간 류세린(柳世麟)이 아뢰기를, “대열(大閱)을 마친 후에 계속 3일간을 강무하면 금년은 철이 늦다 하나 10월 보름쯤에는 일기가 반드시 추워질 것이요, 또 눈이 온다면 사람과 말이 동상걸릴 우려가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숙소에서 강무장까지 너무 멀어 아랫사람들의 폐는 따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께서 옥체가 너무 수고로우실 것입니다. 계속 3일을 강무하려면 그 폐도 적지 않을 것이니 2일 뒤에는 환궁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하였다.
중종31(1536)년 11월 15일(정묘)
송겸(宋㻩)을 이조 참의에, 류세린(柳世麟)을 홍문관 부제학에, 정만종(鄭萬鍾)을 응교에 제수하였다.
중종31(1536)년 윤12월 23일(갑술)
홍문관 부제학 류세린(柳世麟)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왕자(王者)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힘써야 할 것은 인심을 진정하고 사기를 격려하는 데에 있으므로, 요행을 엿보는 길을 막고, 이리저리 형세를 살피는 폐단을 끊어야 합니다. 이번에 이름이 역당(逆黨)에 들어 있던 자가 놓아보내는 은혜를 입은 것도 이미 법에 어그러지는데 또 직첩(職牒)을 주어 사판(仕版)에 끼게 하시니, 명령이 내려지자 사람들이 놀라서 모두가 성심(聖心)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염려합니다. 무리를 지어 악한 짓을 한 죄는 신(神)과 사람이 함께 분하게 여기고 나라의 법이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번 그 꼬투리를 열어 놓으면 반드시 엿보는 자가 많아지고 따라서 인심도 진정되지 않을 것인데, 전조(銓曹)가 반란한 무리를 예사롭게 보고 초계(抄啓)하는 속에 으레 넣은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헌부(憲府)는 직첩을 도로 주는 것을 옳지 않게 여겼으면 곧 논해야 할 것인데 의논이 시작되자 곧 멈추고 열흘 동안이나 머뭇거리며 반드시 외방(外方)에 있는 장관(長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이 언책(言責)을 맡고도 이처럼 구차하였으니, 장관이 외방에 오래 있었다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서 시일만 질질끌다가 그만두려 한 것입니다. 퇴폐하고 게으른 폐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요즈음 날씨가 추워서 경연에 오래 나가지 않으므로 뭇 신하가 품은 뜻이 있는데, 신들은 직책이 논사(論思)에 있으므로 보고 들은 바가 있으면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순일(純一)한 덕(德)으로 시종 일관 하시어 인심을 진정시키고 사기를 격려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더 없이 다행하겠습니다.”하니, 답하였다.
“요즈음 날씨가 춥다고 경연을 오래 멈춘 것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지금 차자(箚子)를 보니, 논한 것이 매우 마땅하다. 안처겸(安處謙)의 건기(件記)에 적힌 사람들에게 직첩을 도로 준 것은 서용(敍用)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직첩을 거두고 파직한 사람을 이조가 세초(歲抄)에 으레 써서 아뢰었고, 나도 세월이 오래 되고 안 된것만을 살펴서 부표(付標)하여 도로 준 것이다. 이제 김광원(金光遠) 등은 처음에는 범한 것이 역당(逆黨)에 관계되는 줄 모르고 세월이 오래 된 것만 보고서 무심코 부표하였는데, 그 뒤에 헌부가 논한 것을 듣고 나도 놀라서 곧 개정하라고 명하였다. 대관(臺官)은 이 때문에 논박 받았으니, 재직하기 어렵다.”
중종32(1537)년) 1월 23일(계묘)
홍문관 부제학 류세린(柳世麟) 등이 상소하기를, “사물의 기미는 늘 발동하기 시작하는 때에 있어서는 그 꼬투리가 매우 작고 형상에 나타나는 것이 작아서 살피는 자가 혹 보지 못하고 보는 자가 혹 알지 못하여, 모두 염려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갈래로 만연되고 불꽃처럼 치성하게 되어 바로잡을 수 없는 형세가 되는 것은 번번이 생각을 소홀히 하는 데에서 일어나는데, 슬기로운 사람이라도 손 쓸 수 없어서 국가가 드디어 쇠망하게 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이 때문에 거룩하고 맑은 임금은 기미가 있으면 작은 것을 살피고 처음을 보아 마지막을 생각하여, 한 줄기 간사한 생각도 내 마음에 두지 않고 한 가지 그른 일도 내 정사(政事)에 끼지 못하게 하며, 작은 잘못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않고 작은 일이라 하여 게을리 하지 않아서, 보면 반드시 없애고 알면 반드시 고치며, 평온 할 때에 힘쓰고 어려울 때에 보람을 거두며, 가까운 데에서 힘을 다하고 먼 데에서 성취를 얻으니, 국가를 가진 이가 본받아야 할 바입니다.
신들이 보옵건대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부지런히 다스려지기를 바라서 편히 쉴 겨를이 없으신 것이 이제까지 30년이었습니다. 사방이 편안하여 백성이 병란을 모르고 뽕·삼을 심은 천리에 닭·개가 소리를 이으니, 성왕(成王)·강왕(康王) 때의 주(周)나라나 문제(文帝)·경제(景帝) 때의 한(漢)나라를 여기에 견주어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태평한 데에 젖으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혹 게을러지고, 심상한 데에 익숙하면 작은 폐단을 돌보지 않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나라의 형세가 당당하다고는 하나, 병폐의 근원이 되는 조짐이 이미 여러 가지 일 사이에 나타나는데, 그 실마리는 두려워할 만한 꼬투리를 나타내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구습에 따라 상례로 여기고 오래도록 고치지 않아 폐단의 근원이 더욱 깊어집니다. 신들이 스스로 이를 통탄하거니와, 조목으로 들어서 아뢰겠습니다.
첫째는 궁금을 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궁금이란 임금이 사는 곳이라 존엄하기 짝이 없어 분명하게 안팎이 구별되고 드나드는 데에 정해진 사람이 있으므로 간사하고 속이는 마음을 품고 곁길이니 굽은 길로 제 술책을 이루려는 자가 스스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인데, 지금은 궁액(宮掖)이 엄하지 않아서 내고 들이는 데에 절제가 없으므로, 청반(靑盤)을 이고 원패(圓牌)를 차고서 궐문(闕門) 안에 붙어 있는 자는 이름이 문안비(問安婢)이며, 설에 나례(儺禮)를 볼 때 대궐 뜰 옆에 빽빽하게 서 있는 자들은 다 시정(市井)의 여자들입니다. 연줄을 따라 제 집에 들어가듯이 금내(禁內)에 들어가니, 몸이 이미 들어갈 수 있다면 무슨 말인들 내지 못하겠으며, 말을 이미 낼 수 있다면 무슨 술책인들 행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여우처럼 홀리고 이[蝨]처럼 붙는 간사한 자가 뒤질세라 기어 붙어 청탁하여 궁위(宮闈)에 재앙을 맺어 주고 조정에 화를 심어 주니, 그 계책이 매우 참혹하지 않습니까.
둘째는 요행(僥倖)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등용할 즈음에는 요행을 바라는 자를 억제하는 것이 급한 일입니다. 양과(兩科) 외에 따로 음거(蔭擧)를 둔 것은 나이와 덕이 높고 노련하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뽑아 써서 모자라는 자리를 채울 따름인 것인데, 지금은 선비의 버릇이 아름답지 않아서 분경(奔競)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무식하여 갑(甲)·을(乙)도 모르는 여염의 무뢰한 자가 재산을 다 기울여 뇌물의 밑천을 만들어 안팎에서 연고를 따라 스스로를 팝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사이에서 이익을 독점하는 자가 있어 여기 저기서 재물을 제 마음대로 받고서 반드시 된다고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반드시 된다고 약속하였다가, 오히려 혹 적중하면 더욱 스스로 뽐내어 제 공로가 있다 하여 거의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하늘이 무심하여 요사한 술책이 절로 행하여지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세째는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재물은 백성에게서 나와 위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데에 제도가 있고 그것을 쓰는 데에 절도가 있는 것이니 쓰는 것을 절약하지 않으면 받는 것이 많을 것이고, 많이 받게 되면 백성이 그 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상규(常規) 외에 재물을 쓰는 것이 매우 많아서, 공조에 한 조각의 금(金)이 없고 제용감(濟用監)에 한 술의 구슬이 없으므로, 온갖 물건을 찾아 써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내용(內用)의 분부가 날마다 내려지니, 해관(該官)의 계책이 궁하여 숨가쁘게 분주하며 번번이 무역(貿易)을 일삼습니다. 무역이 번거로와서 저자의 백성은 이미 고달프거니와, 한 저자를 들어 그 밖의 것을 알 수 있으니, 먼 지방의 시름하고 괴로와하는 정상을 또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민은(民隱)을 돌보는 것입니다. 사민(四民) 가운데에서 군졸의 괴로움이 가장 심하고 군졸 가운데에서도 수군(水軍)·보군(步軍)이 더욱 불쌍한데, 그들에게 영조(營造)하는 토목일을 담당시켜 산에서 호야(乎耶)하고 길에서 짐 지우므로, 굶주린 자가 거리에서 자빠지고 병든 자가 길에서 엎어지며 죽으려 하여도 죽지 못하는데다가 매가 또 뒤따라 내몰면서 독촉하여 마지 않으니, 애처로와 견딜 수 없는 정상을 이루 들어 말하기 어렵습니다. 큰 집이 이미 이루어지고 문과 담이 다 갖추어져도 돌려 보내려 하지 않고, 영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핑계하여 속으로는 댓가를 거두려고 세월을 끌어 재물을 넉넉히 받습니다. 이 때문에 곤궁한 백성이 근심하여 산으로 올라가고 들로 흩어져서 중이 되고 도둑이 되는 자가 열 가운데에서 여덟 또는 아홉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섯째는 음사(淫祀)를 없애는 것입니다. 수(壽)와 복(福)은 하늘에 달려 있으므로 부처에게 바라서 얻을 수 없으며, 재앙과 탓이 나에게 있으므로 무당을 섬겨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른 것을 지켜서 어기지 않고 내 큰 도리를 이행하는 것은 필부(匹夫)도 그러한데, 더구나 임금이겠습니까. 지금은 간사하고 속이는 말이 쇠퇴하였으나 숭상하는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송도(松都)에서 불공을 크게 일으키는 것을 사람들이 안에서 분부하신 것이라 하거니와, 나라 무당이 귀신을 섬겨 괴이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어찌 자기 뜻이겠습니까? 한 사람이 먼저 부르면 백 사람이 화답하고 가까운 자가 북치면 먼 자가 어울리어, 서울에 중들이 성행하여 거짓으로 꾀어 현혹하여 시주를 권하는 자가 많으며, 여염 사이에 귀신을 제사하는 일이 한창 벌어져 낮도 없고 밤도 없이 뜻대로 행하니, 신들은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더 심하게 좋아하여 사도(邪道)가 정도(正道)를 이겨 말세의 해독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아,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다 전하의 가법(家法)이므로 온갖 교화의 시초이고 모든 정사의 근본이니 그 일이 작더라도 관계되는 것은 크며, 그 잘못이 숨겨지더라도 끼친 해독은 오래 갑니다. 궁금이 엄하지 않은 것을 알면, 그 엄하지 않은 까닭을 찾아서, 여알의 길을 막고 간사한 자가 오는 것을 막아 요사한 말과 괴이한 말이 그 사이에서 행해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요행이 억제되지 않는 것을 알면, 그 억제되지 않는 까닭을 찾아서, 벼슬을 파는 폐단을 없애고 청탁하여 진용(進用)되는 버릇을 고쳐, 하늘을 속이고 농단하는 무리가 그 가운데에서 자취를 끊게 해야합니다. 재용이 절약되지 않는 것을 알면, 그 절약되지 않는 까닭을 찾아서, 오직 바른 공급을 헤아리고 급하지 않은 비용을 줄여, 재물의 창고가 비게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민은이 돌보아지지 않는 것을 알면, 그 돌보아지지 않는 까닭을 찾아서 궁실의 제도를 좁히고 일하는 시일을 줄여, 굶주리고 추워도 호소할 데가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토목 일에서 죽는 것을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음사가 없어지지 않는 것을 알면, 그 없어지지 않는 까닭을 찾아서, 오도(吾道)의 바른 것을 밝히고 사도(邪道)의 그른 것을 물리쳐, 요사한 중과 늙은 무당이 술책을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어찌 구습을 지켜 구차하게 지내며 그 폐단을 앉아서 보고 조처하지 않아서 뒷날에 끝이 없는 화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심하여 어려움을 생각하고 작은 일이라고 하여 삼가지 않지 말며, 마지막을 처음처럼 삼가서 오래 편안하였다고 하여 스스로 게을리 하지 말며, 소장(消長)이 변하는 것을 생각하고 치란(治亂)의 기틀을 살피시어, 털끝만한 정성스럽지 못한 것도 내 마음과 내 일에 머물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면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하니, 답하였다.
“이제 상소하여 논한 것을 보건대, 모두가 매우 마땅하여 살펴야 할 바이다. 그 가운데서 ‘나례(儺禮)를 구경하는 시정의 여자가 대궐 뜰 옆에 빽빽이 섰으니, 이러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면 무슨 말인들 들어갈 수 없겠느냐.’고 한 것은 매우 놀랍다. 여느 때 대궐 안의 사람일지라도 출입할 즈음에는 지극히 엄밀하여, 문을 나가는 자는 명출패(命出牌)를 지니고 문을 들어오는 자는 선소패(宣名牌)를 지니는데, 중궁전(中宮殿)의 내관(內官)이 이것을 관장하여 번번이 석달에 한번씩 그 출입한 사람들을 적어 낱낱이 써서 아뢴다. 이것은 조종(祖宗) 때부터의 옛 규례이며 이제까지 지켜 오므로 본디 바깥 사람이 마음대로 출입하는 일이 없는데, 시종이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다만 차비문(差備門) 밖에 문안하는 비자(婢子)가 어수선하게 오는 일은 혹 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례를 볼 때에는 제군(諸君)의 부인과 옹주(翁主)의 안 친척 및 외명부(外命婦)가 궁에 들어올 때 거느리는 비자(婢子)를 한정하여 들여보내는데, 거느리는 비자 가운데에 시정(市井)의 여자가 혹 있을는지 알 수 없으나, 나례를 볼 때에 구경하는 사람은 들어왔다가 곧 나가니, 무슨 말이 있겠는가.
송도(松都)에서 불공하는 일은, 전일 경연관은 동궁(東宮)에서 나왔다 하더니, 이 소(疏)에 논한 바는 내지(內旨)에서 나왔다 하니, 나도 놀랍다. 널리 듣고 널리 물어 보았으나, 대궐 안에서는 다들 모른다 하고 동궁에서도 모른다 하니 매우 의심스럽다. 다만 생각하건대, 정월 보름날은 덕풍군(德豊君)의 아내 윤씨(尹氏)【장경왕후(章敬王后)의 언니.】의 소상(小祥)이니, 그 집에서 소상 때에 불공하였는데 동궁과 가까운 친척이라 혹 이 때문에 동궁의 사람이라 핑계하여 말한 것으로 의심되나, 이것도 확실히 알지 못하겠다. 각사(各司)가 저자에서 무역하는 폐단을 나도 생각하였으므로, 내용(內用)에 관한 것을 늘 억제하고, 천사 때에 쓸 물건이 지나치게 되면 또한 억제하였으나, 폐단이 마구 생겨나 절약하여 쓰는 보람이 아주 없으니, 소에서 논한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 요즈음 각사의 일을 보면, 그 고자(庫子)·색리(色吏)가 훔치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므로, 나라에서 쓸 때에는 모자라거나 나빠져서 마침내 반드시 무역하게 되니, 그 폐단이 적지 않다. 한 가지 일을 들어서 말하자면 제용감(濟用監)의 주홍(朱紅)을 회계한 수는 매우 많으나, 고자와 색리가 훔치거나 바꿔서 거의 다 없어져서 가져다가 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중에서 사야 한다. 이러한 간사한 술책이 자못 많으니, 진실로 살펴 생각해야 하겠다.”
중종32(1537)년 1월 29일(기유)
류세린(柳世麟)을 사헌부 대사헌에, 성윤(成倫)을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하였다.
중종32(1537)년 2월 12일(신유)
대사헌 류세린(柳世麟), 대사간 윤풍형(尹豊亨) 등이 상차하였다. “윤만천의 일을 보고 처음에는 무지한 백성이 내지라 핑계하여 자기를 자랑하고 남에게 뽐내기만 한 것이므로 법으로 조치하여 뭇 사람들의 의혹을 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내지를 받은 것이라는 분부를 듣고는 놀랍고 염려되어 기가 꺾여서 마음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저 이교(異敎)가 일어나는 것은 임금의 은택이 끊어진 뒤를 틈타서 오도(吾道)와 더불어 뿌리가 깊이 박히고 널리 퍼지는 것인데, 그러면 임금은 그 나라를 잃고 신하는 그 집을 잃어 뒷날의 참혹한 화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현이 이를 범이나 승냥이, 독약처럼 보고 막고 물리치되 미치지 못할세라 염려하듯이 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상이 위에 계시어 밝은 공과 정일한 학문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시어 정도(正道)가 밝아지고 간사하고 더러운 것이 숨을 죽였습니다. 모든 신민이 성화(聖化)에 목욕하고 지치(至治)를 노래하여 모두가 성심(聖心)의 순일함을 받들었는데, 어찌 오늘날에 다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은 아는 것이 없고 오랜 버릇에 젖어, 혹 10년 동안 부처를 받들면 풍년을 맞을 수 있다고도 하고, 정릉(貞陵)·원각사(圓覺寺)를 회복하면 태평을 가져올 수 있다고도 합니다. 중들이 거리를 마구 다니고 백성이 절을 찾아가며 향·떡·차·과일이 부처 앞의 탁자에 벌여 놓여 있고 번당(幡幢)의 그림이 절에서 밝게 빛납니다. 재물을 다 없애어 백성에게는 한 끼의 저녁거리가 없는데 놀고 먹는 중에게는 앉아서 누리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 예전에 비하여 오늘날에는 더욱더 심합니다. 더구나 내지가 한 번 내려졌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더욱 의혹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그치지 않는다면 어찌 한때의 간쟁하는 자만이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사책(史冊)에 적혀 천년토록 씻지 못할 부끄러움을 남겨서, 즉위하신 30년 동안에 날로 진보한 공이 하루 아침에 떨어진 것입니다. 성념(聖念)이 여기에 미치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제부터라도 지난날의 허물을 살피고 장래의 걱정거리를 끊으며,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 덕을 밝히고 교화를 도타이 하여, 백성들의 의혹을 깨우치고 선비들의 마음을 위안하소서. 그러면 국가와 오도가 다행하겠습니다.”
중종32(1537)년 2월 21일(경오)
허흡(許洽)을 의정부 우참찬에, 김인손(金麟孫)을 형조 판서에, 류세린(柳世麟)을 형조 참판에, 권예(權輗)를 사헌부 대사헌에, 윤풍형(尹豊亨)을 예조 참의에, 상진(尙震)을 사간원 대사간에, 임붕(林鵬)을 집의에, 정만종(鄭萬鍾)을 홍문관 전한에, 신거관(愼居寬)·박세옹(朴世蓊)을 장령에, 신영(申瑛)을 응교에, 이명(李蓂)·정희렴(鄭希廉)을 지평에, 이몽필(李夢弼)을 헌납에, 조사수(趙士秀)를 교리에, 이원손(李元孫)·허경(許坰)을 정언에 제수하였다.
중종32(1537)년 7월 12일(기축)
조윤손을 의정부 좌참찬에, 권예를 이조 판서에, 오준(吳準)을 형조 판서에, 심언광을 공조 판서에, 류세린(柳世麟)을 이조 참판에, 정옥형(丁玉亨)을 예조 참판에, 성윤(成倫)을 형조 참판에, 윤침(尹沈)을 사간원 정언에 제수하였다.
중종32(1537)년 7월 12일(기축)
以曺潤孫爲議政府左參贊, 權輗爲吏曹判書, 吳準爲刑曹判書, 沈彦光爲工曹判書, 柳世麟爲吏曹參判, 丁玉亨爲禮曹參判, 成綸爲刑曹參判, 尹沈爲司諫院正言。
조윤손을 의정부 좌참찬에, 권예를 이조 판서에, 오준(吳準)을 형조 판서에, 심언광을 공조 판서에, 류세린(柳世麟)을 이조 참판에, 정옥형(丁玉亨)을 예조 참판에, 성윤(成倫)을 형조 참판에, 윤침(尹沈)을 사간원 정언에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3책 85권 35장 A면
중종32(1537)년 8월 8일(갑인)
동지사(冬至使) 류세린(柳世麟)이 북경(北京)에 갔다.
중종33(1538)년 1월 2일(정축)
성세창(成世昌)을 공조 판서에, 이귀령(李龜齡)을 호조 참판에, 류세린(柳世麟)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이몽필(李夢弼)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제수하였다.
중종33(1538)년 2월 6일(경술)
임백령(林百齡)을 공조 참판에, 류세린(柳世麟)을 한성부 좌윤에, 조인규(趙仁奎)를 우윤에, 권벌(權橃)을 경상도 관찰사에, 남효의(南孝義)를 함경도 관찰사에, 홍춘경(洪春卿)을 세자 시강원 보덕에, 류진동(柳辰仝)을 사간원 정언에 제수하였다.
중종33(1538)년 2월 20일(갑자)
대사헌 양연(梁淵)과 대사간 황헌(黃憲)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삼흉을 제거할 당시 중한 법을 적용하여 조처할 것을 논계하였으나 상께서 일찍이 경상(卿相)의 지위에 있었다 하여 관대히 용서하고 사형만 내렸으므로 신들은 성상의 인후(仁厚)한 덕에 감격하여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하고 명목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또, 그 심복과 손발이 되어 악을 돕던 무리 중 심한 자를 잡아들여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하였으나 역시 경중을 잃었습니다. 그 밖에 앞을 다퉈 빌붙은 무리를 불문에 부친 것은 그 당시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급급해서 소요를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덮어둔 것은 이들 모두가 성상의 덕화 속에 자신도 모르게 융화되어 개과 천선하는 길을 찾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이는 모두 함께 유신(維新)에 참여하자는 뜻입니다.
만일 간흉의 심복이 되어 악한 짓을 도와 남을 해침에 있어 못할 짓이 없는 등 행동이 개돼지 같은 자와, 앞장 서서 간흉을 유인하여 음험하게 발신(發身)의 소지를 삼고 활개치고 위세부려 조정의 화(禍)를 만든 자는 왕법(王法)에 용서할 수 없고 공론에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당시 원흉(元凶)과 서로 맞지 않는 의논이 있었기에 신들은 망령되이, 처음에는 악을 도왔으나 종말에는 돌이켜 서로 다투었으니 또한 용서할 만하다 생각하고 구차하게 용서하여 약간의 견책만 가했을 뿐 그들이 지은 죄대로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신들은 지식과 사려가 천박하여 일을 처리함에 마땅함을 잃었고 조정에서 악을 징계하는 법으로 하여금 공정성을 잃게 하여 중론(衆論)이 불쾌해 하고 공론이 분발하여 갈수록 더욱 격해집니다. 이것은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소치이니 진실로 죄책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의 분부가 간곡하신데 너무 번거롭게 무리하게 아뢰는 것도 황공하기에 감히 다시 사직하지 못했습니다.【오늘 아침에 다시 사직을 청했다.】
심언광·심언경·권예는 대신이 이미 아뢰었거니와, 박홍린(朴洪鱗)은 악을 도운 죄가 추종한 자의 유가 아닌데 관작만 삭탈하고 내쫓아서 고향에서 편히 지내니 악을 징계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
소봉(蘇逢)은 악을 돕고 방종하여 인물을 많이 해쳤으니 그 죄 역시 중합니다. 파직만 시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고신(告身)을 추탈하소서. 윤풍형(尹豊亨)은 지나치게 빌붙은 자이니 논사(論思)하는 자리는 합당치 않으며, 류세린(柳世麟) 역시 극도로 빌붙은 자입니다. 한성부는 육조와 다를 것이 없으니 체직시키소서.
오준(吳準)과 김광철(金光轍)은 거듭 드러나게 논박받았으니 그 녹(祿)을 잃지 않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준직(準職)은 온당치 못하니 개정하소서. 이들은 모두 죄과가 있고 공론도 매우 엄중하니 결코 용서할 수 없기에 감히 아룁니다. 속히 따르시어 물정을 위로하소서.”하니, 답하였다. “근자에 내 뜻과 대신·대간의 뜻은 모두 인심을 진정시키려고 한 것이건만 이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울분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
중종33(1538)년 2월 22일(병인)
동지사(冬至使) 류세린(柳世麟)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니, 세린이 아뢰었다. “황화집(皇華集)은 신이 통사(通事)를 시켜 사사로이 공용경(龔用卿)과 오희맹(吳希孟)에게 보내주고자 하였으나,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표계(標契)가 있어야 한다 하므로 할 수 없이 주사(主司)에게 고하였습니다. 주사가 예부(禮部)에 알리니, 예부는 ‘외국인은 서책을 가지고 사대부의 집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없다.’ 하면서 신들에게 ‘주문(奏聞)하고서 전해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되어도 주문하지 않기에 신들이 상마연(上馬宴) 때에 글을 올려 다시 청하니 서장을 올려 청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서장을 올리니, 예부가 서장의 내용이 격식에 맞지 않는다 하여 고쳐 쓰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입주(入奏)하였는데, 우리 나라를 포장(褒奬)하면서 ‘조정의 사명(使命)을 존경하니, 중국을 사모하는 뜻이 지극하다. 서책은 금백(金帛)과는 같지 않으니 전하여 주게 하자.’고 아뢰니, 황제가 그 주달을 허가하였고 예부가 사람을 시켜 전달해 왔습니다.
11월 18일에 공용경과 오희맹 등이 회동관(會同館)에 이르러 신들을 부르기에 가서 만나본 다음에야 비로소 2인이 모두 그 책을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척독(尺牘) 2통을 신에게 주었으니, 곧 전하께 드리는 편지였습니다.
또 들으니, 안남국(安南國)은 그 시조(始祖) 진씨(陳氏)가 영락(永樂) 연간에 그 신하 여결(黎結)에게 찬탈당했는데,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진씨의 후손을 찾아내어 세워주려 하였으나, 모두 여결에게 해를 당하여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몰락하여 군현(郡縣)이 되었다 합니다. 그후 여씨(黎氏)의 후예가 자립하여 임금이 되어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다시 정토(征討)하지 않고 그대로 세워주었는데, 지금은 막등용(莫登庸)에게 축출당하여 정덕(正德) 11년부터 조공이 끊겼다 합니다. 병신년에 그 나라 사신이 여씨의 명을 받들고 내조(來朝)하였는데, 조정(朝廷)이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은 연유를 물으니 ‘막등용이 조공하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내조할 수가 없었고, 지금은 다행히 바다에 떠다니는 상선(商船)을 타고서 오다가 중도에 풍랑에 표류되어 점성국(占城國)에 이른 지 여러해 만에 중국에 도착했다 하였습니다. 조정은 사신을 가두고 문죄(問罪)하는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거역할지 순응할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사신을 안남국 사신과 함께 그 나라에 보내어 거역할지 순응할지를 관찰한 후에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아직 보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