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역사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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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7.png 9세 춘호공 류영경(柳永慶)의 역사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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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16/06/01(신해)

사간원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헌납 류영경(柳永慶), 정언 정숙남(鄭淑男) 등이 아뢰기를,㰡병조 판서 이이는 나라의 중임을 맡았으니, 마음을 대해 직무를 수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저번에 말[馬]을 바치고 부방을 면제시킨 것은 군정(軍政)에 관계되는 일인데도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였으며【조종조에 이런 일로 주벌을 받는 병조 판서가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특별히 이를 예로 든 것이다.】 그것이 잘못임을 깨달은 뒤에도 대궐에 나와 대죄하지 않고 범연하게 황공하다는 한 마디 말로써 계사(啓辭)에 삽입시켰을 뿐입니다. 그리고 변방의 변란 보고가 들어와 이에 대한 책응이 시급한 판에 병조 판서를 명소(命召)하면 병을 핑계대다가 내조(內曹)에만 들어오고 끝내 명을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범한 행위는 분명히 마음대로 일을 시행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가 있습니다.

대간은 직무상 바른 말을 해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일에 따라 탄핵을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는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구심을 가지고 깊은 분노심을 품고서 여러 날 상소를 올렸는데 말씨가 불평스러웠습니다. 성상께서 온화한 말씀으로 위로해 주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이를 감격스럽게 여겨서 성상의 뜻을 받들려고 하지는 않고, 반드시 대간이 논한 것을 허위와 날조로 규정하려 하였으며, 심지어는 대신(大臣)들이 대간을 배척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그르다고 하는가 하면, 좌우와 여러 대부에게 자문하여 경중(輕重)을 헤아리게 하라고 하면서 마치 승부(勝負)를 결판내고자 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말한 자를 배척하여 그 승부를 결판내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보더라도 진실로 듣지 못했던 일이니, 파직을 명하소서.㰡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원전】 25 집 517 면

 

선조16/07/18(정유)

사간 성낙(成洛)과 정언 황정식(黃廷式)이 아뢰기를, "지난날 이이가 주병(主兵)의 관원으로서 망령되이 한 일이 많았으므로 대간이 그 일을 들어 규정(糾正)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일반적인 탄핵이었습니다. -중략- 박순(朴淳)도 그가 면대했을 때의 말은 비록 화평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나머지 도리어 언자들을 재억(裁抑)하려는 뜻에서 그들 이름을 들어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니 역시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한 일은 아닙니다. 또 송응개(宋應漑)가 근원을 추궁하자는 논의를 제시했을 때 류영경(柳永慶) 등이 말렸는데, 이는 역시 모든 일을 신중히 다루어 허물이 있는 자리에서 허물이 없게 되기를 바라는 뜻이었습니다. 대간(臺諫)이 잘못한 것은 별로 없으니, 대사헌(大司憲) 이기(李?), 집의(執義) 홍여순(洪汝諄), 장령(掌令) 이징(李徵), 윤승길(尹承吉), 지평(持平) 이경률(李景썑),조인후(趙仁後), 헌납(獻納) 류영경(柳永慶), 정언(正言) 이주(李澍) 등을 모두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원전】 21 집 396 면

 

선조16/08/01(경술)

특지(特旨)로 홍여순(洪汝諄)을 창평 현령(昌平縣令)으로, 홍진(洪進)을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김첨(金瞻)을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김수(金첱)를 이조 정랑으로, 정창연(鄭昌衍)․오억령(吳億齡)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삼사가 이이를 공격할 적에 허봉이 논박을 주도하여 삼사의 상소와 차자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홍여순(洪汝諄)과 류영경(柳永慶)이 매와 사냥개 역할을 하면서 논의가 매우 준엄하였으므로 당시에 헌부에는 홍여순, 간원에는 류영경이라고 추켜세워 주었다. 이기(李?)는 성품이 괴퍅하고 무식한 자로 평소 선비들을 미워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역시 허봉 등의 매와 사냥개 역할을 하며 홍여순과 류영경에 다름없이 앞장서서 담당하였다.】 【원전】 25 집 531 면

 

선조21/07/05(병진)

한효순(韓孝純), 류영경(柳永慶), 김권(金權), 정숙남(鄭淑男), 우성전(禹性傳), 조인득(趙仁得), 노직(盧稷) 등을 패초(牌招)하여 어사(御史)로 치장시켜 보냈다. 【원전】 21 집 453 면

 

선조22/04/04(경진)

의정부(議政府) 홍문록(弘文錄)에, 한준겸(韓俊謙), 류영경(柳永慶), 윤승훈(尹承勳), 조정(趙挺), 임몽정(任蒙正), 정경세(鄭經世), 신식(申湜), 정협(鄭協), 윤담무(尹潭茂)를 뽑았다. 【원전】 21 집 457 면

 

선조25/05/12(신미)

양사가【집의(執義) 권협(權?), 사간(司諫) 류영경(柳永慶), 지평 신경진(辛慶晋), 이경기(李慶셢), 장령 정희번(鄭姬藩), 이유중(李有中), 헌납 이정신(李廷臣), 정언 윤방(尹昉)이다.】 아뢰기를, "급제(及第) 이산해는 본시 간사한 사람으로서 일평생의 처신이 전하께 아첨하고 환심을 사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며 정승이 된 뒤에는 몸을 보존할 생각과 지위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더욱 심해져서 천한 사람들과 결탁하여 빌붙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인심은 날마다 떠나게 되고 국세(國勢)는 날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왜변이 일어난 뒤엔 나라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한 한 가지 계책이나 한 가지 지모(智謀)도 낸 적이 없으며 입대(入對)하는 날 성상께서 파천할 뜻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이 사람이 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군부(君父)로 하여금 나라를 잃고 떠돌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종묘 사직이 적의 소굴로 되고 2백 년 동안 편히 살아온 생령(生靈)들을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하였으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재앙을 부른 죄가 극도에 달한 것입니다. 삭직(削職)만으로는 부족하니 율(律)에 의거해서 죄를 줌으로써 종묘 사직에 사죄하고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이산해에 대한 논계는 지나치다. 이미 삭직했으니 결단코 죄를 더 줄 수는 없다. 또 산해만이 그 죄를 받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21집 490면

 

선조25/06/16(갑진)

박숭원(朴崇元)을 승정원 도승지로, 지중추부사 윤우신(尹又新)을 급고사(急告使)로, 사간원 사간 류영경(柳永慶)을 초유 어사(招諭御使)로 삼았다.【원전】 21 집 500 면

 

선조25/07/10(정묘)

좌의정 윤두수가 아뢰었다. "예로부터 쇠미함을 일으키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시대에는, 반드시 형벌과 포상으로 권징(勸懲)하는 일이 있은 뒤라야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진 뒤로부터 평소 국록을 먹던 사람들이 공공연히 뒤떨어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명을 받들고 외방에 가 있으면서 그일을 끝마치지도 않고 멋대로 다른 곳으로 달려가서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니, 이에는 반드시 대간(臺諫)의 공론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류영경(柳永慶)의 서장을 보니, 토병을 징발하여 보낸 숫자가 8백 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실로 근래 봉사신(奉使臣)으로서는 없었던 일이기에 조정의 의논이 훌륭히 여겼습니다. 참의 홍세공(洪世恭)은 조도(調度)하라는 명을 받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껏 조처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운산(雲山)으로 달려갔으며, 또 병을 핑계댑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형상(刑賞)으로 권징하는 일이 없을 수 없기에 감히 아룁니다."【원전】 21 집 515 면

 

선조25/07/10(정묘)

류영경을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이유징을 통훈대부 사간원 사간에, 기경복(奇景福)을 순천군수(順川郡守)에, 윤탁연(尹卓然)을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원전】 21 집 515 면

 

선조25/07/15(임신)

이조를 통정대부 행 김포 현령(行金浦縣令)에, 김명원(金命元)을 의정부 좌참찬에, 류영경(柳永慶)을 승정원 승지에 제수하였다.【원전】 21 집 516 면

 

선조25/07/17(갑술)

류근(柳根)을 승정원 도승지에, 홍진(洪進)을 승정원 좌승지에, 류희림(柳希霖)을 우승지에, 심대(沈岱)를 좌부승지에, 오억령(吳億齡)을 우부승지에, 류영경을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해도의 군량을 조처할 일이 제일 급한데, 당상관 중에서 파견할 만한 자가 아주 적습니다. 심희수(沈喜壽)는 중국 장수를 접대하는 소임을 맡았고, 이곽(李곽)은 지금 병이 들었습니다. 동부승지 류영경이 위임하는 명을 감당할 만하니 차견(差遣)함이 합당합니다. 군관 4명도 대동하고 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윤허하고 순찰사(巡察使)라 칭하게 하였다.【원전】 21 집 516 면

 

선조25/07/18(을해)

빈청(賓廳)이 아뢰기를, "흉적(凶賊)이 교전하기 전에 먼저 달아날 징후가 있습니다. 만일 이 흉적을 놓치게 되면 사람과 귀신의 분노를 씻지 못할 뿐 아니라 후일의 환난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지 류영경이 황해도의 군량을 조처하는 일로 명을 받고 나갔습니다. 이제 또 통정(通政) 중에서 합당한 사람을 순찰사로 차출하여 산군(山郡)을 경유, 경기의 고을에 도달하여 군졸을 불러 모으고 군량을 끌어모으고 선척을 정리했다가 중국 군사의 경성(京城) 작전에 쓰이게 하면 훌륭한 계책이 될 듯합니다.-중략- 정인홍(鄭仁弘)은 시골에 묻혀있다가 어느날 변란을 듣고는 의병을 일으켜 분발하여 크게 사기를 격앙시켰습니다. 당연히 표창해야 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경기 순찰사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정인홍 등은 별로 드러난 공이 없으니 다시 후일을 기다렸다 하여도 무방하다."하였다. 【원전】 21 집 517 면

 

선조25/07/24(신사)

박응인(朴應寅)을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박동언(朴東彦)을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에, 정기원(鄭期遠)을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고언백(高彦伯)을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류영경(柳永慶)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신점(申點)을 승정원 승지로 제수하였다. 【원전】 21 집 520 면

 

선조25/08/07(갑오)

좌의정 윤두수를 인견하였다. 공조 판서 한응인(韓應寅), 병조 판서 이항복,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 형조 참판 신잡(申캈), 도승지 류근(柳根), 가주서(假注書) 강욱(康昱), 봉교(奉敎) 기자헌(奇自獻)이 입시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류영경(柳永慶)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적세가 쇠하여진다고 합니다.㰡하였다. 상이 이르기를,㰡떠도는 소문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하니, 류근이 아뢰기를, "경상도 백성들은 해를 당한 것이 많지 않는데도 농사를 짓지 못하여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하였다. 【원전】 21 집 527 면

 

선수25/11/01(정사)

대간이 황해 감사 류영경(柳永慶)이 적에 대한 토벌을 지연시킨 죄를 논하고 체임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그대로 유임하게 하였다. 류영경은 이정암(李廷암)과 뜻이 맞지 않아 저지하고 동요시킨 양상이 있었으므로 대론(臺論)이 탄핵하여 체임하도록 하였다. 이에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근래에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관군을 까닭없이 취합하므로 류영경이 그들의 소행에 분격하여 문자(文字)로 표현했으니, 그가 훼방한 일이 있었다면 필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우선 전직(前職)을 그대로 두고 뒷날 공을 세우도록 하소서."하니, 따랐다. 【원전】 25 집 632 면

 

선조25/11/18(갑술)

사헌부가 아뢰기를, "황해도는 군읍(郡邑)이 적고 드문 데다 난리를 겪은 뒤에 백성들이 경황이 없는데 명을 받고 벼슬에 부임한 사람이 4~5명에 이르러 공억(供億)이 적지 않고 호령이 여러 갈래이니 매우 염려됩니다. 감사(監司) 류영경(柳永慶)은 조치가 온당하지 못하여 인심을 크게 잃고 있는 데다 또 순찰사 이정암(李廷촑)과 함께 해변(海邊)에 있으면서 양사(兩使)가 함께 거처하니 열읍(列邑)이 누구를 따라야 좋을지 모르고 있습니다. 류경영을 체차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홍은 이미 차하(差下)하였으니 지금 개정할 수 없고, 황해 감사는 그처럼 자주 바꾸었으니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21 집 571 면

 

선조26/01/01(병진)

밤중에 행장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이 언 강을 건너 탈출했는데, 중화(中和)와 황주(黃州)에 주둔해 있던 적은 먼저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이보다 며칠 전에 류성룡이 황해도 방어사(黃海道防禦使) 이시언(李時言)과 김경로(金敬老)에게 비밀히 통보하여 적의 퇴로를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이때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 류영경(柳永慶)이 해주(海州)에서 군사로 자신을 호위시키면서 또 김경로를 부르니, 김경로는 적과 더불어 교전하기를 꺼려 하여 바로 류영경에게 갔다. 행장 등이 밤새도록 도망쳐 군사가 피곤하여 부오(部伍)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시언은 군사가 얼마 안 되어 감히 접전하지는 못하고 단지 굶주리고 병든 낙오병 60급만을 베었으며, 황주 판관(黃州判官) 정엽(鄭燁)은 90여 급을 베었다. -中略- 적의 대장 중에는 행장과 청정(淸正)이 인물이었는데, 이때 청정은 북쪽에 있었다. 따라서 수가(秀嘉)는 직위가 높기는 하였지만 나이가 어려 제대로 일을 주관하지 못하였으니, 만일 행장과 조신(調信)을 제거하고 진격하여 경성에 들이닥쳤다면 수가의 형세가 고단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독이 이미 기회를 잃은 데다가 김경로마저 절도(節度)를 어기고 말았으므로 류성룡이 매양 이것으로 류영경을 허물하였다.【원전】 25 집 635 면

 

선조26/01/19(갑술)

황해 감사 류영경(柳永慶)이 치계하였다."황주 목사 김진수(金進壽)의 치보(馳報)에 '9일에 도망하는 적을 본주(本州)의 군사가 세 차례나 접전하여 벤 것이 1백여 급(級)이다.'고 하였습니다." 【원전】 21 집 610 면

 

선조26/01/20(을해)

사간원이 아뢰기를, "황해 감사 류영경(柳永慶)은 날랜 군사 1천여 명을 데리고 자신을 호위하는 것으로 상책을 삼습니다. 그는 수안(遂安)에 있으면서, 적이 노리치(老里峙)를 넘었다는 것을 듣고도 동궁이 옮기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지름길로 안악(安岳)으로 달아났으며 적의 세력이 접근하는 것을 꺼려 또 해주(海州)로 들어갔으며, 황주와 봉산의 적이 이미 도망하였는데도 추격하지 않았고, 심지어 꼴과 식량을 전혀 조처하여 준비하지 않아 대병(大兵)으로 하여금 전진할 수 없게 하였으니 파직하소서. 그리고 황해 조도 어사(黃海調度御史) 정광적(鄭光績)은 임무를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오히려 조치한 성과가 없어 명나라 군사로 하여금 전진할 수 없게 하였으니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꼴과 식량에 대한 일은 내가 늘 대신을 볼 때마다 끊임없이 말하였다. 밤낮으로 근심한 것이 오직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었는데 대신들은 '자연히 될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 이와 같은 데 이르렀으니 어찌하겠는가. 이 사람들을 이런 시기에 파직시키는 것이 적당한지 않은지를 비변사를 물어서 아뢰라."하였다. 【원전】 21 집 610 면

 

선조26/01/21(병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해 감사 류영경과 조도 어사 정광적을 파직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명나라 군사가 바야흐로 본도에 있으니 모든 조치에 있어서는 하루가 급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체대(遞代)시키는 즈음에 바로 명나라 군사가 지나가는 날과 서로 마주칠 것이니 적합한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우선 뒷날의 성과를 책임지워 그 죄를 천천히 의논하소서."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원전】 21 집 611 면

 

선조26/01/22(정축)

황해 감사 류영경이 치계하였다. "1월 11일에 명나라 군사 선봉이 이미 황주(黃州)를 지났는데 왜적이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경성(京城)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좌방어사(左防禦使) 이시언(李時言)이 9일에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여 1백 8명을 베어 죽이고 1명을 사로잡아 명나라 장수에게 수송하였습니다."【원전】 21 집 612 면

 

선조26/01/22(정축)

황해도 감사 류영경이 치계하였다. "일로의 적은 모조리 도망하였고 강백(江白)의 적은 그대로 소굴에 웅거하면서 끝까지 항거할 듯하며, 일로의 도망한 적들도 금교(金郊)에 진을 치고 모여 있습니다." 【원전】 21 집 612 면

 

선조26/01/23(무인)

사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류영경, 정광적이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죄를 가지고 파면하도록 주청한 것은 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비변사가 꼴과 식량을 운반하는 데 급하여 우선 뒷날의 성과를 책임지우는 것으로 회계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고식적인 의논이므로 아마도 성과를 책임지울 기약이 없을 듯합니다. 함께 파직시켜 뒷사람들을 징계하소서."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21 집 612 면

 

선조26/02/04(기축)

이항복이 아뢰기를, “들으니, 황해도에서 주선하여 준비한 군량이 무려 6만 석이나 된다고 하는데 천병이 전진할 때에 곧바로 개성부에 도착시킨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도 지공(支供)에 소용된 것은 많아야 1만 석에 불과했으니 그 나머지 5만 석은 운반해다가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황해도의 양곡은 바다로 수송해온 뒤에야 쓸 수 있다. 황해도에 양곡이 이렇게 많은 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양곡이 이렇게 많은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수송하지 않았는가?"하니, 홍성민(洪聖民)이 아뢰기를, "이것은 바로 감사 류영경(柳永慶)의 장계입니다. 그 양곡을 이미 직로(直路)로 운반해 오도록 하였습니다."하였다. 【원전】 21 집 622 면

 

선조26/05/28(신사)

대신들이 아뢰기를, "어제 윤근수가 아뢴 바, 1만 명의 병사가 한 달 동안 먹는 군량은, 5천 석을 넘지 않으니,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 등과 본도(本道) 및 전라 감사로 하여금 대구(大丘) 등지에 비축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서(下書)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中略- 안악(安岳)은 직로(直路)와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형편상 매우 편리하나 지탱할 만한 양식이 없습니다. 양식만 조처된다면 제일 편리하고 마땅할 것입니다. 이 뜻을 류영경(柳永慶)에게 자세히 하문하시고 또 경략의 회자(回咨)를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아뢴 대로 하라. 이 제독(李提督)이 있는 곳으로 은냥(銀兩)을 다 보냈는가? 여러 장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는가? 은냥을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그 곡절을 자세히 이르라."하였다. 【원전】 21 집 715 면

 

선조26/06/06(기축)

류영경(柳永慶)을 행 호조 참의로 삼았다. 【원전】 22 집 5 면

 

선조26/06/26(기유)

예조가 아뢰었다. "황해도 관찰사 류영경(柳永慶)의 서장을 보니, 제독 일행이 이달 24일에 경성을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황해도 관찰사 및 수령들은 바야흐로 대가를 맞이하기 위하여 주정처(晝停處)에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직로(直路)의 일이 과연 허술한 것이니 감사로 하여금 즉시 도 경계로 달려가서 수령들을 검칙(檢飭)하여 중국 장수를 환영 접대하라는 뜻으로 하유하소서."【원전】 22 집 18 면

 

선조26/07/07(기미)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해도에 모속(募粟)을 주관하는 사람이 15인이나 되는데도, 지금 본도 감사(監司) 류영경(柳永慶)의 장계를 보건대, 모집하여 받아들이는 곡식이 유명 무실하여 소용되는 수량의 겨우 십분의 일 정도라고 하니, 호조로 하여금 일일이 적발하여 직명(職名)을 삭제하고 그 죄를 징벌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22 집 29 면

 

선조26/08/13(갑오)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지극히 경악스럽습니다. 이 제독의 마음으로는 자기가 돌아가는 때이기 때문에 대우가 이렇게 태만하다고 여길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관(本官)은 어디로 갔는가?"하였다. 운익이 아뢰기를, "류영경(柳永慶)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듣지 못했습니다."하고, 희수가 아뢰기를, "아마도 배장(裴章)의 집에 가서 있을 것입니다.”하였다.【원전】 22 집 72 면

 

선조26/08/18(기해)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황해 감사 류영경(柳永慶)의 서장(書狀)을 보건대, 서(徐), 사(謝) 두 명사(明使)가 스스로 말하기를 㰡두 왕자와 안주(安州)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였답니다. 서, 사 두 명사는 왕자를 위험에서 탈출(脫出)시켜 준 공이 있으니, 약속한 대로 서로 만나게 해야 될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 "왕자가 이미 서울에서 그들과 서로 이별하였으니, 먼길을 강행(强行)하여 안주까지 뒤쫓아가서 만날 필요가 없다. 경략은 이미 안주를 떠나 의주(義州)로 향하고 왕자도 먼길을 와서 피곤할 것이니, 나의 생각에는 꼭 가서 볼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하였다. 【원전】 22 집 77 면

 

선조26/09/06(정사)

황해도 순찰사 류영경(柳永慶)이【이달 4일임.】 치계하기를,【류영경은 이산해의 응견(鷹犬) 노릇을 하던 자로 청류(淸流)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각참(各站)의 군량이 결핍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고 새 곡식이 점점 익어가고 있으므로 중국군을 접대하고 주린 백성을 구제함에 있어 큰 폐단이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대장(大將)이 서쪽으로 가고부터는 오가는 중국 군사가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이 행패를 부리며 작란하는 작태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말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도 쇄마(刷馬)를 요구하면서 여러 가지로 겁을 줍니다. 수령 이하 사람들은 목을 매어 끌고 다니기까지 하는데 주포(紬布)를 바치지 않으면 그들의 노여움을 풀 수가 없으며 군량도 외람되이 받아다가 매매의 비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그들의 뜻을 거역하면 몽둥이와 돌멩이로 무수히 난타당하는데, 요즈음 맞아 죽은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 밖에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형상은 하도 비참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하니,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원전】 22 집 95 면

 

선조26/09/12(계해)

간원이 황정욱과 황혁 등의 일에 대해 죄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거가(車駕)가 머물렀던 본읍(本邑)의 수령을 으레 순서를 뛰어 넘어 승진시킨 데 대해서는 이미 옳지 않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옮겨와서 머무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본도의 감사․병사와 본주(本州)의 목사(牧使), 판관(判官)에게 일시에 아울러 중가(重加)를 내린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감사 류영경(柳永慶)과 목사 박경신(朴慶新)은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병사 조인득(趙仁得)은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 방어(防禦)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견고한 성(城)을 지키지도 않고 적봉이 이웃 고을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도망하여 해도(海島)에 숨어 버려 온 도(道)의 사람으로 하여금 소문만 듣고 흩어지게 하였고 여러 고을이 허물어지게 하였습니다. 판관 목전(睦詮)은 성을 버리고 도망간 죄가 조인득과 다를 것이 없는데 아직도 관작(官爵)을 보전하고 있고 이번에 또 중가(重加)를 제수하셨으므로 물정(物情)이 더욱 통분하게 여깁니다. 아울러 개정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황정욱 등의 일은 이미 하유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거가가 본도에 머물게 되면 방백, 곤수, 수령에게 가자(加資)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개정할 수 없다. 성(城)을 버린 사람이 어찌 그 사람뿐이겠는가. 진작에 그의 죄를 들어 파직시키기를 청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이번에 가자를 인하여 거론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으니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22 집 98 면

 

선조26/09/13(갑자)

사헌부가 아뢰기를, "거가가 머물렀던 본읍(本邑)의 수신(守臣)이 분주히 직무를 수행한 것은 신자(臣子)로서의 당연한 직분이므로 조금도 포상해야 할 공이 없습니다. 그런데 해주 목사(海州牧使) 박경신(朴慶新)과 판관(判官) 목전(睦詮)은 갑자기 특별한 은전(恩典)을 받아 중가(重加)를 제수받기까지 하였으며, 더구나 관찰사 류영경(柳永慶)과 절도사 조인득(趙仁得)은 더욱 이렇다 할 공로가 없는데도 이러한 제수의 명이 있게 되니 물정(物情)이 모두 온편하지 못하게 여깁니다.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中略- 전 목사(牧使) 민충남(閔忠男)은 부임한 처음부터 전연 정사는 돌보지 않았고 사변(事變)이 발생한 뒤에는 관청에 쌓아둔 곡식을 공공연히 훔쳐다가 물화(物貨)를 사기도 하고 땅과 집을 사기도 하여 본 고을의 창고를 텅 비게 함으로써 한 도(道)의 고을을 버려지게 하였으므로, 물정이 놀라고 통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관찰사 이하는 참작하여 논상(論賞)한 것이니 이제 와서 개정할 수 없다. 황수(黃璹)는 이미 논상하였으니 또한 개정할 수 없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이러한 논계(論啓)는 따르기는 하겠으나 수령을 자주 바꾸면 백성의 해가 심하다고 한다. 앞으로는 각별히 자세하게 살펴서 하라."하였다. 【원전】 22 집 98 면

 

선조26/09/13(갑자)

간원이 류영경(柳永慶), 조인득(趙仁得), 박경신(朴慶新) 등에게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하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원전】 22 집 98 면

 

선조26/09/14(을축)

간원이 아뢰기를, "군부가 머물러 있던 곳에서 신하가 약간의 애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직분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더구나 이렇다 할 공로는 없고 다스려야 할 죄만 있는 자이겠습니까. 은전(恩典)이 너무 지나치므로 물의가 떠들썩합니다. 감사 류영경(柳永慶)과 목사 박경신(朴慶新)은 아울러 개정하게 하소서. -中略- 깊이 다시 생각하시어 율(律)에 따라 죄를 정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헌부의 답과 같다. 황정욱 등의 일은 앞서 다 유시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22 집 98 면

 

선조26/09/18(기사)

황해 감사 류영경(柳永慶)과 병사 조인득(趙仁得)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해야 왜적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병력(兵力)은 단약한데 군량마저 떨어져서 지금은 식량을 잇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량은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가가 생기면 반드시 농사를 권장해야 할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밀과 보리는 소신(小臣)도 이미 농사짓도록 권장시켰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토굴(土窟)은 으레 산 위에 자리잡고 있어 반드시 어떤 형세(形勢)를 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왜적은 아이들 장난 같을 뿐이다. 경상도에 있는 왜적을 보면 매우 험한 데에 자리잡고 있다."하니, 인득이 아뢰기를, "소신이 뽑은 정병은 1만 2천 명 정도였으나 대다수가 도망하였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이번에 새로 급제(及第)시킨 것은 모두가 헛일이니 피차 모두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하고, 인득이 아뢰기를,"사졸(士卒)이 그러할 경우에는 반드시 장수의 얼굴을 알게 해야 바야흐로 쓸 수가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 고을에는 공물(貢物)에 대한 역사(役事)는 없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국가에서는 감해 주라는 명을 내렸으나 겨를이 없어 거행하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고을 백성 중에 왜적에게 잡혀 죽은 자는 몇 사람이나 되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이 고을 사람들은 매우 못되어 왜적을 보면 맞이하여 항복하였으므로 죽음을 당한 자가 적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해주(海州)에는 절의(節義)에 죽은 사람이 없단 말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해주에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가렴 주구였다.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포상(褒賞)하도록 하라."하고, 이어 술을 하사하였다. 【원전】 22 집 101 면

 

선조27/01/06(을유)

사간원이 아뢰기를, "황해도 관찰사 류영경(柳永慶)은 이렇게 여러 고을이 탕패하고 국사가 간난한 때를 당하여 주전(廚傳)이 너무 사치스럽고 또 가속(家屬)을 도내(道內)에 데리고 있으므로 폐단을 끼치는 일이 많습니다. 자신이 안찰(按察)하는 직임에 있으면서 먼저 스스로 법을 범하고 있으니 어떻게 일도(一道)를 규검할 수 있겠습니까. 추고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원전】 22 집 202 면

 

선조27/01/30(기유)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무는 오직 군사를 훈련시켜 왜적을 막는 이 한 가지 일뿐이니 이 이외의 모든 일은 일체 버려두고 군사의 훈련에만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中略- 지금 둔전(屯田)을 경영하려고 하지만 농량(農粮)이 없으니, 변장이 군졸을 데리고 스스로 농량을 준비하여 빈 땅에다 힘닿는 대로 개간 경작하여 군량을 조달하게 해야 합니다. 당초 황해도에 병사(兵使)를 특별히 설치한 것은 단지 이런 등등의 일을 위해서였으니 전처럼 유유히 세월만 보내다가 대계(大計)를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이런 내용으로 병사 조인득(趙仁得)과 감사 류영경(柳永慶)에게 하서하여 근일의 조처하고 있는 형편을 물으시어 특별히 책려(策勵)하소서."하니, 답하기를, "평안 감사의 일은 매우 가상하다. 황해도의 일에 대해서는 나의 의견도 이와 같기 때문에 전자에 병사, 우상에게 하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안(問安)하는 내관(內官)이 내려갈 적에도 반드시 백성을 진구하고 군사를 훈련시킬 것으로 병사․목사에게 말하게 하였는데도 훈련시켜 무예를 성취시킨 일이 어느 정도인가를 아직 듣지 못하였다. 대저 우리 나라 사람은 성품이 게을러 조정에 좋은 법이 있건만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거행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고 있으니, 이른바 시어미의 입만 번거로울 뿐 며느리는 들은 척도 않는다는 격이다."하였다.【원전】 22 집 213 면

 

선조27/02/07(병진)

헌부(憲府)가 아뢰었다. "황해도 관찰사 류영경(柳永慶)과 절도사 조인득(趙仁得)은 위임받은 직책의 중함을 생각하지는 않고 오로지 사사로운 일을 경영하는 데에만 힘써 가속(家屬)을 도내로 데리고 와서 살며 관의 힘을 빌어 사사로이 둔전(屯田)을 개간하였으니,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원전】 22 집 219 면

 

선조27/02/07(병진)

대신이【류성룡(柳成龍)과 최흥원(崔興源)이다.】 아뢰기를, "류영경과 조인득의 일에 대해서 신들은 아직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모르겠으나 공론(公論)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이러한 때에 감, 병사를 일시에 파직하는 것은 형편상 어려울 듯한데,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하니, 상이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22 집 219 면

 

선조 048 27/02/08(정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류영경(柳永慶)과 조인득(趙仁得)은 오로지 사리만을 채우는 데 힘쓴 허물이 있으니 한 번만 추국하고 그칠 수는 없습니다. 파직하소서."하니, 파직은 너무 중하다고 답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원전】 22 집 219 면

 

선조27/04/17(을축)

사간원이 아뢰기를, "연안 부사(延安府使) 박응인(朴應寅)은 성품이 느슨하여 정사를 아전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지금 농사철이 되었는데도 농사를 잘 권면하지 않아 1백 리 기름진 땅이 거의 모두 황무지가 되었으니,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그리고 본 연안부가 지금 서방으로 통하는 대로(大路)가 되어 있어 너무나 심하게 조폐(凋弊)되었으니 강명(剛明)하고 재간 있는 인재를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황해 감사(黃海監司) 류영경(柳永慶)은 중국군이 나온다고 빙자하여 각 고을의 창곡(倉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수령들이 감히 손을 쓸 수가 없어 밭갈고 씨뿌리는 시기를 놓치게 하여 온 도민의 원망이 말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추고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원전】 22 집 255 면

 

선조27/05/05(임오)

추국청이 아뢰기를, "삼가 황해 감사 류영경(柳永慶)의 계본을 보건대, 기린 역리(麒麟驛吏) 장천로(張天老)는 황당인(荒唐人)으로써 참봉(參奉) 오언종(吳彦宗) 등 6인에게 잡혀 재령(載寧) 고을에 진고(進告)되었는데, 그 내용에 '장천로가 가지고 있던 자루와 전대를 수색해 보니 위조(僞造)한 표편 인신(瓢片印信)과 인신 패자(印信牌字) 1장(張), 인신 조량건기(印信助糧件記) 1장, 백문 패자(白文牌字) 6장이 있었다.' 하였습니다. 감사(監司)가 그 고을에 도착하여 장천로를 추열(推閱)했는데, 그 공초(供招)에 '지난해 11월 사이에 듣건대, 유일참(踰一站)에 사는 최무(崔武)가 역류(逆類)의 대장으로서 상경(上京)하여 거사할 때에 쓸 인마(人馬)를 정제하였고, 신천(信川)에 접우(接寓)하고 있는 수군(水軍) 김송(金松)을 찰방으로 차정하였다. 김송이 그 위조 인신을 가지고 재령 역(載寧驛)의 관군(館軍) 박무응(朴無應), 충신천역(忠信川驛)의 강태만(姜太萬), 문화 역(文化驛)의 홍언춘(洪彦春), 안악역(安岳驛)의 장귀언(張貴彦), 장연역(長連驛)의 김언방(金彦方), 은율역(殷栗驛)의 최용근(崔龍斤), 풍천역(禮川驛)의 노억준(盧億俊), 기린 역리 김석(金石) 등을 통솔하여 체계를 이루고 군량을 도와주라고 유인했다…….' 했으며, 또 '최무, 김송 등에게 사환(使喚)으로 출입하여 얻어먹고 살면서 최무의 화처(花妻)인 양녀(良女) 금덕(金德)과 간통을 하였다. 그래서 최무에게 살해당할까 두려워 금덕을 데리고 도망했는데 이달 12일 김송의 집에 도착하여 최무의 말이라고 속이기를 「역모가 발각되어 성사(成事)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고, 전일 서로 약속하고 보관해 두었던 문서(文書) 및 인신(印信)을 가지고 와서 본도(本道) 감사에게 고하려 하였는데 중로에서 오언종(吳彦宗)에게 잡혔다.……' 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을 추열해 보니, 각기 사사로운 혐의를 거론했고 감사 계본의 결미사(結尾辭)에도 장천로의 초사(招辭)가 부실하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위조 인신을 상고해 보니 전자(篆字)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건기(件記)에는 '모인(某人)의 전미(田米)가 몇 말'이라고 되어 있었으며, 패자(牌字)는 모두 역리(驛吏)를 추착(推捉)하는 것으로 전부 위조된 것이고 역적의 문서와는 간여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장천로의 초사가 부실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합니다. 감사에게 장천로를 끝까지 추문하여 정상을 알아내어 계문하게 하고 그 나머지 연루된 각인들은 분간하여 놓아 보내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2 집 264 면

 

선조27/10/07(신해)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원익(李元翼), 접반사(接伴使) 김찬(金瓚), 고급사(告急使) 류영경(柳永慶)의 장계(狀啓)에, "신 김찬은 어제 만났을 때에 뒤에 남게 하였으므로 함께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신 영경과 조도 어사(調度御史) 남이공(南以恭)이 먼저 서문(西門) 밖에 나아가 사후(伺候)하였고 신 원익은 행차를 따르다가 총병의 하처(下處)에서 사후하려는데, 총병이 통사(通事)를 불러 분부하기를 '관찰(觀察)은 배행(陪行)하지 못하니 역시 문 밖에 나아가 접반사와 같이 사후하도록 하라. 분부할 말이 있다.'고 하여 즉시 분부대로 문 밖에 나아가 사후하였습니다. 총병이 하마(下馬)하여 즉시 이항복(李恒福)의 정문(呈文)을 내보이고 이어 이르기를 '이 변보(邊報)를 보니 당신네 나라의 일이 위급하다. 지금 발병(發兵)하여 와서 구원한다면 당신네 나라의 식량으로는 모두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3분의 1은 조치할 수 있겠는가? 당신네 나라에서는 발병하여 소탕하기를 바라면서도 언제나 식량이 부족하다로 고하니 이는 오로지 중국에만 의지하려는 것으로 옳지 못하다. 여러 배신(陪臣)은 식량의 실제 수효를 말하여 사기(事機)를 어렵게 하지 말라.'고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탕패(蕩敗)함이 극도에 이르러 식량이 이미 고갈되어 현재의 식량은 매우 적기 때문에 충분히 제공할 수가 없다. 만일 대군(大軍)이 나오고 식량도 중국으로부터 3분의 2를 운반해 온다면 3분의 1은 우리 나라에서 준비할 수 있다. 백성이 비록 주린다 할지라도 어찌 감히 왕사(王師)를 위하여 힘을 다해 군량을 제공하지 않겠는가."하였습니다.

총병이 말하기를 "현재 바다 밖에 있는 왜적이 5만에 이르니 1대 1로 대적한다 하더라도 5만의 병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비록 당신네 나라의 식량이 궁핍하다 하여 줄여서 조발(調發)한다 해도 3만 명은 넘을 것이다. 설령 중국에서 식량을 왕경(王京)까지 운반하다 해도 당신네 나라에서 남쪽 변경까지 운반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용병(用兵)을 한다면 수륙(水陸)으로 나누어야 하는데 5~6천 명은 해로(海路)를 통해 진격해야 한다. 평양의 전투에서는 왜적은 불과 1만이었고 당신네 나라의 투항(投降)한 사람의 수급(首級)은 겨우 1천 뿐이었다. 그리고 전투를 하려면 중국에서 군량을 실어오도록 허락하겠지만 지키려고 한다면 방어하는 병력의 군량은 당신네 나라에서 감당해야 한다. 지키기만 하려 해도 2만 명은 필요하니, 1만은 전라(全羅), 1만은 경상(慶尙)을 방어해야 겨우 막아낼 수가 있다. 그곳의 식량은 얼마나 되는지 역시 실제 수효를 분명히 말하라."고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남방의 식량 사정에 대해서는 노야(老爺)께서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비록 금년의 수확이 있다 하더라도 겨우 자활(自活)할 정도이니 어떻게 2만의 병력을 먹여내겠는가. 금년에 백성들이 경작을 못했으나 추곡(秋穀)을 거두어서 우리 나라 백성의 식량은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군량으로만 사용한다면 1만 병력의 식량은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습니다.

총병이 "5천의 병력으로는 형세상 굳게 지키기가 어렵다. 5천으로 비록 한 쪽을 지킨다 하더라도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을 어떻게 지켜내겠는가. 당신네 나라는 방어를 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전투를 하고자 하는가?" 하기에 신들이 답하기를 "저 적은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우리 나라가 곤궁하고 약하여 공격해서 섬멸하지는 못하지만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언제나 섬멸하고자 하는데, 어찌 방어를 말하겠는가."하니, 총병이 "방어하는 가운데 전투가 있는 것이니 저들이 우리를 침범해 오면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저들이 물러가면 방어하는 것이다."하고, 이어서 "지금 만일 발병(發兵)한다면 보병(步兵)만을 쓸 것이니, 말에 먹일 태두(太豆)는 많이 준비할 필요가 없다."하고, 또 "전일에 황주(黃州)의 광(鑛)을 보니 은광(銀鑛)이었고, 강서(江西)의 광은 동광(銅鑛)이었다. 국왕에서 아뢰어 은광을 채취하여 식량 값을 준비하도록 하라."고 하기에, 신들이 "삼가 말씀대로 하겠다. 다만 식량에 관한 일만은 우리 나라는 오로지 노야(老爺)만을 믿으니, 그곳에 도착하거든 우리 나라의 궁핍한 식량 사정을 힘써 진달하여 끝까지 도와 달라." 하였습니다.

총병이 "나는 식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병력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다. 지금 만일 병력과 식량을 함께 요청하면 그 일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먼저 병력을 요청해 놓고 나서 식량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손야(孫爺)가 물으면 「조선의 식량은 자활할 정도에 불과하여 조선 백성의 굶어 죽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중국 병력의 식량으로 제공한다면 지탱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 대답할 것이니, 배신(陪臣)도 군문(軍門)에 도착하면 이와 한가지로 대답해야 한다."하고, 또 "만일 긴급한 변방의 보고가 있으면 즉시 중군(中軍)을 출동할 것이니 파발마로 전송(傳送)하라." 하고, 또 신(臣) 영경(永慶)에게 "변방의 보고가 위급하니 자문(咨文)을 속히 고쳐지어 서둘러 가져오라."하였습니다. 자문을 속히 고쳐서 시급히 내려보내어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시고, 만일 남쪽 변방의 소식이 있으면 파발을 띄워 급속히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중군에 전송하도록 하소서."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원전】 22 집 362 면

 

선조27/12/02(을사)

비변사 영부사 심수경(沈守慶),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판부사 최흥원(崔興源), 우의정 김응남(金應南), 좌찬성 정탁(鄭琢), 우찬성 최황(崔滉),【황은 위인이 강퍅(强愎)하고 재능도 없는데 이공(二公)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논하는 사람들이 하찮게 여겼다.】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좌참찬 한준(韓準), 우참찬 이헌국(李憲國), 호조 판서 김수(金첧), 이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형조 판서 신점(申點), 행 상호군(行上護軍) 조인득(趙仁得), 행 훈련 도정(行訓鍊都正) 조경(趙璥), 행 판결사(行判決事) 윤선각(尹先覺),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호조 참판 성영(成泳), 동지중추부사 류영경(柳永慶), 병조 참판 한효순(韓孝純) 등이 아뢰기를,

"어제 경연에서 송악산(松岳山)을 독성(禿城)처럼 할 일을 말씀하였는데, 민력이 이미 다해서 실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하자, '비변사에 일러서 의논해 처리하라.'고 전교하셨는데, 송악산이 비록 1면에 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밖의 3면은 둘러쌓인 형세가 없으므로 독성이나 해주(海州)처럼 옛터에다 그대로 수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을 쌓든 책(柵)을 설치하든 반드시 신설해야 하는데, 본부(本府)의 탕패(蕩敗)가 이미 극심하여 인력을 동원하는 문제를 백방으로 생각해도 도무지 계책이 없습니다. 접경인 황해도나 경기 같은 지역도 한결같이 쇠잔하여 힘을 빌릴 수도 없거니와 설령 완성이 된다 하더라도 양식을 저축하고 백성을 모을 길이 없습니다. 경기 감사 류근(柳根)과 상의하였더니, 그의 생각도 그러하였습니다. 가벼이 거행하기 어려울 듯싶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2 집 406 면

 

선조28/01/12(을유)

특진관 류영경(柳永慶)과 허진(許晉), 참찬관 오억령(吳億齡), 시독관 박홍로(朴弘老), 검토관 정경세(鄭經世) 등이 입시하여 《주역》 건괘를 강하였다. 【원전】 22 집 418 면

 

선조28/01/18(신묘)

우의정 김응남, 좌찬성 정곤수(鄭崑壽), 우참찬 이헌국(李憲國), 행 판결사(行判決事) 윤선각(尹先覺),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동지중추부사 류영경(柳永慶)이 이어서 아뢰기를, "삼가 성교를 받으니 황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수년 이래로 누차 미안한 하교를 하시니, 매번 명이 내려질 때마다 신들은 경악하여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종시 진심으로 호소해 마지 않는 것은, 참으로 선양하는 일은 결코 이때에 행할 것이 아닙니다. 근래에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 자주 경연에 임어하시되 안색이 온화하고 수작할 때의 목소리가 명랑하시니,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어 소회가 있으면 기탄없이 성상에게 다 주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상하가 상통하고 여러 계책이 모여 기울어진 국세를 붙들어 만분의 일이나마 왜적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는 판인데, 이 같은 성교가 어찌해서 오늘날에 나옵니까. 신들은 황공하고 민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책봉의 일이 이미 황상에게 주달된 데이겠습니까. 비록 중국 조정의 이의로 인해 준허되지 않았으나 재차 주청하면 반드시 인가를 받을 것이니, 아예 염려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힘쓸 일은 오직 군신간에 마음과 힘을 합하여 조석으로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왜적을 쳐서 복수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는 것일 뿐입니다. 왕위를 물려주는 일은 결코 오늘날에 행할 것이 아닙니다. 신들은 슬픔과 민망함이 절박하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성상께서 깊이 살피소서."하니, 답하기를, "결코 이렇게 할 수는 없다. 영상에게 가서 의논하든가 영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려서 의논하든가 속히 서둘러 행할 것이요, 늦추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진실로 일호라도 감당할 만한 힘이 있다면, 나도 완전히 혼매한 사람은 아닌데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하겠는가. 지금 이같이 아뢰니, 곧 통곡하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더구나 전에 정주(定州)에 있을 때 이미 서로 약속을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도리어 식언을 하니, 이 무슨 이유에서인가?"하였다.【원전】 22 집 419 면

 

선조28/02/20(계해)

영사 정탁(鄭琢), 동지사 이항복(李恒福), 참찬관 김우옹(金宇춳), 특진관 류영경(柳永慶), 허진(許晉), 참찬관 정구(鄭逑), 시독관 박홍로(朴弘老), 지평 류희서(柳熙緖), 정언 이형욱(李馨郁), 기사관 신성기(辛成己), 김신국(金藎國)․윤휘(尹暉)가 입시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는 공사(公事)를 만들어 처리하라."하니, 특진관 류영경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항복이 아뢴 일은 비변사에게 이문(移文)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요즘 남쪽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들 무리가 유리(流離)하여 굶어 죽기도 하고 혹은 도로 적중으로 들어간다 합니다. 어찌 공사가 없어서 그렇겠습니까. 봉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하였다. -中略- 류영경은 아뢰기를, "정문부는 당초에는 피신하려는 계획을 가졌다가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루었으니, 장수의 재질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中略- 류영경이 아뢰기를, "지금 온 항왜(降倭) 20명은 처치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김응서(金應瑞)의 진중에 있었으나 김응서도 그들을 제어하기 어려움을 알고 경성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각기 궁시(弓矢)와 전마(戰馬)를 가졌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그들에게 '우리 나라의 법은 그렇지 않으니 너희는 궁시의 무장을 풀어야 한다'라고 효유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성질이 아주 불순하니, 한 곳으로 같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20명이 한 곳에 모이면 난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 또 전마는 어디서 얻었는가?"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김응서가 주었다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는 빨리 처치하라."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이 어찌 그와 같겠는가. 방관자와 당국자는 다른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모두 '모인이 가면 가하다.' 하는데 그 사람이 가도 전의 사람과 다른 바가 없다. 속담에, 쥐를 고양이로 바꾸었다는 것도 역시 이런 유이다."하고, 이어 류영경에게 이르기를, "특진관도 비변사 당상이니, 소회를 말해 보라."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신은 권율의 한 일을 모릅니다. 요즘 원수의 장계를 보니, 모두가 군량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고 그가 거느린 군관을 각관에 나누어 보내어 먹이게 하였는데 각관에서도 능히 먹이지 못한다 합니다."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사람의 소견이 각각 다르니 긴밀히 비변사에 의논하라."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관서 지방도 중요하지만 남쪽 지방이 더욱 긴급하니 이원익(李元翼)을 남쪽 지방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영상에게 '이원익을 원수로 삼고 이덕형을 평안 감사로 삼으면 어떻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영상이 불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만두었던 것이다."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낫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원익으로 원수를 삼는다 하더라도 적을 물리치는 일은 내가 기필하지 못하겠다."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그 일은 이원익이라 하더라도 능히 하지 못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이원익이 본디 이덕형보다 낫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남쪽 지방에 우려가 없는 연후에 서쪽 지방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도 근본 구실을 하는 지방이니 이원익을 체직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내가 한 말과 여러 재상들이 답한 말을 상세히 다 적어서 비변사와 상의해 처리하라."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둔전(屯田)․연병(鍊兵) 등에 관한 일을 권율은 잘 하지 못하나 이덕형은 반드시 잘 해 낼 것입니다."하고, 정구는 아뢰기를, "권율은 김응서로 하여금 적과 서로 만나게 내버려 두고 중지시키지 않았으니 이 같은 일은 극히 잘못된 것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장수는 밖에 있는데 조정이 이처럼 의논하니 그가 들으면 필시 미안해 할 것 같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원의 인사 처리를 가지고 말하면, 송응창(宋應昌)이 체직되자 고양겸(顧讓謙)이 왔고 고양겸이 체직되자 손광(孫鑛)이 왔는데 손광이 온 뒤에 벌써 이 적을 쓸어 버렸는가. 대개 장수란 자주 교체할 수 없는 것이다. 경연관이 말한 조괄 같은 경우는 부득이 체직시켜야 할 것이다."하자, 정구가 아뢰기를, "중원에서는 송응창을 갈아내고 교대자에 있어서 그 적임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하였다. 【원전】 22 집 445 면

 

선조28/06/13(갑인)

홍진(洪進)을 겸 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로, 김늑(金폠)을 겸 동지춘추관사로, 조정립(趙正立)을 병조 좌랑으로, 류영경(柳永慶)을 형조 참판으로, 강신(姜紳)을 진흥군(晉興君)으로, 이정립(李廷立)을【간교하고 아첨을 잘해 수시로 아부를 일삼았다. 처음에 이발(李潑)의 문하에서 노예처럼 굴어 출세하였는데 역옥이 일어나자 거꾸로 정철에게 붙어 문사 낭청(問事郞廳)으로 훈적(勳籍)에까지 참여되었다. 일찍이 정철이 정승을 사직한 데 대한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응제(應製)한 글에 '유속(流俗)에서 천길이나 초월하여 이 때문에 집권자를 거슬러 10년이나 배척되었다.'는 구절이 있으니, 사람들이 다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 광림군(廣林君)으로, 황시(黃是)를 홍문관 응교로, 윤돈(尹暾)을 사간원 사간으로, 정경세(鄭經世)를 겸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삼았다.【원전】 22 집 512 면

 

선조28/07/08(기묘)

상이 별전에 나아가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판윤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지중추부사 류근(柳根)․신점(申點), 동지중추부사 조경(趙儆), 부제학 이정형(李廷馨), 호조 참판 노직(盧稷), 동지중추부사 류영경(柳永慶), 동부승지 기자헌(奇自獻), 사간 황시(黃是), 장령 정기원(鄭期遠), 전한 김시헌(金時獻), 가주서 채형(蔡衡), 봉교 오백령(吳百齡), 홍문 정자(弘文正字) 윤의립(尹義立), 검열 성이문(成以文).】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요즘 인신(印信)을 위조한 자를 형조에서 추고하는 중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교사(敎師)가 힘을 다해 훈련시키고 있는가?'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교사가 날마다 훈련을 시키고 대오(隊伍)를 지어 권장하므로 살수(殺手)는 전일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하였다. 【원전】 22 집 527 면

 

선조28/09/17(병술)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군공과 곡식 바치는 일은, 허위가 많기는 하나 그 사람의 그릇에 따라 가려 쓰는 것이 좋습니다."하였다. 경세가 아뢰기를, "중전(中殿)께서 해주에 오래도록 머무시어 민력이 지치고 피곤하여 오늘날까지 편안한 날이 적으며 도하(都下)의 인심 또한 의구(疑懼)하는 단서가 있으니 춥기전에 경성으로 진주(進駐)하시면 인심이 거의 진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구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하자, 경세가 아뢰기를, “임진년의 변란에 뜻밖에 서쪽으로 행행(幸行)하시었으므로, 소민들은 '국가가 우리를 속였으니, 혹시라도 위급함이 있으면 혹 전일처럼 할까 두렵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일로 의심하는 단서가 많으나 다 아뢸 수 없습니다."하였다. 【원전】 22 집 556 면

 

선조28/10/17(병진)

형조 참판 류영경(柳永慶)은 아뢰기를, "삭주는 적을 막는 요해처이고 군량도 많이 저축되었으나 그 성은 사면을 모두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 전교에서 이 삭주의 군량을 옮겨 두려 하셨으나 대군이 연평령을 막아 끊으면 옮겨두지 않아도 됩니다."하였다. 【원전】 22 집 578 면

 

선조29/01/03(경오)

김명원(金命元), 류영경(柳永慶), 강신(姜紳)은 의논드리기를, "흉적은 우리와 더불어 처음부터 원수를 맺은 것이 아닌데, 무단히 군사를 일으켜 묘사(廟社)를 불사르고 백성들을 도륙하여 그 불측한 화가 선왕의 능묘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 적은 우리 나라에 있어 언제고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인데, 어찌 다시 통신사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애초 우리 나라가 자강(自强)하지 못하여 중조(中朝)에 구원을 요구하자 중조는 끝까지 구제해 주었는데, 불행하게도 기미(틓쭻)의 설이 나오자 굳이 고집하지 못하고 결국 황상에게 주달해서 지금 책사(冊使)가 이미 적의 진영에 들어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적은 오히려 물러가지 않고 우리에게 통신사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만약 따라 주지 않으면 적은 필시 이를 핑계로 지류(遲留)할 것이요, 끝내는 유경(惟敬)이 이것을 꼬투리로 잡아 허물을 전가하려 할 것이니, 이 점이 몹시 염려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의심스러운 적의 동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봉사(封事)의 성패가 만약 배신이 가고 안 가는 것에 달려 있다면 책사가 어찌 요청하지 않고서 '유격의 농간이다.' '별로 볼 일이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그 사이의 실정은 실로 알 수 없는 바입니다. 더구나 천조가 약속을 정할 때 우리 나라의 통신사는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과연 공순하다면 어찌 통신사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철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데에 대해 할 말이 없음을 염려할 게 없습니다. 신들의 우매한 생각에는 의리를 따져 논변하여 유격에게 회자(回咨)하는 한편 적의 정세를 갖추어 진술하여 하루 속히 중국에 주달하는 것이 사리에 마땅할 것 같습니다. 성상께서는 참작하소서."하였다. 【원전】 22 집 621 면

 

선조29/04/03(기해)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중국은 필시 통신사를 보내지 않는 것으로 배약(背約)하였다고 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서 자문을 보니, 통신사를 비록 강력히 요구하더라도 보내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필시 석 상서의 말일 것이다."하자, 응남이 아뢰기를, "석 상서가 전에 말하기를 '조선의 도리에 있어서는 의당 통신사를 보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강력히 요구해 오면 보내는 것도 좋겠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원전】 22 집 672 면

 

선조29/05/03(기사)

류영경(柳永慶)【류영경은 이때에 대사간(大司諫)이었다.】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통신사(通信使)를 보내지 않은 것이 약조를 어긴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자문을 보니 '통신사를 굳이 바라더라도 보내지 말아야 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석 상서의 말일 것이다."하자, 응남이 아뢰기를, "석 상서는 전에 '조선의 도리로는 통신사를 보내지 않아야 하겠으나 굳이 바라면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하였다.【원전】 22 집 701 면

 

선조29/06/05(신축)

헌납(獻納) 윤형(尹泂), 정언(正言) 신설(申渫)이 아뢰기를, "남호정을 삼성이 교좌(交坐)하여 추국할 때에 전 정언 오백령은 위관으로 '남호정의 옥사가 강상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삼성이 추국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뜻으로 계사(啓辭)를 지었는데 분변하여 막지 못하고 인혐하여 물러갔으므로, 신들이 대사간 류영경(柳永慶) 등과 함께 처리하였습니다. 이제 헌부가 피혐한 사연을 보면, 신들의 잘못은 이미 류영경 등과 같고 형추(刑推)하던 날에도 함께 참여하였으니, 법을 무너뜨린 잘못이 헌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의 직을 파면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23 집 6 면

 

선조29/06/05(신축)

정언(正言) 남이공(南以恭)이 와서 아뢰기를, "남호정이 범한 것은 나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고, 구전(舊典)으로 참고하여도 참으로 예전에 없던 예(例)이며, 그 정상을 논하면 참으로 한때의 막대한 죄이므로 무거운 법으로 처치하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합니다. 금부의 추국을 인하여 삼성의 추국을 계청한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기려는 것일 뿐이고 별로 법외의 잘못이 없습니다. 오백령이 밝혀서 바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이에 의거하여 갈기를 청한 것은 마땅한 일이었으므로 더욱 피할 만한 혐의가 없거니와, 추국해야 할 자리에 가서 참여한 것은 본디 인혐할 일이 아닙니다. 대사헌 이기(李?), 집의 권희(權憘), 장령 우준민(禹俊民), 이철(李鐵), 지평 송준(宋駿), 대사간 류영경(柳永慶), 사간 정기원(鄭期遠), 헌납 윤형(尹泂), 정언 신설(申渫)을 모두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3 집 6 면

 

선조29/06/20(병진)

호군(護軍)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사명을 받든 신하는 으레 지체하여 쉽게 나아가지 못하니, 이제는 파발아(擺撥兒)를 시켜 황급히 치송(馳送)해야 하겠습니다."하였다. 류성룡이 말하기를, "손 군문(孫軍門)이 이 뜻을 안다면 갑자기 군사를 보내어 오겠는가?"하자, 윤선각이 말하기를, "전혀 무리한 일은 아닙니다."하니, 류성룡이 아뢰기를, "이로 인하여 군사를 보내준다면, 한편으로 형세를 보면서 군량을 미리 조치해 두고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사신의 주문(奏聞)의 초고를 보지 못하였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단단히 봉하여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무엇 때문에 들어갔는지 물은 데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하던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전일 병부의 영(令)에 '왜가 아직 가지 않았더라도 도해하도록 하라.'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였다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고명이 없는데 지레 가는 경우가 있겠는가."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지금의 적세(賊勢)는 어느 때에나 정해질는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 -中略- 윤선각이 아뢰기를, "문안사(問安使)라 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 "사후 배신(伺候陪臣)이라 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후 배신이라 칭하면 형세상 반드시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하였다. -中略- 류영경이 아뢰기를, "저 적에게는 반드시 정해진 계책이 있을 것으로 부산에서 사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해진 계책이란 어떤 것인가?"하자, 윤선각이 아뢰기를, "정해진 계책이란, 큰 것은 곧바로 상국(上國)으로 가는 것이고 그 다음은 우리 나라를 침범하는 것인데, 근일에는 중국에 교통하기를 요구하려는 것이 더욱 분명합니다."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 "우리의 도리는 주문하는 일을 다할 뿐입니다."하였다. 【원전】 23 집 16 면

 

선조29/07/18(계미)

사헌부가 아뢰기를, "대사헌 류영경(柳永慶)이 궐정에 있으면서 신들에게 알리기를 '서폐에 관한 일을 비변사가 다시 계청(啓請)하여 거행하려고 함께 다시 의논하고 있다.'고 하기에, 신들이 이 일은 다시 논해야 된다고 여겨 가부를 상의(商議)하는 판에, 마침 친국(親鞫)하시게 됨에 따라 대사헌이 입시(入侍)하게 되었으므로 다시 의논하지도 못했고 또 제때에 바로잡아 시정하지도 못했습니다. 신들이 처치를 엉성하게 하여 시들시들 일을 망친 잘못이 큽니다. 면목없이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의 직을 파척하소서."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23 집 32 면

 

선조29/07/24(기축)

추관(推官)은 이산해(李山海), 류성룡(柳成龍), 윤두수(尹斗壽),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 윤자신(尹自新)과 대사간 이기(李?), 대사헌 류영경(柳永慶), 우승지 이광정(李光庭)이고, 문사 낭청(問事郞廳)은 윤유기(尹惟幾), 윤방(尹昉)이다. 【원전】 23 집 35 면

 

선조29/08/04(기해)

이기(李?)와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이는 성상께서 재량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마는, 옥사의 사체로 말하건대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면 우선 후일을 기다렸다 하는 것이 무방합니다."하였다. 【원전】 23 집 39 면

 

선조29/08/12(정미)

대사간 이기(李?)와 대사헌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죄인 임회(林檜)를 문초받을 때에 묻는 것 이외에도 많은 말을 하게 하여 자못 난잡하게 되었으므로 신들도 역시 미안함을 알고서 여러 차례 문사 낭청(問事郞廳)에게 말을 했었지만, 다만 죄인이 원정(原情)하는 것이라 그대로 다 진술하는 것을 듣게 되어 끝내 정지하지 못했습니다.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요사이 추국하는 체례가 잘못되고 있다.' 하셨습니다. 신들이 추국청에 나가 참여하고 있으면서 소임을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현저하니, 신들의 체직을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23 집 42 면

 

선조29/08/01(을축)

양사(兩司)가 합사(合司)하여【행 대사간(行大司諫) 이기(李?), 대사헌(大司憲) 류영경(柳永慶), 사간(司諫) 김홍미(金弘微), 집의(執義) 김시헌(金時獻), 장령(掌令) 이철(李鐵), 최관(崔瓘), 지평(持平) 이형욱(李馨郁), 헌납(獻納) 남이공(南以恭), 지평 송준(宋駿), 정언(正言) 정혹(鄭?)․이필형(李必亨).】 와서 아뢰기를, "임금은 하루에도 만 가지 기무(機務)를 처리해야 하는 법이어서, 하루만 다스려 가지 않으면 천위(天位)가 비게 되고 천직(天職)을 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섭정(攝政)에 관한 일로 궁궐 문이 굳게 닫히어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전달할 길이 없으므로, 신들이 거적자리를 깔고 복합(伏閤)한 지가 몇 주야가 지난 지금 호소할 말은 이미 다하였는데 거절함은 더욱 완강하십니다. 대소의 신하들만 황황 민박(悶迫)하여 호소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들의 영혼 또한 반드시 슬퍼하실 것입니다. 성상께서 신들의 구구한 성의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하신다 하더라도, 조종들의 부탁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고 만백성이 우러러 받드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성상께서 조종 때의 예를 들어 분부하셨습니다마는, 지금 국가 사세가 날로 위급해져 사태의 기미를 헤아릴 수 없으므로 조종들의 때와는 너무도 같지 않은 바가 있는데, 성상께서는 오직 물러나서 한 몸을 보호하는 것이 시급한 줄만 아시고 조종과 만백성의 소중함은 생각하지 않으시어, 신기(神器)를 내놓고 인사(人事)를 사절하기를 마치 필부(匹夫)의 행동처럼 하려고 하시니, 성상께서 과연 이를 마음에 편하게 여기시어 기필코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또한 크게 우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동궁(東宮)께서 평소에 병이 많으셨는데, 성상의 분부를 들은 뒤로 침식을 폐하고 종일토록 노천(露天)에 나앉아 계십니다. 혹시라도 이로 인해 중한 손상을 입으신다면, 성상께서 세자를 염려하시는 면에 있어 후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정리(情理)로 보나 사세로 보나 모두 결코 할 수 없는 일인데 명령을 폐쇄하고 계시니, 이는 더욱 전고(前古)에 없던 변입니다. 바라건대 시급히 천의(天意)를 돌리시어 위급한 화를 풀게 하소서."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원전】 23 집 51 면

 

선조29/09/01(갑오)

행 대사간(行大司諫) 이기(李?), 대사헌(大司憲) 류영경(柳永慶), 사간 김홍미(金弘微), 집의(執義) 김시헌(金時獻), 장령(掌令) 이철(李鐵), 최관(崔瓘), 지평(持平) 이형욱(李馨郁), 헌납(獻納) 남이공(南以恭), 정언(正言) 이필형(李必亨)․정혹(鄭?)이 아뢰기를, "대간이 대궐에 나아가 일을 논계(論啓)하다가, 발락(發落)이 내리지 않으면 감히 앞질러 나가지 못함은 내려오는 규례(規例)입니다. 지난날 합사(合司)하여 아뢸 적에 승전색(承傳色)이 체직되어 아뢰는 말을 입계(入啓)하지 못했었는데, 번번이 대궐 안에서 자는 것도 온당하지 못하므로 나가는 날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후일 대간이 발락을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먼저 나가는 폐단이 있는 것은 반드시 신들로부터 시작된 일일 것입니다. 그때 즉시 인혐(引嫌)했어야 하는데 한창 대사(大事)를 논계하기 때문에 미처 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와서 인피(引避)하니 잘못이 더욱 큽니다. 결단코 면목없이 직에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을 체직(遞職)시켜 물리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23 집 73 면

 

선조29/09/01(갑오)

홍문관 관원들이【부제학 이호민(李好閔), 교리 한준겸(韓浚謙), 부수찬 신설(申渫)이다.】 아뢰기를, "삼가 살피건대 대사간 이기(李?), 대사헌 류영경(柳永慶), 사간 김홍미(金弘微), 집의(執義) 김시헌(金時獻), 장령(掌令) 이철(李鐵), 최관(崔瓘), 지평(持平) 이형욱(李馨郁), 헌납(獻納) 남이공(南以恭), 정언 이필형(李必亨), 정혹(鄭?) 등이 인혐(引嫌)하고 물러갔습니다마는, 지난날 논집(論執)한 일은 거조(擧措)가 특수하여 상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간이 처음에는 비록 천의(天意)를 돌리기에 급급하여 낮이나 밤이나 대궐에 있으면서 윤허하시는 분부가 내리기를 기다렸었지만, 상하(上下)가 서로 대치하게 되어서는 시일만 점점 허송하게 되어 생기(省記)하는 관원에 들지 못하게 되고 게다가 번번이 금중(禁中)에서 유숙하기도 난처하다고 여겨 더러 나갔던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한참 대사를 논집하느라 미처 인피하지 못한 것은 사세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별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3 집 73 면

 

선조29/09/24(정사)

영사(領事) 김응남(金應南), 지사(知事) 김수(金첧), 특진관(特進官) 이증(李增), 대사헌(大司憲) 류영경(柳永慶), 대사간(大司諫) 이정형(李廷馨), 특진관 허진(許晉), 참찬관(參贊官) 이호민(李好閔), 참찬관 정기원(鄭期遠), 검토관(檢討官) 정혹(鄭?), 기사관(記事官) 조즙(趙?), 윤의립(尹義立), 류경종(柳慶宗)이 입시하였다. 묘시(卯時) 정각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을 진강(進講)하였다. 【원전】 23 집 78 면

 

선조29/11/07(기해)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왜선은 용렬하여 우리 나라의 것만 못하므로, 가볍고 빠른 듯하기는 하나 우리 나라의 배에 부딪치면 곧 남김없이 부서집니다."하고,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큰 배가 부딪치면 늘 적의 배 두세 척을 부수므로, 사람마다 다들 말하기를 '주사(舟師)가 있으면 힘껏 싸울 수 있으니, 큰 적을 막는 것은 알 수 없더라도 치중선(輜重船)은 틀림없이 칠 수 있을 것이다.' 합니다. 이제 공천(公賤)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본역(本役)을 면제하여 주사에 전속(專屬)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사도 조금 온전해지고 백성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편리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원전】 23 집 95 면

 

선조29/11/07(기해)

미시(未時) 정각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大臣)과【이산해(李山海), 류성룡(柳成龍), 윤두수(尹斗壽),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 이원익(李元翼).】 비변사(備邊司) 유사 당상(有司堂上)을【김명원(金命元), 김수(金첧), 이덕형(李德馨), 류영경(柳永慶), 승지 이덕열(李德悅).】인견(引見)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이것은 지극히 긴급하나 서장(書狀)에 써서는 안 될 것이 있는 것입니다."하고,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황신의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들은 대로 말하게 하였더니, 군관이 말하기를 '심 사신(沈使臣)은 일본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나라를 위하였다. 심 사신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천조(天朝)에 죄를 지었고 다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내가 천조에 들어가면 반드시 곧 죽을 것인데, 조선에서 천조에 주선하면 만일의 희망이 없지도 않을 것이나, 염려되는 것은 내 뜻을 천조에 드러내어 아뢰지 못할 듯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습니다."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것은 조덕수(趙德秀)의 말입니다."하였다. -中略- 류성룡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황신(黃愼)이 서장(書狀)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하니, 이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정이 만약 침략하게 되면 평조신(平調信)은 반드시 말리려 할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잘 알 수 없습니다."하고, 류성룡이 아뢰기를, "조덕수(趙德秀)가 말한 바, 그가 예물(禮物)을 보탰다는 말로 보면 수상한 듯합니다."【중국에의 예단(禮單)이 모자라므로 평조신이 자기 물건으로 보탰다.】하였다. 신시(申時) 초에 파하여 나왔다. 【원전】 23 집 97 면

 

선조29/11/26(무오)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영돈녕(領敦寧) 이산해(李山海), 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 판부사(判府事) 윤두수(尹斗壽), 좌의정(左議政) 김응남(金應南), 지사(知事)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수(金첧),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덕형(李德馨), 우참찬(右參贊) 신잡(申캈), 첨지(僉知) 류영경(柳永慶)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우승지(右承旨) 기자헌(奇自獻), 주서(注書) 조즙(趙?),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최동식(崔東式), 검열(檢閱) 강주(姜?), 심액(沈?)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도(漢都)가 황성(皇城)보다 크다 한다."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서로 비슷합니다."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습니다."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곳이 더 큽니다. 둘레가 40여 리라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양문(正陽門)은 우리 나라의 남대문만한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中略- 김수가 아뢰기를, "비변사가 장속(裝束)하여 대령하라고 하였다 하여 강원도의 군사 40여 명이 이미 서울에 왔다고 합니다."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 "병조(兵曹)가 분명하게 공문을 보내지 않아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 사람이 이처럼 추운 날씨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빨리 시재(試才)하고 상물(賞物)을 주어 보내라. 아울러 술을 먹이고 궁시(弓矢)도 주라."하였다. -中略-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복남이 나주에서 떠나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 군사를 데리고 나가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가."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 "나주는 판관(判官)이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中略- 류성룡이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숭장(崇獎)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는 사변이 있더라도 의병(義兵)을 일으킬 사람이 없을 것이라 합니다."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 "황주(黃州) 사람이 여러 번 와서 진소(陳訴)하기를 '임진년에 적을 토벌하는 데에 힘을 다하였으나 아직 상격(賞格)을 입지 못하였다.'하였는데, 황주 사람이 과연 힘껏 싸운 것은 중화(中和)와 다름 없으나, 이번에 그들의 진소에 따라 논상(論賞)할 수 없었으므로 아래에서는 난처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할 만한 일이면 하도록 하라. 섭섭하게 하는 것은 온편하지 못하다. 황주 사람이 힘껏 싸운 것은 사람들이 다 아니, 비변사가 의논해서 하라."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특별히 은전(恩典)을 입어야 할 수 있습니다. 으레 비변사가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하였다. 【원전】 23 집 118 면

 

선조29/12/04(병인)

장만(張晩)을 예문관 대교로, 이정암(李廷촑)을 황해 감사로, 송언신(宋言愼)을 함경 감사로, 윤의립(尹義立)을 세자 시강원 설서로, 송일(宋馹)을 세자 시강원 사서로, 홍경신(洪慶臣)을 사간원 정언으로, 김시헌(金時獻)을 의정부 사인으로, 정숙하(鄭淑夏)를 병조 참지로, 류영순(柳永詢)을 승정원 좌부승지로, 류영경(柳永慶)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원전】 23 집 125 면

 

선조29/12/27(기축)

대사간 류영경(柳永慶), 사간 김흥미(金弘微), 헌납 남이신(南以信), 정언 김순명(金順命)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당초에 황신의 일을 논집(論執)한 것은 일을 맡아서 처리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언한 것은 아닙니다. 늙은 도적이 흉악하고 교활하여 경솔한 말이 한두 마디가 아니었는데도 황신은 일찍이 한마디 말을 해서 이를 꾸짖지도 못하고 다만 공갈 협박하는 말을 듣고서 고개를 숙인 채 돌아왔는데, 견책은 가하지 않고 도리어 중한 가자를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공론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신들의 말이 정직하지 못하여 성교를 내리게 하였으니, 신들의 잘못이 매우 큽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23 집 139 면

 

선수30/01/01(임진)

23일에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영돈녕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판중추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男), 지중추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 김수(金첧),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상호군(上護軍) 류영경(柳永慶), 노직(盧稷), 승지 김시헌(金時獻), 주서 박승업(朴承業),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이순민(李舜民), 검열 심액(沈?)이 입시하였다. 【원전】 25집 660면

 

선조30/1/16(정미)

상이 대신(大臣)및 비변사 당상을 명패(命牌)로 불렀다.【영의정 류성룡,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 김수(金첧), 예조 판서 홍진(洪進),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상호군(上護軍) 이일(李鎰), 상호군 최원(崔遠), 상호군 류영경(柳永慶),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동지중추부사 노직(盧稷), 대사간 윤승훈(尹承勳).】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여러 재신(宰臣)에게 이르기를, "험패(驗牌)는 비록 누구라도 주문(奏聞)하는 자가 쓰는가?"하니, 류성룡이 아뢰기를," 병부(兵部)에서 쓰는데, 그곳의 인마(人馬)가 고르지 않아서 황급히 치문(馳聞)할 때에만 쓰고 있습니다. 지금 험패를 보낸 것은 급한 일을 고하는 것입니다. 대개 왜적이 가까이 있어 도모할 만한 형세이거나 갑자기 바다를 건너려 한다면 급함을 고해야 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원전】 23 집 146 면

 

선조30/01/23(갑인)

김응남이 아뢰기를, "성지(聖旨)가 이곳에 도착하면 즉시 당보(塘報)해야 합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막지 못할 걱정이 있을까 싶습니다. 반드시 주문(奏聞)해야 합니다."하고, 류영경(柳永慶)은 아뢰기를, "비록 성지를 받든다고 하나 사실은 병부(兵部)의 제본(題本)입니다. 설사 성지를 받들더라도 땅을 할양하고 칭신(稱臣)하라 한다면 어찌 일일이 다 응할 수 있겠습니까.㰡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㰡기회를 보아가며 보내는 것이 편리합니다."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심사(沈使)는 천자를 속였으니, 이는 천하의 도적이므로 천하가 함께 성토(聲討)해야 한다. 천자를 기만한 죄는 덮어둘 수가 없는데, 다만 천자가 그 간사함을 통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가서 영접하지 못한 것은 병이 있어서였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심사는 중국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판 간흉입니다."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임금은 마땅히 천하의 도량을 가져야 합니다."하였다. -中略- 류영경이 아뢰기를, "갑오년 사이에 사람들 모두가 석성(石星)의 화상(턛像)을 걸어놓고 생사(生祀)를 지냈습니다만 신은 홀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신의 말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하교하신 대로 먼저 사신을 의주로 보내 성지(聖旨)가 동쪽에 반포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들어가 주문(奏聞)해서 다시 성지를 받든 뒤에 서서히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하였다. 【원전】 23 집 152 면

 

선조30/01/27(무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비변사 대신 및 유사 당상인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의정부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의정부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 김수(金수),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병조 참판 류영경(柳永慶),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상호군 노직(盧稷)을 인견하였다. 좌승지 이덕열(李德悅), 주서 조즙(趙?),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이순민(李舜民), 검열 심액(深?), 이유홍(李惟弘)이 입시하였다. 【원전】 23 집 157 면

 

선조30/03/04(갑오)

정언 최홍재(崔弘載)가 와서 아뢰기를, "별시 무과(別試武科)의 초시 시관(初試試官)이 탈이 있어서 개의(改議)할적에 마구 노병자(老病者)를 충당하여 자주 바꾸는 폐단을 가져왔고 심지어 유문(留門)하고 출입하기까지 하여 보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사체(事體)를 손상시켰습니다. 병조 당상(兵曹堂上)과 색낭청(色郞廳)을 아울러 추고(推考)하소서. 비변사의 모획(謨턛)은 전적으로 대신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문서(文書)를 봉행(奉行)하는 데 있어서는 한 사람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도 충분히 담당할 수있는데 하물며 여섯 사람이나 되는 많은 숫자이겠습니까. 류영경(柳永慶) 등이 시원(試院)에 들어가더라도 별로 일을 망칠 염려가 없는데 본사(本司)가 번거롭게 아뢰어 개정하였으니, 구차하고 체통을 손상시킨 일이 많습니다. 차지 당상(次知堂上)을 추고하소서. 나주 판관(羅州判官) 어운급(魚雲級)은 관하(管下)를 검칙(檢飭)하지 않아 전선(戰船)에 불이 나서 격군(格軍)이 많이 익사(溺死)하고 화상자(火傷者)가 매우 많게 하였으며, 심지어 총통(銃筒)까지 빼앗기어 왜적이 쏘아 보고는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하니, 범한 죄가 지극히 중합니다. 잡아다가 추국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23 집 173 면

 

선조30/04/13(계유)

미시(未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하였는데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행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행 형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공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병조 참판 류영경(柳永慶),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동부승지 윤형(尹泂)이 입시(入侍)하였다. 【원전】 23 집 192 면

 

선조30/05/15(을사)

오시(午時)에 대신과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편전에서 인견하였다. 영의정 류성룡, 판중추부사 윤두수, 좌의정 김응남, 형조 판서 김명원, 병조 판서 이항복, 동지중추부사 류영경(柳永慶),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행 대호군(行大護軍) 노직(盧稷), 동부승지 권희(權憘), 가주서(假注書) 송석경(宋錫慶),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허적(許썞), 기사관(記事官) 이지완(李志完)․정홍익(鄭弘翼)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조정이 만일 '언제는 출병을 청원하고, 이제는 또다시 물러 지체시키기를 청원하다니, 왜 이다지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가?' 하면 그때에 어찌하려는가? 또 적들에 대한 근심은 언제 어떨지 헤아리지 못한다. 만일 창졸간에 변이 생기면 압록강에 주둔한 군사를 기다릴 틈이 있겠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금은 임진년(壬辰年)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적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서라도 미리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으로는 군량이 부족하다는 내용만을 이자할 것이 아니라, 적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수비할 것인가의 계책까지도 품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중조(中朝)에서 비록 진격하기를 원하나 일부러 수비하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또 압록강에 군사를 주둔하는 문제도 속히 이자하도록 하라. 만일 이미 넘어왔으면 말을 꺼낼 것이 없다. 다른 일처럼 늑장을 부려서는 안될 것이다."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우리 군사로 적을 침범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가볍게 하여서는 안됩니다."하고, 성룡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먼저 적이 우리를 이길 수 없도록 대비한 뒤에야 거사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가볍게 움직였다가는 잠자는 범을 건드리는 격이 되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문(軍門)에 통보하여 허락을 받고난 다음에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中略- 류영경이 아뢰기를, "청정이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변방이 매우 소요스럽다고 하니, 헛소문이 아닌 듯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호 도사(胡都司)가 중국으로 향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만일 그가 친한 사람에게 알려주어 혹시 비보(飛報)라도 하게 되면, 지금 대군을 징발하고 있는 시기에 이로 인하여 뒤를 돌아보는 염려가 있게 될 것이니, 매우 좋지 않을 것이다. 또 청정이 갔는지 안갔는지를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일은 원수(元帥)가 장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원전】 23 집 222 면

 

선조30/06/02(신유)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유사 당상(備邊司有司堂上)인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판부사(判府事)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병조 참판 류영경(柳永慶), 행 대호군(行大護軍) 노직(盧稷)을 인견하였는데, 좌부승지 김홍미(金弘微), 기사관(記事官) 송석경(宋錫慶),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허적(許썞), 기사관 이지완(李志完), 기사관 정홍익(鄭弘翼)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들으니 노아합적(盧兒哈赤)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우리를 후하게 대우해 왔는데 양 순무(楊巡撫)가 온 후부터는 박대(薄待)한다.'고 했다 한다. 이를 보면 엄급(嚴急)한 사람이 분명한데, 이번에는 무슨 마음을 먹고 우리 나라에 왔단 말인가. 또 듣자니 그는 이마를 드러내고 높이 망건(網巾)을 쓴다고 하던데, 그러한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사모(紗帽) 역시 별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이마가 드러나게 쓴다고 합니다.“ 하였다. 【원전】 23 집 237 면

 

선조30/06/18(정축)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有司堂上)인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형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병조 참판 류영경(柳永慶), 행 대호군(行大護軍) 노직(盧稷)을 인견하였는데, 동부승지 윤돈(尹暾), 기사관 송석경(宋錫慶),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허적(許썞), 기사관 이지완(李志完), 기사관 정홍익(鄭弘翼)이 입시하였다. 류영경은 아뢰기를, "경상좌도가 위급하니, 윤두수가 아뢴 대로 오 총병의 군사는 안동에 주둔하게 하고 마도독의 군사는 조령(鳥嶺)과 죽령(竹嶺) 및 공주(公州)에 나누어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노직은 아뢰기를, "적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중로(中路)가 텅 비게 될까 가장 염려됩니다."하였다. -中略- 류영경이 아뢰기를, "어제 양 경리(楊經理)의 차관(差官)이 신을 보고자 하기에, 신이 가서 보니 '양 경리의 군량 대미(大米) 20만 석이 이미 여순(旅順)에 도착하였는데 장 참의(張參議)가 양식 운반하는 일로 내려갈 것이다.' 하였습니다."하고, 류성룡은 아뢰기를, "통찰(統察)하는 자는 양 경리이고 장 참의는 관찰사(觀察使)와 같습니다."하였다.【원전】 23 집 250 면

 

선조30/06/29(무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금방 영국윤(寗國胤)이 매우 노했다는 말을 듣고는 류영경(柳永慶)과 노직(盧稷)으로 하여금 가서 보고 풀게 했더니, 영국윤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긴급한 군기(軍機) 때문에 나왔으니 호응원(胡應元)이나 나부교(羅敷敎)의 무리에 비할 바가 아닌데, 어제 입성했는데도 오늘 유독 호와 나 두 사람만 접견하고 나는 보지 않았다. 이는 필시 권신(權臣)과 간신이 옹폐해서 그런 것이다. 만약 보지 않으려거든 분명히 말하라. 그러면 즉시 내가 돌아갈 것이다. 나를 접견하지 않은 것은 군사를 철수시키고자 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대개 이러하였는데 노기가 등등하여 거의 스스로 진정하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그런 무리들이야 따지고 말고 할 것이 못되지만, 그래도 경리 아문(經理衙門)의 사람이라서 체면이 매우 중하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몸이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감당하겠는가마는 당일(當日) 접견하겠다."하였다. 【원전】 23 집 258 면

 

선조30/07/22(신해)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행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우의정 김응남(金應南), 행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행 형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병조 참판 류영경(柳永慶), 행 상호군 노직(盧稷), 좌승지 정광적(鄭光績), 주서 박승업(朴承業), 가주서 이성(李惺), 검열 임수정(任守正), 이필영(李必榮)이 입시하였다. 【원전】 23 집 267 면

 

선조30/08/16(갑술)

사헌부가 아뢰기를, "호군(護軍) 류영경(柳永慶)․박응복(朴應福), 우윤(右尹) 류자신(柳自新), 호조 참판 심우승(沈友勝), 지평 장만(張晩), 부수찬 윤의립(尹義立)은 모두 재상과 시종(侍從)으로서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하지 않고 먼저 자기 가속들을 피난시킴으로써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추고하여 치죄하소서. -中略- 성을 수축할 때에 중국 장수들은 몸소 현장에 나와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감독하는데 우리 나라의 병조, 공조와 한성부(漢城府) 당상들은 아예 나가 보지도 않을 뿐더러 나갔더라도 막사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여겨 감독하는 책임을 이행하려는 뜻이 전혀 없으니 지극히 형편없습니다. 추고하여 치죄할 것을 명하시고 상께서 특별히 근신을 파견하여 감독하는 장관을 위로함으로써 성의를 보이도록 하소서."하니, 상이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원전】 23 집 281 면

 

선조30/12/23(기묘)

도통판(陶統判)이【도양성(陶良性).】 회례차(回禮次) 왔다. 통판이 아뢰기를, "군문께서, 대병이 남하하였는데 양초가 넉넉하지 못하여 돌아오게 된다면 다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속히 대관(大官)을 보내어 독촉하라고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신(部臣) 윤승훈(尹承勳), 류영경(柳永慶), 성영(成泳) 등이 이미 내려갔소이다."하였다. 【원전】 23 집 353 면

 

선조30/12/27(계미)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에는 윤승훈(尹承勳), 류영경(柳永慶), 성영(成泳) 등이 현재 군량을 수괄하고 있는데 진 동지(陳同知)가 갈 것 같으면 또 관원을 차출하여 모셔 보내겠소이다. 전라도에는 어사(御史) 남탁(南晫)을 각별히 차출하여 보내도록 분부하였으니, 권율(權慄)도 아마 반드시 수괄을 독촉하고 있을 것이외다. 그러나 동 대인(董大人)이 가게 된다면 남탁 등으로 하여금 나아가 분부를 듣게 하겠소이다. 황해도와 평양의 운량(運粮)은 홍세공(洪世恭), 박이서(朴츺敍), 조존성(趙存性) 등이 조달도 하고 운송도 하고 있을 것이외다. 그러나 정 동지(鄭同知)와 조지현(趙知縣)이 회동하도록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다만 경기는 양곡이 떨어져서 남방으로 운송할 수가 없어서 남방 근처의 양곡을 이미 실어 들이도록 명하였소이다. 그러나 지방이 잔파되고 민력이 이미 고갈되었으므로 3일에 한 번씩 보고하는 것도 형편이 닿지 않을 까 두렵소이다. 배를 만드는 일도 마음먹은 대로 정제(整齊)하지 못할까 염려스럽소이다."하니, 차관이 아뢰기를, "이러한 사세에 대해서는 말로는 소상히 밝힐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일일이 글로 써서 주소서. 저는 밖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하였다.【원전】 23 집 355 면

 

선조31/01/25(신해)

윤승훈(尹承勳)을 경상도 관찰사로, 송응순(宋應詢)을 정언으로, 류영경(柳永慶)을 병조 판서로, 정윤우(丁允佑)를 형조 참의로, 정엽(鄭曄)을 성균 직강(成均直講)으로 삼았다. 【원전】 23 집 373 면

 

선조31/02/24(기묘)

류영경(柳永慶)을 대사헌으로, 이정구(李廷龜)를 집의로, 여우길(呂祐吉)을 지평으로, 정홍익(鄭弘翼)을 봉교(奉敎)로, 박승종(朴承宗)을 주서(注書)로, 이필형(李必亨)을 직강(直講)으로, 이광길(李光吉)을 지평으로 삼았다.【원전】 23 집 393 면

 

선조31/02/27(임오)

이정구(李廷龜)를 동부승지로, 이이첨(李爾瞻)을 문학으로, 류영경(柳永慶)을 병조 참판으로, 조수준(趙守準)을 필선으로, 정엽(鄭曄)을 집의로 삼았다. 【원전】 23 집 394 면

 

선조31/02/29(갑신)

남정 양향사(南征糧餉使)에게 상(賞)을 내렸다. 당초에 양향(糧餉)의 조치에 있어 삼로(三路)로 나누어 각각 관장하게 하였었다. 그리하여 윤승훈(尹承?)은 좌영(左營)을, 류영경(柳永慶)은 중영(中營)을, 성영(成泳)은 우영(右營)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들이 한결같이 성심을 다하여 조처하였는데 그 중에서 좌도(左道)는 곡식의 수량이 매우 많았다. 대군(大軍)이 내려간 뒤로 모두 울산(蔚山)에 모여 있었는데, 좌영과 중영에서 조치한 곡식으로 운반하여 지급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류영경과 윤승훈이 가장 공로가 있고 성영이 그 다음이다. 그리고 낭청(郞廳) 중에서는 이영도(李詠道)도 조처한 공로가 있었다. 또 대군이 충주(忠州)를 경유하면서 충주의 곡식을 조령(鳥嶺) 본처(本處)로 가지고 가는데 있어 관량관(菅糧官) 이시발(李時發)도 성심을 다하여 조처하였다. 이상의 일을 아뢰니, 상이 일렀다. "윤승훈은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진시켰으니 지금 가자(加資)하기가 어렵다. 류영경과 성영에게는 각각 한 자급(資級)씩 가자하라. 이영도는 승직(陞職)시키고 이시발에게는 숙마(熟馬) 1필을 내리라." 【원전】 23 집 394 면

 

선조31/03/26(신해)

지휘(指揮) 풍중영(퐀仲纓)이 게첩(揭帖)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제가 한성에 도착한 지 20일이 넘었습니다. 전하께서 제가 지난날에 공로가 없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즉시 사신(史臣)을 보내어 예를 갖추심에 제가 비록 공손히 받기는 하였으나 부끄럽고 감사한 마음 실로 깊었습니다. -中略- 전하께서는 명철하심이 제 환공(齊桓公)이나 진 문공(晉文公)보다 뛰어나시며 강토도 진(秦)나라나 초(楚)나라보다 작지 않으며, 섬기고 있는 신하들 가운데 윤두수(尹斗壽), 이원익(李元翼), 김명원(金命元), 윤근수(尹根壽), 이덕형(李德馨), 류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노직(盧稷), 심희수(沈喜壽), 김수(金?), 홍세공(洪世恭) 등은 모두 재주가 높고 식견이 탁월하며 강개하고 충의로와 한 때의 성대함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날마다 앞으로 불러들여 부자 사이와 같이 기쁘고 정답게 강론하여 만전의 계책을 이루기를 구하지 않습니까. -中略- 더구나 귀국은 문화(文化)가 거의 중국과 같아 중국 이외에는 대등할 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다만 예절(禮節)과 문장(文章)․풍속(風俗)․병기(兵器)․제작(制作) 등 한두 가지가 조금 다른 것이 있는데 이는 예전 습속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울러 말해보고자 합니다."원전】 23 집 405 면

 

선조31/04/29(계미)

상이 김수에게 이르기를, "경리가 지금 영남으로 수송하라고 독촉하고 있는데 계속 수송할 수는 있는가?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철병(撤兵)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지탱될 수가 있겠는가?""㰡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아마 지탱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이 류영경(柳永慶), 심우정(沈友正)의 장계를 보았더니 좌도는 5월 보름 전까지는 지탱할 만한 식량이 있으나 우도는 더욱 형편이 없다고 하였고, 김신원(金信元), 송일(宋馹)의 장계에는 하루 수송되는 것으로 하루를 지탱하기가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원전】 23 집 425 면

 

선조31/07/15(무술)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군이 이미 길을 나누어 양남(兩南)으로 내려갔으니 군량을 마련하여 공급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급합니다. 식량 운반이 하루라도 끊겨 삼군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탈이라도 생기면 대사를 그르칠 것이니, 신들은 이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경상 감사 정경세와 총관사(摠管使) 류영경(柳永慶) 등의 장계에 '동로 조도사(東路調度使) 심우정(沈友正)이 영 도사(?都司)에게 노여움을 받고 오랫동안 구류(拘留)되어 있다가 중병을 얻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中略- 그리고 이시언(李時彦)을 좌도로 옮겨 심우정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아울러 총관사(摠管使) 류영경으로 하여금 양쪽을 두루 검칙하게 하고 나아가 타도로 곡식을 운송하는 일은 총관사의 명령에 따라 행하게 한다면 양쪽 모두 편리할 것이며 절대로 차질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경세의 장계 안에 '왕 안찰사(王按察使)와 총관사 류영경이 호남으로 달려갔다.'는 말이 있는데, 비록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 안찰과 유 제독은 서로(西路)를 전관(專管)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자기들이 관장하고 있는 지역만 중하게 여기고 다른 곳은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근래에 중국 장수의 조처가 대체로 이러한 일이 많으니 매우 걱정됩니다. 류영경이 호남으로 옮겨가면 거리가 아주 멀어서 호령(號令)이 통하기 어려워져 영남 2로(二路)의 군량은 마련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광정(李光庭) 또한 정2품 중신으로서 전라도에 내려가 있으니 전라도와 충청우도의 군량 운송에 관한 일은 수륙(水陸)을 막론하고 이광정에게 두루 검칙하게 하되, 품격은 류영경과 똑같이 하고 양호 총관사(兩湖?官使)라 칭하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류영경은 경상도에 그대로 있으면서 본도 양로(兩路)의 군량 조치를 전관하게 하고, 아울러 충청좌도, 강원도, 함경도의 군량 운송을 검칙하게 하여 이광정과 양쪽으로 나뉘어 각기 전심 전력하게 하면 일이 조리가 있게 되고, 피차 미치지 못하는 걱정이 없게 되어 매우 편리하고 온당할 듯합니다. 이 뜻을 왕 안찰사에게 자문으로 보내어 그 까닭을 알게 하는 것이 또한 옳을 듯하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3 집 469 면

 

선조31/11/16(정유)

사간원이 아뢰기를,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류성룡은 간사한 자질에다 간교한 지혜로 명성과 벼슬을 도둑질하여 사람을 해쳐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세상을 속여도 세상이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 평생의 심술입니다. -中略- 지난해 왜적이 서울에 다가왔는데도 오히려 화친하자는 의견을 가지고 비변사에서 큰소리를 치니, 류영경(柳永慶)이 앉아 있다가 분이 나서 일어나 말하기를 '전일에도 이미 잘못을 저지르고 오늘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가?'하니 성룡이 문득 성을 내며 '영공(令公)의 비석에는 화친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써야 하겠다.' 하였으니, 그의 방자한 짓에 대해 누가 가슴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中略- 사헌부 지평 이흘(李?)은 그이 친동생인 이협(李?)이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었으니 중요한 사헌부의 직책에 있을 수 없습니다. 여론이 온당치 않게 여기니 체직시키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어찌 그러기까지야 하였겠는가. 전해 들은 말은 반드시 모두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미 체직시킨 대신을 다시 논할 필요 없다. 이흘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23 집 532 면

 

선조31/12/18(기사)

이비(吏批)가 아뢰기를, "본조 판서에 의망할 사람이 부족하니 부임하지 않은 감사도 아울러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신의 뜻도 역시 이와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경상 감사 한효순(韓孝純), 전라 감사 류영경(柳永慶)이 모두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원전】 23 집 546 면

 

선조32/01/07(무자)

호조가 아뢰기를, "왜적이 물러간 뒤에 남쪽 지방의 수습에 관한 일은 하루가 급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경상도의 경우 감사 정경세(鄭經世)는 병으로 용궁현(龍宮縣)에 누워 있어 직임을 수행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신 감사 류영경(柳永慶)도 병으로 체임(遞任)되어 오랫동안 도주(道主)가 없으므로 모든 일이 해이해졌으니,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中略- 본조의 뜻은 이와 같으나 감히 멋대로 품정할 수 없으니 비변사로 하여금 논의 결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전라도는 감사에게 이러한 뜻을 낱낱이 들어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3 집 555 면

 

선조32/04/21(경오)

덕형이 아뢰기를, "신이 훈련 도감 제조로 있지만 도감의 업무가 날로 해이해져 장차 수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포수(砲手)가 매우 필요합니다. 만일 도감을 혁파시킨다면 그만이겠으나 혁파할 수 없는 경우라면 반드시 당상(堂上) 중에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는 자를 정하여 그 업무를 맡아 관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도감과 병조(兵曹)는 서로 안팎이 되니, 판서 류영경(柳永慶)을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삼아서 맡아 관장케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병난이 있은 이후 면천(免賤)․면역(免役)된 자가 매우 많은데 모두를 군역(軍役)에 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한 부대를 이루게 하면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병조 낭관이 빈번하게 바뀌어 일에 허술한 점이 많으니, 감당할 만한 두세 사람을 골라 위임시키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번호(藩胡)들이 변방의 백성들을 살육하고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것은 필시 믿는데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이들이 노추(老酋)를 유인하여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게 한다면 어찌 살육하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비변사의 의견은 어떠한가?"하였다. 【원전】23집 602면

 

선조32/04/26(갑진)

도제조 이항복(李恒福), 제조 류영경(柳永慶), 부제조 최천건(崔天健)이 아뢰기를, "삼가 전교를 보고서야 비로소 옥체가 편찮으시다는 것을 알았는데 놀랍고 민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상께서 편찮으신 것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발병한 것이 아니고, 몇 해 동안 근로(勤勞)하시어 손상된 것이 쌓여서인데 날씨가 점점 더워지므로 발병하게 된 것입니다. 병의 뿌리가 오래되었으니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면 병세가 오래갈까 걱정됩니다. 의관으로 하여금 들어가 진맥하게 한 뒤 약을 의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삼령백출산(蔘쫢白朮散)에 건갈(乾葛), 맥문동(麥門冬), 모과(木果), 오미자(五味子)를 가미하여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지어 들이라고 답하였다. 【원전】 23 집 614 면

 

선조32/06/06(계미)

훈련 도감이【제조(提調) 행 호조 판서 윤자신(尹自新), 병조 판서 류영경(柳永慶), 행 호군(行護軍) 변양걸(邊良傑).】 아뢰기를,"후사(後司) 전초관(前哨官) 전제안(田齊安)과 좌초관(左哨官) 윤지상(尹之商) 등이 영솔한 군사는 모두 중국군의 방자(幇子)로 모집한 사람들입니다. 지난해 봄에 계청하여 뽑아내어 제안 등으로 하여금 장단(長湍) 땅 호곶(壺串)으로 인솔해 가 둔전(屯田)케 하고 나머지 군사는 도감에 머물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두 초관이 모두 해이해지기에 지난번 부득이 그 대임(代任)을 계청하여 냈습니다. 그러나 제안 등이 이미 초관이라는 명호(名號)에서 벗어났으므로 아랫사람들을 검속할 방법이 없으니, 원방(遠方)의 오합지졸들이 흩어져버릴 염려가 있을 뿐더러 농사일마저 허술해질까 매우 걱정됩니다. 전제안과 윤지상 등에게 좌, 우별초관(左右別哨官)이라는 칭호를 주어 그대로 거느린 군사를 영솔하여 농사일을 잘 마무리짓도록 책임지우는 것이 온당할 듯하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3 집 629 면

 

선조32/06/08(을유)

병조가【판서는 류영경(柳永慶)이고 참판은 남이신(南以信)인데 그가 기해년에 우승지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중국 장수들이 중외(中外)에 가득 널려 있었고 국가에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신은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직책을 잘 수행하여 접대하는 업무에 잘못한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상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참판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참의는 이수광(李첧光)인데 그는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등제(登第)하였으나 세상을 따라 부침(浮沈)하여 곧은 지조가 없었다. 참지(參知)는 송준(宋駿)이다.】 아뢰기를, “이덕열(李德悅)의 계사(啓辭)에 '신이 동지사(冬至使)로 부경(赴京)하는데 요즈음 중원(中原) 일로(一路)에 달자(?子)들에 대한 소문이 긴박하다. 마침 겨울철이라 적로(賊路)가 막힘이 없어 노략질하는 변란이 잇따라 발생한다고 한다. 이러한 때에 사신에게 의외의 환란이 꼭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최근 군문(軍門)이【군문은 총독(總督) 형개(邢죐)이다.】 명령한 대로 행차하는 각 원역(員役)을 태반이나 줄였다. 그런데 역관(譯官)이나 서리(書吏), 반종(伴後) 등은 혹 줄일 수 있다 하더라도 군관(軍官)은 세 사람뿐이니 일행을 방호(防護)하는 데에 고단할 뿐만 아니라 진헌(進獻)하는 방물과 공마(貢馬)를 보호하는 데 대단히 염려된다. 원래의 군관 외에 2인을 더 뽑아 데리고 가고 의주(義州)에 있는 군기(軍器)와 궁전(弓箭)을 적당히 가지고 가게 하여 예측할 수 없는 환란을 방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황공하게도 감히 아뢴다.'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지난번 형 군문의 명령에 따라 부경하는 원역을 이미 감축한 마당에 계속 데리고 갈 것을 계청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현재 중원 지역에 달로(?虜)의 소식이 있으므로 군관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더라도 적을 막는 데는 도움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방물을 수호하는 데는 고단할 듯 싶으니, 지난해 성절사(聖節使) 김상용(金尙容)의 예에 따라 군관 2인을 더 정하고 의주의 군기를 적당히 주어 보내는 것이 무방할 듯하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3 집 630 면

 

선조32/06/20(정유)

류영경(柳永慶)은 의논드리기를, "수군과 육군 중에서 최소한 7천~8천의 정병을 택해 내년까지 남쪽 변방 및 경성에 주둔시켜 서로 협력하여 방어하는 계책을 삼는다면 온당할 듯합니다."하고, 이광정(李光庭)은 의논드리기를, "선후책에 의한 군사는 감해야 하겠습니다. 자강책(自强策)을 강구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하고, 변양걸(邊良傑), 이사명(李思命), 이윤덕(李潤德), 조대곤(曺大坤), 권준(權俊), 전봉안(田鳳安)은 의논드리기를,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 절박하기는 하지만 군량을 이을 계책이 전혀 없으니, 우선 철병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하였다. 【원전】 23 집 636 면

 

선조32/06/24(신축)

심희수(沈喜壽)를 예조 판서로, 류영경(柳永慶)을 병조 판서로, 김상용(金尙容)을 승정원 좌부승지로, 윤형(尹泂)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이홍로(李弘老)를【사람됨이 패망스럽고 객기(客氣)가 많다.】 승정원 동부승지로, 남근(南瑾)을【임진란에 대간(臺諫)으로 어가를 호종하다가 길을 반도 가지 않아서 도망갔다. 그러다가 사로(仕路)가 통하게 되자 권문(權門)에 노예처럼 빌붙어 섬겼다. 그의 성격은 교활하고 험특하며 자기보다 나은 자를 원수처럼 질시하였다.】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김상준(金尙寯)을 내섬시 정(內贍寺正)으로, 임수정(林守正)을 예조 좌랑으로, 유석증(兪昔曾)을【사람됨이 비길데 없이 용렬하였는데 사국(史局)에 임명되자 시의(時議)가 대부분 부족하게 여겼다.】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로, 조존세(趙存世)를【임진란 때 어가를 호종하다가 중도에서 사책(史冊)을 불사르고 도망쳤다.】 예문관 대교로, 김선여(金善餘)를【임진란 때 어가를 호종하다가 중도에서 사책을 불사르고 도망쳤다.】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삼았다. 【원전】 23 집 638 면

 

선조32/07/24(신미)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이 복상 단자(卜相單子)로【이산해(李山海)․최흥원(崔興源), 윤두수(尹斗壽), 이기(李?), 이헌국(李憲國), 류영경(柳永慶)을 복상하였다.】 아뢰었다. "복상은 중대한 일이라 집에 앉아서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교가 두 번이나 내리고 대신이 오랫동안 궐원되어 있으니 사체에 관계된 바 실로 염려가 많습니다. 이에 감히 무릅쓰고 전일의 복상인과 아울러 서계합니다. 오직 성상의 선택에 달렸을 뿐입니다." 【원전】 23 집 651 면

 

선조32/08/10(병술)

좌의정의 복상 단자(卜相單子)를 입계(入啓)하니【복상(卜相)된 사람은 이산해(李山海), 최흥원(崔興源), 정탁(鄭琢),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이헌국(李憲國), 이기(李?), 류영경(柳永慶)이다.】 당일에 정사(政事)하여 제수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3 집 661 면

 

선조32/09/01(정미)

이이첨(李爾瞻)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실록》을 상고해보면 '이첨은 바른 사람으로 문예(文藝)를 잘하였으며, 위인이 엄숙하고 판단이 분명하였으며, 지덕(智德)을 갖춘 모습으로 조정에 우뚝 서서 위언(危言)과 당론(黨論)이 제일 먼저 정승 류영경(柳永慶)에게 미치자 죽지 않은 권간(權奸)들이 낙담하였다.' 하였고, 또 '어버이를 효로 섬기고 임금을 충으로 섬기는 것이 지금 세상에 제일인 자였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이첨은 간사하고 악독한 성품으로 일찍이 대각(臺閣)에 들어가 오직 공격하고 해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혼조에 이르러서는 위험한 말로 임금을 놀라게 하고 미혹시켜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켰으니, 영창 대군(永昌大君)이 제 명에 죽지 못한 것은 실로 이 적(賊)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며, 옥사를 조작하여 죄를 얽어 무함함이 모후(母后)에 미치도록 해서 유폐(幽閉)시키고 곤욕을 치르도록 함으로써 불측한 지경에 이를 뻔하였으니, 어찌 충(忠), 효(孝) 두 자를 이런 적에게 붙일 수 있겠는가. 또 자신이 문병(文柄)을 잡아 실제로 《실록》 편수를 전담하였는데, 자기를 기리는 말이 이처럼 낭자하니, 정말 꺼리는 바가 없는 소인이라 하겠다. 【원전】 25 집 674 면

 

선조32/09/12(무오)

복상 단자(卜相單子)를【이산해, 최흥원(崔興源), 정탁(鄭琢),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이기(李?), 류영경(柳永慶).】 입계하니, 이비(吏批)에게 전교하였다. "도승지 최천건(崔天健)을 가자(加資)하고, 이항복을【국사를 일삼지 않았다.】 좌의정으로, 이덕형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으라."【원전】23집 679면

 

선조32/10/12(무자)

류영경(柳永慶)을 대사헌으로, 기자헌(奇自獻)을【사람됨이 침중하고 정도를 지켰으며 아첨하지 않았다.】 병조 참의로, 신흠(申欽)을【사람됨이 재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전한으로, 강연(姜혎)을 장령으로, 권경우(權慶祐)를 직장으로 삼았다. 【원전】 23 집 693 면

 

선수32/11/01(병오)

민몽룡(閔夢龍)이 다음날 나와 사은하고 아뢰기를,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연소한 무리로 남이공, 김신국 등은 붕당을 지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조정을 편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대사헌 류영경(柳永慶), 집의 송응순(宋應洵), 지평 류희분, 사간 송일(宋馹) 등은 언관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일찍이 바로잡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직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이 큽니다. 모두 체차하소서."하였다. 헌납 남탁(南晫), 정언 조탁(曺倬)이, 채겸길(蔡謙吉)의 상소에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된 것을 들어 모두 인피하니, 몽룡이 처치하기를, "일개 유생이 권한 밖의 말을 한 것은 비록 믿을 것이 못되지만 자신이 언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남이공 등의 죄를 거론하지 않았으니 재직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체차하소서."하고, 또 아뢰기를, 남이공과 김신국은 낭관(郞官)의 반열에 있으면서 나라의 권병(權柄)을 잡으려고 부박한 무리와 결탁하여 질투하고 훼방하는 흉계를 자행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하였으니, 아울러 파직하소서."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원전】 25 집 676 면

 

선조32/11/14(기미)

비망기(備忘記)로 정원에 전교하기를, "대신(大臣) 8명, 부원군(府君君) 윤근수(尹根壽)․정곤수(鄭줸壽), 최황(崔滉), 박충간(朴忠侃), 한준(韓準), 이증(李增), 이축(李軸), 판돈녕(判敦寧) 송찬(宋?),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윤자신(尹自新), 의정부(義政府) 심희수(沈喜壽), 구사맹(具思孟), 지 경연(知經筵) 류영경(柳永慶), 정창연(鄭昌衍), 판서(判書) 6명, 판윤(判尹), 경연 동지사(經筵同知事) 이희득(李希得), 정광적(鄭光績),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 8명, 승지(承旨) 6명, 홍문관(弘文館), 주서(注書) 2명, 가 주서(假注書) 1명, 예문관(藝文館) 5명,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 문성군(文城君), 오산군(鳥山君), 기성군(箕城君), 화령 도정(花寧都正), 춘천 부정(春川副正), 평양군(平陽君),의성군(義城君), 서흥군(西興君), 순의군(順義君), 봉림군(鳳林君), 한순(韓淳), 신건(愼죩), 정기명(鄭耆命)에게 각각 필단(匹段) 1필(疋)씩 하사(下賜)하라."하고, 내하물건(內下物件) 2복(?)으로써 전교하기를, "대신에서부터 정기명까지는 각각 1필씩 사급(賜給)하고, 승지에게는 화자(靴子) 1개와 혜(鞋) 1켤레를, 홍문관, , 문관, 주서․가 주서에게는 각각 혜 1켤레씩을 하사하라. 그리고 비변사 당상을 8명으로 서하(書下)한 것은 당상 중에 더러 각조(各曹)의 판서 및 다른 아문(衙門)의 소속으로서 그 속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8명으로 서하했던 것이다. 행여 거듭 받는 사람이나 누락(漏落)된 자, 그리고 이밖에도 응당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해 빠진 자가 있거나 내려보낸 물건이 부족하거든 모두 입계(入啓)하라."하였다. 【원전】 24 집 5 면

 

선조32/11/22(정묘)

대사간 민몽룡(閔薨龍)이 와서 아뢰기를, "근래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연소배들로 남이공․김신국 같은 자들이 봉당을 지어 권세를 제멋대로 농락함으로써 조정을 조용하지 못하게 하고 국사를 와열(瓦裂)시키고 있는데도 사헌부 대사헌 류영경(柳永慶), 집의 송응순(宋應洵), 지평 류희분(柳希奮)과 사간원 사간 송일(宋馹) 등은 언관의 신분으로서 그 죄를 규탄하여 바로잡는 한 마디 말도 한 적이 없습니다.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잘못이 크니 모두 체차를 명하소서. 헌납 남탁, 정언 조탁이 인혐(引嫌)하고 물러갔습니다. 일개 유생(儒生)의 참람된 발언이야 본디 믿고 말 것도 없습니다만, 대체로 남이공과 김신국 등이 제멋대로 권세를 희롱하여 분단을 일으킨 정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언관의 신분으로서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간으로서 말하지 않은 실책이 있으므로 그대로 그 직책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체차를 명하소서.

종부시 정(宗簿寺正) 남이공과 사복시 정(司僕寺正) 김신국 등은 낭관(郞官)으로 있으면서 국권(國權)을 잡으려고 부박한 무리와 결탁하고서 남을 무함하고 헐뜯는 흉악한 행동을 제멋대로 행함으로써 조정을 날로 더욱 어지럽게 하였으므로 여정이 통분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아울러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4 집 8 면

 

선수33/01/01(병오)

사헌부는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 류영경(柳永慶)은 김, 남(金, 南)의 당에 빌붙어 모든 계책과 행동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전일 인피(引避)할 때 단지 '한 번 남이공을 만났다.'고 하여 군부(君父)를 기만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원전】25집 677면

 

선조33/01/03(무신)

헌부가 아뢰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류영경(柳永慶)이 남이공(南以恭), 김신국(金藎國) 등과 모든 모의(謀議)에 대해 주장(主張)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정상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어서 숨기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피혐(避嫌)하는 말에는 모르는 것처럼 하여 자신은 빠져나갈 여지를 만들었으니, 그가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인 죄가 큽니다. 파직시키소서." 제독(提督) 이승훈(李承勳)이 회례하고 나갔다. 지평(持平) 홍식(洪湜)이【위인이 용렬하고 식견이 없었다. 권간(權奸)에게 빌붙어 분당(分黨)에 치우쳤으며 한때의 벼슬을 좋아하여 남의 꾸짖음과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와서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 류영경을 파직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류영경은 파직시킬 필요가 없다."하였다. 【원전】 24 집 20 면

 

선조33/01/05(경술)

지평 홍식(洪湜)이 와서 앞서 아뢴 류영경을 파직시킬 일을 아뢰니, 답하였다. "류영경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원전】 24 집 20 면

 

선조33/01/06(신해)

사헌부가 잇따라 류영경을 파직시킬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원전】 24 집 21 면

 

선조33/01/16(신유)

이항복이 또 아뢰기를, "남방의 형세에 대해서는 우선 논하지 않겠습니다만, 왜적이 왕래하다 보니 민업(民業)이 안정되지 못하여 거의가 다 근거없고 정착지 없는 무리가 되어 있는데, 작년 연말부터 떼지어 도둑이 되었다는 보고가 곳곳에서 들립니다. -中略- 전일 비변사에서 신을 체찰사에 차임하고 류영경(柳永慶)을 부사에 차임한 것은, 신의 병이 봄이 되어도 회복되지 않으면 류영경을 보내어 제때에 책응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입니다. 신이 지금 출발함에 있어 부장도 함께 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방의 형세가 위에 진달한 바와 같으니 무슨 물력으로 양부(兩府)를 개설하여 평상시의 모양을 모방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부장은 서서히 사세를 살펴 행지(行止)를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中略- 이들을 모두 신의 별장(別將)으로 칭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내(道內)의 충성스러운 군사를 모집하여 약속(約束)을 정하고 정제(整齊)해 있다가 신이 불시에 조용(調用)할 수 있도록 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4 집 25 면

 

선조33/06/27(무술)

좌의정 이헌국(李憲國)을 총호사(摠護使)로, 류영경(柳永慶), 황진(黃璡), 이호민(李好閔)을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이충원(李忠元), 윤자신(尹自新), 한준겸(韓浚謙)을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로, 이정구(李廷龜), 김수(金?), 노직(盧稷)을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로, 윤형(尹洞)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이덕장(李德章)을 시릉관(侍陵官)으로 삼았다.【원전】 24 집 83 면

 

선조33/07/04(을사)

류영경(柳永慶) ,황진(黃璡) 등은 의논드리기를, "추존하여 시호를 올리는 것은 전례(典禮)에 관한 일로서 2백여 년 동안 이미 의범(懿範)으로 되었는데, 오늘날 중국 장수들이 도성에 가득 차 국가의 거조를 낱낱이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혹시라도 간인(奸人)이 날조하여 또 다시 주달하게 되면 난처한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규례에 있어 편리하게 선처할 수 있는 것은 마땅히 구례 그대로 시행하고, 기타 시의에 맞추어 추후에 거행할 일로서 천리와 인정의 예절에 해로움이 없는 것은 상교에 의해 봉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하고, -中略- 이충원(李忠元)은 의논드리기를,㰡할 수가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가 없는데 하는 것이 모두 예가 아닙니다. 옛날 열국의 부인이 모두 시호가 있었고, 우리 나라 열성(列聖)의 왕비도 모두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일국의 국모가 되었습니다. 의당 천조에서 사시(賜諡)하던 전례대로 요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나, 《오례의》에 이와 같은 예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왕비의 시호는 그 나라 자체적으로 하였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만약 주저한다면 불가한 것 같습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고례를 널리 상고하여 시호를 올리게 되면 전호(殿號), 옥책(玉冊) 등의 일을 차례로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후(后)'자는 참람함을 범한 것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에 가까우니, 고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에 합하면 행해야 하지만 예에 합하지 않으면 미안한 것이니, 중국 장수의 거류(去留)에 너무 억매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하니, 대신(大臣)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4 집 91 면

 

선조34/02/12(신사)

상호군(上護軍) 류영경(柳永慶)과 부호군(副護軍) 황진(黃璡)이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무상한 자들로 혼전(魂殿)을 조성하는 역사를 감독했는데 난리를 치른 뒤라 여염집의 불결한 것들이 도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전(正殿)의 내외 마당은 있는 인력을 다 들여 흙을 파고 소제하여 정결하게 하였고, 바깥 마당 가 담장까지도 모두 지휘하여 소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외면의 동쪽 담에 배열한 돌이 무너지지 않는 곳은 그대로 수축하였으므로 그 근처 땅 밑에 이런 오물이 있는데도 전혀 살피지 못하여 미처 파버리지 못하였으니, 신들이 잘 검칙하지 못한 죄가 큽니다. 황공하기 그지없어 부복하여 대죄합니다."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198 면

 

선조34/03/10(무신)

류영경(柳永慶)을 형조 판서로, 윤성(尹쉕)을 사간원 사간으로,【위인이 용렬하여 쟁신(諍臣)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홍인헌(洪仁憲)을 강원도 관찰사로,【용렬하고 노쇠하여 방면(方面)의 중직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류색(柳穡)을 예문관 봉교로 삼았다. 【원전】 24 집 211 면

 

선조34/04/30(정유)

비변사가 대신의 뜻으로 아뢰기를, "상께서 '여러 장수들을 별도로 녹훈(錄勳)하는 일에 대하여 여러 의논이 저러하니 여러 의논대로 하되 공의 고하(高下)에 대해서는 시안(試案)을 만들어 의정(議定)해서 아뢰면 발락(發落)하겠다. -中略 - 그리고 최흥원(崔興源)은 황해도 도순찰사가 되어 종사관(從事官) 류영경(柳永慶)과 같이 일로(一路)의 여러 일을 조치하기 위하여 대가보다 먼저 본도(本道)로 갔는데, 최홍원은 낙점(落點)을 받아 왕세자를 배행(陪行)하였고, 류영경은 대가를 호종하여 모두 시종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원익(李元翼)은 평안도 순찰사로 최흥원 등과 같은 때에 명을 받고 먼저 서로(西路)로 갔는데, 또 낙점을 받아 평양에 남아 지키다가 평양이 함락된 뒤에 의주(義州)로 입조(入朝)하였고, 또다시 본도 관찰사로서 순안(順安)으로 나가 주둔하였었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행조(行朝)에 출입한 것은 모두가 공무로 인하여 왕래한 것입니다. -中略- 그리고 호종한 자의 등급을 매기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원훈이 결정되어야만 비로소 마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일에도 성명(聖明)께서 결정해 내려주실 것을 청하였으나 위에서 아직까지 지명하여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삼가 결정하여 내려주시기 바랍니다.㰡하니, 비망기로 전교하기를,㰡전에 내려준 하인(下人)의 치부(置簿)와 반은기(頒銀記)는 마침 안에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 내려서 알도록 했을 뿐으로, 이에 의거해서 논공(論功)하여 외람스러운 폐단이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중에 혹시라도 다행히 논공해야할 사람이 있으면 뒤에 다시 조사하여 내리겠으며 이 단자는 우선 안에다 보관하겠다. 최흥원 등에 관한 일은 참으로 그러하니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다만 류영경은 이 계사에 '대가를 호종하여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해조에서 서계한 단자에는 왜 이름이 없었으며, 최흥원은 종사관까지 아울러 아뢰면서 이원익은 어찌하여 종사관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는가? -中略- 그리고 영상은 도승지로서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또 병관(兵判)이 되어서 어려움을 당하여 있는 힘을 다 바쳤으며, 정곤수는 중국군을 얻어서 돌아왔으니, 나의 생각으로는 경들 2인이 당연히 원훈이 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요즈음 정신이 더욱 혼미하니 경들이 다시 더욱 자세히 살펴서 하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24 집 240 면

 

선조35/01/01(갑오)

이조 판서 심희수, 참판 정사호, 참의 신경진을 체직하고 정랑 이홍주(李弘?), 성진선(成晋善) 등을 삭직하였는데, 정종명(鄭宗溟)을 의망(擬望)한 일로 추고당하여 모두 논죄된 것이다. 류영경(柳永慶)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때 류영경에 대한 임금의 신임이 날로 높아져, 삼공이 이조 판서를 의망하여 추천할 때 그를 거론하지 않았는데도 상이 특명으로 많은 사람을 더 망에 넣게 한 뒤 드디어 이 직에 제수하였다. 【원전】 25 집 683 면

 

선조35/01/11(갑진)

이조 판서를 더 천거하였다.【구사맹(具思孟), 정창연(鄭昌衍), 류영경(柳永慶), 이광정(李光庭)이었다.】 【원전】 24 집 333 면

 

선조35/01/12(을사)

류영경(柳永慶)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이때 이조의 당상이 모두 궐원(闕員)이었으므로 삼공(三公)이 판서를 의논하여 천거하였는데, 한응인(韓應寅), 홍진(洪進), 이정구(李廷龜)를 의망하니, 상이 가망(加望)하도록 명하여 류영경을 판서로 삼았다.】 【원전】 24 집 333 면

 

선조35/02/02(을미)

윤승훈이 아뢰기를, "교분이 두터울 리가 없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요즈음 조정의 진용이 바뀌어 이항복이 수상의 지위에 있으므로 비방이 백방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날 이조 판서를 의천(議薦)할 때에 홍진(洪進)을 의망하고 류영경(柳永慶)을 의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허물을 돌리고 있는데, 홍진은 실상 신이 천거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임국로(任國老)를 의망하지 않았다.'고 하는 등 비방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하였다.【원전】 24 집 349 면

 

선조35/02/02(을미)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우의정 윤승훈(尹承勳)이 아뢰기를, "박이검의 상소에 이항복을 정철의 심복이라고 지적했는데, 신이 알기로는 항복은 실로 정철의 심복이 아닙니다. 요즈음 조정이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항복이 수상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비방하는 말이 백출(百出)하고 있습니다. 신도 전판(銓判)을 추천할 때 류영경을 주의(注擬)하지 않았다 하여 바야흐로 비난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간에서 떠도는 잡스러운 말을 대신은 모름지기 진정시켜야 한다."하였다. 【원전】 25 집 685 면

 

선조35/02/26(기미)

이조 판서 류영경이 두 번째 정사(呈辭)하고 사면해주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원전】 24 집 356 면

 

선조35/02/26(기미)

류영경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원전】 25 집 686 면

 

선조35/03/21(계미)

류영경(柳永慶)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정협을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조정립(趙正立)을 사간원 사간으로, 최충원(崔忠元)을 헌납으로, 목장흠(睦長欽)을 정언으로, 정혹을 홍문관 교리로, 구의강(具義剛)을 수찬으로,【척완(戚횁)의 연줄을 타고 권흉(權兇)과 결탁하였으므로 사류가 천하게 여겨 동렬(同列)에 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강홍립(姜弘立)을 성균관 전적으로 삼았다. 【원전】 24 집 364 면

 

선조35/04/12(계묘)

묘정(卯正)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경연을 열고 《주역(周易)》을 강론했는데, 영사 류영경(柳永慶), 지사 심희수(沈喜壽), 특진관 신잡(申캈)․신식(申湜), 대사헌 정인홍(鄭仁弘), 참찬관 이효원(李效元), 사간 조정립(趙正立), 시독관 박진원(朴震元), 검토관 구의강(具義剛)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습감(習坎)의 대체적인 뜻을 해석하면 무엇인가?"하니, 박진원이 아뢰기를, "이것은 대체로 중복되었다는 뜻입니다. 64괘 중에 먼저 출현하였으므로 괘에만 습자(習字)를 붙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이 괘를 일반적인 말로 이른다면 빠진 속에서도 행해야 된다는 말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만일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빠진 속에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박진원은 아뢰기를, "험란한 속에서 나와 행한다는 뜻인데 한결같이 참되게 행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효(陽爻)로서 속에 있으니 만일 한결같이 참되게 행하지 않으면 제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겠다."하니, 박진원이 아뢰기를, "물이 흘러 차지 않는다는 뜻인데 감괘(坎卦)는 양(陽)으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흘러서 차지 않아 험란한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담자(?字)는 무슨 뜻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대체로 구덩이 속에 다시 구멍이 있다는 뜻입니다."하였다. 원전】 24 집 372 면

 

선조35/04/21(임자)

영사 류영경(柳永慶)은 아뢰기를, "이 괘는 이 시대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구오(九五)가 양강(陽剛)의 덕(德)을 가지고 음험한 시기에 처하여 있으니, 아래에 반드시 어진 이가 있어서 협력하여 도와 주어야 험난함에서 벗어나 시대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원전】 24 집 376 면

 

선조35/06/14(갑진)

예조가 회계하기를,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영상 이덕형(李德馨), 좌상 김명원(金命元), 우상 류영경(柳永慶)은 '등황 재조관(謄黃賚詔官)이 직접 서울까지 오는 것은 과연 난리 후의 잘못된 규례(規例)이니 실로 번번이 그대로 따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런데 이번에 휘호(徽號)를 진하(進賀)하기 위한 사신을 차임하여 이미 출발시켰으니 국총(國寵)이 나오는 것은 더욱 부당하다. 해조의 공사(公事)대로 자문(咨文)을 요동(遼東)에 보내 청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삼가 상의 결단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388 면

 

선조35/07/02(신유)

사시(巳時)에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좌의정 김명원(金命元),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을 인견(引見)하였는데, 동부승지 권협(權?), 가주서 신광립(申光立), 기사관 민경기(閔慶基)․기사관 성준구(成俊耈)가 입시(入侍)하였다. 류영경은 아뢰기를, "신은 인홍이 처음 올라왔을 때 마침 전관(銓官)으로 있었는데, 신의 인재 등용에 대해 잘못된 점이 많다고 여겨 심지어는 편지를 내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뒤 신이 한 번 가서 보았더니 자기 역시 그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개 세련되지 못한 탓에 언어가 과격하였던 것입니다."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정인홍은 신사년 무렵에 장령(掌令)으로 올라왔었는데, 신이 처음 출신한 때라서 서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 당시에 들었던 일을 감히 진달할까 합니다. 인홍이 여섯 가지 조항을 모두 갖추었다고 안민학(安敏學)을 선발하자, 이경중(李敬中)이 말하기를 '안민학이야말로 어리석고 망령된 사람으로 이 선발에 합당하지 않다.' 하였는데, 인홍이 이경중을 탄핵했다고 합니다. 그 뒤 신이 영남에 가서 처음으로 인홍을 보았는데, 본시 오활하고 소루한 유자(儒者)로서 호오(好惡)와 시비(是非)에 대한 생각이 한편으로 치우친 인물이었습니다. 이번에 상께서 특별히 부르시자 외방 사람들은 '산림(山林)의 인사에게 기대할 만한 일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그의 차자를 보건대, 불평과 과격한 말이 많았는데 조정 사람들을 지목하여 도당(徒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적도들에게나 도당이 있는 법이지 어떻게 조정 안에 도당이 있단 말입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인홍이 어떤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은가? 경들은 바른 대로 말하라."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임금의 위엄이 지척에 계신데 어찌 감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인홍을 과격하다고 의아해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누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임금의 위엄이 지척에 계신데 어찌 감히 거짓으로 고하겠습니까. 신이 전일 인홍을 만나 보았는데 그의 소견이 편벽됨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원래 인재가 부족한데 만약 한쪽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다면 한 시대의 인재를 어떻게 수습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인홍의 생각은 남인(南人)을 물리치고 모두 대북(大北) 사람을 등용하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이가 좋지 못한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밖에 대단한 일이 있다는 것은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화수(和愁)가 괴수라는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그가 비록 용맹스럽고 날래다고는 하나 어찌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겠는가."하자, 명원과 류영경이 아뢰기를, "밖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나 지적해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승지를 보내어 백성들을 위무(慰撫)하는 한편 괴수를 찾도록 청했던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괴수라고 하는 주몽룡(朱夢龍) 등 5인이 수금(囚禁)되었는데, 어찌 괴수가 5인일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원전】 24 집 394 면

 

선조35/07/02(신유)

상이 편전에 나아가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김명원, 우의정 류영경을 인견하였다. 상이 또 하문하기를, "인홍이 어떤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가?"

하니, 류영경이 답하기를, "인홍은 남인(南人)들을 배척하고 대북인(大北人)들만 모두 등용하고자 하므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인홍 같은 사람은 쉽게 얻을 수 없는데, 이제 그가 떠나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가 뜬말로 그를 격동시켜서일 것이다."하였다.【원전】 25집 686 면

 

선조35/07/27(병술)

묘시 정각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의 함괘(咸卦)를 강(講)하였다. 영사 류영경(柳永慶), 동지사 이호민(李好閔), 특진관 신잡(申캈), 윤승길(尹承吉), 참찬관 류영순(柳永詢), 사간 김대래(金大來), 장령 이호의(李好義), 시독관 이심(李햖), 전경(典經) 정호선(丁好善)이 입시하였다. 【원전】 24 집 401 면

 

선조35/09/06(을축)

예조가 아뢰기를,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 특별히 제문(祭文)을 올리는 일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은 '해조의 계사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하고, 좌의정 김명원(金命元)과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예문(禮文) 중에 작헌례에는 비록 제문이 없지만 성묘를 중건하여 처음 거행하는 성대한 예이니, 평상시의 관례에 구애될 것 없이 특별히 제문을 만들어 제사를 올리는 사유를 고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은 이와 같습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407 면

 

선조35/09/12(신미)

예조가 아뢰기를, "종묘 및 효경전(孝敬殿)의 악기를 지금 제작하고 있는데 동향 대제(冬享大祭) 때부터 쓸 것입니다. 장악원(掌樂院)에서 본조에 첩보(牒報)하기를 '효경전의 악기는 마땅히 소경전(昭敬殿)의 예에 따라 해야 할 것이나 이번 추향 대제(秋享大祭)의 제례(祭禮)에 한결같이 종묘의 예에 따라 이미 거행하였으니, 이번 악기는 어떤 예로 거행할 것인가?' 하였습니다. -中略- 그래서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좌의정 김명원(金命元), 지중추부사 윤승훈(尹承?), 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등은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등의 악은 태조(太祖)를 위하여 종묘에 올리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니, 종묘악을 효경전에 혼용하여 쓸 수는 없다. 추향 대제 때에 경솔히 사용했다고 해서 어찌 두 번 다시 그르칠 수 있겠는가. 소경전의 예에 따라 별도의 악장을 짓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408 면

 

선조35/09/18(정축)

예조가 아뢰기를, "효경전(孝敬殿)의 제례악(祭禮樂)은 소경전(昭敬殿)의 예에 따라 별도의 악장(樂章)을 지으라는 것으로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례에 대해서도 '종묘의 예를 그대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소경전의 예를 따르는 것이 합당할 듯하나 일이 중대하여 본조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길 바란다.'고 한 것에 대해 윤하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좌의정 김명원(金命元), 행 지중추부사 윤승훈(尹承?),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악장을 고쳐 지으면서 종묘의 예를 그대로 쓸 수는 없다. 다만 오향(五享) 및 속절(俗節)에는 평상시 영은전(迎恩殿)의 예에 따라 설행(設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412 면

 

선조35/10/21(기유)

예조가 아뢰기를, "효경전(孝敬殿)의 재기(再朞)후 제의(祭儀)에 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니, 이항복(李恒福)과 윤승훈(尹承?)은 '아직 부묘(쯊廟)하기 전에는 별묘(別廟)이니 찬품(饌品)과 예절을 대략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따라 생시와 같은 의미를 붙이는 것이 좋다. 태묘(太廟)에서 쓰는 관창(쥭쾕)과 희생(犧牲)의 의식은 전일에 옛 경전을 상고해 보니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오직 상께서 결단하기에 달렸다.' 하였고, -中略- 류영경(柳永慶)은 㰡난리 뒤에 증거를 삼을 만한 등록이 없고 신은 예문(禮文)에 어두워 전후의 의례에 대해 묻는 대로 임시 대답하였으나 종묘의 예식을 그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영변(寧邊) 묘향산의 《실록》에서 휘덕전(輝德殿)과 소경전(昭敬殿) 재기(再朞) 뒤에 거행한 예문을 예관을 시켜 등사해 오도록 하고, 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경문(經文)을 상고하게 하여 참작해서 강정(講定), 시행함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다른 대신들은 병으로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421 면

 

선조35/11/08(을축)

간원이 아뢰기를,【전계는 이질수의 파직에 관한 일이다.】"삼성 추국은【김득강(金得康)의 일이다.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위관(委官)이다.】 체면이 대단히 중대하므로 응참(應參)하는 사람은 대단한 공고(公故)가 아니면 결코 편리한 대로 면직을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문사 낭청(問事郞聽)인 군기시 정(軍器寺正) 김순명(金順命)과 이조 좌랑 이지완(李志完)이 잇따라 병을 핑계삼아 체개(遞改)까지 되었으니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추고를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역적을 체포한 사람들을 논하여 파직시키는 것은 불가하다."하였다. 【원전】 24 집 424 면

 

선조35/11/10(정묘)

정수민 등이 상소한 것을 봉하여 빈청에 내렸다. 좌의정 김명원(金命元),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이 회계하기를, "정수민 등의 상변(上變)의 소와 바친 편지를 보니 그 내용이 매우 흉칙합니다. 거짓이든 사실이든 간에 당연히 구명하여 처리해야 하겠습니다만, 편지 끝에 착압(着押)만 하였고 또 함평 등의 글자 아래 성씨만 쓰고 이름을 쓰지 않았으며 길에서 만났던 편지를 잃어버린 사람도 찾을 수가 없으니 그곳에 가서 적발하려 해도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순천부 김덕인(金德仁) 등의 이름자가 편지 안에 쓰여 있으니 이 사람을 추문하면 혹시 드러나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도 감사에게 비밀리에 글을 보내서 상세히 치계토록 한 다음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거짓이든 사실이든 간에 상변하였으니 본도에 천천히 글을 보내어 처리할 일이 아니고 마땅히 법에 따라 그곳에서 체포하여 잡아와 처리할 일이다. 그리고 상변하였던 사람을 빈청으로 불러들여 그 곡절과 범인에 대하여 상세히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하자, 회계하기를, "정수민 등을 불러 물어보니 그가 공초한 말은 이렇습니다. 역모를 꾸민 자들의 성명을 알 길이 없는데 지금 경관(京官)을 먼저 보내면 소요만 일으킬 뿐, 그들을 체포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하여 상세히 규명해서 치계하게 한 후에 처리하고자 했는데, 지금 상의 하교를 받아보니 매우 타당합니다. 금부 낭청을 보내서 감사와 은밀히 의논하여 성명이 밝혀지는 자를 먼저 체포하고 신흥사(神興寺) 등지에 모여있는 사람도 세밀히 살펴서 체포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4 집 425 면

 

선조35/11/13(경오)

문사 낭청이 위관의【우상 류영경.】 뜻으로 아뢰기를, "대체로 삼성 추국은 모반과 반역 및 강상에 관계된 죄를 추국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므로 그전부터 삼성의 옥에서 정범이 죽으면 그 나머지 종범은 금부로 옮겨 추국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법례입니다. 윤녀(尹女)의 옥사는 처음에 아비를 죽였다는 것으로 말을 만들었으므로 삼성에서 추국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지금은 추핵하는 일에 불과하고, 윤조원(尹兆源) 등이 무고하여 모살(謀殺)한 죄는 강상의 옥에 관계되지 않는데 삼성이 추국하게 되면 뒤폐단이 생길까 염려됩니다."하니, 답하기를, "대간이 아뢴 말이 저러하니 어떻게 해야만 합당할지 모르겠다. 다만 적질녀(嫡姪女)와 적동생(嫡同生)을 모함해 죽게 한 것은 역시 강상에 관계된 듯하니 다시 의논해서 참작하여 시행하라."하였다. 【원전】 24 집 426 면

 

선조35/11/17(갑술)

정원이 위관 류영경(柳永慶)의 뜻으로 아뢰기를, "한영(韓瀛), 연환(連環), 구복(九福) 등의 공초(供招)는 이러한데, 이 일은 십년 뒤에 다시 발생한 것으로 그 당시의 문안이 유실되어 고증할 데가 없으니 성옥(成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각인의 초사(招辭)에 의거하고 그때 사정을 참작해보면, 윤조원 등과 윤녀의 원한 관계는 일조일석에 맺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윤백원이 불의에 죽고 나자 그들은 덕경을 꾀어 소장을 올리게 하고 갖가지 말로 윤녀를 정범(正犯)이라고 지목하였는데 그 단서가 밝혀지기도 전에 곧바로 형문(刑問)하여 장하(杖下)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윤녀에게 범죄 사실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원 등이 시기를 틈타 모함한 자취는 엄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옥을 다스리는 체모는 먼저 사간을 신문하여 그 단서를 잡은 다음 정범을 형추하는 것이 법례인데, 지금 이 사간 중에 한영(韓瀛)은 당초에 옥사에 관여한 사람이 아니고 단지 그 아비가 죽을 때 어떻게 말했는지를 조사해 보려고 부른 것이며, 연환(連環)과 구복(九福)은 벌써 누차 형문을 받고 확실하게 밝혔으니, 지금 또다시 신문하기는 어렵습니다. 덕개(德介)와 영개(永介)는 난 후에 간 곳을 모르겠으니 나문할 길이 없습니다. 신들이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았으나 이 옥사는 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백원이 실지로 독살되었다면【백원이 독살되었다는 말은 윤녀의 아들 이순(李諄)의 상언 중에 실려 있는데, 단지 율무죽과 쇠고기 중에 어느것 때문이었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독살되었다는 말이 잘못된 말이라 하니, 추관의 의도를 알 수 없다. 독살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므로 당시 윤녀도 장문을 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윤덕공(尹德恭)과 윤덕경(尹德敬)이 당연히 연명(聯名)으로 장문을 올려서 원통함을 푸는 게 자식의 심정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덕공이 굳이 사양하고 따르지 아니하고 덕경에게만 장문을 올리게 했으니, 이는 실로 대단히 어긋납니다. 그 사이에는 필시 어떤 이유가 있을 터인데 바로 실토하지 않으니, 먼저 덕공을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밝히게 하소서."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원전】 24 집 428 면

 

선조35/12/29(병진)

정오(正午)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행 지중추부사 윤승훈(尹承勳),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이상의(李尙毅)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신이 류영경(柳永慶), 신잡(申?) 등과 회동하여 의논했으나 미처 완결짓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준의 위인이 통제사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가?"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전에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있을 적에 처신이 검소하고 맡은 일을 잘 조처하였으므로 군졸들이 많이들 좋아하였습니다. 유형은 국사에는 마음을 다하였지만 제장(諸將)을 대함이 너무 엄격하고 사나와서 군졸들은 좋아해도 장사들은 싫어합니다. 이에 반하여 경준은 상하의 장졸들이 모두 아끼고 받들 줄 압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행여 뜻밖의 변고가 생긴다면 70척의 배와 주사(舟師)로 큰 적을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주사에게 배 80척이 있어도 격군(格軍)은 배 1척에 8명씩이므로 이로써 계산한다면 1번(番)에 들어가는 숫자가 8천 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조발(調發)할 때는 민력이 고갈될 것이므로 토병(土兵)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창졸간에 바삐 서두르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중원(中原)에 가서 강화를 청한다고 합니다. 신이 삼가 적모(賊謀)를 헤아리건대, 중원에서 늘 이쪽에다 힘을 쏟으므로 그곳에 가서 이쪽에다 전력을 쏟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하고, -中略- 상이 이르기를, "이같이 미루다가 끝내 어쩌자는 것인가?"하자, 덕형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1년을 미룬다면 1년의 방비를 준비하고 2년을 미루면 2년의 방비를 가설(加設)할 수 있을 테니, 그러면 조용히 선도(善圖)하는 효험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바야흐로 봄철이 되는데 남방의 왜적이 걱정입니다. 비록 변란의 소식은 없으나 반드시 변란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방비에 관한 제구(諸具)를 지휘 조처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은 도원수(都元帥)를 보내고자 하는가, 아니면 방어사(防禦使)를 보내고자 하는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신이 지휘 조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지칭한 것입니다."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경중에서는 요즈음도 연락(宴樂)을 하는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연락을 하는 자가 즐비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후로 경중은 사헌부로 하여금 엄금토록 하고, 외방은 감사가 적발하여 아뢰게 하라."하였다. 【원전】 24 집 436 면

 

선조36/01/07(갑자)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재이의 발생이 근래 더욱 빈번하여 별이 떨어지고 돌이 구르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더구나 정월(正月)에 횐 무지개가 해를 꿰는 변이 있었으니, 상황이 매우 참혹하여 바라보기에 두렵기만 합니다. 해는 중양(衆陽)의 종주이고 무지개는 사특한 음기(陰氣)인데 양이 한창 자라나는 시기에 음기가 사나와 해를 가로 꿰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어떤 일에 대한 감응인지는 분명히 모르겠지만 하늘이 경계를 보여준 것은 심각합니다. 오늘날 시세(時勢)가 걱정스럽고 어려운데다가 민심은 원고(怨苦)에 허덕이고 있는데 내외에 어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마치 지는 해처럼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자질로 외람되이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눈으로 근심스러운 형상이 날마다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털끝만큼도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을 못한 채 공연히 자리만 차지하고 구차히 날짜만 보내면서 국사를 그릇되게 한 탓으로 변이(變異)가 거듭 나타나고 있으니, 황공하고 두려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신들을 파척시키시고 보상(輔相)의 직임을 잘 가려 맡기고 수성(修省)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천심(天心)에 보응(報應)하고 세도(世道)를 돌리게 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재변이 매우 놀랍고 두려우니 사피하지 말고 다시 국사에 힘쓰라."하였다. 【원전】 24 집 439 면

 

선조36/01/14(신미)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을 인견하였는데, 좌승지 송준(宋駿)이 입시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반드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자세히 참고한 뒤에 정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귤적(橘賊)이 우리 나라에 나왔다가 돌아가기도 전에 이 왜인이 뒤따라 왔으니, 그 정상이 매우 수상합니다. 갑자기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한 듯하니, 우선 대마도로 급히 글을 보내어 이 왜인이 아무런 이유없이 우리 나라로 나왔다는 뜻을 효유하고, 왕복하는 사이에는 우선 머물려 두면서 그 정형(情形)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뜻이 어떤가? 절대로 머므르게 할 수는 없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대마도 왜인이 제 마음대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오랫동안 머므르게 할 수 없으니 속히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호조의 일이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각사(各司)의 재정이 모두 탕진되어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전적으로 시민들에게서 판출하는데 모양이 말이 아닙니다. 전에 경연석상에서도 이런 뜻을 전달했었습니다. 호조 당상관 가운데 자상하고 분명하여 그 일을 주간할 수 있는 사람 1원(員)을 특별히 뽑아서 각사의 재정을 마감(磨勘)하고 검칙(檢飭)하게 하여 전적으로 구관(句管)하게 한다면 거의 두서(頭緖)가 있게 될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해사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라."하였다. -中略- 류영경이 아뢰기를, "차관(差官)을 접대할 적에 해사에서 전적으로 힘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해관(該官)또한 이와 같이 하였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이런 등등의 일 때문에 노여움을 발했을 것이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은자(銀子)를 사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경(赴京)할 때 은냥을 매매한 것이 수백 냥이 넘었으니, 중국인들이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이러한데 저들의 은냥 매매를 금하면 저들이 반드시 노여워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은을 채굴하는 데 대한 폐단을 모르는가. 만약 은을 사용하는 길을 열어놓게 된다면 지탱할 수 없게 것이다."하였다.

-中略- 류영경은 아뢰기를, "인접(引接)하겠다는 명이 있음을 듣고 반드시 상께서 묘모(廟謀)에 대한 계책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어 허겁지겁 입시하였는데, 지금 이와 같은 성교(聖敎)를 받드니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말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경들은 나의 뜻이 실지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정신과 기력이 날로 쇠약해지고 달마다 피폐해져서 지려는 해와 같이 가물가물하니, 만기(萬機)의 번잡한 일을 스스로 결단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대위(大位)에 머물러 있으면서 또다시 전복되는 환란을 만나게 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하였다. -中略- 류영경은 아뢰기를, "위에 계시는 성명(聖明)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지탱해 왔는데 이와 같은 전교를 내리시니, 신은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원전】 24 집 458 면

 

선조36/03/17(계유)

전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신(臣) 안중묵(安重黙)이 상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성은 임금, 스승, 아비를 똑같이 섬겨야 합니다. 신의 스승 정개청(鄭介淸)은 역옥(逆獄)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지 14년이 지났는데 공론(公論)이 아직도 답답해 하고 있으며 지극한 원통함을 신설(伸雪)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中略- 죄를 가하려 하면 어찌 핑계가 없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정철(鄭澈)이 이미 길삼봉(吉三峯)의 설(說)을 지어내 류영경(柳永慶)을 무함하여 죄에 빠뜨렸는데 그것은 배절의(排節義) 3자를 지어낸 수단으로 만든 것입니다. 아, 사람을 참소함이 망극하여 죄를 얽어내 억울하게 옥사(獄死)하게 하였는데 사방에다 방(榜)을 걸어 보이기까지 하였으니, 사기(士氣)가 있는 사람은 누군들 분하여 팔을 걷어붙이지 않겠습니까. 성감(聖鑑)이 지극히 밝아서 윤음(綸音)이 가린 것을 풀어 당시에 잘못 죄망에 걸린 사람들을 모두 사유(赦宥)하였으므로 더러 조정의 반열에 드러나 있는 이도 있습니다. 류영경에게 이르러서도 특별히 신설(伸雪)해 주시어 그 아들에게는 관직을 주고 그 동생은 증직(贈職)시켰으므로 억울함을 품었던 사람들이 기뻐서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유독 개청만 아직 신리(伸理)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지의 화기가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전】 24 집 458 면

 

선조36/04/26(임자)

승문원이【도제조(都提調) 이덕형(李德馨), 윤승훈(尹承勳), 류영경(柳永慶) 이다.】 회계하기를, "저번에 성절(聖節) 및 사은(謝恩)에 관한 표문(表文)을 마련할 때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들 맨처음 마련한 말이 간혹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여 여러 차례 대제학에 오가며 계속 수정을 받았는데, 이는 종장(宗匠)이 있으므로 해서 다른 사람은 그 사이에 손을 대기가 마땅치 않아서였던 것입니다. 사대 문서는 종전부터 신중히 여겨왔기 때문에 의논이 온당치 않게 여기면 여러 차례 고치는 것은 예로부터 해 온 일로, 본원이 한 일은 이뿐입니다. 이호민(李好閔)은 본디 문망(文望)이 있어 재상들 중에 제일인데 차자의 뜻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혹시 본원이 표문의 말을 고친 것 때문에 갑자기 막중한 소임을 사임하려고 한 것이라면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470 면

 

선조36/05/06(신유)

영사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정개청의 일에 대해 신이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정철(鄭澈)과 의논이 같지 않았었기 때문에 대간이 배절의론을 가지고 죄를 얽어 만들었던 것이지, 애당초 절의를 배격했던 것은 아닙니다."하고, 이호민은 아뢰기를,"단지 남쪽 지방의 선비들 풍습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논을 짓게 되었던 것이지 절의를 배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자어록(朱子語錄)》에 그런 논이 있으므로 선성(先聖)의 말을 조술했던 것뿐입니다. 초야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곡절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역적의 옥사 때 죽었으므로 이준의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하였다. 【원전】 24 집 475 면

 

선조36/05/23(무인)

예조가 아뢰기를, "진헌할 인삼을 파삼(把蔘)으로 대신하는 문제를 대신들에게 의논해 보니, 행 판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과 오성 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은 '신들은 인삼을 채취하는 묘리를 알지도 못하고 변방 지역의 물가도 알지 못한다. -中略- 그리고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초삼은 자연 그대로 온전한 것이고 파삼은 본성을 잃은 것이니, 약에 쓰기로 말한다면 초삼을 취하고 파삼을 버려야 할 듯하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이 파삼을 귀중히 여겨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으니, 취하고 버리는 뜻을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자품(咨?)하기로 한다면 변명할 말이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중국 조정에서도 어찌 허락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요즈음 삼값이 폭등하여, 진헌에 합당한 양각삼은 비싼 값을 준다 하더라도 쉽게 구할 수가 없다. 모리배들이 때를 틈타 농간하여 값을 십 배나 올려놓았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이 해를 입게 되어 원망과 고통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만일 자문을 보내 허락을 받아 파삼으로 봉진하게 된다면,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의 인심이 본래 교묘하고 간사한데 난리 뒤에는 더욱 심해졌다. 양각삼은 몸체가 하나이므로 속임수를 쓰기가 어려울 듯한데도 지난해에는 쇠꼬챙이를 속에 넣었다가 발각된 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파삼은 대소 장단을 혼합하여 몸체를 이루는 것이겠는가. 이번에 무단히 파삼으로 바꾸어 달라고 자문을 보내 중국 조정에 봉진했다가, 조사받을 적에 만에 하나라도 이처럼 교묘하게 속이는 일이 드러난다면 실로 나라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킬 것이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다시 상량(商量)하여 일의 경중에 따라 잘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다.'했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방물(方物)을 경솔하게 변경하는 것은 곤란다."하였다. 【원전】 24 집 482 면

 

선조36/05/23(무인)

호조가 아뢰기를, "대신들에게 의논해 보니, 관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의 의논은 ' 중국에서는 입고 먹는 것 이외에 별도로 전화(錢貨)를 사용하여 예나 지금이나 통용해 왔는데, 우리 나라만 유독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우리 나라의 습속이 중국과 달라 인내심을 갖고 오래도록 시행하지 못하고 폐단이 생기면 그만 두었기 때문입니다. -中略-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의논은 '돈이란 화폐는 위로는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때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대에 통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 나라에서만 돈이란 화폐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입고 먹는 것이 쌀과 베이고 재화를 통용하는 것도 쌀과 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신이 계미년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적에, 중국 사람들이 재화를 통용하는 문제와 입고 먹는 문제에 있어서 각각 여유가 있는 것을 보고는 매양 우리 나라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병화(兵火)를 겪은 뒤이므로 공사의 물화가 남김없이 탕갈되었으니, 만일 돈을 주조하여 통용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험삼아 사용해 보자는 의논은 진실로 소견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듣건대, 조종조에서도 일찍이 시행했었는데, 변계량(卞季良)이 상소하여 돈의 폐해를 진달하면서 정지하기를 청하였다고 하니, 이는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만일 이번에 한때의 소견만으로 경솔하게 시행했다가 폐해가 있게 되어 도로 폐지한다면,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해조로 하여금 심사 숙고하여 어떤 쇠로 주조하고 어떤 모양으로 표준을 삼으며, 어떤 방편을 마련해 통용해야 영구히 통용할 수 있고 폐해가 없게 될런지를 먼저 자세하게 계획해서 절목을 마련하게 한 다음에 다시 의논해 처리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돈을 통용하는 문제에 대해 대신들의 뜻이 모두 시험삼아 사용해 보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고 있으니, 앞서의 공사(公事)에 의해 사목을 마련하도록 하여 양사(兩司)에 계하하셔서 서경(署經)하게 한 다음에 거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돈을 사용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나는 평소 우리 나라에서는 반드시 시행할 수 없다고 여겨 왔다. 이는 대체로 인정과 습속이 중국과 같지 않은 점이 있어서, 마치 노(魯)나라의 장보관(章甫冠)을 월(越)나라에서는 쓸 수 없었던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본받았다가는 뒤에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될 것인데, 어떻게 정철(正鐵)같은 천한 물질로 돈을 주조하여 통용할 수 있겠는가. 나의 소견은 이와 같다. 본조는 시험삼아 사목을 마련하여 아뢰라."하였다. 【원전】 24 집 482 면

 

선조36/05/25(경진)

약방 제조가【류영경(柳永慶)․신잡(申캈)․이상의(李尙毅)이다.】 중전에게 문안하니, 답하기를, "평안하다. 복통이 오늘은 나은 듯하다."하고, 술을 내렸다. 약방이 아뢰기를, "신들이 의관을 통해 삼가 듣건대, 내전의 옥후(玉候)가 날로 점점 나아지지만 뱃속의 응어리진 증세는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고 수라도 평소처럼 드시지 못한다고 하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이미 7일이 지났으므로 산실청(産室廳)을 파하고 나가야 할 듯합니다만 내전께서 기력이 완전히 회복되시지 못하였으니, 아직은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파하고 나가라고 답하였다. 【원전】 24 집 484 면

 

선조36/05/28(계미)

병조가 아뢰기를, "정탁(鄭琢)의 치사(致仕)에 관한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해 보니, 오성 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의 의논은 '치사하는 규정에 대해 전부터 조신(朝臣)들 중에 아는 사람이 없었고, 신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中略- 또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의논은 㰡치사의 규정은 드물게 있는 일이므로 시행해 온 옛적의 준례를 신이 자세히 들어보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경솔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시임(時任)으로 치사하기를 진걸(陳乞)하였는데, 치사라는 것은 직사를 도로 돌려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시임으로 치사하는 것은 진실로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옛적에는 별함(別銜)으로 치사하는 제도도 있었으니, 이는 필시 한때에 원로를 우대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일일 것입니다. 정탁은 일찍이 의정(議政)을 지냈고 늙어서는 물러나 시골에서 지내고 있는데 이번에 진소(陳疏)한 것에 따라 그의 치사를 허락했으니, 정탁이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와 조정에서 원로를 우대하는 뜻에 있어서 둘 다 극진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특별히 원임(原任)으로 치사하게 한다면 그를 영광스럽게 해 주는 은전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은혜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아래에서 함부로 의논하기 어렵습니다.'고 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시임으로 치사하는 것이 의심할 바가 없을 듯하다."하였다. 【원전】 24 집 486 면

 

선수36/06/01(병술)

돈[錢]을 사용하는 일로 2품 이상의 관원을 명하여 대궐에서 회의하게 하였다. 우의정 류영경은 의논드리기를, "동철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는 시행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새로 시행되는 돈에 대한 법은 그 제도를 엄격히 만들지 않으면 간사하게 속이는 근심을 막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걱정하여 가혹한 법으로 묶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어서 시행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하니, 상이 류영경의 의견에 따랐다. 【원전】 25 집 690 면

 

선조36/06/02(정해)

상이 별전에 나아가니, 입시하여【영사 류영경(柳永慶), 동지사 심희수(沈喜壽), 특진관 송언신(宋言愼)․노직(盧稷), 참찬관 이경함(李慶涵), 시강관 류몽인(柳夢寅), 기사관 임연(任?), 사경 민관기(閔官基), 지평 이유연(李幼淵), 정언 신율(申慄), 기사관 정호관(丁好寬)․배용길(裵龍吉).】 《주역(周易)》을 진강하였다. 노직이 아뢰기를, “길에서 장겸(張謙)을 만나서 매우 후하게 접대했더니, 장겸 또한 중국의 사신의 무례함을 말했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조만간에 마땅히 물의가 있게 될 것입니다."하였다.【원전】 24 집 487 면

 

선조36/06/24(기유)

2품 이상의 관원들을 대궐 안에 모아 전폐(錢幣)를 사용하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의논드기기를, "오늘날 국가의 예산이 바닥이 나서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신하가 지탱해 갈 대책이 없으므로 전화(錢貨)를 사용해 보자는 의논을 하게 된 것이니, 우선 시험해 보는 것도 불가한 일은 아닐 듯합니다. 다만 그전부터 여러 차례 이런 의논이 있었는데도 시행하지 못했던 것은 필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일에는 해조로 하여금 먼저 절목을 마련하게 한 다음에 다시 의논해서 처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의논드렸던 것입니다. 지금 해조가 마련한 사목(事目)을 근거로 반복해서 참고해 본건대, 해조가 철(鐵), 연(鉛), 동(銅) 3가지 쇠를 재료로 쓰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철은 본래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연철은 비록 우리 나라에서 나기는 하지만 채취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으니 이것은 시행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이유입니다. 또 새로 시행하는 전법(錢法)에 대해 엄격하게 과조(科條)를 재정하지 않는다면, 간사한 자들의 소행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고, 만일 이를 염려하여 한결같이 준엄한 법으로만 처리한다면 백성들이 필시 불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우매한 소견에는 시행하기가 어렵다고 여겨집니다."하니, 전폐 주조에 관한 의논을 거행하지 말라고 정원에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496 면

 

선조36/06/25(경술)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좌의정 윤승훈(尹承?), 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대제학 이호민(李好閔), 우참찬 황진(黃璡)이 아뢰기를, "익운 공신(翊運功臣)들이 등급을 마련해야 하겠기에 충훈부에 있는 녹권(錄券)의 전례를 조사해 보니,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경우 태종 대왕이 정안공(靖安公) 시절에 일등 공신의 첫머리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번에 왕세자도 종묘와 사직을 호위한 공로가 있으니 마땅히 그전의 예대로 처리해야 할 듯합니다. 왜적을 정벌한 여러 장수들 중에 안위(安衛)는 행상의 대전에는 미처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순신(李舜臣)의 장계에 마련한 군공의 내용을 보면 권준(權俊)이 첫머리에 있고, 이순신(李純信)이 둘째에 있으며, 정운(鄭運)은 셋째에 있고, 배흥립(裵興立)은 넷째에 있었습니다. 인원수가 많은 듯하여 그 중에 우등한 사람을 뽑다보니, 정운은 빠지고 배흥립은 참여하여 일이 미안스럽게 되었습니다. 정운을 추가하여 녹공할 수 없다면 이 두 사람도 앞서의 계사대로 산개(刪改)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 날에 이희득(李希得)은 서울에서부터 호종하다가 중간에 공사로 출사(出使)했었지만 다시 의주(義州)로 들어왔으므로 서울에서부터 호종한 사람에 관계되기 때문에 취품했던 것이고, 이병(李?)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이지만 평양(平壤)에서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관직을 제배(除拜)했다가 병으로 체직하고, 앞질러 동궁에게 갔었기 때문에 녹공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희득은 참여하게 되었으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자못 온당하지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심희수(沈喜壽)는 성응길(成應吉)의 종사관으로서 뒤쫓아 평양에 이르렀고, 의주에 있으면서 요동에 들어가 청병(請兵)할 때에 중국 장수들을 접대하느라 노고가 많았습니다. 만일 심희수을 녹공할 경우에 류몽정(柳夢鼎)은 임진년의 성절사로서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할 적에 뒤따라갔고, 북경에 도착해서는 정문(呈文)하여 위급을 상고(上告)하는 노고가 있었으니, 류몽정만 유독 빠지게 된다면 미안스러울 듯합니다. 이 네 사람을 참여시키려면 모두 참여토록 해야 하고 삭제시키려면 모두 삭제시켜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대조(大朝)를 호종한 견마배(牽馬陪) 및 사알(司謁) 등이 이미 녹공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동궁을 호종한 견마배 및 사약(司촻)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서리 김원남(金元男) ,전유형(全有馨)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묘와 사직을 호위한 공로가 있었습니다. 비록 하천(下賤)한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그 공로가 특이한 듯한데, 이들은 또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세자도 아울러 녹공하는 일로 고사(故事)와 전례를 고찰해서 처리하고, 두 사람을 삭제하여 고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이희득, 심희수, 류몽정은 모두 녹공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동궁의 견마배를 참여시키는 것은 방해로울 것이 없으나, 사약까지 참여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김원남 등이 비록 호종했다고는 하나 별로 특이한 공로가 없었으니 그들을 정훈(正?)에 참여시키는 것은 또한 외람한 듯하다."하였다. 【원전】 24 집 497 면

 

선조36/06/26(신해)

영의정 이덕형, 오성 부원군 이항복, 좌의정 윤승훈, 우의정 류영경, 대제학 이호민, 우참찬 황진이 아뢰기를, "전부터 등급 단자(等級單子)는 직품의 고하에 따라 성명을 쓰지 않고 공의 경중을 가지고 참작해서 등급을 정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전의 준례대로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이름 밑에 어떤 공로가 있었음을 기록해 넣고 싶으니, 어제 입계한 단자를 도로 내려주소서.㰡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㰡공로의 등급을 논하는 일은 곧 국가의 더없이 큰 일이어서 취사(取舍)하는 것을 실적(實績)과 공론에 의해서 하여 조금도 마음에 꺼림직함이 없게 해야만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참여하지 못한 사람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이 점에 대하여 십분 자세하고 신중하게 사핵하고자 해서 등급을 정한 뒤에 다시 살펴보니 더러는 참작해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에 두 원훈이 여러 당상들과 서로 의논하여 응당 정훈에 참여해야 할 사람들을 결정한 것 이외에 공사로 인하여 뒤늦게 당도해 호종한 사람 약간을 차록(箚錄)하여 다시 감정할 것에 대비해 놓았습니다. 심희수와 류몽정 등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이 두 사람만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뒤에 당도하여 호종한 사람들의 날짜의 선후와 의주에 있을 때에 분주하게 일한 것을 조사해 보니, 한응인(韓應寅)․오억령(吳億齡)․신경진(辛慶晉)은 북경에 갔다가 개성(開城)까지 돌아온 뒤에 그대로 호종하여 의주로 들어갔었는데, 그 중에 한응인은 더욱 중국 장수들의 접대에 분주하였습니다. 심희수는 뒤늦게 평양(平壤)에 도착하였으니, 개성에서부터 호종한 사람과는 호종한 시일의 선후에 차이에 있습니다. 하지만 수고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참여하고 누구는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 지극히 미안스러운 일인니, 심희수만 참여시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희득(李希得)은 서울에서 대가를 호위하고 개성까지 가서 경성 순검사(京城巡檢使)가 되어 배사하고 나왔다가 5월에야 비로소 평양에 들어갔고, 6월에는 중전께서 북도에 행행하시게 되자 명을 받고 함경도에 갔다가 9월에야 비로소 의주로 돌아왔으니 그 동안에 호종한 시일이 매우 적었습니다.

이병(李?)은 처음부터 호종했는데도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성중(李誠中)은 통어사로서 5월에 뒤이어 평양에 가서 호종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름이 원훈들이 차의(箚議)하여 결정한 속에 들어 있는데도 당초에 계품하지 않았습니다. 이병 등도 이미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희득만 참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온당하지 못합니다. 어제 계품할 적에 '삭제하려면 모두 삭제해야 한다.'고 한 것이 대개는 이와 같은 일들을 염려하여 한 말이니, 아울러 삭제하여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 "류몽정, 심희수, 이희득을 삭제하고 싶다는 뜻인가?"하자, 회계하기를, "여타의 사람들이 이미 참여하지 못했으니, 이 사람들도 마땅히 모두 개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하였다.【원전】 24 집 497 면

 

선조36/07/16(경오)

정원에 전교하기를, "삼공(三公)과【이덕형(李德馨)․윤승훈(尹承勳)․류영경(柳永慶).】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을【이항복(李恒福).】 명초하라."하였는데, 영상 이덕형이 병 때문에 나오지 않으니, 전교하기를, "내가 녹훈(錄勳)에 관한 일을 논의하려 하였는데, 수상이 오지 않았으니 어찌 수상이 없이 의논할 수 있겠는가. 녹훈에 관한 일은 뒤에 해야 하겠으나 대신이 왔으니 인견하겠다."하였다.【원전】 24 집 501 면

 

선조36/07/23(정축)

윤성(尹성)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왕세자빈궁(王世子嬪宮)의 의장(儀仗)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떠한지를 여쭈자, 윤허한다고 전교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 이원익,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윤승훈(尹承勳),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왕세자빈이 써야 할 의물(儀物)은 이미 《오례의》에 실려 있고 또 덕빈(德嬪) 때에 썼던 의물은 사람들이 본 것이 있으니 해관(該官)이 살펴서 시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상께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이러한 전의(典儀)에 대해서는 구규(舊規)를 찾아 품질(品秩)을 강구하여 전례에 따라 마련하는 것이 유사(有司)의 직분입니다. 지금 그 유래를 모르고 분명한 근거가 없다 하여 헌의(獻議)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도 무엇을 근거로 말하겠습니까. 국법에 근거할 것이 없으면 고사(古史)에서 살피거나 고로(古老)에게 물어서 마땅한 것을 참작하여 여쭈어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상께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506 면

 

선조36/08/10(계사)

묘시(卯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하였는데 영사 류영경(柳永慶), 동지사 이호민(李好閔), 대사헌 박홍로(朴弘老), 특진관 신식(申湜), 정사호(鄭賜湖), 참찬관 윤성(尹쉕), 시강원 홍경신(洪慶臣)․강첨(姜籤), 정언 금업(琴슑), 가주서(假注書) 송극인(宋克휖), 기사관(記事官) 김대덕(金大德)․권혼(權昕)이 입시하였다. 류영경은 아뢰기를, "《정전》의 '유기점(有其漸)'의 점자와 '점혁(漸革),점지(漸漬)'의 점자는 고저(高低)가 같지 않은 듯합니다."하였다. 【원전】 24 집 514 면

 

선조36/08/10(계사)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세도(世道)가 날로 글러가고 인심이 점점 험악해지며 연운(年運)이 좋지 않으므로 외구(外寇)가 없더라도 토적(土賊)이 크게 성합니다. 평시에는 외방(外方)에서도 사대부(士大夫)의 집은 감히 침해하지 못하였는데 근래는 조사(朝士)가 피살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피살되었는가?"하자, 류영경이 이뢰기를, "전 안동 부사(安東府使) 황극중(黃克中)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곳에 살고 있었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대흥(大興)에서 살았다 합니다. 수원(水原)에 있는 최천건(崔天健)의 집도 화적(火賊)이 침범하였다고 하는데, 가을, 겨울 사이에는 도적떼가 많아질 것입니다. 충청도 내포(內浦)는 인심이 나쁘니, 그곳의 수령은 각별히 가려서 보내야 마땅하겠습니다. 살길이 있으면 도둑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온갖 조치가 지금처럼 어려운 때가 없습니다. 적국(敵國)의 어려움이 어찌 이 도둑과 같겠으며, 선후(善後)의 어려움이 어찌 이 시기와 같겠으며, 재변의 위태함이 어찌 지금과 같겠습니까."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저번 해풍(海風)의 변 때문에 인물이 많이 죽고 기계(器機)가 많이 없어졌는데, 하늘의 노여움은 아직도 뉘우치지 않습니다."하고, 호민은 아뢰기를, "어렵고 위태한 이때에 위에서는 각별히 두렵게 여기고 삼가시나 사기(事機)는 극히 번잡합니다. 예전부터 언로를 여는 것은 대개 뭇사람의 계책이 다 나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일 김순명(金順命)이 아뢴 것에 무슨 실언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조보(朝報)와 정원의 계사로 보면 그에게는 잘못한 점이 없고 바로 그의 직분이었습니다. -前略- 그런데 성지(聖旨)가 엄준하게 두 번이나 내려졌으니, 오늘 입시한 신하들이 누구인들 이 분부를 미안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신은 매우 슬퍼집니다."하였다.【원전】 24 집 515 면

 

선조36/08/13(병신)

묘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갔다. 영사 류영경(柳永慶), 지사 윤근수(尹根壽), 특진관 조정(趙挺), 류희서(柳熙緖), 장령 이호의(李好義), 시독관 이덕형(李德泂), 헌납 신율(申慄), 시독관 권진(權縉), 가주서 송극인(宋克휖), 기사관 김대덕(金大德)․권혼(權昕)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첫 대문의 소주(小註)에 '미자(微子)가 떠난 것은 도리어 쉽지만 비간(比干)이 줄곧 간(諫)하다가 죽은 것은 또한 도리어 색성(索性)하다.' 하였는데, 색성이란 무슨 뜻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이는 어록(語錄)에 너무 심하다고 하는 뜻과 같습니다."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미자가 떠난 것과 비간이 간하다가 죽은 것은 다 같이 비통한 마음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정(貞)하되 이롭지 못하였고, 기자가 수노(囚奴)까지 된 것만이 정한 것이 이롭게 된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사실 그렇지만 나는 색성의 뜻을 몰라서 물은 것이다. 소(素)자의 뜻이 아닌가?"하자, 윤휘(尹暉)가 아뢰기를, "고서(古書)에 '왕안석(王安石)은 색성한 소인이다.'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누구의 말인가?"하니, 윤휘가 아뢰기를, "신이 누구의 말인지 기억하지 못하나 이 말이 분명히 있습니다."하고, 덕형은 아뢰를, "《중용》의 은벽한 이치를 찾아내고 괴이한 짓을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심하다는 말과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 기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였다는 것은 기자가 아니라 미자일 것이다. -中略- 도간이 유양(庾亮)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유양이 그 말을 꾸며 만든 것이고, 서시는 병란에 죽었는데 오호(五湖)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하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저 교동(狡童)의 노래도 기자의 말이 아닙니다. 나라를 잃은 뒤에 임금을 가리켜 교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라 하였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느 중국 사신이 기자묘(箕子廟)에 알현하고, 시(詩)를 짓기를 '백수에 무왕 만나 봉지를 얻었으나, 황천 가서 성탕 볼 낯이 없구나.[白首有封逢聖武 黃泉無面見成湯]'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무식한 말이니, 따질 것도 없다."하였다. 근수가 아뢰기를,"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무슨 까닭인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삼한(三韓)이 국호이었으므로, 한을 가리켜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공가(孔哥), 인가(印哥), 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입니다. 대개 기자의 작은 아들이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선우라 합니다. 고시(古詩)에 '기자의 후손에는 털북숭이가 많다.[箕子枝裔多혚翁]' 하였는데, 대개 선우추(鮮于樞)를 가리킨 것입니다."하고, 윤휘는 아뢰기를, "평안도에서는 선우가가 대대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이 된다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중국 사신이 기자묘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역장(逆葬)이니, 너희 나라에는 반드시 기자의 자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그것은 풍수설(風水說)입니다."하였다.【원전】 24 집 518 면

 

선조36/08/26(기유)

묘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독하였는데, 영사 류영경(柳永慶), 지사 한응인(韓應寅), 특진관 송언신(宋言愼)․박동량(朴東亮), 참찬관 강연(姜?), 집의 윤수민(尹壽民), 사간 강첨(姜籤), 시독관 조탁(曺倬), 검토관 송보(宋숮), 기사관 이극신(李克信)․황경중(黃敬中)․권혼(權昕)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三)은 양위(陽位)이고 내괘(內卦)의 위에 있으므로 지나치게 강하고 엄한 뜻인데, 무슨 까닭으로 부자(婦子)를 말하였는가?" 하자, 조탁이 아뢰기를, "부자는 곧 부인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자로 보면 부자란 부인을 이른 말이 아니다."하니, 송보가 아뢰기를, "부자는 서로 연접하여 가까우므로 경계한 것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물은 것은 부자와 부인이란 칭호가 같으냐 다르냐는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이 효에는 부자가 없어야 할 것인데 부자를 말한 것은 학학에 대한 것입니다."하고, 송보가 아뢰기를, "대개 한 집안의 무리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자란 한 것은 주부(主婦)를 가리킨 것인가. 자제(子弟)를 가리킨 것인가? 처자(妻子)라는 문자로 보면 지어미와 아들이 아니겠는가?"하니, 조탁이 아뢰기를, "처자도 부자라 할 수 있습니다."하고, 강첨이 아뢰기를,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소주(小註)에 상세히 말하였습니다."하고, 송언신이 아뢰기를,"지위로 보면 주부를 가리킨 듯합니다. 남자는 엄중함으로 처하지 않으면 가도가 어려워질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주부,자부(子婦)인지, 지어미와 아들인지를 구별하려는 것이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집안을 주장하는 지어미를 말하고, 아내와 아들을 나누어 말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성인(聖人)의 이 말은 후세의 인정(人情)을 매우 잘 안 것입니다. 가장(家長)이 스스로 닦아서 엄정하면 가도가 바로잡힐 수 있겠으나 가장이 스스로 다스리기를 게을리하면 가도가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니, 성인의 가르침은 천년 뒤에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이들이 천하기는 하나 극도로 혼란한 상황에서 다들 뒤에 처지지 않았다. 이들이 없었다면 조정의 진신(振紳)이 있더라도 온갖 거조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니 또한 이들에게 힘입은 것이 없지 않은데, 이제 삭제한다면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북방의 신보(申報)가 이어지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약탈하러 오더라도 정엽(鄭曄)이 앓아 누웠고 모든 기구가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방이 허술하므로 적이 물러가더도 장래가 염려스러우니, 우상(右相)은 헌책(獻策)하도록 하라."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대단한 적은 아닌 듯하나 노토(老土)가 심처(沈處)의 호(胡)를 유인하다면 환난이 작지 않을 것인데, 객병(客兵)은 멀리 가더라도 반드시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개 지난해에는 남도(南道)에 흉년이 들고 올해에는 북도가 크게 재해를 입었으니, 군량을 대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본도(本道)의 쇄환(刷還)은 이제 거행해야 하겠으나 인심이 매우 나쁘고 살길이 극히 어려우니, 반드시 어사(御史)를 가려 보내어 착실하게 해야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병사(北兵使)는 사람됨이 능히 적을 막을 만한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문관 가운데에 조금 감당할 만한 자인데 늘 변방의 일에 유념합니다. 참으로 장략(將略)이 있는지는 신이 모르겠습니다. 적의 정세가 긴박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양식도 아울러 조치하라는 것을 또한 어사가 갈 때에 분부해야 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영동(嶺東)에서 곡식을 옮겨가야 할 형세인데, 감당할 만한 사람을 보내면 스스로 잘 조치할 것입니다. 쇄환하는 일은 혹 잘 처치하지 못하면 그 폐해가 끝이 없을 것입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권관(權管), 만호(萬戶) 같은 변장도 가려서 보내야 할 것이다. 백성이 쇄한되더라도 수령이 어루만져 돌보지 않으면 매어 둘 수 없을 것이니 모든 변장을 각별히 가려 차출하라."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상교(上敎)대로 신칙(申?)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臺諫)이 수령은 번번이 논하면서 권관, 만호는 논한 적이 없으니, 어찌 미관 말직이라 하여 빼놓겠는가. 사체가 이러하여서는 안 될 듯하다. 진졸(鎭卒)의 고락이 달려 있으니 수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뒤로는 반드시 듣고 보는 대로 탄핵해야 한다. 또, 수령을 세 번 서경(署經)하는 데에는 뜻이 있는데, 지금은 서경하고 배사(拜辭)하여도 곧 탄핵하므로 체역(遞易)에 따른 영송(迎送)의 폐단이 적지 않으니, 매우 삼가야 한다."하였다. 【원전】 24 집 525 면

 

선조36/08/28(신해)

묘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주역》의 가인괘(家人卦)를 강독하였는데, 영사 류영경(柳永慶), 지사 홍진(洪進), 특진관 노직(盧稷)․윤승길(尹承吉), 대사간 권희(權憘), 참찬관 이경함(李景涵), 시독관 이덕형(李德泂), 지평 원호지(元虎智), 검토관 송보(宋숮), 기사관 금개(琴愷), 황경중(黃敬中), 권흔(權昕)이 입시하였다. 상이 전에 수강한 《주역》 가인괘의 㰡초구는 가정을 둔 처음에 법도로 막으면 [初九閑有家]㰡부터 㰡집안이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다. -中略 이덕형은 아뢰기를, "사(四)는 음효(陰爻)가 외괘(外卦)에 있어 음위(陰位)를 얻었으니, 한집안에서 마치 가모(家母)가 정위(正位)에 있어 그 집을 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집주(集註)》에 운운한 것이 좋은 논(論)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부(富)는 금백보화(金帛寶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의(禮義)로 그 집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하였다.【원전】 24 집 526 면

 

선조36/09/21(갑술)

정원에 전교하였다.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윤승훈, 우의정 류영경, 영중추부사 이원익, 아성 부원군 이산해, 오성 부원군 이항복,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성군(全城君) 이준(李準), 진흥군(晉興君) 강신(姜紳), 양릉군(陽陵君) 허욱(許頊), 무성군(茂城君) 윤형(尹泂), 지경연 홍진(洪進), 동지경연 심희수(沈喜壽), 이호민(李好閔), 홍여순(洪汝諄), 대사헌 신식(申湜), 행 도승지 윤돈(尹暾), 우승지 윤청(尹픺), 좌승지 강연(姜혎), 좌부승지 윤휘(尹暉), 우부승지 이경함(李慶涵), 동부승지 류몽인(柳夢寅), 부제학 신흠(申欽), 대사간 박승종(朴承宗), 우빈객 기자헌(奇自獻)에게 각각 돈피 사모 이엄(퍗皮紗帽耳掩) 1부(部)를, 직제학 홍경신(洪慶臣), 전한 홍식(洪湜), 응교 정협(鄭協), 부응교 구의강(具義剛), 교리 이심(李햖), 부교리 조작(曺晫)․권진(權縉), 수찬 김광엽(金光燁), 조즙(趙?), 부수찬 송보(宋?), 강주(姜켩), 주서 금개(琴愷), 가주서 박대겸(朴大謙), 서경우(徐景雨), 봉교 심광세(沈光世), 대교 김대덕(金大德), 검열 황경중(黃敬中), 정호관(丁好寬), 권흔(權昕), 집의 윤수민(尹壽民), 장령 윤의(尹휆), 이구징(李久澄), 지평(持平) 류시행(柳時行)․원호지(元虎智), 사간 강첨(姜籤), 헌납 이선복(李善復), 정언 정입(鄭쬬), 금업(琴슑), 보덕 권반(權盼), 필선 류간(柳澗), 문학 이순경(李順慶), 사서 최기남(崔起南)․조중립(趙中立), 설서 신광립(申光立)에게 각각 서피 사모 이엄(鼠皮紗帽耳掩) 1부를 내려 주라. 사례(謝禮)하지 말라."【원전】 24 집 540 면

 

선조36/10/02(갑신)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좌의정 윤승훈(尹承勳),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지난밤 천둥과 번개의 변고는 지극히 놀랍습니다. 지금 계절로 본다면 소리를 거둬야 될 때가 된 지 오래인데도 입동(立冬)이 가까와 오는 이 때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천둥이 울리는 것이 여름철보다 심하니, 음양(陰陽)이 도수를 잃은 변고가 막대합니다. 지난해부터 전사(前史)에 보이는 천재(天災), 지변(地變), 물괴(物怪)가 거듭 나타나고 때아닌 천둥, 번개가 그치지 않고 잇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저 재변(災變)은 헛되이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부른 까닭이 있게 마련인데, 이 어렵고 위태한 때에 하늘의 노여움이 이러하니,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변변치 못한 자로서 자리를 차지하여 녹만 먹으며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듣고 보는 것이 절박한 근심 아닌 것이 없는데도 계책을 세워 위태로운 것을 도와서 재변을 그치게 하고 인심을 수습하기를 도모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그 죄가 더욱 막중합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시세를 깊이 살펴 신들을 먼저 물리침으로써 직분을 다하지 못한 채 자리만 차지한 신하를 경계하시고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도리를 극진히 함으로써 하늘의 꾸중에 답하는 실상을 보이소서. 그리하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천변(天變)이 비상하여 몹시 두려우니, 다시 더욱 덕을 닦고 행실을 살펴야 하겠다. 경(卿)들은 어진 정승으로서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보필하는 도리를 더욱 다해야 한다."하였다. 【원전】 24 집 543 면

 

선조36/10/23(을사)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의논드리기를 '주인을 배반한 자를 다스리는 율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근래 종으로서 주인을 배반하는 풍조가 날로 심해지니, 이는 조정에 기강이 없고 유사가 법을 집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죄가 드러나는 대로 낱낱이 안법하여 시행한다면 횡역(橫逆)하는 무리가 저절로 징계되어 두려워할 것이니, 법 외에 다시 새 규례를 만들 필요는 없다. 위에서 재결하시기에 달렸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러하니, 위에서 재결하시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는데, 의논대로 하라고 하였다.【원전】 24 집 548 면

 

선조36/11/13(을축)

신시에 왕자(王子)가 마마를 앓다가 졸서하였다.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심희수(沈喜壽), 부제조 윤돈(尹暾)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오늘 대내(大內)에서 참통(慘痛)한 일이 있었다 하니, 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겠기에 감히 와서 문안드립니다. 몇 개월 동안 옥후(玉候)가 편찮으시어 약을 들고 계시는 지금 잇달아 자정(慈情)의 아픔을 당하셨으니, 애써 너그러이 참지 않으시면 조섭(調攝)하는 도리에 해로울 듯합니다. 신들이 더욱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되어 감히 이렇게 아울러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원전】 24 집 551 면

 

선조36/12/06(정해)

삼성 교좌(三省交坐)의 위관(委官)【류영경(柳永慶).】 아뢰기를, "자근개(者斤介)는 두 차례 형문(刑問)하고 정숙(貞叔)은 세 차례 형문하고 최예원(崔禮源)은 한 차례 형문하고 선이(善伊)도 한 차례 형문하였으나, 모두 숨기고 곧바로 공초(供招)하지 않으니, 내일 더 형문하겠습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이때 공주(公州) 사람 최예원이 서형(庶兄)인 최선원(崔善源)의 아내 정숙과 몰래 간통하고 최선원을 독살하여 시신을 강에 던졌는데, 그 일이 전파되어 장차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게 되자, 최예원이 도리어 정장(呈狀)하기를 '최선원이 몰래 자기의 처인 김씨와 간통하고는 일이 발각될까 염려하여 달아났다.' 하였다. 김씨는 바로 이른바 선이이다. 최예원은 본디 예의범절을 모르는 자인데, 김씨에게 공초를 받으니, 곧 최예원이 몰래 최선원의 아내와 간통한 사실과 최선원을 독살한 일에 대해 아주 상세히 내용을 말하였다. 그리고 최가의 노비(奴婢) 역시 최예원이 최선원을 독살한 사상(事狀)을 말하였는데, 대변(對辨)하게 되어서 정숙과 최예원이 다 굴복하였다. 그러나 정숙도 김씨가 몰래 최선원과 간통한 정상을 말하였는데 김씨가 제대로 변명하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각각 형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씨의 일은 억울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원전】 24 집 552 면

 

선조36/12/21(임인)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의논드리기를 '양전의 중대한 일에 대해 영을 내린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끝내지 못하였으니, 지극히 한심하다. 따라서 해조가 어사를 나누어 보내서 성적을 재촉하려는 의도가 우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삼동(三冬)이 다 가고 농사철이 다가오는데, 이런 때에 어사가 각도에 나뉘어 가서 소관 업무를 처리하느라 오래 지방에 머무르게 되면 필시 농사를 방해할 걱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폐를 염려하여 대충 어설프게만 순력(巡歷)하면 복심하는 일이 필시 자세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차관(差官)을 보내 감사에게 하유하여 빨리 성적하게 하고, 내년 추수 때를 기다려 어사를 보내 종용히 복심하게 하면, 백성은 농사를 그르칠 일이 없고 전적도 소루하게 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하니, 좌상의 의논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4 집 554 면

 

선조36/12/28(기유)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의논드리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도 경솔히 놓아 주는 것은 미안하다고 여겨지므로 전에 이미 계사(啓辭)하였다. 이번에 해관(該官)이 율문을 상고하고 참작해서 의죄(擬罪)하였으니, 위에서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내 뜻은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옥체가 이미 구성되었고 정률(正律)이 이미 명백하여졌어도 의의(擬議)하여 그 정상을 참작하고 뒤폐단을 염려하여 반드시 그 합당한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란 아무리 완전히 하려 해도 완전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인데, '더구나 안 될 것이 없다.㰡는 식으로 율을 삼는 경우이겠는가. 지금 사람을 주벌(誅罰)하면서 안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하고, 뒷날 사람을 주벌할 때에도 안 될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누가 변별할 수 있겠는가.'미위불가(未爲不可)라는 넉 자야말로 율을 벗어나서 사람을 주벌하는 끝없는 폐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확실한 소견이 있을 것이니, 본부(本府)가 참작하여 시행하라."하였다.【원전】 24 집 556 면

 

선조36/12/30(신해)

좌의정 윤승훈(尹承勳),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내일 임금께서 망궐례를 거행하려 하시는데, 신들도 본디 성념(聖念)이 반드시 '동지에 의례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원일(元日)에 망궐하여 진하(陳賀)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일 임금께서 바야흐로 조섭(調攝) 중이시고 인후증까지 있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거둥하시면 필시 더치실 것이니, 뭇 신하의 심정이 지극히 민망합니다. 일에는 경상(經常)과 권의(權宜)가 있는 법인데 그에 알맞은 방법으로 처치하는 것을 옛사람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내일의 거둥은 멈추도록 명하시어 뭇 신하의 심정을 안정시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이 구구한 생각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이렇게 아뢰니, 미안하기는 하나 멈추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24 집 557 면

 

선조37/02/20(신축)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좌의정 윤승훈(尹承勳), 우의정 류영경(柳永慶) 등이 아뢰기를, "전일 성교(聖敎)를 받들었으나 신들이 청광(淸光)을 우러러 뵙지 못한 지 이미 반년이 되었습니다. 날씨가 조금 온화하여지기를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전교의 뜻에 따라 등대(登對)하여 품정(稟定)하겠습니다. 근일 이래 봄 추위가 풀리지 않았고 옥후(玉候)가 바야흐로 조섭중이므로 인접(引接)하시기에 방해로움이 있습니다마는, 녹훈(錄勳)하는 큰 일이 이토록 지연되어 매우 미안합니다. 계사(啓辭)로 출납하더라도 감정(勘定)하여야 될 일이므로 감히 와서 앙품합니다."하니, 답하기를, "오랫동안 접견하고 싶었으나 근일 뱃속이 불편하여 하지 못하였었다. 마침 오늘 왔으니 접견하겠다."하였다. 【원전】 24 집 569 면

 

선조37/02/20(신축)

임금이 별전(別殿)에서 영의정 이덕형, 오성부원군 이항복, 좌의정 윤승훈, 우의정 류영경 등 대신(大臣)을 인견하였는데 승지(承旨) 윤휘(尹暈), 기사관(記事官) 이호신(李好信)․정호관(丁好寬)․오익(吳翊)이 입시(入侍)하였다. -中略- 류영경이 아뢰기를, "임금의 분부가 지극히 마땅합니다마는 평시 선왕조 때에는 왕자도 다 참여되었습니다. 신의 뜻은 무장(武將)의 녹공은 넓게 두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하고, 윤승훈이 아뢰기를, "위에서 분부하신 것이 지극히 마땅합니다마는 왕자가 호종하지 않았다면 녹공하지 않더라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나 왕자가 이미 호종하였으니 어찌 참여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항복은 아뢰기를, "외방에 있던 조신(朝臣)도 어찌 뚜렷한 공로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호종한 한 가지 일로 참여된 자도 있습니다."하였다. -中略- 이덕형이 아뢰기를, "마땅히 신칙해야겠습니다만 모든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사(舟師)도 하삼도(下三道)의 물력(物力)을 다 끌어대어 조처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할 뿐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육지에서 조련(操練)하는 일은 조금 모양을 이루었지만 어찌 이것만을 믿고 급할 때에 쓸 수 있겠습니까."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믿는 것은 주사입니다. 적(賊)이 경상도를 넘어서 먼저 전라도에 이르는 일은 없을 듯하니, 소신의 생각으로는 전라도의 주사를 경상도로 옮겨서 급할 때에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그러하기 때문에 경상도의 주사는 병선(兵船) 65척을 장만하였는데 전년에 비하면 많은 듯합니다. 대개 주사는 격군(擊軍)이 일정하지 않으면 적이 오기 전에 먼저 지칩니다. 군사 1천을 양성하면 10척에 승선시킬 수 있고 군사 2천을 배양하면 20척에 승선시킬 수 있고 군사 3천을 배양하면 30척에 승선시킬 수 있는데, 내지(內地) 백성들에게 쌀․베를 거두어 이것으로 군사를 배양하여 늘 머물러 사변에 대비하게 한다면 군사를 배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본디 군사를 배양하는 본말(本末)을 모르므로 중국군이 물러가자 변경이 드디어 형세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일 이원익(李元翼)이 내려갈 때에 임금께서 '변경에는 6천의 군사를 수합(收合)해야 한다. 그러면 절로 양식을 대어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교하셨으므로, 이원익이 감격하여 힘을 다해 하려고는 하였으나 사세가 용이하지 않아서 마침내 성취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소신이 그곳에 갔을 때 겨우 1천의 군사를 얻었을 뿐인데 지금도 두서가 잡히지 않고 있으니, 우리 나라가 본디 군사를 배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하였다. -中略- 임금이 이르기를, "다른 지방의 신하와는 과연 다르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사알(司謁) 정경신(鄭景信)도 회의하는 곳에 와서 호소하였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의주에 호종하였으나 가사알(假司謁)이라 하여 참입되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원통하다고 했습니다. 이도 참여시켜야 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실을 헤아려 참여시키는 것이 옳다."하였다.【류영경의 말은 비루하다. 사알은 일개 가노(家奴)로서 분부를 전하는 자일 뿐이다. 한때의 하찮은 노고가 있더라도 명주나 베로 상을 주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단서 철권(丹書鐵卷)에 수록하고 삽혈 동맹(챍血同盟)하는 사이에 끼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정경신은 가사알로 말을 전했을 뿐이니 이는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 또한 어찌 그가 호소한 말을 가지고 기록할 것인지 뺄 것인지의 경중을 논할 수 있겠는가. 류영경이 이 일에는 본시 공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 터인데도 감히 면대한 자리에서 버젓이 아뢰었는데, 이것이 어찌 대신이 논할 만한 것이겠는가.】 류영경이 아뢰기를, "송언신(宋言愼)은 마련한 가운데에서 빠졌는데, 이 사람도 어찌 공로가 없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승전(承傳)한 일이 있으니 이에 따라 부표(付標)하여 들이고 짐작하여 정하는 것이 옳다. 대개 어쩔 수 없는 자 이외에는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한데, 종시호종이라 하였으므로 공이 있는 자가 부표한 가운데에 들어 있기도 하니, 대신이 헤아려서 조처하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24 집 569 면

 

선조37/02/20(신축)

이덕형, 류영경이 또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서울에서부터 호종한 사람이 아니므로 호종의 반열에 대등하게 논할 수 없고 또 별로 기록할 만한 노고가 조금도 없는데 당초 원훈(元勳)을 마련할 때 잘못 제출하여 수록하였으니, 신들은 매양 몹시 부끄럽게 미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공론이 거듭 제기되어 공박한 뒤에 신들이 앉아서 마련함에 있어 다른 사람은 삭제하고 자기 이름은 그대로 두는 것은 참으로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삭제된 사람이 듣는다면 어찌 마땅하게 여기겠습니까. 신들이 탑전에서 언급할 때에 입을 열어 아뢸 수 없는 형세였으므로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왔으나, 반드시 삭제되어야만 신들의 어리석은 분수에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황공하고 민망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사양할 만한 의리가 없으니, 사양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24 집 571 면

 

선조37/05/14(갑자)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류영경(柳永慶), 제조(提調) 심희수(沈喜壽), 부제조(副提調) 윤돈(尹暾)이 아뢰기를, "요사이 가뭄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데 성후는 어떠하십니까?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은 3첩을 이미 모두 진어하셨습니까? 어제 의관(醫官)들을 통해 듣건대, 약을 드신 뒤 효과가 있는 듯하고 귓가의 마비증(麻痺症)도 점차 덜해지는 듯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십니까? 날씨가 바야흐로 더워지니 인후(咽喉)의 증세를 시급히 치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의관들이 입시하여 살피지 못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니, 신들은 답답하고 염려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감히 와서 문안드립니다."하니, 답하기를, "형방패독산을 든 뒤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이 약을 더 먹으려고 어제 의관들에게 일렀다. 문안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24 집 609 면

 

선조37/05/20(경오)

이원익(李元翼), 윤승훈(尹承勳), 류영경(柳永慶) 등이 모두 아뢰기를, "이렇게 소장을 진달하였으니 반드시 온 도(道)의 공론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절(死節)한 사람과는 똑같이 대우할 수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문안(文案)을 고찰해 보고 들은 말도 참작해 보아 요량해서 포장하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이 의논을 옳게 여겼다. 【원전】 24 집 611 면

 

선조37/05/22(임신)

임금이 대신이 오래 궐원(闕員)된 것을 들어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에게 복상(卜相)하라고 명하였다. 윤승훈(尹承勳)을 영의정으로, 류영경(柳永慶)을 좌의정으로, 기자헌(奇自獻)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원전】 24 집 612 면

 

선조37/06/21(경자)

빈청의 원훈 대신(元勳大臣)들이【이항복(李恒福), 윤승훈(尹承勳), 류영경(柳永慶), 기자헌(奇自獻).】 아뢰기를, "공신(功臣)의 등급단자(等及單子)는 대신이 다시 참작해서 하라는 것으로 전교하셨습니다마는, 신들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만 무장들로서 이미 녹훈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삭제된 것을 미안하게 여긴 것일 뿐입니다. 시종 싸움터에서 자신을 잊은 채 역전(力戰)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도 이순신․원균 이외에는 고언백 1명만 취했을 뿐이고 그 이외의 권응수 등은 현저하게 녹훈할 만한 공이 있는데도 모두 참여되지 못하였습니다. 녹훈한다고 하면서 이처럼 매몰스럽게 했으니, 어떻게 전사(戰士)들의 마음을 격려 권면하여 분발시킬 수 있겠습니까. 단지 격려 권면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실망하고 해체되게 하여 뒷날 위급한 때에 힘을 다하도록 요구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비록 대단찮은 논쟁이지만 관계되는 바는 큽니다. 신점(申點)의 경우, 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해준 것은 모두 이 사람이 처음에 발단시킨 공이었는데 도리어 초두 난액(焦頭爛額)한 사람의 밑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신들이 어제 부득이하여 아뢴 것입니다만 성상께서 재량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또 호종(扈從)한 사람 가운데도 한두 명의 의논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신들이 감히 끝내 함구하고 있을 수 없어 어제 아뢰려 했습니다마는 황송하여 감히 발론하지 못했으니, 또한 위에서 아울러 재량하여 참작해 주소서. 그리하여 신들이 다시 의논해서 합당하게 하도록 해주신다면 이보다 더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이외의 장사(將士)들은 진실로 적을 무찌르면서 역전(力戰)한 공이 없다. 설혹 성(城)을 지킨 노고와 어느 한곳에서 역전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옛 사례로 말한다면 이런 경우에는 단서 철권(丹書鐵券)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니, 대간이 논계한 것이 불가할 것 없다. 다만 나는 임금이기에 그들이 큰 공은 없었더라도 다같이 거두어 모두 녹훈함으로써 한때의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뒷날의 여지가 되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당초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뢴 뜻이 매우 합당하다. 무장과 호종한 사람 가운데 의논할 만한 사람들을 서계(書啓)하라. 정왜 공신(征倭功臣)의 명칭을 다시 생각해 보건대, 보절(保節), 익운(翊運) 등의 말은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보절이란 말은 장의(仗義)란 말보다 못한 듯하고 익운이란 말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또 호종 공신의 명칭에 있어서는 1등이나 혹은 2등까지도 결책(決策)이란 등의 말을 더 넣고 싶다. 대개 중국군을 청해다가 원수인 왜적(倭賊)을 토벌하여 몰아낸 일은 무장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한 도망하여 방관(旁觀)하던 자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지금 우리 동토(東土)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진실로 호종했던 제신(諸臣)들의 공로로 이는 곧 실적(實績)이기에 이런 말을 더 넣고 싶은 것이니, 모두 의논해서 아뢰라."하였다.

재차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신들은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들도 난후 제장(諸將)들이 실제로 적을 무찔러 함몰시킨 공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녹훈하는 일을 시행한다면 그중에서 공로가 가장 많은 사람은 녹훈하여 전사(戰士)들을 격려 권면시키는 여지를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또한 단지 한때의 공을 취한 것으로, 어찌 옛 사람들의 풍성한 공로나 큰 업적에 견주어 함께 논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이미 녹훈했다가 도로 삭제해버리면 무사들의 마음을 실망시키게 되어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기 때문에 신들이 그 가운데 뚜렷이 드러나 일컬을 만한 사람인 권응수(權應銖), 이억기(李億祺), 조경(趙儆), 김시민(金時敏), 이정암(李廷촑) 등 6인을 아뢰어 삼가 성상께서 재량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지금 다시 6인 가운데 반복해서 헤아려 보건대, 조경은 권율의 중군(中軍)으로 행주(幸州)에서 승전한 공이 있었고, 이광악은 김시민과 힘을 합쳐 진주성(晋州城)을 지켰으므로 모두 훈적(勳籍)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순신과 원균의 관하(管下) 장사들은 모두 삭제되었고 유독 조경과 이광악만 취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이 두 사람은 녹훈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만 오직 성상께서 결단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훈호(勳號)의 글자를 넣기가 과연 꼭 맞지 않는 것은 진실로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과 같으니, 보절(保節) 두 글자를 버리고 장의(仗義)로 대신하되 결책(決策) 등의 어구(語句)도 첨가하여 넣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익운(翊運)이란 말도 온당하지 못한데, 이는 추후 개정하여 아뢰도록 하는 것이 합당 하겠습니다. 다만 중국군을 청하여 왜적을 친 것은 모두가 성상의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성상께서 사대(事大) 하시는 정성이 중국을 감동시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종했던 제신(諸臣)들이야 무슨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었다고 뻔뻔스레 이런 훌륭한 명칭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감정(勘定)한 여덟 글자는 신자(臣子)의 분의에 있어 또한 너무 과하니, 다시 다른 어구를 더 넣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신들의 의견이 이러하기에 감히 아룁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 삼가 무장(武將)과 호종(扈從)했던 사람들 가운데 의논할 만한 사람을 서계(書啓)하라는 분부를 받들고서 무장에 대해서는 대개 서계했습니다. 그런데 좌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자신의 이름이 의논할 만한 대상에 들어 있다 하여 인혐(引嫌)한 채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독자적으로 의계(議啓)하는 것은 미안할 듯한데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감히 품합니다."하니, 답하기를, "윤허한다. 이 6인은 아뢴 대로 모두 녹훈하라. 조경(趙儆)은 권율의 휘하(麾下)로 녹훈되었으니 이순신과 원균 두 대장의 휘하에서도 몇 사람을 취해 아울러 녹훈하라. 그렇게 하면 균등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하라. 그리고 육장(陸將)들 가운데 적을 무찌른 공이 없더라도 또한 전부를 버릴 수는 없다. 이시언(李時言)은 날랜 장수로 처음부터 끝까지 왜적을 쳤으니 한마(汗馬)의 공이 있고, 평양(平壤)에 있던 왜적이 패하여 돌아갈 적에 중도에서 시살한 일이 있는 것 같고, 도산(島山)의 전투에서도 공로가 있었으니, 버려둔다면 이는 또한 잘못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까마득하여 기억하지 못하겠으니 잘 살펴서 조처하라. 또 훈호에 대해서는 사실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지 당초부터 터무니없이 외람되이 포장(褒獎)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당시 파천(播遷)하였을 뿐인데, 어찌하여 지나치게 사양하여 위에만 공을 돌리고 차지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하고, 또 답하기를, "좌의정이 혐의스럽게 여겨 인피(引避)하였다면 다른 정승이 의논해서 처결하도록 하라."하였다.

세 번째 아뢰기를, "호종했던 제신(諸臣) 가운데 최흥원(崔興源), 이원익(李元翼), 류영경(柳永慶) 등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幸行)하시기 수일 전에 서도(西道)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다가 중도에서 대가를 맞이하여 그대로 호종하였으니, 헌신한 노고가 제신(諸臣)들에 못지 않은데 사명을 받들고 먼저 나간 것 때문에 모두가 삭제 대상에 들어 있습니다. 사알(司謁) 정경신(鄭景信)은 의주(義州)에 계실때 가임(假任)이었기 때문에 녹훈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만 담당한 소임의 진가(眞假)를 따지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의논할 만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신점(申點)의 일은 어제 이미 모두 진달했으므로 오늘은 감히 재차 번독스럽게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성상께서 재량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습니다만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 두 대장의 휘하 장사들 가운데 당초 녹훈된 사람이 각각 2인씩인데, 권준(權俊), 이순신(李純信)은 이순신의 관하이고 이운룡(李雲龍), 우치적(禹致績)은 원균의 관하입니다. 이 4인은 모두 해상(海上)에서의 전공(戰功)이 있는데 그 우열을 논하는데에 있어서는 신들이 정확한 소견도 없고 또한 의거할 만한 문적(文籍)도 없습니다. 만일 모두를 수록(收錄)한다면 숫자가 과하게 될 듯하고 취사(取捨)하려면 공로가 같아서 경중을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점에 대해 조처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시언(李時彦)은 평소 날랜 장수라는 평이 있었는데 황해도 방어사로서 평양에 있던 왜적이 패전하고 돌아갈 때 과연 중도에서 가로막고 시살한 일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시살한 일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말이 매우 많은 것은 물론 의자(議者)들은 이시언의 공으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유독 이 사람만을 많은 삭제 대상자 속에서 취한다면, 뒷말하는 사람들이 분개할 것인데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또 훈호(勳號)에 부득이 다른 말을 첨가해야 한다면 결책(決策)의 결(決)자를 협(協)자로 하는 것이 더 온당합니다. 협책(協策) 두 글자로 1등과 2등에 첨가해 넣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윤허한다. 부득이한 것 이외는 대간(臺諫)의 아룀을 이미 윤허했기에 어기기가 곤란하다. 정경신에 대해서는 대간이 불가하다고 했으므로 추가하여 녹훈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신점에 대해서는 의계(議啓)한 대로 하라. 원균과 이순신이 해상에서 세운 공은 진실로 권율보다도 우월한데 권율의 휘하는 녹훈하고 두 대장의 휘하는 녹훈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만일 4인을 녹훈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이 조경(趙儆)도 삭제해야 한다. 그러나 5인을 모두 다 녹훈하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육장(陸將) 가운데 1인도 참여하지 못한 것은 지나친 듯하다. 이시언과 박진(朴晉) 등도 어찌 그만한 공이 없겠는가. 녹훈하든지 삭제하든지는 다시 의논, 침작해서 되도록 알맞게 하라. 무장들을 잘 통제하여 그들의 마음을 수습하는 데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원전】 24 집 621 면

 

선조37/06/25(갑진)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 정곤수(鄭?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 이후(信城君李珝), 정원군 이부(定遠君李쯆), 이원익(李元翼), 윤두수(尹斗壽), 심우승(沈友勝), 이호민(李好閔), 윤근수(尹根壽), 류성룡(柳成龍), 김응남(金應南), 이산보(李山甫), 류근(柳根), 이충원(李忠元), 홍진(洪進), 이괵(李?), 류영경(柳永慶), 이유징(李幼澄), 박동량(朴東亮), 심대(沈岱), 박숭원(朴崇元), 정희번(鄭姬藩), 이광정(李光庭), 최흥원(崔興源), 심충겸(沈忠謙), 윤자신(尹自新), 한연(韓淵), 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 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 순령군 이경검(順寧君李景儉), 신잡(申?), 안황(安滉), 구성(具宬)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 이헌국(李憲國), 류희림(柳希霖), 이유중(李有中), 임발영(任發英), 기효복(奇孝福), 최응숙(崔應淑), 최빈(崔賓) -中略- 이마 오연(吳連), 이마 이희령(李希齡)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원전】 24 집 623 면

 

선수37/06/25(갑진)

공신을 대대적으로 봉하였다. 서울서부터 의주(義州)까지 시종 어가(御駕)를 모신 사람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삼고, 왜적을 정벌한 제장(諸將)들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을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삼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한 자를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삼아, 모두 3등급으로 나누고 차등 있게 봉호(封號)를 내렸다.

호성공신 1등에는 이항복, 정곤수(鄭?壽), 2등에 신성군 이우(信城君李珝)․정원군 이부(定遠君 李?)【이 분이 원종 대왕(元宗大王)이다.】2등에 이원익(李元翼), 윤두수(尹斗壽), 심우승(沈友勝), 이호민(李好閔), 윤근수(尹根壽), 류성룡, 김응남(金應南), 이산보(李山甫), 류근(柳根), 이충원(李忠元), 홍진(洪進), 이괵(李괵), 류영경(柳永慶), 이유징(李幼澄), 박동량(朴東亮), 심대(沈岱), 박숭원(朴崇元), 정희번(鄭姬藩), 이광정(李光庭), 최흥원(崔興源), 심충겸(沈忠謙), 윤자신(尹自新), 한연(韓淵), 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 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 순령군 이경검(順寧君 李景儉), 신잡(申?), 안황(安滉), 구성(具宬), 3등에 정탁(鄭琢), 이헌국(李憲國), 류희림(柳希霖) -中略- 전용(全龍), 이희령(李希齡), 오연(吳連) 등 총 86인이요, 내시(內侍) 24인, 마의(馬醫) 6인, 의관(醫官) 2인, 별좌 사알(別坐司謁) 2인이다.【원전】 25 집 694 면

 

선조37/08/07(을유)

우의정 류영경(柳永慶)을 최유격(崔遊擊)이 유숙하고 있는 곳에 보내어 주연(酒宴)을 베풀게 하였다. 【원전】 24 집 631 면

 

선조37/08/08(병술)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 등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박승종(朴承宗)과 기사관(記事官) 이극신(李克信)․박안현(朴顔賢)․기협(奇協)이 입시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 "이처럼 덜할 때도 있다. 이때에는 목소리가 조금 트이나 조금 늦으면 전혀 트이지 않고 때때로 가래를 뱉으면 진하게 달인 아교같은 것이 끈적끈적하여 풀리지 않는다. 이것은 반드시 열이 극도로 올라 치받쳐서 그런 것이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폐경(肺經)에 열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옥음(玉音)을 들으니 전일 침을 맞으실 때와는 매우 다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늦으면 막히고 말을 많이 하면 막히는데, 오늘은 해가 아직 이르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가 나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열병(熱病)일 것이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대개 열증(熱證)일 것입니다. 의관(醫官)의 의논도 다들 열이라 합니다. 그래서 탕약을 많이 쓰는데, 이것은 쓰고 찬 약제이어서 비위를 상하실까 더욱 염려됩니다. 수라는 어떠하십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래도 전폐하지 않는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수라를 잘 드시고 약을 많이 쓰면 저절로 회복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자미(杜子美)의 병이라면 가을 바람에 나을 수 있겠으나 나는 담병(痰病)을 앓고 있다. 가을이 깊어 바람이 세면 담기가 성해질 것이고 담기가 성하여 약물을 많이 쓰면 또한 도리어 담이 될까 염려된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두자미의 병도 폐병(肺病)이었습니다. 아랫사람의 병을 이렇게 아뢰는 것이 매우 황공스럽습니다마는 소신(小臣)도 평소 담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담기가 수시로 오르내리는데,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 자연히 내려가고 기가 고르지 않으면 올라오니, 약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근일 약방(藥房)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면서 오랫동안 상후(上候)를 살펴보니 심장과 허파 사이의 담열(痰熱)의 증세가 틀림없는데, 근래 가래가 끈적끈적하다 하시니 열기가 점점 치열해지는 일이 없지 않을까 염려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을 오래 접견하지 못하였으니, 조정(朝政)에 궐실(闕失)이 많을 것이어서 경들을 접견하려 하였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죄다 말하기 바란다. 내가 그것을 듣고 싶어서 경들을 인견하였으니, 각자 생각하는 것을 다 아뢰라. 병 때문에 경들을 오래 접견하지 못하여 매우 미안하다."하였다. -中略- 류영경이 아뢰기를, "홀적이 우리 나라의 벼슬을 받고자 한다 하는데, 그 뜻은 알기 어렵습니다. 노호(老胡)가 모두 이미 중국에서 벼슬을 받은 것을 보고 이를 본떠서 받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나라의 허실(虛實)을 알아보려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하였다.【원전】 24집 631 면

 

선조37/08/26(갑진)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나아가 호소하고 날마다 성비를 받들었는데 갈수록 절박하여 차마 읽지 못할 것이 있으므로 서로 돌아보며 목이 메고 가슴이 막혀 스스로 풀 수가 없습니다. 어제 받은 하교에 '경들이 익대하는 정성이 절실하나 나에게도 어찌 매우 절박한 내용이 없겠는가.' 하셨습니다만, 우러러 생각건대 천지같이 큰 도량으로 신들의 구구한 정성을 용납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신들의 마음도 조금은 넓어졌고 말씀드릴 길이 트였으니, 다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과거 환란이 일어난 처음 변이 갑자기 일어났으므로 하늘이 어둡고 안개가 가려서 삼정(三精)이 빛을 잃은 듯하여 왕령(王靈)이 떨치지 못한 데다가 성언(聲言)이 망측하여 천하가 놀랐으므로 국가가 위태로왔으니, 어떻게 천하의 의심을 풀고 요기(妖氣)를 소탕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에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였겠으며 일국의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오늘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지성으로 사대하시는 마음이 속에 쌓여서 진실로 하늘에 사무쳐 황제의 마음에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하루아침에 대궐에 호소하니 천노(天怒)가 혁연(赫然)하였습니다. 그때 황제가 분부하기를 '각각 해부(該部)는 군사와 군량을 징발하여 조선에 한 명의 왜적도 남지 않게 한 뒤에 돌아오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하가 모두 메아리처럼 향응(響應)하여 천하의 용맹한 장졸(將卒)이 다 우리에게 모여 반드시 '이는 공순(恭順)한 나라이다. 황제의 명이 있는데 감히 죽을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흉추(凶酋)를 몰아내어 바다물결이 맑아졌고 국가가 재조(再造)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중국에서 이를 얻어냈겠으며 모신(謀臣)이 계책을 행하였겠으며 처사(處士)가 그 설(說)를 진달하였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고금의 위대한 공렬이므로 귀신이 굽어살피는 것이고 천하가 들어서 아는 것인데, 전하께서 차지하지 않으시려 한들 되겠습니까. 신들의 익대하는 정성은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강역(疆域)이 무사하고 국사(國事)가 조금 안정되었으니, 조종에서 기뻐하시는 마음은 어떠하겠으며 신민들이 감복하여 기뻐하는 뜻은 어떠하겠습니까. 신들이 두어 자 휘호를 청하는 것은 성대한 행사를 베풀어 임금의 덕을 손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상하 신인(上下神人)의 기대를 위로하여 보답하려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성명께서는 사람들의 뜻을 굽어살펴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하니, 답하기를,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을 날마다 아뢴다고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다시는 소요스럽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하였다. 【원전】 24 집 647 면

 

선조37/08/27(을사)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 등이 아뢰기를, "임금의 공덕(功德)에는 대소(大小)가 있고 신하의 정원(情願)는 완급(緩急)이 있는데 오늘날의 일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급하다 하겠습니다. 지극히 급한 정원으로 지극히 큰 공덕을 기리는 것이니, 이것이 신들이 절박한 분부를 받더라도 순종하지 못하고 차라리 번거롭게 아뢰는 죄를 받더라도 잠자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인 것입니다. 예부터 임금 가운데 공덕이 있는 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천하를 위하여 대의를 밝히고 만세를 위하여 인륜을 부지시켜 온 국민이 금수같은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한 것으로 말하면 그 공덕이 또한 지극히 크지 않겠습니까. 예부터 신하 가운데 아름다움을 돌려 위에 보답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천고에 없던 성대한 공을 만나 일국이 함께 옳게 여기는 공론에 따라 성상의 충성, 의열(義烈)을 천하 만세에 밝게 드러내는 것으로 말하면 그 정원이 또한 지극히 급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큰 공덕이 있어도 드러내지 못하고 지극히 급한 정원이 있어도 펴지 못한 채 성덕(聖德)은 갈수록 겸손하여 성미(聖美)가 더욱 드러납니다만 신들의 죄는 더욱 커집니다. 서민(庶民)의 집에 어진 아버지가 있으면 그 아들이 반드시 아버지의 어진 것을 드러내어 종족(宗族)․향당(鄕黨)이 일컫게 하되 오히려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효한 아들임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오늘의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두어 자 휘호가 성사의 공덕을 손익시킬 수는 없겠으나 우리 임금의 아름다운 공렬과 빛나는 덕이 천하 후세에 드러나지 않게 하면 신들이 장차 어떻게 불충한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람들의 뜻을 굽어살펴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하니, 답하기를, "무사한 때에 까닭없이 일을 일으켜 조정이 고요하지 않고 상하가 불안하고 기무(機務)가 처리되지 않게 하니, 이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여러 날 동안 서로 버티느라 손상된 것이 매우 많다. 이미 나라를 전복시킨 몸이 어찌 이런 헛된 칭호를 받을 수 있겠는가. 결코 따를 수 없으니, 다시 소요스럽게 하지 말라. 백료(百僚)는 빨리 물러가 각각 직무를 보살피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24 집 648 면

 

선조37/08/28(병오)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잇달아 글을 올리고 대궐에 호소하여 정성을 다하고 말을 다하였으나 천의(天意)를 아직 돌리지 못하여 윤허가 아직도 아득한데, 어제 받든 성비(聖批)에 '따를 도리가 전혀 없다.' 하셨습니다. 신들은 어쩔 줄 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스스로 성의가 두텁지 못하여 지척에 계신 천위(天威)에 하정(下情)이 통달되지 못하여 이런 미안한 분부가 계신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대저 따를 도리가 전혀 없다는 것은 옛 도리를 본받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아가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상의 공덕이 받을 만하지 못하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비상한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비상한 호가 있어 그 공과 짝하는 것이니 이는 실로 사리에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임금은 혹 한때의 어려움을 안정시켜 구제하여 불세출의 공이 있게 되면 누구나 다 명호를 높이고 성덕(盛德)을 밝혔으며 우리 나라의 선왕께서도 일찍이 행하여 현책(顯冊)을 받으셨습니다. 일이 종묘에 관계되고 덕을 엄폐할 수 없는 경우에는 겸허한 지덕(至德)으로서도 사람들의 뜻이 바라는 것을 굳이 사양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우리 성상께서 성취하신 것이 어떠한 공덕입니까. 사대의 정성이 평소에 충만하여 흉적의 길을 빌자는 청을 거절하고 대신 병화를 받았으니 위망(危亡)에 이르더라도 군신(君臣)의 대의는 해와 별처럼 밝게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능히 황제의 마음을 감동시켜 군사와 군량을 두 번씩이나 보내어 신속하게 요기(妖氣)를 쓸어 없앰으로써 동한(東韓) 전역이 물짐승의 고장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만세의 강상을 부지시키고 조종의 구업(舊業)을 회복하게 된 것은 전대에서 찾아도 짝이 없는 것으로 천하가 사모하는 바이고 조종께서 기뻐하시는 바입니다. 대저 이러하다면 휘호를 더하여 아름다운 공렬을 드러내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천리․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고전을 살펴보아도 저와 같고 그 공덕을 살펴보아도 이와 같으니 신들이 청하는 것이 과연 따라야 할 만한 도리가 없는 것입니까. 따를 만한 도리는 본디 한둘이 아닌데 성상께서 지나치게 겸양을 고집하여 줄곧 굳게 물리치시니 일국 신민의 희망이 억눌려 펼 수 없게 될 뿐더러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께서도 어두운 가운데에 서운해 하시는 점이 있을 듯합니다. 궐정(闕庭)에 가득찬 백료가 꾀하지 않고도 말을 같이하는 것이 마치 강이 터져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세월을 끌더라도 허락받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을 의리입니다. 차라리 소요스럽게 한 죄를 얻을지언정 차마 잠자코 말하지 않음으로써 임금의 성덕(盛德)과 신공(神功)을 드러나지 않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신들이 오늘날 조처할 방도는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쾌히 여망에 따라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하니, 답하기를, "스스로 평생을 돌이켜보건대 괴로움이 지극하였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꿈에도 놀라니 이제라도 땅에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바라는 바이다. 덧없는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어서 부귀와 득실도 오히려 따질 것이 못되는데, 더구나 호라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높이기 위해서라면 임금이 높음은 이미 견줄 데가 없는 것인데 호를 어디에 쓰겠는가.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절로 후세의 공론이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망령되이 스스로 칭호하여 신민에게 뽐내어 보일 수 있겠는가. 대저 우주의 사업은 모두가 분수 안의 일인 것이다. 나에게 참으로 하늘에 드날리고 땅을 진동시킬 만한 공이 있더라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종사(宗社)에 어떠하겠으며 백성에 어떠하겠는가. 자신이 현재의 임금인데 그 책임이 어디로 가겠는가. 이런데도 호를 더하여 뽐내며 스스로 대단한 체한다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마음은 논할 것도 못되거니와, 성질이 편벽되고 뜻이 졸렬하여 50년 살아오는 동안 어지러이 화려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느지막에 도리어 이런 무익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구구한 평소의 뜻도 보전하지 못한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경들은 다시 이 뜻을 헤아리기 바랄 뿐이다."하였다. 【원전】24집 649 면

 

선조37/08/29(정미)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진심을 피력하여 잇따라 소장을 올린 지 이제 20일이 되었으나 윤허는 오래도록 내리지 않고 성비(聖批)는 더욱 굳어만집니다. 신들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지만 어찌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으며 또 어찌 소요스럽게 하는 것이 미안할 줄 모르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 성취한 것은 한때의 공업(功業)일 뿐이 아니라 실로 만세의 대의를 부지시킨 것이고, 세운 것은 한 나라의 공렬(功烈)일 뿐이 아니라 실로 천하의 대공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신들이 성명의 뜻을 따르려 하지만 모두 입을 모아 말하는 공론을 어떻게 누를 수 있겠습니까. 전부터 자세히 아뢰어 온 것을 면류(冕旒) 아래에 다시 번거롭히겠습니다. 바라건대 중복된다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말고 살펴주소서. 당초 흉적이 무리를 모두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을 때 그 의도가 어찌 우리 나라에 있었겠습니까. 하늘을 욕보일 생각으로 하지 못할 짓이 없었는데 길을 빌자는 흉참(凶慘)은 문정(問鼎)보다 심하였습니다. 따르면 편안하고 거스르면 화를 입을 것은 필연적인 이치인데도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끝내 거절하셨으니, 그 늠름한 충렬(忠烈)은 일월과 빛을 다툴 만하고 강상이 힘입어서 실추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의 공업일 뿐이겠습니까. 중국인들이 일컫는 것이고 만백성이 우러르는 것이니, 성명께서 아름다움을 아래로 돌리려 하시더라도 어찌 될 수가 있겠습니까. 또 1백 년 동안 태평이 이어져 오다가 갑자기 변란이 일어났는데 한 모퉁이인 용만(龍灣)에서 팔방에 두루 찬 적을 막았고 지성의 여파가 천심(天心)을 감동케 하였으므로 만리 밖에 군사를 출동시켜 와서 8년 동안 주둔하여 지키면서 마침내 요기(妖氣)를 깨끗이 쓸어내고 강역을 재조(再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랑캐의 무리가 압록강 북쪽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동쪽에 대한 천자의 근심을 근절시켰으니, 이것이 어찌 한 나라의 공일 뿐이겠습니까. 조종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고 황제가 칭찬하는 것이니, 성명께서 겸양하여 차지하지 않으려 하시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조종께서 성명을 보시는 것이 성명께서 신하들을 보시는 것과 같은데, 성명께서는 고삐를 잡은 작은 노고나 싸움터에서 분부한 작은 공효에 대하여는 종정(鐘鼎)에 이름을 새기고 봉작(封爵)이 낭자하게 하고도 조금이라도 빠뜨렸을까 염려하십니다. 그러나 성명께서는 대의가 일성(日星)처럼 빛나고 큰 공렬이 우주에 드러났는데도 지나치게 스스로 낮추고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인유(引喩)하심으로써 성덕(盛德)․신공(神功)이 민멸되어 전하는 것이 없게 한다면 이것은 성명께서 공에 답하는 은전이 신하에게는 행해질 수 있고 조종께서 덕을 숭상하시는 뜻이 성명에게 펼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오르내리시는 영령이 어찌 어두운 가운데에서 유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말한다면 성명께서 신들을 따르지 않으실 수 없고 신들이 성명께 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천리, 인정에 있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들의 성의가 천박하여 한마디 말로 천의(天意)를 돌리지 못하고 말을 지리하게 하여 날마다 번독스럽게 하여 마지않으니, 신들의 죄가 큽니다. 바라건대 다시 더 깊이 생각하여 쾌히 여망에 따르소서."하니, 답하기를, "상하가 날마다 서로 버티며 부질없이 논하는 것이 국사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손상되는 것은 말할 수도 없거니와,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친 것은 군자가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이는 종묘를 지키지 못하여 나라를 전복시킨 죄는 덮어두고 신하들이 충성을 다하여 회복한 공을 빼앗는 것이다. 바라지 않는 것을 억지로 꺾어서 헛된 칭호를 더함으로써 사방에 웃음을 전하고 천년 뒤까지 비난을 남기려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지 모르겠다.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스스로 낮추고 겸양하는 뜻이 있는 것이겠는가. 참으로 하늘은 속일 수 없는데, 이것을 할 수 있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도록 하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 어려워서 이제까지 망설이겠는가."하였다. 【원전】 24 집 651 면

 

선조37/09/10(정사)

예조가 '회맹제(會盟祭)를 물려 거행하지 말고, 도감(都監)도 설치할 필요가 없다.'는 상의 분부를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한 결과, 이산해(李山海), 이덕형(李德馨),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류영경(柳永慶), 기자헌(奇自獻) 등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상이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원전】 24 집 661 면

 

선조37/09/12(기미)

류정량(柳廷亮)을【좌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손자이다.】 전창위(全昌尉)로, 이덕형(李德泂)을 응교(應敎)로, 류희분(柳希奮)을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으로, 김수현(金壽賢)을 문학(文學)으로, 유석증(兪昔曾)을 병조 정랑으로, 조중립(趙中立)을 찬의(贊儀)로, 성시헌(成時憲)을 병조 좌랑으로, 이사욱(李士郁)을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최관(崔瓘)를 제주 판관(濟州判官)으로, 송경영(宋慶英)을 장연 현감(長淵縣監)으로, 정흠(鄭欽)을 대흥 현감(大興縣監)으로, 박여량(朴汝樑)을 양재 찰방(良才察訪)으로 삼았다. 【원전】 24 집 662 면

 

선조37/09/03(경진)

의금부가 백사림(白士霖)의 일 때문에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류영경(柳永慶), 기자헌(奇自獻) 등이 모두 말하기를 '군법(軍法)으로 말한다면 성(城)을 적에게 내어준 죄에 해당되어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하였는데, 상이 일렀다. "그의 죄는 바로 성을 잘 지키지 못한 데에 해당된다. 여러 번 사면령을 내려 특별한 사죄(死罪) 이하는 죽이지 않고 정배(定配)시켰는데, 사면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참작하여 시행하라." 【원전】 24 집 667 면

 

선조37/10/07(계축)

이조에서 대제학(大提學) 이호민(李好閔)의 체차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의논드리기를, "지극한 정성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문형(文衡)의 체차와 잉임은 상의 명에서 나와야 됩니다." 하고,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은 의논드리기를, "이호민(李好閔)이 전후에 이렇게 굳이 사양하는 것은 반드시 사세상 감내할 수 없는 점과 그의 마음에 불안한 점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지금 그를 영화와 벼슬을 탐하여 남의 비웃음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기필코 무릅쓰고 출세만 하려는 자들과 비교해 보건대, 그 차이가 현격합니다. 사퇴하는 것에 따라 체차시켜 사양하는 풍도를 이루게 한다면 세도(世道)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하고,【편협한 소견이요, 괴퍅한 논의이다.】 좌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의논드리기를, "이와 같이 간절히 사퇴하니 억지로 머물게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문형은 중임(重任)이어서 경솔히 체차시키기도 어렵습니다."하고, 우의정 기자헌(奇自獻)은 의논드리기를, "체차시킬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하였는데, 상이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원전】 24 집 675 면

 

선조37/10/10(병진)

존숭 도감(尊崇都監)이【제조(提調) 류영경(柳永慶), 심희수(沈喜壽)】 존호 악장(尊號樂章)을 진상하였다. 【원전】 24 집 675 면

 

선조37/10/17(계해)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은 의논드리기를, "문묘의 전식(典式)은 사도(斯道)의 성쇠에 관계되는 것이니 신들이 어떻게 감히 경솔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대하다는 이유로 한 차례 가부를 귀결짓지 않는다면 끝내 귀정(歸正)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왕작(王爵)으로 높인 것은 당초 성인(聖人)을 높인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왕(王)'이라고 하는 것은 부자(夫子) 때의 천자(天子)입니다. 춘추 대의(春秋大義)에도 왕을 높이는 것을 제일로 삼았고 부자께서도 일찍이 '노(魯)나라의 교제(郊祭)와 체제(?祭)는 비례(非禮)이니 주공(周公)의 도가 쇠해졌구나.' 하였습니다. 예악(禮樂)도 참람됨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높이던 바 작명(爵名)이 자신에게 가해진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부자께서 편안히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도(人道) 가운데 큰일로는 스승보다 더 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군(君), 사(師), 부(父)는 일체(一體)라 하여 한결같이 섬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디부터 있던 지위(地位)에 의거하여 단지 '지성 선사(至聖先師)'라고만 일컬어도 그 존숭이 이미 높은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왕(王)'자를 덧붙인 다음에라야 더 높이는 것이 되겠습니다. 중국에서 하루아침에 결단하여 개정하였으나 천하에서 이를 그르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전고의 누습(陋習)을 모두 씻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성묘(啓聖廟)는 사도를 중히 여기는 정성이 선성(先聖)의 유래에게까지 미쳐 가는 것으로 이는 사문의 성전(盛典)입니다. 그리고 안자(顔子)․증자(曾子) 등 제자(諸子)들이 아무리 성인이지만 아비보다 먼저 흠향받을 수 없다는 혐의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천리와 인정에 비추어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해조의 공사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공문 제자(孔門諸子) 이외에도 사도를 호위하는데 공이 있는 자는 모두 종사(從祀)하여 묘정에 배향되었는데 승출(陞黜)에 대한 의논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중국 조정에서 이미 수정을 가하였으니 또한 달리함이 있어서는 부당하겠습니다. 전부터 중국 사신이 왔을 적에 성묘를 배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성묘의 전식(典式)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어찌 못보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 의도를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면서 혈성(血誠)을 다하여 사대(事大)하였으므로 그 지성에 상하가 미덥게 되었습니다. 전고의 사례를 두루 살펴보건대, 치란(治亂)을 기록한 역사책도 외국으로 반출하는 것을 금해왔는데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을 기록한 《회전(會典)》까지 번국(藩國)인 우리에게 반포하였으니,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보는 것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경리(經理)가 이자(移咨)까지 하여 귀일시키려 한 것은 그 의도가 역시 중국과 같게 올려놓으려는 것입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스스로 힘써 도(道)에 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국에 이미 이루어진 법식이 있으니 우리 번국의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준행하는 것이 사체상 올바른 것이 됩니다. 그리고 뒷날 중국 사신이 보더라도 반드시 성조(聖朝)의 문교(文敎)가 동쪽으로 파급되어 온 성대함에 기뻐할 것이고, 또한 우리 나라의 전제(典制)가 올바르게 된 것을 숭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사된 사람 가운데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 등은 모두 이학(異學)으로 성문(聖門)에 죄를 얻은 자들이어서 그 유해(流害)가 홍수나 맹수보다도 더합니다. 한때 한두 사람의 강력한 고집에 의해 사도를 호위한 공로의 대가로 종사의 대상에 들게 되었으나 이는 실로 천하 공공(公共)의 의논이 아닌 것입니다. 그 뒤에도 잘못임을 탄핵하고 거짓임을 변론하는 소장(疏章)이 왕왕 통보(通報)에 잇따른 것을 보면 중국 조정의 인심이 지금까지도 승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을 묘정에 종사하자는 의논에 이르러서는 40년 이래 온 나라 대소 신민의 공통된 의논으로 오랠수록 더욱 격렬하여 모두 이견(異見)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명께서 중흥하시어 모든 것이 함께 일신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성대한 법전을 특별히 거행해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크게 보임으로써 일시(一時)의 선비들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을 데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도를 부식할 수 있는 한번의 큰 기회로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가의 큰 제도에 관계된 것이고 백세 뒤에도 우러러 볼 것으로, 한두 신하가 감히 독단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다시 널리 조정의 의논을 모아 품재해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위에서 재결하소서."하였다. 【원전】 24집 677 면

 

선조37/10/20(병인)

영의정 윤승훈(尹承勳), 좌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은 의논드리기를,"김천일이 다른 사람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제일 먼저 창의하였으니, 제도(諸道)의 수창(首唱)입니다. 마땅히 먼저 포상(褒賞)하는 은전을 시행하여 인심을 용동시키는 거조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조에서 지금 이에 대해 마련하는 중에 있고 천일도 그 가운데 들어 있으니, 그 공사(公事)가 귀일되기를 기다려 다른 사람들과 동시에 거행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하니, 삼공의 의논을 따르라고 하였다.

-中略-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완평 부원군 이원익, 영중추부사 이덕형, 영의정 윤승훈, 좌의정 류영경, 우의정 기자헌은 의논드리기를, "해조의 공사(公事)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고, 오성 부원군 이항복은 의논드리기를, "신은 오랫동안 종묘의 제조(提調)로 있으면서 직접 이 일을 보았으므로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평시의 제물을 고찰해 보고 외공(外貢)의 증감된 숫자를 참고하여 보건대, 정조(鼎俎)에 오르는 것이 배로 풍성하지는 못하지만 외방의 공물은 진실로 증가되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늘 민망하게 여겨왔습니다만 감히 발론하지 못했습니다. 수년 이래 모든 일들이 대략 이미 복고(復古)되었지만 유독 이것만은 복고되지 않고 있는데 전에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욱 흠전(欠典)이 되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유사(有司)가 지난해 친제(親祭)할 때의 예(例)에 견주어 회복시켜 그대로 시행하려 했었으나 그 일이 시행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강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용(器用)을 갖추는 데 대한 선후 차제가 더욱 시의(時宜)에 합당하니, 다시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하였는데, 의논한 대로 하라고 계하하였다. 【원전】 24 집 680 면

 

선조37/10/23(기사)

좌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기자헌(奇自獻)은 의논드리기를, "신주를 고쳐 쓸 적에 칼을 신주에다 대는 것은 과연 미안한 일입니다. 집사자로 하여금 일을 잘 아는 장인(匠人)과 의논하여 편리한 대로 칠묵(漆墨)을 제거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물로 씻어내더라도 오래도록 씻어낸다면 제거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해조(該曹)에서 다시 상의하여 조처하기에 달려 있습니다."하였는데,【기자헌은 도량이 넓고 법도에 매우 근엄하였으며 사류(士類)를 많이 추천하여 진출시켰으니, 한때의 명상(名相)이다.】 전교하기를, "해조에서 참작하여 조처하라."하였다.

비망기(備忘記)로 일렀다. "지난번 위에서 편두통(偏頭痛)을 앓아 침을 맞을 때의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인 좌의정 류영경(柳永慶)에게는 내구마(內廐馬) 1필을, 제조 평천군(平川君) 신잡(申캈)과 도승지 박승종(朴承宗), 침의(鍼醫) 허임(許任)․남영(南嶸)에게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가자(加資)하라. 김영국(金榮國)은 승직(陞職)시키고, 어의(御醫) 허준(許浚)에게는 숙마(熟馬)한 1필을 하사하고, 조흥남(趙興男)은 실직(實職)에 붙이라. 이등 장무관(二等掌務官)들에게는 각기 아마(兒馬) 1필씩을, 탕약 사령(湯藥使令)들에게는 각각 목면 2필과 포자(布子) 1필씩을, 고직(庫直)․서원(書員)에게는 각각 목면 1필과 포자(布子) 1필씩을 사급(賜給)하라."【입시(入侍)한 사관(史官)에게도 궁자(弓子) 1장(張)을 사급하였다.】 【원전】 24 집 682, 683 면

 

선조37/10/29(을해)

호성 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반급할 적의 별교서(別敎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들의 공로를 버릴 수 없음은 세상 사람들을 면려시키기 위한 당연한 일이요,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는 일은 가장 우선하는 정사이다. 지난번 역이(逆夷)들이 난(亂)을 얽어내기 위해 감히 길을 빌자는 흉계를 부렸는데, 이런 고통을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은 정리상 실로 당연한 것이다. 외적을 편들기 위해 황제를 저버리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 평소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힘을 다해 주선(周旋)하기에 분주하여 신하들 또한 수고로왔다. 충정(忠貞)한 절개를 바쳐 말고삐를 잡고 치달리는 수고로움을 극진히 하였으니, 일은 같지 않지만 그 공로는 다를 바 없다. 교서(敎書)로 호칭을 내려 크게 맹약(盟約)하는 반열에서 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崑壽)를 1등(等)에 책훈(策勳)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세 자급(資級)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세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甥姪)과 여서(女챢)를 두 자급 초천하라. 적장(嫡長)은 세습(世襲)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赦宥)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伴쩣) 10인, 노비(奴婢) 13구, 구사(丘史) 7명, 전지(田地) 1백 50결, 은자(銀子) 10냥,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

신성군 이익(信城君李珝), 정원군 이부(定遠君李?), 이원익(李元翼), 윤두수(尹斗壽), 심우승(沈友勝), 이호민(李好閔), 윤근수(尹根壽), 류성룡(柳成龍), 김응남(金應南), 이산보(李山甫), 류근(柳根), 이충원(李忠元), 홍진(洪進), 이괵(李섾), 류영경(柳永慶), 이유징(李幼澄), 박동량(朴東亮), 심대(沈岱), 박숭원(朴崇元), 정희번(鄭熙藩), 이광정(李光庭), 최흥원(崔興源), 심충겸(沈忠謙), 윤자신(尹自新), 한연(韓淵), 해풍군 이기(海豊君李耆), 순의군 이경온(順義君李景溫), 순녕군 이경검(順寧君李景儉), ․신잡(申?), 안황(安滉), 구성(具宬)은 2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두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두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한 자급 초천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그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赦宥)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원전】 24 집 687 면

 

선조37/10/30(병자)

정원군 이부(定遠君李?),【자신의 궁노(宮奴)를 놓아 남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므로 도민(都民)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전양 부원군(全陽府院君) 류영경(柳永慶)이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萬曆) 32년 10월 28일 삼가 우리 전하(殿下)께서 호성(扈聖), 선무(宣武), 청난(淸難) 이 세 공신들을 책훈(策勳)하고 맹단(盟壇)을 설치하여 회맹(會盟)하였습니다. 다음날 교서(敎書)를 반급하고 나서 상물(賞物)을 하사하고 연회(宴會)를 내렸습니다. 신들은 감격스럽기 그지없어 삼가 전(箋)을 받들어 칭하하고 사례합니다. 신 부(?) 등은 진실로 황공스럽게 머리 조아리고 말씀 올립니다. 사륜(絲綸)의 교서가 아래로 공이 없는 사람에까지 이르니 이는 우로(雨露) 같은 은혜로 곡진한 은수(恩數)를 입은 것입니다. 이를 피하려 하여도 피할 수가 없으니 감격스러움만 더욱 깊어집니다. 신들은 모두 대수롭지 않은 사람으로 훌륭한 점이 하나도 없어서 비상한 변란을 만나서도 즉시 목숨을 바치지 못하였는데 재조(再造)하는 날을 당하여는 문득 먼저 은총을 입었습니다. 외람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감히 이를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러러 생각건대, 임금이 신하의 공을 보답함에 있어서는 실로 헛되이 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토(茅土)를 내리는 것을 이장(츺章)이라 하는데 이는 반드시 공로가 나라에 환히 드러나야 되고 또 그래야만 바야흐로 산하(山河)를 두고 맹서(盟誓)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외환(外患)이 어느 때엔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런 흉적은 예전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의리에 입각하여 흉적의 요구를 거절했고 나중에는 정성을 기울여 황제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이러한 성산(成算)은 모두가 전하의 깊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으로 미력한 저희는 털끝만큼도 보탬이 없었습니다. 말고삐를 잡고 환란 속에 호종하기도 하고 무기를 메고 대군(大軍)의 뒤를 따르기도 했습니다만, 명령에 분주히 힘쓰려 했을 뿐인데 어떻게 받들어 주선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데 공을 이룬 것을 어떻게 감히 자신에게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 효경(梟툕)처럼 사나운 흉적이 끝까지 횡포를 부리고 있었는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지만 어찌 오래도록 버틸 수가 있겠습니까. 마침내 스스로 파멸되는 것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치우친 포장(褒獎)을 받고 아울러 봉(封)해 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직분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못하였는데 갑자기 뜻밖의 후한 은혜를 받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내장이 다 없어질 것만 같습니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德)에 배불렀는데 뼈속에 배어들어 피부까지 윤택해졌습니다. 이러한 은총을 받으니 어떻게 감당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분수에 넘는 외람된 이 영광 사적(史籍)을 상고하여 보아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인륜을 부식하고 천의(天意)를 감동시켜 일노(一怒)의 위엄을 봉행(奉行)함으로써 흉적의 소굴을 쓸어내었고 중희(重熙)의 운수를 무유(撫綏)하여 봉강(封疆)을 깨끗이한 데서 온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려웠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이에 날을 가려 재계(齋戒)한 다음 북소리를 들으면서 작은 공이라도 빠뜨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상을 주어 면려시키는 법전이 거듭 실상이 없는 몸에 내려진 것입니다. 신들이 감히 처음 먹은 마음을 더욱 면려하여 다시 만절(晩節)을 다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환(憂患) 속에서 생존된다는 옛말을 공경히 실행하고 잠시도 싸우다 죽을 것을 잊지 않으면서 공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성상을 우러름에 감격스러운 마음 견딜 수가 없어 삼가 전문(箋文)을 받들어 칭하하고 사례하는 바입니다."【대제학(大提學) 류근(柳根)이 지었다.】 【원전】 24 집 689 면

 

선조37/11/01(정축)

정언 이덕온(李德溫)이 아뢰기를, "성상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쳐 나라를 다시 회복하신 공업은 우주에 빛나고 사람들의 이목에 생생하여, 존호를 올리는 청이 의논없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영의정 윤승훈은 성품이 본래 편사(偏邪)하고 논의가 괴팍하고 간휼하여서 의논을 제기하던 처음에 드러나게 불평하는 빛이 있더니, 겨우 요청한 지 6, 7일 만에 문득 저지시킬 계책을 내고는 앉아서 여러 재신(宰臣)들을 불러 가부(可否)를 묻고 사설로 선동하며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논사(論思)하고 병필(秉筆)하는 관원이 혹 시종 참여하지 않은 이가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지시에서 나온 것이어서 나라 사람들의 말이 비등한 지 오래입니다. 신이 논계하고자 하였으나 동료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대사간 성이문(成以文), 사간 정협(鄭協)이 아뢰기를, "무릇 상신의 반열에 있는 사람을 논계할 때 반드시 동료와 가부를 서로 통한 뒤에야 바야흐로 죄주기를 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처음부터 그를 구원하려는 뜻이 없었는데도 덕온이 곧바로 먼저 인피했으니 신들도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하고, 잇따라 자핵(自劾)하니, 헌부가 덕온만을 체직시키도록 처치(處置)하였다. 이에 성이문과 정협 등이 승훈의 죄를 논하여 파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 번 아뢰니 체직만을 명하였다. 승훈이 임인년부터 이미 류영경, 정인홍의 무리들과 논의가 어긋나서 이 때문에 탄핵을 받았다. 두 번째 재상이 되었을 때에도 류영경, 정인홍과 또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승훈이 우선 류영경과 함께 일을 했는데 그 뒤에 그가 전단(專斷)의 조짐이 있음을 알고는 크게 틈이 벌어져 성이문, 문여 등의 일을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발언하여 원한을 맺은 것이 나날이 심해 갔다. 이때에 이르러 시론(時論)이 '승훈이 공론을 막으려 한다.'고 허물하면서 다투어 일어나 공격하였다. 【원전】 25 집 695 면

 

선조37/11/13(기축)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전양 부원군(全陽府院君) 류영경(柳永慶)이 전문(箋文)을 올렸다. "모년 모월 충훈부(忠勳府)에서 신구 공신(新舊功臣)의 상회연(相會宴)을 간략하게 행할 때에 법온(法춠)을 내리시는 천은(天恩)을 입어 신들은 지극히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기에 삼가 전문을 올려 사례를 드립니다. 신(臣) 이항복 등은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상언(上言)합니다. 생각하옵건대, 공은 작은데 상은 크기만 하여 외람되게 동맹(同盟)에 참여하게 되었고, 은총이 너무도 깊어 도리어 부끄러운데 갑자기 특이한 은수(恩數)를 받으니, 떠받들고 싶은 마음 뼈에 사무치고 비감(悲感)이 가슴에 복받칩니다. 생각하옵건대, 신들은 전쟁 끝에 그래도 살아 숨쉬며 첫째는 호성(扈聖), 둘째는 선무(宣武)라 하여 청난(淸亂)의 공에 모두 수록(收錄)되었으니, 죽어서 결초(結草)하고 살아서는 연구(捐軀)하여 망극한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이번 신구(新舊)의 모임은 예전에도 행한 것이므로 동맹한 날이 지나자 구례(舊禮)를 지키는 뜻을 간략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난리를 겪은 지 오래지 않으므로 잔치를 벌일 때가 아닌 줄 잘 아는데, 거듭되는 상은(上恩)을 입고 놀랍게도 거듭 중사(中使)를 보내셨습니다. 황봉(黃封)이 내부(內府)에서 나와 마시고 즐거워하며, 소인(小人)도 임금의 국을 함께 맛보게 되었으니 음식은 많기도 하였습니다. 은덕에 배부르고 나니 그지없이 태평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대개 삼가고 두려워하며 높고 넓으신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 주상 전하(政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主上殿下)께서 위로 신임을 얻는데 도(道)가 있어 의(義)를 지키고 성(誠)을 다하며, 아래로 백성들을 보살피시는데 하늘처럼 드넓어 인(仁)을 베풀고 예(禮)를 다하시는 시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슨 조금이라도 수록될 만한 공이 있길래 이처럼 전에 없는 특별한 은혜를 받는단 말입니까. 신들이 어찌 감히 용광(龍光)을 공경히 받들어 어리석은 재능이나마 다하도록 힘쓰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고락을 함께 하여 잠시라도 상의 뜻을 받들겠으며 어려울 때나 평탄할 때나 변함없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꾀할 것입니다." 【원전】 24 집 697 면

 

선조37/11/16(임진)

평천군(平川君) 신잡이 아뢰기를, "난리 이후로 요괴(妖怪)한 무리가 각도에 횡행합니다. 신이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있을 때 자칭 함경 감사(咸鏡監司) 류영립(柳永立)의 아들이라는 자가 보러 왔기에 상세히 추문(推問)하였더니 류영립의 아들이 아니라 도적인 전주(全州)의 관노(官奴)였으므로 감사(監司)에게 보고해 형추(刑推)하였습니다. 또 좌의정 류영경(柳永慶)이 황해 감사(黃海監司)였을 당시 자칭 수안 군수(遂安郡守)라는 자가 보러 왔으므로 잡아서 죄를 다스렸으나, 다 왕옥(王獄)에서 국문(鞫問)하지는 않았습니다. -中略- 신이 약방(藥房)의 입직(入直) 때문에 들어왔다가 패초(牌招)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을 잘 알았다. 경의 뜻은 지극하다."하였다. 【원전】 24 집 698 면

 

선조37/12/01(병오)

심희수를 우의정으로, 류영경을 영의정으로, 기자헌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원전】 25 집 695 면

 

선조37/12/06(신해)

류영경(柳永慶)을 영의정으로, 기자헌(奇自獻)을 좌의정으로, 심희수를 우의정으로, 최천건(崔天健)을 호조 참판으로, 박이장(朴而章)을 대사간으로, 이심(李햖)을 집의로,【모습이 난장이 같았다.】 오백령(吳百齡)을 응교로, 류영근(柳永謹)을 필선으로, 조탁(曺倬)을 사예로, 윤황(尹煌)을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삼았다. 【원전】 25 집 3 면

 

선조38/02/01(을사)

신잡이 명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신이 평안 병사로 있을 때에 자칭 함경 감사 류영립(柳永立)의 아들이라는 자가 있었고, 류영경(柳永慶)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는 자칭 수안 군수(遂安郡守)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난후에 요괴한 무리가 이와 같이 많았기 때문에 즉시 모두 잡아 다스렸을 뿐, 조정에는 번거롭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세침의 사건을 듣고는 경희에게 글을 보내어 경솔하게 도신(道臣)에게 보고한 것을 책망하였습니다."하였다. 【원전】 25 집 696 면

 

선조38/02/24(무진)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심희수(沈喜壽)가 의논드리기를, "신들이 삼가 이충원이 지은 글을 보건대, 실로 옛날 문인들이 헌송(獻頌)한 유의(遺意)가 있으니 노신의 간절한 충신이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돌을 깎고 비석에 새겨 후세에 전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생각해보건대 평양을 회복하였을 처음에 조정이 중국의 은덕과 이 제독(李提督)의 공적을 기록하여 세 곳에 비석을 세우자고 의논을 드려 즉시 윤허를 받고 대제학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비석 세울 만한 적합한 지역을 물색하라 명했었는데 국사가 곤란하여 13년이 되도록 오랜 세월을 방치하였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 마땅히 유사에게 신칙하여 조사해 거행토록 하며 이어서 대제학으로 하여금 중국의 은덕과 제독의 공적을 서술하게 하고 겸하여 충원이 지은 송(頌) 중에 있는 말을 채택해 상의하여 완성한다면 비록 원래 송의 전문을 쓰지 않더라도 무방합니다."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하였다. 【원전】 25 집 37 면

 

선조38/05/15(무자)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변방의 대비를 충실히 하는 것이 상책인데, 변방의 대비를 충실히 하는 계책은 수령과 변장을 적격자로 임명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적격자를 얻으면 그 고을의 백성이 틀림없이 편안해질 것이니, 한 번의 승리를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 지역이 공허해지면 어떻게 보전할 수 있겠는가."하니,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이번 거사는 홀적(忽賊)을 토벌한 것이 아니고 건퇴(件退)의 적도들을 토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뒤의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수령과 변장을 가려 보내라고 하신 전교는 과연 합당한 것입니다. 지난번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종성(李宗誠)은 사람들이 칭찬하기도 했기 때문에 함께 의논하여 천거한 것입니다."하고, 기자헌(奇自獻)은 아뢰기를, "두세 곳에 비가 세워져 있다 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신도 당초에는 종성의 사람됨을 몰랐었습니다. 지난번에 보았더니 망령스런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의 기색을 살펴보니 매우 안 좋은 빛이었습니다. 그에게 물었더니 '80여 세가 된 노모(老母)가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일찍 그런 줄 알았더라면 오래 머물러야 할 자리에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헌의 말로는 어미의 나이가 85세라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오래 머무르기 어려울 듯하다. 벼슬에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그의 마음도 반드시 불안할 것이다. 체직하려면 불가불 속히 조처하여야 한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지난번 서성의 사서(私書)를 보았더니 종성(鍾城)이 가장 어려운 곳이라고 했습니다."하고, 기자헌은 아뢰기를, "류영경(柳永慶)에게 서신을 보내왔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장 어렵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육진(六鎭) 가운데 가장 어렵다는 것이고 회령(會寧)도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하니, 자헌이 아뢰기를,"회령은 종성보다는 낫습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서성의 서신에 의하면 윤선정(尹先正)이 종성에 적합하다고 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선정은 어느 곳에 있는가?"하자, 자헌이 아뢰기를, "상토 첨사(上土僉使)로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들은 번호(藩胡)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그들의 종족이 매우 많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조금씩 출몰한다면 막을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많이 출몰한다면 군사를 충원한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했다. 우리 나라의 성지(城池)와 무기는 매우 허술하다. 많이 몰려나오면 의외의 걱정이 생길까 염려된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아랫사람들도 이점을 걱정하고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곳에서 들여보낼 만한 구원이 없는데, 저들이 많이 몰려나와 기어코 성을 함락시키고자 하면 우리 나라의 성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함락시키기에 무엇이 어렵겠는가. 또 우리 나라의 장수들은 병법(兵法)을 모른다. 성을 수비하는 등의 일은 단지 성 위에 사람을 늘어 세우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병서(兵書)를 보니 많은 절차가 있었다. 이런 절차가 있기 때문에 7~8년이나 혹은 2~3년씩 수성(守城)을 하는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수성(守城)에 대해서는 절목(節目)이 매우 많은데, 우리 나라에서는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성 위에 늘어세우는 것뿐이다. 병법에는 수성하다가 간간이 진(陣)을 치기도 하고 유병(遊兵)을 두기도 하는데, 우리 나라는 이런 병법을 모르고 있다. 또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나라의 성은 완고하다고들 한다. 다른 곳은 알지 못하지만 내가 의주의 해자(垓子)를 보았는데 단지 땅을 파내고서 말뚝을 박아 세워놓았을 뿐이었다. 호인(胡人)들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해자도 메워 버렸는데 이까짓 해자를 메우는 것쯤이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하니, 자헌이 아뢰기를,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의 성을 조롱하여 시를 짓기를 '무너진 성곽 어깨높이라네.[頹城肩與高]'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람만 많다면 성은 그렇더라도 막아낼 수가 있다. 동관(潼關)으로 말하더라도 단지 수백 명의 군사뿐이라고 하였으니, 이를 함락시키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동관은 육진 가운데서도 조금 낫다는 곳인데 이 지경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원(中原)의 형세는 우리 나라와 같지 않다. 그런데도 많은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중원의 성곽으로도 보잘것없이 되고 마는데, 더구나 우리 나라의 성이겠는가. 육진을 지키지 못하면 비단 풍패(豊沛)를 수비하지 못하는 불행이 있을 뿐만이 아니다. 믿을 곳이라곤 단지 쌍성(雙城)뿐인데, 이곳도 많은 군사로 거세게 밀어닥칠 경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쌍성은 영흥(永興)에 있는가?"하니, 자헌이 아뢰기를, "영흥에는 강이 있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북도(北道)는 이와 같다지만 남도(南道)는 호지(胡地)와 더욱 가깝다고 합니다. 또 근래에 노토(老土)와 아로(阿老)의 사건이 터졌으니, 이들 적도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홀적(忽賊) 노가적(老可赤)은 전에 없던 적도로 나의 대에 이르러 대적하게 되었으니, 불행함이 막심하다. 만일 서북 지역에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하니, 자헌이 아뢰기를, "평안도의 장계를 보건대, 노추(老酋)의 일에 대해 품한 듯하였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두 호인(胡人)을 살해하였다는 일은 만두리(萬斗里)를 지칭하는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에 대해서 나는 모르고 있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신축년에 호인 10명이 나왔던 것을 체포하였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나온 것을 왜 체포했는가?"하니, 자헌이 아뢰기를, "하는 짓이 황당했기 때문에 체포했던 것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이응해(李應?)가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있을 적에 그들이 성을 포위한 적이 있었는데, 그뒤 정탐하기 위해 나온 듯하였기 때문에 체포했던 것입니다. 그때 판관(判官)만 있었기 때문에 만두리를 포구(浦口)의 연대(烟臺)에서 체포하여 죽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변장(邊將)이 10명의 호인을 모두 살해하였는데 이는 입을 막기 위해서인 듯합니다. 그때 신잡(申캈)의 장계에 의해 변장은 잡아다 추고했었습니다. 대체로 그때부터 화근이 얽혔고 그뒤로 매양 나오고자 하였으나 재변이 있는 데다가 만두리가 죽어버린 까닭에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 "이시언(李時言)은 이 사건이 만두리 때문에 화가 얽힌 것이니 개유(開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습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육진(六鎭)의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반드시 별도의 조처가 있어야만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박승종(朴承宗)은 아뢰기를, "국경의 적정(賊情)을 신이 알지는 못하지만 반드시 번호(藩胡)에 비할 바가 아닌 대적(大賊)일 것입니다. 어떻게 종말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근심이 없으리라곤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백성이 있어야 보전할 수 있는데 육진에는 백성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혹 변방을 충실히 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부역을 없애준 다음이라야 백성들이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격자의 수령을 얻는 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극진히 한다면 대적도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하고, 홍식(洪湜)은 아뢰기를, "남이공(南以恭) 등의 일에 대해 신이 매번 진달하고자 하였습니다만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다행히 조용히 입시하게 되었으므로 감히 아뢰겠습니다. 소신이 갑오년부터 기해년까지 6년 동안 연이어 상(喪)을 당해 연안(延安)에서 상주(喪主) 노릇을 하였습니다. 복(服)을 벗은 뒤 외람되게도 정언(正言)에 제수되어 출사(出仕)한 지 겨우 10여 일이었으니, 조정의 시비(是非)와 인물의 현부(賢否)에 대해 신이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널리 묻거나 자문을 구하지 못하고서 경솔히 논계하였으니, 조정에서 신을 그르다 하게 된 까닭은 실상 신이 무상(無狀)했던 소치인 것입니다. 지금은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사유(赦宥)가 여러 차례 내렸으니, 성명하신 전하의 조정에 어찌 끝내 버릴 인물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여되었습니다. 허봉(許풤)과 정사룡(鄭士龍)을 거두어 서용한 전규(前規)가 있기는 하지만 해조(該曹)에서 황공하여 감히 세초(歲抄)에 서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지금은 그들도 반드시 자신(自新)하였을 것이니, 과거의 잘못을 깨끗이 씻어주고 거두어 서용한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건퇴(件退)는 4식정(息程)이라 하는데 그러한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1백 20리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하루 안에는 돌아올 수 없겠구나."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돌아올 수 없습니다. 또 지금은 수목이 무성합니다. 5일 미시(未時)에 행군하여 6일 동틀녘에 도착할 것이라 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락이 많은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부락은 많지 않지만 홀온(忽溫)의 군사들이 서로 교체할 때 머무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군사들이 출래(出來)할 때 머물러 주둔하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건퇴(件退)가 홀온의 적도와는 7일 거리이기 때문에 이곳을 머무르는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홀적이 보내온 글에 실직(實職)을 요구한다고 했다고 합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 "홀적의 서신에는 과장된 말이 있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수상하기 그지없습니다. 홀적이 글을 보내온 것은 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하였다. 승종이 아뢰기를, "문서는 보지 못하였으나 유정(惟政)이 이미 바다를 건넜을 것이니, 조정에서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반드시 정해진 계획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량하여 조처하소서."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유정이 떠날 때 예조의 서계(書契)에 '다른 일은 중국 조정의 뜻을 어기고 마음대로 할 수 없었지만 왕래하며 사고파는 일만은 우리가 허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온 답서에 강화를 맺는 증험을 보이라는 등의 말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유의할 만한 일입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 "징험[驗]이란 글자에 뜻이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통신(通信)하는 일은 용이하게 허락할 수 없다. 소위 통신이라는 것은 신의로 서로 접하는 것인데, 전에 신묘년에 신사(信使)를 보내자마자 적병이 뒤따라 이르렀으니, 통신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 쪽에서 하는 말은 매우 이치에 순한 바른 말이다. 그렇더라도 제왕이 이적(夷狄)을 끝까지 거절하는 도리는 없다. 또 우리 나라와 일본은 불행히도 서로 가까이에 있으니, 이는 천지가 끝나도록 함께 할 나라로 마치 음(陰)과 양(陽), 낮과 밤이 함께 운행하면서도 어그러짐이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난처하기 그지없다. 진영을 마주하고 전쟁을 할 때라면 화의(和議)는 그른 것이지만 적이 물러간 뒤이니 끝까지 거절하기도 어려울 듯한데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그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정유년에도 책사(冊使)를 무례하게 대접하며 책서(冊書)를 받지 않기까지 하는 등 중국 조정에 대한 패만스러움이 극심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나의 견해와 같다. 통신사를 보낸다 하더라도 끝내 효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거절하기도 또한 어렵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탑전에서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이 일은 일본의 짓이 아닙니다. 서계로 보면 틀림없이 대마도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대마도에서 쌀과 베를 요구하기 위하여 이런 짓을 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은 쉽게 허락해서는 안 되니, 허락한 뒤에는 끝에 가서 반드시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개돼지 같은 자들에게는 만족이 없는 법이어서 한 가지를 얻게 되면 또 한 가지를 요구하게 마련입니다."하고,

성이문(成以文)은 아뢰기를, "전일 입시(入侍)할 적마다 북쪽에 대해 걱정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와서 보면 전하께서 우려하신 그대로입니다. 지금 과연 저들이 흉포하게 날뛰니 지난번의 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세가 고단한데 북도(北道)가 이지경이고 남도(南道)도 또 이지경이라서 관료들이 모두 이 점을 근심하고는 있습니다만 좋은 계책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운반하는 데 대해 타도(他道)에는 대부분 책응(策應)이 있습니다마 본도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을 적임자로 가려 부임시킨 다음이라야 가능한데 또한 사람마다 가려 보낼 수는 없는 것이어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변장과 수령은 미관 말직(微官末職)일지라도 이조와 병조가 함께 의논하고 대신이 결정하되 책(冊)을 만들어 놓고 가려서 등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싶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병조에 있으면서 보건대 판서가 또한 다 잘 알아서 제수할 수가 없습니다. 보통 때라면 대신은 체모가 중대하니 이런 자질구레한 것까지 하게 할 수 없겠습니다만, 지금은 변시(變時)이니 이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장령(將領) 이상은 으레 대신에게 품하여 왔는데 요즈음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륙(內陸)이라면 모르지만 변방 근처에는 문신(文臣)을 보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라는 제반 일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반드시 미리 강론한 다음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문신 가운데 유장(儒將)들은 변방에 제수할 수 있겠지만 무예(武藝)를 모르는 사람이야 어디에 쓰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본에 관한 일은 내가 사세로 말한 것이요, 바로 신사(信使)를 파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로서는 일본과 끝까지 끊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 그들 말에 따라 즉시 선사를 파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전교하신 뜻을 신은 압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이적(夷狄)을 접대하는 도리가 이와 같다고는 하지만 이번의 일은 경솔하게 조처해서는 안 됩니다. 허락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신의가 지켜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하고, 박진원(朴震元)은 아뢰기를, "근래 2~3년 사이에 옥후(玉候)가 미령(未寧)하시어 오랫동안 경연을 폐하였습니다. 성학(聖學)이 고명하시니 경연을 폐하여도 관계될 것은 없을 듯합니다만, 문서로 진달할 수 없는 아랫사람의 심정을 경연에서는 남김없이 모두 진달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자주 신료들을 접하시는 것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승정원으로 하여금 으레 시사(視事)할 적에 정치(政治)와 학문(學問)에 대해 품하게 하여 필히 유념하시면 유익할 것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노가적(老可赤)을 하질이(何叱耳)에 견준다면 두려울 것이 없으나 서방이 또한 걱정스럽습니다. 신이 듣건대 서방의 인민들이 거의 대부분 떠돌아 흩어졌는데 이산(理山)이 더욱 심해서 폐읍(廢邑)이 되었다 합니다. 이 때문에 본도(本道)에서 문관(文官)을 보내줄 것을 계청했으나 문관은 보낼 수 없을 듯합니다. 무관 가운데서 신중히 가리는 것이 옳겠습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관노비(官奴婢)는 단지 15~16명만 있고 민호(民戶)는 옛날에는 5~6백 호나 되었는데 지금은 폐읍이 되었다고 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서방은 인삼(人蔘) 한 가지 일 때문에 민력(民力)이 곤궁해진 것입니다. 해사(該司)에서 늘 걱정은 하고 있으나 좋은 방도가 없습니다. 중원(中原)에서 인삼이 귀해진 뒤로 백성들이 더욱 곤궁해 졌습니다."하고, 승종은 아뢰기를, "강변(江邊)의 여러 고을들이 한결같이 잔파되었는데 이산(理山)이 더욱 심하니, 수령을 가려 보내더라도 반드시 경장(更張)하여야만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이문(以文)은 아뢰기를, "이산은 민물(民物)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서방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어떤 사람은 차라리 강등시켜 첨사(僉使)를 두자고도 하니, 들려오는 소문이 놀랍습니다. 우리 나라 성지(城池)에 대한 전교는 과연 그대로입니다. 신이 광녕(廣寧)에 이르러 중국 장수들을 만났더니 우리 나라의 성지에 대해 비웃으면서 반드시 개축하여야만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중국의 성지를 보았더니 우리 나라의 성지는 아이들 장난과 같았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김신원(金信元)이 구성(龜城)과 안주성(安州城)을 쌓으려고 한창 기와를 굽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인심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김신원이 두 성의 일을 한꺼번에 하려 한 까닭에 사람들의 불평을 많이 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물력이 소비되었으니 중도에서 그만두기에는 아까운 일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은 이미 다 쌓았는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기와는 이미 다 구웠다고 들었습니다. 또 신이 듣건대 삼화(三和)는 조그만 고을인데도 기와를 굽는 데 드는 가목(價木)을 30여 동(同)이나 책출(責出)했다고 합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 "용강(龍岡)은 40여 동이나 책출했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하였다.

자헌이 아뢰기를, "이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곳 사람들은 고기잡이에 힘쓰지 않고 순전히 방납에만 힘쓴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당초 비변사와 감사의 의견이 달랐던 것 같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감사의 말은 '이미 비변사에 통보하여 이와 같이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감사를 조정에서는 그르다고 여기는가?"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본도에는 민원(民怨)이 많기 때문에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하였다. 승종이 아뢰기를, "신이 권반(權盼)의 기와굽는 상황에 대해 확인해 보니, 아직 30분의 1도 굽지 못하였는데 이미 소비된 물력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중도에서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일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새 감사가 조처하기에 달려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새 감사로 추천된 사람이 여럿인데 그중 누가 감당할 만한 사람인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비변사에서 권점(圈點)으로 결정할 일이니 신으로서는 누가 가장 적당한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평안도는 중국과 국경이 접해 있으므로 감사의 소임이 중난합니다. 또 죽산 산성(竹山山城)을 쌓기는 하였지만 역시 흡족하지는 못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말하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쌓은 것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이는 전에 쌓았던 돌로 다시 쌓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견고하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일찍이 그렇게 될 줄을 알고서 사기군(沙器軍) 등을 모두 죽산에 허락하여 주었더라면 이유홍(李惟弘)도 반드시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듣건대 전에 쌓았던 돌로 다시 쌓았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성(城)으로는 창주성(昌州城)이 매우 좋다고들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모르는 일이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육진(六鎭)에 별도로 김종서(金宗瑞)를 파견한 것처럼 할 수는 없으나, 그곳의 공물 같은 것들을 견감하여 주는 문제를 각별히 유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쇄환(刷還)하는 일은 어사를 파견한다 하여도 국가에 기강이 확립되지 않아서 유명 무실하게 될 것입니다. 조종조에서는 방금(防禁)이 매우 엄하였던 까닭에 입거인(入居人)이 되돌아 나올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그곳 사람을 혹 첩(妾)으로 삼아 데려오더라도 옛날에는 모두 논하였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육진에서 도망친 사람이 2천 7백 명이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그들의 거처를 알아 내어 일일이 쇄환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자헌이 아뢰기를, "몇몇 사람들은 혹 알 수 있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가까운 시일 안에 길주(吉州) 이북의 사람들을 우선 뽑아서 쇄환해야 할 것입니다. 평상시 어사와 감사들이 상공(上供) 등의 물품을 속속 감해주기를 청해 매우 미안하였으나 육진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육진에 번호(藩胡)가 매우 많았던 까닭에 피물(皮物)과 상공 등의 일을 준비하기가 매우 쉬웠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하고, 이문은 아뢰기를, "식(洪湜)이 아뢴 말이 맞습니다. 그들에게 과연 죄는 있지만 지금은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식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그들이 당시에 과연 죄가 있었으나 죄를 받은 지가 7~8년이 되었으니 새로와지려는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식의 말이 매우 옳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안 감사는 누가 적합한가? 나의 뜻에는 반드시 호조 판서 한효순(韓孝純)이라야 합당할 듯한데 어떠한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옳습니다. 다만 나이가 60이 넘어 기력이 부칠 듯합니다. 평안도는 참으로 장자(長者)를 보내어 진정시켜야 할 곳입니다. 조종조에서는 다른 도에 비해 다르게 본 까닭에 혹 들어와서 정승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하였다.

송석경(宋錫慶)이 아뢰기를, "소신이 원손(元孫)의 강학관(講學官)이 되었는데 조정에서 이미 결정한 일이지만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손의 강학은 반드시 제때에 해야 하니 또한 겸관(兼官)으로 겸임케 할 수는 없습니다. 실관(實官)을 임명해서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책임지게 하여야 될 듯합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수성법(守城法)에 대해 중국인들이 대부분 비웃고 있습니다. 왜구를 막는 일 같은 것을 기병으로는 쉬우나 보병으로는 어려우니, 마정(馬政)을 힘써 다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 "홀적(忽賊)의 말은 매우 크다고 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감목관(監牧官)을 다시 차출해야 하겠습니다. 감목관을 두었을 때는 마정이 조금 나았었습니다."하니, 상이 "안 된다"고 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지방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사이 마정에 한심한 일이 많으니 다시 감목관을 두어 적임자를 가려 시키느니만 못할 것 같습니다."하고,

승종은 아뢰기를, "사복시(司僕寺)는 대신이나 중신의 소관이지만, 신이 감히 상달하건대, 우리 나라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정이니 류영경이 아뢴 말이 옳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애당초 마정이 없었던 까닭에 살곶이를 백성들에게 경작토록 허락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은 수초(水草)가 좋은 곳은 사대부들이 모두 절수(折受)받은 탓으로 말들을 산 밑 수초가 넉넉하지 않은 곳에 방목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간혹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걱정이 생기는 것은 물론 말들도 번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감목관을 혁파하지 않았을 때 번식된 것과 현재 번식된 것에 대해 어느 때가 많고 어느 때 적은가를 살펴보소서. 다시 감목관을 두되 적격자를 가려야 될 것입니다."하였다. 오시(午時) 정각에 끝내고 물러갔다. 【원전】 25 집 64 면

 

선조38/05/29(임인)

사시(巳時)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를 인견하였는데, 좌승지 류인길(柳寅吉), 기사관(記事官) 이척(李?), 기사관 오익(吳翊), 기사관 이호신(李好信)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함경도 감사와 병사의 일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건퇴의 일은 잘 시작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뒤탈이 있게 마련인데, 지금은 잘 시작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이 비국(備局)에 있으면서 장계를 보니, 사람들이 많이 다쳤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감사와 병사를 체직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사핵한 다음 조처하려 하였는데, 지금 대론(臺論)이 벌써 들고 일어났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치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대패했다는 것이 과연 대간이 아뢴 대로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기병은 도망치고 보병은 숨음으로써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패한 것은 사실입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 "마실 물이 없어 사졸들의 기갈이 심했으며 성우길은 두 번이나 오줌을 마시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하고, 회수는 아뢰기를, "밤새도록 1백 40리 길을 걸었으므로 군인들이 주리고 목이 말라 진흙탕의 흙물을 마시기도 했다고 합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 "사람마다 10일의 양식을 준비했다가 모두 내버렸으므로 배고픔에 시달렸다고 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사람과 말이 함께 지쳤으니 어떻게 역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때가 아닌 때 출동하였고 계획이 잘못된 소치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대체로 이 적은 당해내기 어려운 적인데 이번에 약점을 보였으니, 만일 도로가 마르고 나면 8~9월 사이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심상하게 조처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하고, 희수는 아뢰기를, "대간이 이른바 '군사를 잃고 나라를 욕되게 하였다.'는 말 그대로입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그 사이에 죽은 토병(土兵)이 어찌 한두 명이겠습니까. 지금 쇄환중이지만 많은 사람이 손상되었다고 합니다."하고, 희수는 아뢰기를, "남관(南關)의 군사들도 사망하거나 사로잡힌 자들이 많다고 합니다."하였다. 영상이 아뢰기를, "김종득이 탁두를 너무 믿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지만 대체로 선처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와 병사가 반드시 불안해 할 것이니 순변사(巡邊使)를 속히 보냈으면 합니다. 병사가 모두 일을 그르친 것인데 감사도 이미 논박을 받았으니 행공(行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6~7월을 어떻게 넘기겠습니까. 몇 달을 넘기는 일은 반드시 어렵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감사와 병사는 누가 대신할 만한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김종득이 죄는 지었으나 그대로 제수하여 탁두를 통제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탁두를 통제하지 않아 탁두로 하여금 저쪽으로 넘어가게 하면 더욱 곤란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득이 탁두를 너무 믿고 있으니 다른 사람을 가려서 보내는 것만 못하다고도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대의 일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다. 내가 탁두의 일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이정험은 '탁두 때문에 패배를 당했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이라면 홀적이 무엇 때문에 탁두를 포위하였겠는가. 이는 정험의 경솔한 말이다. 어찌 이로 인해 의심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희수가 아뢰기를, "먼저 도망쳐 온 군사들이 으레 패했음을 말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장계를 올린 것인데, 정험도 두 가지 말이 분운하여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탁두의 군대에도 사망자가 있었고 석을장개 부자도 화살에 맞거나 칼날에 찔렸다고 했습니다만, 부실한 말인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사 승전했다 하더라도 어찌 전연 손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사핵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 고을에 군부(軍簿)가 있으니 조사하여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각 고을에 마련된 군부가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고경민(高敬民)이 금부에 갇혀 있으니 추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추문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왕옥(王獄)에 갇혀 있는 죄인에게 전시의 상황을 추문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병사를 체직하여야 한다면 속히 체직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비변사의 의견은 사핵한 다음 조처하려 하고 있으나 아직 대임자(代任者)를 얻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매사에 오래 인내하지 못한다. 일정 일사(一政一事)도 오래 견디지 못하니, 동방(東方)의 인심이 대개가 이러하다. 사람들은 왜인(倭人)이 매우 경솔하다고들 하지만 왜인은 실상 경솔하지 않다. 평행장(平行長)의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왜인이 평양에서 대패했을 적에 요동이 없었다. 이는 성공을 책임지워 위임시킨 때문인 것이다. 중국 사신 이종성(李宗誠)이 도망쳐 돌아왔을 때도 역시 요동이 없었다. 모든 일은 오로지 책임지워 요동치 않게 하는 것이 귀중하다."하니, 희수가 아뢰기를, "중원(中原)에서는 경솔히 장수를 바꾸지 않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적을 토벌하려다 도리어 위엄을 꺾였으니, 불행스럽게 되었지만 이는 국사인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국사에 힘을 기울이지 않고 편히 앉아 개만(箇滿)만을 넘기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편안하겠지만 국사는 전연 돌보지 않는 것이니, 속담에 이른바 '국사에 힘쓰는 것은 관재(官災)의 근본이다.'란 것이 바로 이를 지칭한 것이다."하니, 희수가 아뢰기를, "이 다음 사람들은 국사를 위해 힘쓰고자 하던 자들도 반드시 힘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체직해야 할 것 같으면 대임자를 내 앞에서 천거하도록 하라."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이런 시기를 틈타 청대(請對)하려 했었으나 요사이 날씨가 흐리고 더워 혹 옥후(玉候)가 미령하실까 하여 주저하면서 실행치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마침 입대하게 되었으니 서로 의논하여 아뢰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부(可否)를 따져서 헤아려 조처해야 될 것이다. 김종득이 어떠한 사람인지 비록 모르지만, 그가 어찌 변방의 사정을 짐작하지 못하였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변방의 상황이 이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번호(藩胡)들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고 모두 저들에게 들어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적의 사세는 번호들과는 크게 다릅니다. 번호들은 소규모의 무리들이라서 분탕되어 한번 보금자리를 잃게 되면 정상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건퇴가 있는 곳은 바로 홀적(忽賊)이 군사를 나누어 진(陣)을 설치한 곳으로, 이제 이들을 이긴다 하여도 홀적에게는 대단한 손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이끌고 갈 때에 길을 바꾸어 우회하는 길로 나아갔다고 했다. 향도(向導)와 체탐(體探)에 대해 미리 강구하지 않고 중간에 갑자기 변경했다는 것은 수상하기 그지없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이는 탁두가 한 것입니다. 다만 탁두가 속인 것이라면 중로에 반드시 복병이 있었어야 할 것인데, 그와 같은 일이 없었으니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 아님은 틀림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누설되는 것을 염려했었는데 과연 그대로였다. 누설되어 알려지면 약한 자들은 반드시 먼저 도망칠 것이고, 강자는 반드시 숲속에 매복할 것이다. 군사 작전이란 귀신도 헤아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누설되면 아군만 헛수고를 하게 된다. 또 불의에 적군이 매복해 있다가 돌격해 왔다고 했는데, 이는 무슨 말인가? 행군(行軍)을 하거나 적을 습격할 때에는 한 걸음이라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이른바 '불의'란 두 글자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종군(從軍)하여 싸움에 익숙하기 때문에 적을 잘 헤아리고 승패에 밝았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은 장수조차 병법(兵法)을 모르고 또 성미마저 옹졸하여 진을 친 뒤에도 삼령 오신(三令五申)에 대한 이치를 모르고 포위할 때에도 약말만 일삼는다고 한다. 이는 군율(軍律)이 없는 탓이다. 옛사람은 백성의 갓 한 개를 빼앗아도 군법을 시행했었다. 그런데 약탈했다는 것은 이 무슨 말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북방의 규례가 그렇다고 합니다. 번호를 분탕할 때에는 가재(家財)를 챙기는 것이 급선무라 합니다."하고, 희수는 아뢰기를, "동이 그릇까지도 빼앗았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불의에 돌격하여 왔다는 말에 나로서는 조소를 금치 못하겠다. 시배(時排)란 어떤 제도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성자(城子)와 같은 것인데 혹 목책(木柵)으로 세우기도 합니다. 건퇴의 싸움에선 적의 정병이 이미 외진(外陣)을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계를 보면 이미 외진을 치고 매복을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전에 분탕할 때에 극비에 붙였었지만 으레 누설되곤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행군(行軍)하였으니, 매우 오활한 것입니다. 서성 등의 일은 사핵한 뒤에 알 수 있을 것이나, 대개는 치밀하지 못했던 탓입니다. 감사와 병사가 당연히 서로 의논해서 약속을 했어야 할 터인데도 각자의 견해를 고집했던 것입니다. 전일 이항(伊項)의 싸움에서도 감사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고 병사가 제 마음대로 한 것이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서성을 계획이 있고 치밀한 사람으로 여겨 왔는데, 이번에는 어째서 이렇게 하였단 말인가?"하니, 희수가 아뢰기를,"재간이 없지는 않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건퇴의 싸움에 대해 병사는 7월에 군사를 늘리자고 하였고, 감사는 8월에 군사를 늘려 줄 것을 계청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책을 세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하였다.

희수가 아뢰기를,"건퇴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의 수가 적다는 말은 정탐을 잘한 것인 듯한데, 이처럼 풀과 나무가 무성할 때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으니, 적군이 곁에 매복하고 있다 한들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군기(軍機)는 치밀하게 하여도 누설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번병(藩兵) 수천 명이 또한 모두 알았었다 하니, 탁,석(卓石)【탁두(卓斗)와 석을장개(石乙將介)이다.】 등이 사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그들 휘하의 오랑캐들이 어찌 서로 통할 리가 없겠습니까. 또 비로 인해 날짜를 물렸다 하니, 이것이 패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입니다. 더구나 탁두에게 알반(謁攀)으로 말 1백 필을 주었다고 했는데, 이도 의심스럽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알반에 대해서는 괴이할 것이 없다. 탁두가 우리 나라를 위하는 진실된 마음이 있다고 하지만 위험이 눈앞에 닥쳤으니 1백 필을 어찌 중하게 여기겠는가. 이른바 알반이란 무슨 말인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세속에서 말하는 선물이란 뜻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탁두가 우리를 향모하는 정성이 있다 하여도 우리의 형세가 고단하고 약해지면 뒷날 홀적에게 붙지 말라는 법은 절대 없다. 저들에게 붙어 버리면 우리는 더욱 곤란해질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탁두가 어찌 우리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킬 자이겠습니까."하고, 희수는 아뢰기를,"우리의 형세가 강하면 저들에게 붙지는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홀적은 달자인가?""하니, 자헌이 아뢰기를,""하질이(何叱耳)의 말에 의하면 고려(高麗) 사람이라 합니다. 선세(先世)에 오랑캐를 토벌하러 그곳에 갔다가 마침내 그곳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인 요동의 넓은 들녘은 천리 만리나 광활하고 삼승(三升) 필단(疋緞)을 많이 저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질이는 바로 홀온(忽溫)의 수령으로 성밖에다 번호(藩胡)와 우리 나라 사람들을 빙둘러 살게 한다고 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국초(國初)부터 홀라온(忽刺溫)이 있었으니 그 유래가 이미 오래입니다. 대체로 서방(西方)의 노토(老土)와 북방(北方)의 홀온(忽溫)은 심상하게 여길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난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후세(後世)에 이르러 걱정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도 서너 명이 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홀적의 나이는 몇인가?" 하니, 자헌이 아뢰기를,"50여 세라 합니다."하였다. 자헌이 아뢰기를,"하질이가 스스로 말하기를 '만일 조선의 관작(官爵)을 얻을 수만 있다면 큰 다행이겠다.'고 했다 합니다."하고, 희수는 아뢰기를,"우리 나라가 건퇴의 적을 모두 섬멸한다 하더라도 홀적이 다시 군사를 배치한다면 섬멸하고 않고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군량이 매우 어렵습니다. 원대(遠大)한 계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먼 길을 운송해 오는 방법으로는 계속 이어댈 계책이 없으니, 군사를 늘려 둔전(屯田)하는 것이 실로 양책(良策)인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둔전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육진(六鎭)에는 반드시 둔전을 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전일 정언신(鄭彦信)이 녹둔도(鹿屯島)에 둔전을 설치했다가 끝내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둔전도 쉽지는 않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녹둔도의 경우 크게 벌렸던 까닭에 성공하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각 진보(鎭堡)에 각각 군사를 늘려 편리한 대로 실행한다면 군량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충국(趙充國)도 한편으로는 수비하고 한편으로 둔전하였으니, 지금 그 계모를 따라 둔전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 문제는 일을 맡고 있는 감사와 병사가 형편을 보아가며 하는 것이 좋겠다. 대체로 사람이 있어야 지킬 수도 있고 싸울 수도 있는 것인데, 지금 듣자하니 육진이 텅 비었다고 한다. 양장(良將)이 있다 한들 빈손으로 앉아서 어떻게 책응(策應)할 수 있겠는가. 백성이 있은 다음이라야 군량도 준비할 수 있고 정탐도 시킬 수 있음은 물론, 수비도 할 수 있고 전쟁도 할 수 있다. 변방을 충실히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어찌 계책이 없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조종조에서는 하삼도(下三道)의 부민(富民)들을 억지로 입거(入居)시켰었으나 지금은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하삼도에 백성들이 매우 많았으나 지금은 드무니, 대거 입거시키기는 형편상 어려울 듯합니다. 따라서 쇄환하여 보내 차츰 변방을 충실히 해야 하는데, 국가에 기강이 없어 일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하고,

희수는 아뢰기를,"본도의 인물을 쇄환하는 것이 지당하나 착실하게 거행하지 못할까 염려입니다."하고, 류인길은 아뢰기를,"번호가 없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안심하고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회령에도 번호가 없다고 합니다."하였다. 희수가 아뢰기를,"회령은 성자(城子)가 넓고 크지만 샘이 없다고 합니다."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감사와 병사에 적격자를 얻은 뒤라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김종득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아직 모르고 있다. 왕성(王城) 사람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직산(稷山) 사람입니다. 신이 전에 황해 감사로 있을 적에 종득이 봉산(鳳山)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불러 모음으로써 봉산 한 군이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재간이 없지 않다고도 하고 쓸 만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기에 신이 전에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온성 부사(穩城府使)에 의망하여 낙점을 받았었습니다."하고, 희수는 아뢰기를,"재국(才局)이 있고 범람된 행동이 없어 매우 청신(淸愼)하다 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민심(民心)을 얻었고 또 매우 청백하다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청백한 것은 귀한 것이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요사이 듣건대, 첩(妾)도 데려 가지 않고 단지 아우 한 사람만을 데리고 갔다 합니다. 그의 본성이 청근(淸謹)하니 대체로 착한 사람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병가(兵家)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재략이 있는 장수도 간혹 공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고, 재략이 없는 사람도 우연하게 공을 이루는 일이 있다. 우윤문(虞允文)이 능히 금(金)나라 임금 양(亮)을 이기고, 사현(謝玄)이 부견(符堅)을 막아 낸 것은 요행히 공을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라, 그밖의 인간사도 모두 그렇다. 옛날 환온(桓溫)이 촉(蜀)을 칠 때 화살이 말 앞에 떨어지자 징을 쳐 군사를 퇴각시키려 하였는데, 군사들이 잘못 듣고서는 북을 울려 제군(諸軍)이 다투어 전진함으로 해서 대공(大功)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하니, 희수가 아뢰기를,"모두가 운수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나의 말은 범론(汎論)이니 이번 건퇴의 싸움도 명분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저들이 아무 까닭없이 군사를 움직여 동관(潼關)을 함락시켰으니, 의를 내세워 토죄(討罪)하는 것이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잘못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하니, 희수가 아뢰기를,"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천시(天時)에도 맞지 않고 지리(地利)도 좋지 않았습니다. 병법(兵法)에 '이익을 위해 1백 리를 달려가면 상장(上將)을 잃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하였다.

희수가 아뢰기를,"비록 1백 리를 달려가도 안 되는데, 더구나 1백 리보다 먼 길이겠습니까."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북도의 일이 앞으로 불행해지려고 이렇게 되었나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한 당상관이 말하였는데 북도에 바닷물이 붉어지는 변이 있었다고 했다. 오로지 북도의 일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 이는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 객성(客星)이 여러 달 미수(尾宿) 분야에 나타났는데, 이 분야는 바로 우리 나라에 해당되는 분야이다. 일찍이 통보(通報)를 보건대, 중원(中原)에도 이러한 재변이 발생하여 각로(閣老)들이 매우 걱정한다고 했다. 객성은 바로 적성(賊星)이다. 중조(中朝)의 화패(禍敗)가 우리 나라와 같다니 매우 염려된다. 더구나 다른 재변도 연이어 나타나는 데이겠는가."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북방에 번호(藩胡)가 없으니 이것이 염려됩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홀적이 말하기를 '번호는 모두 나의 관할 아래 있는 자들이니 육진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두 쇄환할 수 있다.'고 했다 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직첩(職帖)에 대한 말도 그가 얻고자 해서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번호들에게 나누어 주어 여러 번호를 얽어 놓으려는 계책에서일 것입니다."하고, 자헌은 아뢰기를,"직첩을 얻게 되면 반드시 평소대로 녹봉을 요구하려 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노을가적(老乙可赤)이 가장 당해 내기 어려운 적이다. 내가 전부터 여러번 들었는데 하질이(何叱耳)는 중국에 조공(朝貢)하지 않지만, 노을가적은 용호 장군(龍虎將軍)이란 명칭을 얻어 중국에 조공한다고 한다. 사로잡힌 우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쇄환하면서 예모(禮貌)를 차려 보내고 또 국중(國中)에서 학문을 가르쳐 군기를 누설하지 않게 하고 있으니, 깊은 뜻이 있는 듯하다. 게다가 하늘에 제사도 지낸다니 이는 매우 흉악한 적으로 심상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중원이 어지러워지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내가 전에 평안도 지역을 본 적이 있는데,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도보로 건널 수 있는 곳은 전조(前朝) 때부터 오랑캐가 거세게 몰아쳐올 경우 방어하기 어려웠었다. 북도(北道)는 요해처가 많아 그래도 방어할 수가 있지만 평안도는 매우 어렵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북도는 대적(大賊)이 들어오기는 어려운 곳이지만, 관서(關西)의 경우 구성(龜城)과 창성(昌城)이 바로 적의 큰 길목이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북도의 두호(頭胡)인 노토(老土)와 하질이(何叱耳) 등이 교결하여 하루아침에 난이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서로 연합할 것이다."하니, 자헌이 아뢰기를,"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서로 오간다고 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창성(昌城)은 적과 3일정 거리의 매우 가까운 지역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탄탄 대로라 합니다. 산보(山堡)의 오랑캐가 모두 그의 휘하로 들어가 노토와 결혼도 하고, 또 아로(阿老)에게 딸을 시집보내기도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평안도의 수령은 가려서 보내야 한다. 평상시 가려 보내지 아니하면 일이 발생한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북방의 일은 일조 일석에 일어난 일이 아니어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하였다. 【원전】 25 집 74 면

 

선조38/08/01(계묘)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賀禮)하였으며, 경외(京外)에 반사(頒赦)하였는데, 이는 상의 병이 나았기 때문이다. 상이 여러 승지를【도승지 홍식(洪湜), 좌승지 류인길(柳寅吉), 우승지 류몽인(柳夢寅), 좌부승지 구의강(具義剛), 우부승지 정혹(鄭?), 동부승지 이선복(李善復).】 불러 안으로 들게 하여 하유(下諭)하기를, "옛날에 경사가 있으면 하례를 행하였다. 내가 병들어 조회를 보지 못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이제 다행히 비로소 경연을 열게 되었으니, 세자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하례를 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도리어 혐의되는 바는 있으나 단지 세자의 예절에 흠이 될까 걱정한 것일 뿐이다. 옛날에 임금들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근신에게는 말하였으니, 정원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하지 말라."하였다.

이에 예조가 하의(賀儀)를 거행하도록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심희수(沈喜壽) 등 및 정원과 양사가 뒤따라 이를 청하면서 여러 번 계달(啓達)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세자도 연이어 차자를 올려 청하기 시작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류영경이 조강(朝講)에 입시하여 상의 뜻에 맞게 힘써 진술하고 물러나와 진계(陳啓)하며 다시 청하니 이에 따랐다. 류영경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을 올려 칭하(稱賀)하였다. 병오일에 세자도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을 올려 칭하하였으며,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김상헌(金尙憲)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삼았다. 처음 상헌이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이조 참판 기자헌이 류영경을 대사헌으로 의망하려 하자 상헌이 이를 힘써 막았다. 이 때문에 영경의 당이 깊이 유감을 품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류영경이 국정(國政)을 훔쳐 잡자 이를 인연하여 때를 보아 복수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상헌을 배척하여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삼았다가 파직되어 돌아오자마자 바로 경성 판관으로 보임시켰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분해하며 탄식하였다.

《실록》을 살피건대,"상헌이 일찍이 전랑이 되었을 때 일을 임의로 처리하니, 자헌이 류영경을 끌어들여 응견(鷹犬)을 삼으려 하였는데, 상헌에게 저지당했다."하였으니, 그 강직하고 방정하여 흔들리지 않았던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받은 것이다. 《실록》에 또, "좌의정 기자헌은 성품이 너그럽고 일찍부터 덕망을 지니고 있었다."하였는데, 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속셈대로 감행하면서 이토록 조금도 거리낌없이 하였으니 주벌(誅伐)해도 모자라다 하겠다. 【원전】 25 집 697 면

 

선조38/08/02(갑진)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도량이 넓고 일찍부터 덕망이 있었다.】 우의정 심희수(沈喜壽) 등이 아뢰기를,"성후(聖候)가 미령하신 지 어언 3년 만에 다행히 천지 신명의 음덕(蔭德)으로 건강을 회복하시어 경연을 열게 되었으니, 온 나라 신민들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실로 종사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유사가 진하를 계청한 것은 실로 정이나 예로 보아 폐할 수 없어서인데 윤허를 받지 못하여 군정(群情)이 낙망하고 있습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내가 외람되이 임금 자리에 앉아 질병이 겹치는 것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비록 경연(經筵)을 열기는 했으나 병이 완쾌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요즘은 천재(天災)가 계속되니 진하할 만한 때가 아니다. 경들의 뜻을 알겠으나 진하는 결코 할 수 없다."하였다.

영의정 류영경, 좌의정 기자헌, 우의정 심희수가 아뢰기를,"삼가 성비(聖批)를 받들고 신들은 민망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진하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지난 계사년 중종께서 몇 개월 동안 종기를 앓다가 나으시자 그때 유사와 대신들이 진하하기를 계청해서 윤허를 받았었고, 기미년에는 명종께서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옥체를 상하셨다가 회복되어 경연을 열자 유사와 대신들이 진하를 계청하여 역시 윤허를 받았던 일이 있으니, 이는 바로 선왕조에서 이미 행한 일입니다. 그때는 진하례만 행한 것이 아니라 크게 은전을 내리기도 했으니, 실로 옥체가 강녕한 것은 종사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께서 여러해 조섭하시다가 병이 나아 경연에 납시게 되었으므로 구구한 군하(群下)들의 심정에, 성후가 쾌차하시어 감격스럽기 그지없으니 진하하는 일절은 정이나 예로 보아 실로 폐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교에 㰡지금은 진하할 만한 때가 아니다.㰡 하셨는데, 전하께서 재변을 만나 수성(修省)하시는 뜻은 극진하나, 신료들의 한없이 기쁜 마음에는 진하례를 꼭 거행하고 싶어합니다. 삼가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일은 때에 따라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전례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그만두라 하는데 그만두지 않는 것도 예에 맞지 않는다. 이는 정말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하지 말라."하였다.

영의정 류영경, 좌의정 기자헌, 우의정 심희수가 아뢰기를,"삼가 성비를 받드니 신들은 답답하고 민망하여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아무리 무상(無狀)한 자들이라 해도 어찌 감히 할 필요가 없는 일을 군부께 강청하겠습니까. 상께서 3년이나 약을 드시던 끝에 옥후가 쾌차하여 경연을 열고 강독을 하시게 되었으니, 온 나라 신민들이 기뻐하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들도 저승에서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에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신들이 구구하게 청하는 것은 전례에 구애되어 반드시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진하하는 정을 펴는 것이 실로 신자로서의 정과 예에 있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거행하도록 명하시어 여정(輿情)에 부응하소서."하니, "다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원전】 25 집 102 면

 

선조38/08/03(을사)

영의정 류영경, 좌의정 기자헌, 우의정 심희수가 아뢰기를,"신들이 연일 대궐에 나아가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한 일인줄 잘 알고 있으나, 감정이 마음속에서 북받쳐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 옥체가 미령하시어 약을 드시고 침을 맞으셨지만 아무 효험을 보지 못하자 아랫사람들의 민박한 심정은 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천지 신령께서 은연중 도와주심으로써 옥후가 회복되시어 경연을 다시 열고 전과 같이 책을 읽게 되었으니, 이는 국가의 더할 수 없는 경사입니다. 그러니 백관들이 구구하나마 진하하려는 예를 어떻게 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선왕조에서 이미 행했던 규례로, 선왕들께서는 잠시 미령하시다가 회복되셨을 경우에도 하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번에는 옥후가 3년 동안이나 편찮으시다가 겨우 회복되셨으니, 신민들이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곡진히 헤아리셔서 속히 윤음(綸音)을 내려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 "다시 와서 아뢰니 매우 미안하다. 해도 괜찮은 일이라면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이므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실상 꼭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 소요스럽게 하지 말라."하였다.

영의정 류영경, 좌의정 기자헌, 우의정 심희수가 아뢰기를, "신들이 이 한 가지 일을 네 번이나 아뢰어 청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아직까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민망하고 답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미령하셨을 때에 아랫사람들이 하염없이 걱정하던 심정이 어떠하였겠으며, 이제 옥후가 회복되시어 경연에 임어하기까지 하시니 아랫사람들의 뛸듯이 기쁜 심정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아랫사람들의 지극한 심정으로 인해 상께 축수(祝壽)하는 상례(常禮)를 거행하려 하는 것이니, 이 어찌 해서는 안 되고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행해오던 전례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옛적에도 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는 실로 신자로서 폐할 수 없는 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거롭게 해드림을 무릅쓰고 감히 다시 아뢰는 것이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여정(輿情)을 굽어 살피시어 속히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까닭없이 한바탕 소요를 일으키니, 이는 내 마음에 불안할 뿐만 아니라 실로 보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만두지 않는 것도 정이나 예에 맞지 않는 것이니 진정하여 소요스럽게 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25 집 103 면

 

선조38/08/04(병오)

묘시(卯時)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니 영사 류영경(柳永慶), 지사 류근(柳根)【자못 문명(文名)이 있었으므로 문형의 자리에 제수되었다.】 특진관 홍가신(洪可臣), 오억령(吳億齡), 참찬관 류인길(柳寅吉), 집의 이덕형(李德泂), 검토관 이호의(李好義), 시독관 성준구(成俊耈), 정언 이극신(李克信), 기사관 목대흠(睦大欽), 기사관 임장(任章)․이현(李俔)이 입시하였다.

상이 《주역》 규괘(?卦)를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탈호(脫弧)' 아래에는 왜 토를 달지 않았는가? 돼지는 본디 불결한 동물인데 또 진흙까지 뒤집어썼으니 귀신이 수레에 가득 타고 있는 형상처럼 볼 수 있지 않겠는가?''서부(챡膚)'라는 말은 그 뜻을 잘 모르겠다. 이 괘는 대체로 서로 어긋난 때를 만났다는 뜻이다."하니,

류근이 아뢰기를,"이 괘는 처음에는 서로 괴리되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서로 합치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중국에 촉인(蜀人)으로 내씨(來氏)라는 자가 《주역》에 정통하다고 하는데, 경은 들어보았는가?"하니, 류근이 아뢰기를,"송(宋)나라 때 양만리(楊萬里)라는 자가 《주역전(周易傳)》을 지었는데 《정전(程傳)》과 다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부'란 물어 뜯어 상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본래의 뜻은 서로 친해지려고 한다는 말이다."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유선(劉禪)과 공명(孔明)이 서로 미덥게 된 것이 바로 그런 유입니다."하고, 호의는 아뢰기를,"대체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미덥게 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귀신이 수레에 타고 있다는 말은 곧 처음에는 소원하다가 나중에는 친밀해진다는 뜻입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누차 강연을 베푸셨는데 옥후는 어떠하십니까?"하고, 덕형은 아뢰기를,"옥후가 회복되시어 경연을 다시 베푸셨으니 진하례(陳賀禮)를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극신은 아뢰기를,"옥후가 회복되셨는데도 예관(禮官)은 진하할 것을 청하지 않았으니, 매우 미안합니다."하고, 준구는 아뢰기를,"옥후가 강녕하시니 신민의 다행입니다. 대신과 양사가 모두 진하를 청하는 것은 정이나 예로 보아 마땅한 일이니 빨리 윤허를 내리셔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예조는 그 때문에 추고할 수 없다. 이런 때에 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이는 평범한 경사가 아니니 진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상의 손등에 부기(浮氣)가 있었는데 완전히 나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부었다 빠졌다 하므로 곧 나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금년에는 더위와 습진 기운이 매우 심하므로 침을 맞아도 효험이 없고 탕약을 늘 복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합니다. 이는 의관(醫官)의 말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침의(鍼醫)가 서울 근처에 머물러 있으면 내 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서민들의 병까지도 다 치료할 수 있을 것인데 먼 지방 사람이므로 서울에 머물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가 용렬하여 수령 등의 관직을 제수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를 서울에 머물도록 조처하지 않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 우선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하자,

류인길이 아뢰기를,"그가 용렬하여 목민관(牧民官)의 직은 감당할 수 없지만 녹봉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면 될 것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 "남영(南嶸)의 노모(老母)가 남쪽에 있으니 억지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근래 북도의 일은 언제 변이 발생할지 매우 우려됩니다. 본도도 물력이 탕진되었고 다른 도도 마찬가지이니 군사를 조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등의 일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내지와 육진의 성곽이나 기계가 모두 견고하게 완비되지 않았으니, 적이 재차 침범하면 국가가 치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육진이 한 번 무너지면 그 다음에는 수복하기 어려울 것이니, 옛날 두충(杜充)이 양주(陽州)를 지킬 당시 악비(岳飛)가 말하기를 '오늘 수복하지 못하면 나중에 걷잡을 수 없는 환난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경우와 같다. 육진은 우리 나라의 척추이다. 척추가 견고하면 등이 믿을 것이 있으나 배와 등이 다 무너지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비변사는 이 점을 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성지(城池)는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므로 이시언(李時彦)의 장계에 㰡만약 사변이 일어나면 천운만을 바라며 성을 지킬 따름이다.㰡하였으니, 옛날 왕흠약(王欽若)의 '재계하고 경이나 왼다.'는 말과 불행히도 흡사하다. 대체로 성을 지키는 법은 체번법(替番法)․결진법(結陣法)․유군법(遊軍法)이 있는데, 여문환(呂文煥)이 6년 동안 원(元)나라 병사를 막아내는 데 썼던 방법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병서(兵書)를 모르니 한스럽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이시언이 떠날 때 성곽을 수축할 것을 말하여 보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경포수(京砲手) 황언(黃彦)이 사로잡혔다가 돌아왔으니 오랑캐 지역의 형세와 군사 기밀을 필시 알 것이다. 비변사로 하여금 물어 아뢰게 하라."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여허 부락(如許部落)에서 청하보(淸河堡)까지는 3일정이라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적추(賊酋)의 이름을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하고(夏古)는 소추(小酋)의 포로가 되었다가 그의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조종조 때부터 서북방을 중시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일 것인데, 조종조 때는 이와 같은 강노(强虜)가 없었다."하고, 또 이르기를,"이 적을 가장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른바 '배반은 더디나 화는 크다.'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만일 서북방에서 동시에 도발해 와 우리의 힘이 분산되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노추(老酋)가 언제 갑자기 도발할지 알 수 없고 하고이(夏古伊)의 흉모도 예측하기 어려우니, 이 적들이 가장 염려스럽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비변사에서 중국 아문에 이자(移咨)하여 적호를 개유하는 계책이 가장 좋다. 이는 의리에도 어긋나지 않고 호인들도 움츠러들 것이다."하니, 류근이 아뢰기를,"호인들은 본디 통솔자가 없었으나 지금은 합세하여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니, 중국에 이자하는 계책이 매우 좋습니다. 그리고 북도에 군량을 입송시키는 일을 소신에게 살펴보게 하셨는데, 소신이 지난 정축년에 흡곡 군수(翕谷郡守)로 있을 당시 권벽(權擘)이 '북도의 군량은 미리 조치하여 들여가야 한다. 강원도의 마상선(?商船)은 다른 지역의 배와 달라서 적재량이 겨우 20여 석 정도로 운반하는 쌀이 매우 적은 데다 중도에서의 소비가 곱절이나 되기 때문에 운송하기가 극히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유사시에만 잠시 일을 조치하다가 평온을 되찾으면 곧 중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북도는 육로가 가깝지 않으니, 이 때문에도 미리 조치하여야 합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이번에 갑자기 발생한 풍수의 재해는 마치 북도 때문에 발생한 것 같아 더욱 놀랍습니다. 영동(嶺東), 안변(安邊) 등지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풍수는 오랑캐가 횡행할 조짐이다.'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강원도, 함경도 등은 나라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인데 이제 이와 같으니, 양도가 재앙을 입은 일은 참담한 일이다. 다만 이런 때에는 인사(人事)를 닦기만 할 따름이니 어찌하겠는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오직 인사를 닦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강원도는 북도와 접경 지역이므로 미리 군사를 뽑으면 소요가 있을 듯하니 무사와 산척(山尺) 중에 쓸 만한 재주가 있는 자를 조용히 미리 뽑아 장래의 용도에 대비할 것을 감사에게 일러 보내라. 우리 나라 장수가 조치하는 일이나 서장 등을 보면 전혀 병서를 모르니 놀랍다. 문신도 병사를 아는 자가 없으니 병서도 고문(古文)인데 어찌하여 읽지 않는가. 옛사람이 '《손자(孫子)》와 《주역》은 같다.'고 하였으니, 옛사람은 참으로 글을 안다고 할 만하다."하니, 가신이 아뢰기를,"중국 장관(將官)은 아무리 용렬한 자라도 모두 병서를 압니다."하였다.

류근이 아뢰기를,"서북의 적이 일시에 함께 도발해 오면 막아내기 어려울 형세가 될 것이니, 방비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이수일(李守一)은 북도의 인심을 깊이 얻고 있으니 큰 고을의 수령으로 차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종조에 이만수(李萬壽)가 안주 목사(安州牧吏)로 있을 때 변방을 대비할 계책을 맣이 세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런 사람을 두고 한 말인가 봅니다."하니, 상이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아당개(阿黨介)는 투거(偸巨)의 아들인가? 이 자는 용렬한 보통 적에 비할 바가 아니다."하니, 류근이 아뢰기를,"발토(큵土)는 바로 효정(孝貞)의 손자라고 합니다. 임진년 이후 북도에 대해 국가에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군졸들이 몹쓸 변장에게 침해를 당하여 사망한 자 이외에 적지로 투항하여 들어간 자도 많으니, 특별히 어사를 보내어 은덕을 베푸셔야 합니다. 전부터 누차 목면(木綿)을 들여보냈으나 전부 지급하지 않고 절반을 피물(皮物)로 바꾸었으므로 그들의 분노를 야기시켰습니다. 이우직(李友直)은 그렇게 하지 않고 전량 지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칭찬하고 있습니다. 호인은 으레 청백한 사람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번호를 전부 사로잡아가 그 세력이 막강한데 탁두(卓斗)도 잡혀갔다고 합니다. 혹자는 '번호를 내지(內地)로 옮겨 들이는 것은 잘못된 계책이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이 계책은 매우 좋지 않다. 지금 어사가 그곳에서 막 돌아왔다."하였다.

가신이 아뢰기를,"백성의 재력이 탕갈된 것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는데, 서울에는 곳곳에서 가무를 벌이고 집집마다 토목 공사를 벌여 톱질하는 소리가 여염에서 끊이지 않고 의복의 사치는 태평한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왕자와 옹주의 궁가(宮家)를 수리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간수(間數)는 한계를 정해 빨리 금단시키소서."하니, 곤란하다고 전교하였다.

가신이 아뢰기를,"이번 수재 때 천 장(丈)이나 되는 거목(巨木)이 강에 가득히 떠내려와 세력이 있는 집에서는 강가의 인가로 끌어올려 놓고 그들에게 운반하게 하므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니 빨리 조처하소서."하니, 해조에 말하라고 전교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이번 풍수재는 역대에 그 유례가 없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영동과 영서는 피해가 가장 심하여 인민들이 사상(死傷)하고 가옥이 떠내려 갔으니 구제하는 은전을 한시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속히 거행하소서."하니, 상이 윤허한다고 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영동 지방은 바닷물이 범람하여 민가를 많이 덮쳤다고 합니다."하고, 가신은 아뢰기를,"강릉 지방은 바닷물의 범람이 더욱 심하였다고 합니다."하고, 인길은 아뢰기를, "강릉은 성 밖 10리 정도까지 큰물이 범람하여 공해(公?)로 흘러들어 1백여 명이 익사하였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양양(襄陽)과 간성(杆城) 등 고을은 수재가 없었는가?"하였다.

억령이 아뢰기를,"영동 지방은 피해가 더욱 심하니, 죽은 자는 조문하고 산 자는 구휼해야 합니다. 각별히 보살펴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공물과 요역 등의 일을 특별히 제거하소서. 그리고 감영과 병영에서 받아들이는 색목(色目)이 매우 많은데 공물이나 다름없이 독촉하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재감할 것을 감사와 병사에게 하유하신다면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경의 뜻은 좋으나 감영과 병영에서도 필시 부득이하여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재감할 수 있는 것은 재감해야 한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북도에 어려운 일이 발생하게 되면 강원도가 우선 원조해야 하는데 병사(兵使)가 없으니, 군사를 거느릴 만한 수령을 차송하면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비변사에서 감사에게 이 뜻을 일러 보내라."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가신이 아뢴 바 왕자와 공주의 궁가에 대하여 간수의 한도를 정하자는 일은 옳습니다. 이밖에도 지나치게 사치스런 재상의 저택이 있는데 심지어 화초와 괴석을 먼 지방에서 구해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간 중에 논계하고 싶은 자가 있지만 혹 구애되는 일이 있을까 하여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사대부 저택의 간수도 일정한 한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종묘도 아직 중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폐단은 먼저 없애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적간(摘奸)하여 철거하는 일은 옳지 않고 본인 스스로 짐작해서 해야 할 것이다. 화초를 애호하는 소소한 일들이야 법사(法司)가 조용히 금단해야 한다."하였다. 준구가 아뢰기를,"모든 일에는 힘써 인심을 수습해야 합니다. 이번 풍수의 재해에 있어서도 어떤 재변이 어떤 일의 감응이라 지적할 수 없으니, 다만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회양(淮陽)에는 바다갈매기가 많이 날아와 죽었다고 하니 매우 괴이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 곡절을 다시 말해보라."하였다.

준구가 아뢰기를,"바다갈매기가 육지로 날아오는 것도 상서가 아닌데, 더구나 지금은 산령(山嶺)을 넘어오지 않았습니까. 성상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시는 마음을 옮겨 하늘을 공경하는 실상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옛날 송 경공(宋景公)의 선한 말 한 마디에 요성(妖星)이 3도(度)를 옮겨갔는데, 하물며 우리 성상께서 하늘을 감동시킬 정성이 어찌 없으시겠습니까."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동해의 갈매기는 북해의 갈매기와 모양이나 몸체가 자못 달라서 북해의 갈매기는 크기가 곤계(쥂鷄)와 같습니다. 이번에 회양으로 날아온 갈매기를 혹자는 동해의 갈매기라고도 합니다."하고, 억령은 아뢰기를,"바다갈매기만 산령을 넘어 온 것이 아니라 뭇새들까지 날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염에 떠도는 말에 '지난 신묘년 7월에는 큰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 왔고 정유년에도 그러하였으니, 이는 매우 불길한 징조이다.'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이것으로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다. 큰 바람이 분 일은 그전에만 있었을 뿐 아니라 왜변 이후에도 있었으니, 남북에 바람이 분 일이 있다고 하여 남북에 병란의 조짐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인심은 극히 경박하여 허무 맹랑한 말에 서로 동요되니 이와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한때의 재앙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인사(人事)를 닦기만 할 따름이다. 근래 일로 말하면, 부사 근처에 큰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전함(戰艦)이 다 파손되자 중국 장수들이 모두 크게 놀랐으나 그후에 별다른 일이 없었으니, 이런 일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는 없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스스로 인사를 다하면 그뿐입니다."하였다.

가신이 아뢰기를,"소신은 형조 당상으로서 그 옥사(獄事)를 자세히 압니다. 역자(驛子) 김경진(金景珍) 등은 억울한 일로 여러 해 동안 수금되어 형신(刑訊)을 많이 받았으니, 빨리 분간해야 합니다."하니,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전교하였다. 가신이 아뢰기를,"교생(校生) 임호(林琥)는 함부로 과장에 들어간 일로 형신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본디 죽을 죄가 아닌데 혹시 죽게 된다면 원통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함부로 과장에 들어간 일은 식년 초시(式年初試)라면 혹 구경하기 위하여 들어갔다고 볼 수 있으나, 복시(覆試)에 들어갔으니 차술(借述)한 정상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형신을 받고서도 승복하지 않아 매우 괘씸하니 섣불리 놓아줄 수 없다."하였다.

류근이 아뢰기를,"소신이 그때 시관으로 참여하여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명지(名紙)를 내밀었다가 사조(四祖)를 쓰지 않았다고 하면서 도로 가지고 나간 뒤 다시 들여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캐물었더니 함부로 들어온 것이 분명하였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초시(初試)에는 혹 잡인(雜人)이 함부로 들어간 적이 있었으나, 복시에 함부로 들어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하고, 가신은 아뢰기를,"소신이 자세히 캐묻자 그가 '초시에는 다 입격하였다.' 하기에, 소신이 초시에 입격한 명지를 보자고 하였더니 진사시(進士試)의 명지는 제목이 '술잔을 들고 사은한다.[執酒謝恩]'는 것이었는데 주초(朱草)와 본초(本草)에 다 비점(批點)이 찍혀 있고 과차(科次)가 삼지상(三之上)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로 볼 때 허위가 분명합니다. 대체로 그는 본디 시골 사람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천역(賤役)을 면하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그가 면역(免役)하려고 하였다면 초시에 입격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한데 복시 과장까지 무엇 때문에 나왔겠는가?"하니, 가신이 아뢰기를,"소신은 그가 글을 모르는 자임을 분명히 압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그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경이 어떻게 아는가?"하니, 가신이 아뢰기를,"초시 시권(試卷)을 보니, 글이 제대로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런 줄 알았습니다. 또 그 위인을 보니 허수아비처럼 무표정하고 덤덤했습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이시언(李時彦)이 무고(武庫)의 활 수백 장(張)을 보내달라고 하였으니, 빨리 내려보내 추수 때 적호의 침입을 막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상이 윤허한다고 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누차 계사를 진달하여 매우 황공하오나 아랫사람들의 마음은 반드시 진하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윤허해 주시면 신민의 다행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대신이 국사의 득실 성패에 관계없는 일을 이렇게까지 굳이 고집하니 매우 미안하다. 내 병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오늘은 이처럼 좋지만 내일 또 어떨지 모른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옥후가 회복되시어 경연을 다시 베푸셨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의 마음에 모두 진하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하고, 류근은 아뢰기를,"상의 옥체가 회복되시어 경연을 베풀기까지 하셨는데 해조가 즉시 진하를 청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다만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민망하고 답답해 하니 빨리 윤허를 내리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명절날에도 오히려 하례를 올릴 수 있는데, 더구나 이처럼 회복되신 뒤에야 더욱이 하례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국사의 득실 성패에 전혀 관계없는 대단치 않은 일인데 이와 같이 고집하니 옳지 않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조종조에도 진하한 전례가 있으니 더욱 그만둘 수 없습니다."하였다. 【원전】 25 집 104 면

 

선조38/08/07(기유)

행 도승지 홍식(洪湜)이 예조의 말로 아뢰었다."이달 4일 조강에서 영사 류영경(柳永慶)이 '이번 풍수의 재변은 근고에 없던 것으로 영동, 영서 지방의 피해가 가장 혹심하여 인민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가옥이 침수되거나 떠내려 가는 등 들리는 소문이 매우 참혹합니다. 가엽게 여겨 구제해 주는 은전을 잠시도 늦출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소서.'라고 아뢰자,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리고 특진관 홍가신(洪可臣)은 '근래 민생이 어느 곳을 막론하고 곤궁한데 풍수의 재변이 닥치자 피해가 더욱 혹심하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민심을 수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엽게 여겨 구제해 주는 은전을 거행하지 않는다면 조정에서 불쌍하게 여기고 성상께서 소생시켜주는 은택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해관으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속히 시행토록 하소서.'라고 아뢰자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원전】 25 집 108 면

 

선조38/08/14(병진)

예조 낭청이 진풍정의 일에 대하여 대신의 뜻으로 달하기를,"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은 '대전께서 침을 맞으신 뒤에 계품하라고 하신 뜻을 전에 이미 다 계달하였다.'하고,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하령하신 말씀을 삼가 받드니, 이는 타고 나신 성효(誠孝)를 보이신 것으로 모든 아랫사람들이 누군들 감격하여 훌륭하신 뜻을 받들어 온 나라가 함께 경하하는 아름다운 일을 이루고자 생각하지 않겠는가. 다만 이 일은 진하하는 일과 다르고, 마침 성상께서 재앙을 만나 수성(修省)하시는 때를 만났으니, 세상에 드문 행사를 거행하기에는 제때가 아닌 듯하다. 삼가 침을 맞으시고 조섭하신 뒤에 천천히 사세를 보아가면서 헤아려 계품하여 훌륭하신 뜻을 진달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하였으며,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은 병으로 의달하지 못하였습니다."하니, 답하기를,"대신의 뜻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내일 의달하라."하였다. 【원전】 25 집 111 면

 

선조38/09/11(임오)

우부승지 정혹(鄭?)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사헌부가 아뢴 초시(初試)의 파방(罷榜)을 청한 것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과거는 중대한 일이어서 빈 파방할 수는 없다.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다.' 하였고,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은 '파방은 중난한 일이나 대관(臺官)의 논집이 이와 같으니 그대로 두기도 어렵다.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다.' 하였고,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파방에 대한 한 가지 일은 말세의 폐습 가운데 가장 극심한 것이다. 평시부터 감시(監試)의 파방이 빈번히 있었는데, 파방이 끝난 후 재차 설치하여 공정치 못한 폐단이 전장(前場)에 비해 몇 배가 되더라도 재차 파방하지 못했던 것은 매번 파방하여 식년(式年)을 그냥 넘김으로써 소요를 일으켜 무궁한 폐단을 자아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근래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원(試院)에서는 사정(私情)을 따르고 거자(擧子)는 분란을 일으키는 불상사가 전후 잇따랐는데, 이번 시장(試場)에서는 특별히 지적할 만한 큰 잘못이 없었으니 이 또한 말세의 다행이라 하겠다. 그런데 뜻밖에 경시(京試)에서 출제(出題)를 잘못한 일이 있었던 것은 실로 미안한 것이다. 풍헌(風憲)의 논란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지만 시관(試官)을 파직하는 것으로 족히 그 실수를 징계할 수 있다. 따라서 원방(原榜)까지 파하는 것은 아마도 중난한 일인 것 같다. 더구나 어렵고 일이 많은 것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는 데이겠는가. 명년 봄에 재차 설치한다 하더라도 파방해야 할 사단이 도리어 이번보다 극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또한 누가 보장하겠는가.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시관만을 치죄하여 후일을 경계하게 하라. 만약 파방까지 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나의 소견은 이와 같다. 하물며 전일 파방하지 말 것으로 승전(承傳)이 있었던 것 같은데, 파방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의 의논 또한 그러하니 의논한 대로 파방하지 말라. 또 이 뜻을 헌부에 이르라."하였다.【원전】 25 집 118 면

 

선조38/09/21(임진)

우승지 정혹(鄭?)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별과(別科)의 일에 대해 다시 대신에게 물으니,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별과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다. 지금 성후(聖候)가 3년 동안 미령하시던 끝에 쾌유하였으니, 이는 국가의 경사 중에도 가장 중대한 것이어서 이에 비교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경사에 관계되는 모든 축전(祝典)을 의당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해사(該司)가 이처럼 누차 아뢰고 신들 또한 당연하게 여기니, 성상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대신의 의사가 이와 같으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스스로 옳다고 하기 어렵다. 앞서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25 집 121 면

 

선조38/10/24(을축)

영의정 류영경, 좌의정 기자헌, 우의정 심희수가 아뢰기를,"신들은 모두 형편없는 사람으로 외람되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국가가 어려운 때를 당하였는데도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하여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봄에 군사를 일으킴으로부터 동원된 사람이나 집에 있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원근이 모두 소란하였으며, 게다가 천재와 시변까지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초가을 혹심한 풍수재(風水災)는 근래에 없던 일인데, 하늘이 인애(仁愛)하여 경계를 보이기를 마지 않아 천둥과 번개의 이변이 입동 후에 일어나니, 음양이 순서를 잃음이 이에서 더할 수 없습니다. 이 어찌 원인이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민심의 위구(危懼)함이 이에 이르러 더욱 깊습니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니 이는 실로 신들이 무릅쓰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치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쾌히 결단을 내리시어 빨리 신들을 체직시키시고 어질고 덕행 있는 이를 개복(改卜)하여 재변을 막아낼 방법으로 삼으면 이보다 더한 다행이 없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때가 아닌 천둥과 번개는 극히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의 부덕(不德)에 말미암은 것이지 어찌 어진 재상들 때문이겠는가. 사퇴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25 집 129 면

 

선조38/10/26(정묘)

상이 이르기를,"자문을 보낼 수 있겠는가. 보낼 수 있다면 어렵지는 않겠는가?"하니, 자헌이 대답하기를,"앞서 심희수(沈喜壽) 또한 이 일에 대해 말하자 류영경(柳永慶)이 '자청(咨請)한 일을 이제 겨우 실시했다.' 하여 아직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 사람을 오래 머물러 두면 폐단이 전과 같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나은 동정의(董正誼) 같은 자를 자청함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원전】 25 집 129 면

 

선조38/10/27(무진)

우승지 정혹(鄭?)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대제학 류근(柳根)의 계사에 '세 곳에 쓸 비문(碑文)을 대제학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진(製進)하게 할 것으로 계하하였는데 세 곳에 세울 비문의 내용을 세 건으로 해야합니까. 아니면 한 건의 글을 세 곳에 새깁니까. 이 한 가지 일을 예관으로 하여금 위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게 하소서. -中略- 그러나 이는 공적을 가려 후세에 전하는 일로 사체가 중대하므로 유사(有司)의 소견으로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이에 윤허한다는 것으로 전교하였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영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세 문신(文臣)에게 분명(分命)하여 각각 제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1건의 기문으로 가감하는 것은 너무 구차한 일이다.' 하고,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은 '해조의 계사에 의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행 중추부사 윤승훈(尹承勳)은 병으로 인해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참작하여 결정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해조의 계사에 의하여 하라."하였다. 【원전】 25 집 132 면

 

선조38/11/03(계유)

진시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니 영사 류영경(柳永慶), 지사 류근(柳根), 특진관 박홍로(朴弘老)․남근(南瑾), 대사간 성이문(成以文), 참찬관 류간(柳澗), 시강원 박진원(朴震元), 지평 민덕남(閔德男), 검토관 박안현(朴顔賢), 가주서 이홍망(李弘望), 기사관 임장(任章)․이현(李俔)이 입시하였다. -中略- 류영경은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어떠합니까? 풍습(風濕) 치료하는 약을 일전에 들였는데 효과를 보셨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부기(浮氣)가 간혹 있는데 왼손이 오른손보다 심하다. 겨울 동안에는 약간 복용하고 있다가 따스한 봄이 되기를 기다려 침구(鍼灸)를 가할 생각이다."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의술(醫術)은 경연(經筵)에서 말할 것이 아니나 마침 이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내가 말한다. 근래 의술이 너무도 허술하다. 내가 의술은 알지 못하나 병의 증세와 이치로 궁구하면 또한 알 수 있다. 약을 쓰는 것은 극히 어려운 것인데, 의관(醫官)들은 쉽게 약을 써서 어느 병에 대해 물으면 무슨 약을 쓰라 이르고 가미(加味)하는 것 또한 많아서 본방(本方)의 약효를 잃게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내가 필요없는 약을 복용한 것이 이제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 약을 복용하여 효과가 없으면 또 다른 약을 복용하곤 할 따름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옛사람들은 병의 증세를 알아서 다스렸는데 지금 사람들은 병의 증세를 알지 못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중종조(中宗朝)에 안찬(安瓚)이란 의관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두통(頭痛) 앓는 것을 보고 바로 낙상(落傷)이라고 진단한 다음 약을 써서 즉시 그 효과를 보았다. 이는 참으로 귀신같다고 하겠다."하고, 또 이르기를,"3대를 계승한 의원이 아니면 그 약을 먹지 않는다 했고, 공자(孔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약은 감히 먹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약의 복용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약 쓰기를 매우 쉽사리 하니 지금의 의술을 알 만하다. 중원 사람은 이에 대해 많은 책자를 만들었는데, 《평림(評林)》,《의학입문(醫學入門)》 같은 책들은 모두 양생(養生)의 방법을 말하여 사람을 기만한 것으로 우리 나라 사람이 이를 믿고 배운다면 필시 생명을 잃는 일이 많을 것이다."하고, 또 이르기를,"후인들은 모두 신농씨(神農氏)에 미치지 못하면서 많이들 사견으로 방서(方書)를 만들기 때문에 도리어 해를 보게 된다."하고, 또 이르기를,"옛날에는 조사(朝士) 가운데도 의술에 능한 자가 있었으니, 정작(鄭칺)의 형 정염(鄭?)은 의술에 정통하여 인묘(仁廟)를 진찰하였다. 그런데 지금 의술은 단지 찌꺼지만을 훔쳤을 뿐이다."하고, 또 이르기를,"나는 하나의 심병(心病)을 앓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면서도 말의 시비를 알 수 없다. 또 내가 일전에는 입으로 토설하지 못하여 벙어리 같았는데 오늘날 이 자리에서 경들과 함께 말할 줄을 예측하였겠는가."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안타까운 심정에서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로는 천변이 있고 아래로는 민원(民怨)이 있으며 남북에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소신이 재상의 지위에 무릅쓰고 있으므로 주야로 민망합니다. 신을 체직시키고 다시 현재(賢才)를 얻어 보상(輔相)의 책임을 맡기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건괘(蹇卦)에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 하였다.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어찌 대인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나라와 함께 휴척(休戚)을 같이 해야 할 대신이니 퇴거할 수 없다. 옛사람은 임금을 보도함에 있어 모두 어려움을 구제하였다. 경은 나를 보도할 만한 사람이니 어찌 퇴거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이윤(李尹), 여상(呂尙) 같은 사람을 얻어 그들로 하여금 보도하게 한다면 일을 극복해낼 수 있겠으나 소신 같은 자는 무능한 사람이니 어찌 일을 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대신이 된 자는 의당 현재(賢才)를 등용하여 내정을 닦고 외침을 막을 뿐인데, 내정을 닦고 외침을 막음에 있어 허다한 곡절이 있는 법이다."하고, 또 이르기를,"함경도에 필시 변고가 일어날 것인데 우리 나라의 민심은 한 번 궤산되면 쉽게 수습할 수 없다. 마땅히 변고가 생기기 전에 미리 방비해야 한다. 이른바 필시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병화(兵禍)가 만연하여 철령(鐵嶺)을 짓밟아 옴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랑캐의 욕심은 한량이 없으므로 훗날의 화가 실로 두렵다. 하지(夏至) 때는 일음(一陰)이 싹틀 뿐이지만 그것이 끝내는 굳은 얼음이 되는 것처럼, 아골타(阿骨打)와 홀필렬(忽必烈)이 처음에는 그 뜻이 천하를 얻으려는 데 이르지 않았으나 훗날의 화는 결국 저와 같은 데에 이르렀다. 모든 일이 이와 같지 않음이 없으니, 묘당(廟堂)은 이를 각별히 조처할 것은 물론 또한 민력(民力)을 해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방비에 전력하면 민력이 상하게 되고 민력의 피해를 염려하면 방비가 허술해집니다. 신이 양전책(兩全策)을 백방으로 생각해 보았으나 하나의 묘안도 얻지를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육진(六鎭)이 텅 비어서 영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이 함몰하면 민심이 흉흉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매양 이를 개탄하면서 스스로 '전일 북도의 감사와 병사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였다."하고, 또 이르기를,"중국 장수가 머지 않아 곧 들어올 것이니, 그에게 말하여 그의 가정(家丁)으로 하여금 하질이(何叱耳)가 보내온 사람을 만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중국 장수가 머물러 있음을 알게 하면 아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변사가 먼저 의논하여 조금이라도 이득이 있을 것 같으면 중국 장수의 가정을 보내어 선유(宣諭)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중국 장수의 허락여부를 알 수가 없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조 어사(趙御史)에게 다시 회자(回咨)하여 그로 하여금 노추(老酋)를 선유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북호(北胡)가 노략질하는 일을 중국에 주달해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훗날 사단이 없을 것 같으면 주달할 필요가 없겠지만, 훗날 만약 변란이 있을 것 같으면 미리 주달함이 옳겠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소신이 거듭 생각해 보건대 이 적호의 환란이 필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적호의 기미를 중국에 주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저 오랑캐가 상경(上京)하고자 한다고 하니 이 무슨 뜻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이는 호기를 부리는 말입니다. 또 이 호인은 왕태(王太)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하질이란 것은 호인의 본명(本名)이 아니라 곧 좌궁(左弓)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복장태(卜章台)인데 형인 복안태(卜安台)가 죽은 후 그 아들이 항상 장태가 부귀를 누리지 못할 것을 비웃자 군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복안태의 딸이 노가적(老可赤)의 아내가 되어 일가(一家)가 되었습니다."하였다.

상이 박홍로에게 이르기를,"경이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되었는가? 영사(領事)가 중국에 주달하고자 하는 뜻과 내가 중국 장수의 가정을 보내 선유하고자 하는 뜻이 어떠한가? 각각 소견을 진술하라."하니, 류근이 아뢰기를,"지금 미리 주달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서서히 일의 기미를 보아가며 주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고, 박홍로는 아뢰기를,"신의 생각에는 중국이 이미 남왜(南倭)를 평정하였는데 지금 또 북호(北胡)의 일로 주달한다는 것은 아마도 부당할 것 같습니다. 중국 장수가 근간에 곧 나올 것이니 그에게 간청하여 그의 가정을 보내어 선유하게 하는 것만 못하겠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조종조에서는 홀온(忽溫)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였습니다."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박승종(朴承宗)이 실록청(實錄廳)에서 보았는데, 성묘조(成廟朝)에서는 안마를 주어 잘 대우하였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저 호인이 경들의 소견에는 어떠한가? 과연 끝내 무사하겠는가? 내지(內地)의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 잘 방비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만전을 기할 수 있겠는가? 경들에게 필시 평소 소견이 있었을 것이니 진술해 보라."하니, 박홍로가 아뢰기를,"적의 정세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애초 군사를 일으킨 것은 무단히 한 일이 아닙니다. 중국의 장관(將官)이 호인을 살해한 것을 보복하려는 계책에서였습니다. 지난날 동관(潼關)의 함락도 처음에는 장구(長驅)할 계책이 아니었습니다. 또 듣건대 그 나라에는 성지(城池)의 형세가 없다고 하니 그 형세가 어찌 남쪽을 침구하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추호(酋胡)를 선유하여 납치된 번호(藩胡) 및 우리 나라 사람을 쇄환(刷還)시킨 후 직첩을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홍로의 말은 곧 처음 주려고 하던 1백 장을 말하는 것인가?"하니, 홍로가 아뢰기를,"오랑캐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고신(告身)을 주어서 이익으로 유도해야 합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섣불리 줄 수 없는 것이니 강정(講定)한 연후에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노략질할 걱정이 목전에 절박하다면 고신을 주더라도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북도의 방수군(防戍軍)이 수천 명에 이르는데 명년에 군량을 댈 일이 극히 염려됩니다."하고, 류근은 아뢰기를,"1~2년 동안의 기한을 두고 한편으로 군사를 보충하고 한편으로 고신을 주는 것이 방비책인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동해(東海)의 물이 붉어지는 변이 무슨 일에 대한 보응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극히 괴이하다."하니, 류근이 아뢰기를,"영동(嶺東)과 영남(嶺南)에서 일어난 풍수(風水)의 변 또한 괴이합니다."하고, 박홍로는 아뢰기를,"우리 나라가 자강(自强)하지 못하는 터인데 북도 수령들의 가렴주구와 백성을 괴롭히는 행정이 근자에 더욱 극심합니다. 이러고서야 국본(國本)이 어떻게 견고해지겠습니까."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전에는 순안 어사(巡按御史)를 보내어 북도를 살피게 하였는데, 일개 문관(文官)이 한 도(道)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하나 탐오한 수령들이 또한 이로 인해 욕심을 함부로 부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금후부터 어사 한 사람을 보내어 수령들을 규찰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수역(戍役)에 보내는 군사들에게 위무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지금도 북도로 가는 장사(將士) 들의 처자에게 호역을 면제시켜서 국가에서 무휼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상이 가하다고 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뜻은 좋으나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인품이 같지 않아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가르쳐도 유익함이 없다."하고, 또 류영경에게 이르기를, "종학을 설립하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아뢰기를,"급하지 않습니다."하였다. 류영경이 또 아뢰기를,"종묘와 궁궐을 짓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이를 먼저 계획해야 합니다."하고, 박홍로는 아뢰기를,"성상께서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와 망궐례(望闕禮) 때 대내(大內)가 극히 협소하여 백관의 반열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서장(西墻) 밖 공지에다 조그마한 집 하나를 지어 어전(御殿)을 만들어서 조회할 때 사용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할 수 있으면 하라."하였다. 오시(午時) 초에 파하였다. 【원전】 25집 133 면

 

선조38/11/30(경자)

류몽인이 임진년에 어가(御駕)를 따라 평양(平壤)에 갔었는데 왜적이 이른다는 말을 듣고 도망쳤으니, 이는 곧 임금을 망각한 사람이다. 일찍이 별성(別星)으로 관서(關西)에 가서 도사(都事) 성안의(成安義)의 첩인 영유(永柔) 고을 여인이 미색임을 듣고 그 고을로 달려가 별성의 위력으로 접간하여 탈취해 왔다가 그후 다시 조정견(趙庭堅)에게 빼앗겼다. 황해 감사가 되었을 때에는 송화 현감(松禾縣監) 류제(柳悌)의 비(婢)가 미색임을 듣고 불러내어 접간하려는 것을 류제가 누차 막았는데 몽인은 끝내 나오게 하여 접간하고 말았으니 그의 음란함이 이와 같았다. 이는 미색을 좋아해서일 뿐만 아니라 류제가 곧 류영경(柳永慶)의 아들이기 때문에 영경의 비부(婢夫)가 되어서 아첨하고자 하는 계획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당하관 때에 영유의 일로 인해 물의에 버림받은 바 되었었는데 전관(銓官)에게 애걸하여 응교가 되고 이어 당상관으로 승격되었다. 배은 망덕이 곧 그의 평생 장기였다. 형의 사위 류경종(柳慶宗)이 일찍이 대간(臺諫)으로 권간의 일을 논박하다가 쫓겨나자 몽인은 그 누가 미쳐 노여움을 받을까 염려한 끝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경종의 비행을 극언하였으므로 경종이 통분함을 참지 못하다가 수원(水原) 농막에 가 있을 때 가까이 접촉하던 사람을 만나 몽인이 기회를 타 모함하는 정상에 대해 호소하였다고 한다.【원전】 25 집 140 면

 

선조38/12/21(신유)

우부승지 황시(黃是)가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방목을 삭제하는 일을 예조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여 아뢸 것을 전교하였습니다. 이에 대신과 의논한 결과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삭제함이 마땅하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고,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일이 시권을 수합한 후에 발생하였으니 그 죄는 집사(執事)로 말미암은 것이라서 응시자가 참여하여 알았음을 단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지엄한 과장에 부정이 드러났으니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랄 뿐이다.' 하였고, 영의정 류영경은 '차비관의 소행이 극히 무례하니 참방한 자를 그대로 두기는 어려울 듯하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랄 뿐이다.'하였습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원전】 25 집 143 면

 

선조38/12/28(무진)

영의정 류영경, 좌의정 기자헌, 우의정 심희수가 아뢰기를,"신들이 육조 당상과 중국 사신을 접대할 일을 상의한 결과 물력의 탕갈과 인심의 태만이 지금처럼 심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조사(詔使)가 분명 2월 초에 출발한다면 기간 또한 몹시 촉박합니다. 접대에 관한 모든 일을 반드시 서둘러 조치하여야 임시하여 군색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전례를 상고하면, 전부터 조사가 온다는 선성(先聲)이 있으면 관반사(館伴使)․원접사(遠接使)․영접 도감(迎接都監)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문례관 도사(問禮官都司)․영위사(迎慰使) 등의 관원을 우선으로 차출하였으니, 지금도 그 예에 따라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임무를 수행하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모든 접대에 드는 잡물(雜物)은 특별히 분정(分定)하는 등의 일을 전례를 살펴보고 물력을 참작하여 충분히 마련할 것을 각도에 행문(行文)해야 하는데, 이처럼 사세가 급박할 때에는 모리배들이 때를 타 물가를 올리므로 민폐가 더욱 극심합니다. 그러므로 안으로는 도감(都監)과 밖으로는 관찰사에게 엄히 금제를 가하여 백성을 해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진하사(進賀使)와 사은사(謝恩使)가 장차 차례로 떠나게 되는데, 자문(咨文)․방물(方物)을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미리 마련하여 조처하게 하고 사신과 서장관 또한 이조로 하여금 속히 차출하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궐문 밖에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가교(街橋)와 각문(各門)에도 결채(結彩)를 설치하여 맞이하는 것이 평시의 전례인데, 임인년 조사가 올 때는 물력이 탕진하고 지세가 협착하여 궐문 밖에 채붕을 설치하지 못하고 오직 가로(街路)와 외문에만 대략 결채를 설치하였으며, 일로(一路)의 각 고을에도 결채를 설치하여 맞이하였었으니, 이번에도 이 예에 따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경기․황해․평안 일대의 관사(館舍)는 임인년 조사가 지나간 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지금은 모두 퇴락하였습니다. 임박하여 수선할 수 없으니 3도(道)의 감사에게 밀리 알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일로와 서울에서 소용되는 역마(驛馬) 또한 마땅히 고루 취합하여 대령하도록 병조로 하여금 살펴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5 집 144 면

 

선조39/01/22(신묘)

이덕형(李德馨)이 모상(母喪)을 당한 뒤에 이조 판서에 기복(起復)되어 정청(政廳)에서 버젓이 행공(行公)하고 흑색 천익 차림으로 늘 정사에 참여하였다. 난리중에 군무로 말미암아 기복하였다면 그래도 댈 핑계가 있겠지만 덕형의 경우는 이록(利祿)을 탐내어 이렇게 나왔으므로 사람의 도리를 다시 찾아볼 수 없다. 훈련 도감 제조로 있을 적에는 도감을 사고(私庫)로 삼아 날마다 쌀과 베를 가져다 썼고 또 남대문 밖에 사사로이 큰 집을 지었는데 병조의 군사로 공공연히 터를 닦게 하고 별영(別營)의 재목을 가져다 썼다. 미천한 사람 박자우(朴子羽)도 대중 앞에서 그의 추잡하고 방자한 작태를 큰 소리로 비난하였다. 그리고 사인(士人) 채정선(蔡禎先) 및 그의 아우 문사(文士) 채경선(蔡慶先)이 조신(朝臣)들에게 말하기를,

"덕형의 아버지가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있을 적에 덕형이 공명첩(空名帖) 1백여 장을 내어다 몰래 문화현 일대에 팔아 소 수백 마리를 사들여서 통진(通津)에 있는 농장에 두었는데 이 소를 방목할 때 들판이 누렇게 되었다."하였다. 이는 정선의 형 길선(吉先)이 덕형의 아버지 후임으로 문화 현령이 되었고 또 통진을 오간 일이 있었기 때문에 두 곳을 직접 보고 말한 것이다. 다만 재주가 조금 있어 기회에 따라 아첨하는 것을 장기로 삼았다. 남인(南人) 쪽이 생기가 보이자 남인의 행세를 하는 한편 또 술을 가지고 서인(西人) 김(金), 권(權)의 집에 찾아가서 서인을 위한 말을 했고, 소북(小北)이 흥성할 무렵에는 맨 먼저 류영경(柳永慶)을 추천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덕형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큰 벼슬을 하는 자는 반드시 누차 변절한 뒤에야 정승이 될 수 있다."하니, 조사(朝士) 유대정(兪大禎)이 웃으며 답하기를, "그렇다면 대감은 몇 번이나 변절하였소?"하자, 덕형이 부끄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정철(鄭澈)이 기축 옥사 때 계달하기를,"정여립(鄭汝立)이 호남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영남에서 일어나는 자도 있고 경중에서 일어나는 자도 있습니다."하였다. 이 의도는 이를 계기로 영남의 최영경, 정인홍(鄭仁弘), 류성룡(柳成龍) 등과 경중의 이발(李潑), 이길(李틠), 정언신(鄭彦信), 백유양(白惟讓) 등을 무너뜨리려는 계책이었다.

상이 이르기를,"이 말을 아는 자는 이 모사에 참여한 것이다. 경은 어디에서 이 말을 들었는가?"하였는데, 문사 낭청(問事郞廳) 신잡(申캈)이 이 비답을 전하자 정철이 말이 궁색하여 신잡에게 말하기를,"그대가 이 말을 하지 않았소."하였다. 이에 신잡이 자신은 모른다고 하니, 정철이 회계하기를,"이항복이 말하였을 것입니다."하였다. 항복이 정철과 동악 상제(同惡相濟)한 실상이 이와 같았는데 정승에까지 올랐으니, 어찌 괴이쩍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전】 25 집 152 면

 

선조39/01/23(임진)

오시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심희수(沈喜壽), 관반 이호민(李好閔), 원접사 류근(柳根)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윤방(尹昉), 기사관 서경우(徐景雨), 조사 가주서(詔使假注書) 곽천호(郭天豪), 기사관 오익(吳翊)․유학증(兪學曾)이 입시하였다. -中略- 상이 이르기를,"이는 예부터 해온 일이다. 나의 뜻은 해서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접대하는 데 지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벗이나 하인을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성으로 하여야 하는데 더구나 중국인의 경우이겠는가. 내가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는 아무리 관질이 낮은 무장이더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조사이겠는가. 원접사가 떠날 적에 내가 분부하여 보낼 일이 있다. 우리 나라는 인심이 교사하여 진실한 뜻이 없으니 이는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다. 나도 사신을 많이 상대해 보았기 때문에 지난날 경험한 일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조사 허국(許國)이 타락죽을 즐겨 먹어서 매일 이른 아침이면 반드시 타락죽을 대접했다. 그런에 어느 곳에서인가 전대로 타락죽을 대접하니, 사신이 조금만 먹고 곧 그만두었다. 나중에 괴이쩍어서 그 죽을 보았더니 이는 흰죽 위에다 타락죽을 띄운 것이다. 또 어느 조사가 관사(館舍)에 도착하여 상사(上使)가 병풍을 걷으라고 하였더니 병풍 위의 보이는 곳 외에 병풍으로 가려진 곳은 도배를 전혀 하지 않아 더럽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하였다. 사람을 접대하는 도리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조사 당고(唐줣)가 서로(西路)의 어느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어떤 중 한 사람이 시를 지어 올리니 사신이 '그대가 유가의 학설로 지어 올렸으나 나는 불가(佛家)의 말로 지어 수답하겠다.' 하고 드디어 차운하여 주었다고 한다. 중이 감히 사신 앞에 시를 지어 올리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또 한 가지의 일이 있다. 남녀가 같이 있는 것은 원래 예의의 일이 아니니,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지난날 어떤 사신이 여악(女樂) 및 심부름하는 여인을 금지하여 달라고 백패(白牌)를 써서 보내왔었다고 한다. 여인은 사신이 보는 곳에 나다니게 할 수 없다. 근래 중국 장수를 접견하여 문아(門衙)에 이르렀을 적에 음식을 장만하는 곳에서 여인들이 아이를 업고 심부름을 하므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바깥까지 요란하게 들렸으니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형 군문(邢軍門)이 접대도(接待圖)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여인이 질항아리를 이고 달음질치는 모양도 그려졌더라고 한다. 중국의 여인이 어찌 심부름을 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이번 사신이 나올 때의 도감 사목(都監事目)에는 여인을 엄금하도록 하였으나 전부터 이 사목을 심상히 보아 넘긴 채 거행하지 않았다. 평안․황해․경기 일로(一路)는 경이 일체 엄금하여 여인이 심부름을 하지 말도록 하라. 또 서울에서는 여인이 다 좌시(坐市)하는데, 중국에서야 어찌 여인이 시장을 열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중국은 여인이 시장을 여는 사람이 없습니다."하고, 윤방은 아뢰기를,"조사가 서울에 머무를 날이 많아야 열흘인데 열흘 동안은 시가(市街)에 여인들을 일체 금단하소서. 그리고 조사가 서울에 들어올 적에 구경하는 여인들을 일체 금할 수가 없다면, 신이 산해관(山海關)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남자는 왼쪽으로, 여자는 오른쪽으로 다녔는바, 이번에 우리도 남자는 왼쪽으로, 여자는 오른쪽으로 다니게 할 것을 한성부(漢城府) 오부(五部)로 하여금 미리 알려서 시행하게 하고, 각 아문은 각별히 신칙하여 금단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의 식성(食性)이란 같은 나라의 사람일지라도 서로 같을 수 없는 법인데 더구나 우리 나라와 중국이 어찌 다르지 않겠는가. 조사에게 접대하는 음식물은 반드시 먹을 수 있게 해서 접대해야 한다. 우리의 상차림은 가짓수 많은 것만 예의로 여기고 생숙(生熟)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하지 않아서 비린내가 풍기게까지 한다. 조사가 반드시 돌아보지도 않을 터인데 더구나 수저를 대겠는가. 내가 중국 장수를 살펴보건대 모두가 우리 나라의 반찬을 먹지 않는데 내가 수저를 들면 마지 못해 수저를 대는 척만 하니, 서로 접대한다는 것이 도리어 불경(不敬)인 듯하였다."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전번 조사 때에도 하교하시어 음식물의 냄새를 가지고 깊이 경계하신 것을 소신도 들었습니다. 이번에 그릇에 대한 일은 이미 마련하여 계품하였거니와, 수저 등에 대해서는 전대로 쓰되 사옹원의 사기(沙器) 가운데 자기(磁器) 정도라면 중국인이 반드시 아름답게 여길 것이니 중국의 체양(體樣)대로 정교하게 만들어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릇은 체양이 크면 담기는 물건이 너무 많아 냄새가 나게 됩니다."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사옹원 관원이 내려갈 적에 대내(大內)에서 이미 전교하여 일체 중국 그릇의 체양대로 만들라고 일렀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조사가 어찌 꼭 매번 고천준(顧天峻)․최정건(崔廷健)과 같을까마는 그보다 조금 낫다 하더라도 반드시 대접하기는 어려울 것인데 유사(有司)의 조치는 어떠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임시해서 군색스러워질 우려도 있으니, 도감은 반드시 잘 헤아려서 대신에게 의논하라. 또 지난번 호조에서 납은 공사(納銀公事)를 입계하였는데, 이처럼 좋지 못한 일을 어찌 제왕의 상례로 삼겠는가. 불시에 다급한 일이 있어 우연히 요구한 것이지 늘상 시행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리로서는 미리 조치하지 않을 수는 없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중국은 뇌물을 주고 받는 것이 유행이니 다소 필요하다 싶은 물건이 있으면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인 가운데 근래 나온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어쩌다 동충(董忠)과 같은 자를 대동하고 나온다면 반드시 지난 일을 다 말하게 될 것은 물론 꾀어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도 있게 될 것이다. 동충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동충과 같은 무리는 반드시 적지 않을 것이니, 이같은 무리들을 많이 거느리고 온다면 지탱하기가 어려울 우려도 있다."하니, 윤방이 아뢰기를,"고천준, 최정건 때의 사람이 이번에 다시 나온 폐단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中略- 윤방이 아뢰기를,"임인년에 윤거(輪車)와 잡상(雜像)을 만들려다가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정지한 일이 있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지금의 물력으로는 결코 준비하기 어려우니, 간략히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고, 이호민은 아뢰기를,"신이 도감에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청하려 하였으나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오산 백희는 실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희자(戱子)의 경우는【곧 정재인(呈才人)이다.】 외방 사람을 대부분 불러 모았으니 간략하게 배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중략(中略)- 류근은 아뢰기를,"예전에는 참로(站路)의 거리가 서로 멀지 않기 때문에 강군이 자주 쉴 수 있었으나 지금은 참로가 멀어서 강군이 쉴 수가 없는 듯합니다. 반드시 여군(餘軍)을 미리 뽑아서 서로 교대를 해가며 쉴 수 있도록 한다면 전일과 같은 폐단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이호민은 아뢰기를,"여군이 있으면 이러한 환난은 없을 것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근래 조사를 지대(支待)하는 일로 말미암아 북방에 대한 일은 마치 잊은 듯합니다. 이번에 장계를 보건대 저들의 사정이 전과 퍽 다릅니다. 선전관이 북에서 돌아오면서 비로소 홀추(忽酋)와 노토(老土)가 서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였으나 그 허실에 대해서는 아직 모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노토는 일찍이 노을가적(老乙可赤)과도 서로 통하였는데 또 홀호(忽胡)와도 서로 통한다는 말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번호(藩胡)가 진고(進告)한 말에 의하면 그렇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번호의 진고가 믿을 만한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번호의 진고를 다 믿을 는 없으나 그렇다고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여길 수도 없습니다. 지난번 진고한 말에 의거, 방어사에게 군사를 청하였는데 이수일(李守一)이 명천(明川)․길주(吉州)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 명천에 머물러 형세를 보아 진퇴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상시와 같이 부실한 진고였다면 어찌 그렇게까지 하였겠습니까. 이미 첨병(添兵)하였으니 장관(將官) 등을 반드시 잘 뽑아 보낸다면 적이 나온다 해도 어찌 실패당하겠습니까. 대개는 선전관이 나올 적에 관찰사가 신에게 통지하기를 '군량을 이어대기가 극히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신들도 이 때문에 군량을 이어댈 길을 백방으로 생각해 보았으나 계책이 떠오르지 않으니 너무도 염려스럽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적이 소요를 일으키려 했다면 건퇴(件退)에게 패배당했을 때가 바로 그 시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이미 첨병하였고 중국 장수가 또 개유(開諭)하고 있다. 적을 무찌를 지의 여부는 나로서는 아직 모르겠다."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봄철이 되어서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지는 걱정이 있게 된다면 이 때는 매우 두렵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북도에서 군량을 타 먹고 있는 숫자가 3만여 명이라고 하는데 허다한 수졸(戍卒)이 벌써 4~5개월이 지났으니, 3월 이후가 극히 염려스럽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양즙(梁?)의 인품은 전번에 관찰사가 포장하고 어사 이정혐(李廷?)이 또 포장하였기 때문에 명천 부사(明川府使)에 제수하였는데, 이번에 관찰사가 범람하다는 이유로 파출(罷黜)시켰습니다. 합당한 사람을 서계(書啓)하려 하나 그 교대가 극히 어렵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누가 적당한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바깥 의논은 지난번 만포 첨사(滿浦僉使)와 북우후(北虞候)에 추천된 사람 가운데서 헤아려 서계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시발(李時發)이 신에게 사사로이 통지하기를 '이광영(李光英)이 북도에서 성망(聲望)이 있었고, 또 북방의 일에도 익숙하니 이러한 사람을 차정하여 보낸다면 합당할 듯하다.'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아직 부임하지 않았다면 제수하여도 되겠다. 그리고 북우후 이인경(李寅卿)은 내가 그의 인품을 모른다."하니, 기자헌이 아뢰기를,"호남 사람인데 용력으로는 이름이 가장 높습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우길(成佑吉)도 위명(威名)이 있어서 노인(虜人)이 매우 꺼립니다. 그 대임에는 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천거하였던 것입니다. 만포 첨사는 꼭 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뽑지 않더라도 글을 알고 담략(膽略)이 있는 사람이면 족히 감당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그리고 양향은 달리 조치할 계책이 없는가? 영남의 쌀을 영동을 통하여 수송하는 일은 운반하기는 어렵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아침에 군량이 떨어진다면 일을 할 수가 없게 된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적에게 지혜 있는 자가 있어서 허장 성세하여 우리의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를 첨가하기 어렵게 될 때를 기다렸다가 도발해 온다면 다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량의 일은 조정에서 심력을 다 쏟아도 수송해 들여보낸 뒤 더러 허술한 폐단이 있다. 그곳에도 구관(句管)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니, 기자헌이 아뢰기를,"목동(木同)의 일로 보더라도 허술하다는 걱정을 면치 못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반드시 허술한 폐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모두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난 계미년 운량(運糧) 때에 이발(李潑)이라는 자가 쌀섬을 숲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것이 발각되어 잡혀오기도 하였다. 외람된 사람이라면 이러한 폐단이 있을 수도 있다. 단 한 섬의 운송도 극히 어려운데 중간에서 이처럼 허술히 한다면 반드시 쉽게 탕갈될 것이니, 어떻게 대처하여야 될지 모르겠다. 둔전(屯田)도 할 수 없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둔전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사(評事) 최기남(崔起南)이 병에 걸려서 경성(鏡城)에 돌아와 누워 있다고 하니, 둔전에 대한 제반 일은 더욱 구관(句管)할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경상도의 양향(糧餉)도 북도로 수송하고 있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권태일(權泰一)이 방금 이 일로 내려갔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면포를 작미(作米)하여 수송하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면포로 쌀을 무역하여 수송하는데 마상선으로【동해(東海)의 사람들이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배를 마상선이라 한다.】 실어나르기 때문에 많은 양을 운송하지 못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조정의 계획은 어떻게 하려 하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다른 방법으로는 곡식을 얻어낼 수 없고 다만 면포로 쌀을 무역하여 수송하려 하나 그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개가죽을 북도에 들여보냈는데 벌써 다 나누어주었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개가죽을 들여보낸 숫자는 1천 벌인데 지난번 장계(狀啓)를 보건대 나누어 준 수는 4백여 벌뿐이라고 하니, 이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기자헌이 아뢰기를,"개가죽에 대한 일은 극히 허술하였습니다. 변장(邊將)의 종들이 그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나온 자가 흔하게 있다고 들은 듯합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진주(陳奏)할 문서는 진하사(進賀使) 편에 부쳐야 할 것입니다. 전일 거론된 선유(宣諭)에 관한 일은 특별히 성지(聖旨)를 내릴 것을 주청하여 바로 선유하게 하는 것은 과연 미안스러웠습니다. 그뒤 《이문등록(吏文謄錄)》을 상고하여 보았더니, 성화(成化) 연간에 바로 주청한 일이 있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바로 오랑캐들에게 선유하라고 했는가? 나는 사체에 미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전일 전교하였던 것이다. 주청하고 싶다면 전례를 원용하여도 되겠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이른바 성화 연간에 청한 일이란 번호(藩胡)가 진고(進告)한 '호인(胡人)이 중원 지방에 모여서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있다.'는 말만 듣고서 선유해줄 것을 주청한 것입니다."하고, 기자헌은 아뢰기를,"이 일은 오늘날의 일과 다릅니다."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이것이 작은 일이기는 하나 조사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주문(奏聞)하자는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기어코 바로 주청하려 한다면 문서 내용에 반드시 전례를 원용하여 써야 될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진주하는 문서는 바로 주청하는 것이 옳으나 그랬다가는 무진(撫鎭) 등의 아문(衙門)에게 저지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뜻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중국에서 노추(老酋)가 홀추(忽酋)와 서로 연대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전일 노추의 차호(差胡)가 광녕(廣寧)에 들어갔을 적에도 이성량(李成樑)이 아주 후대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아문에서도 일을 야기시킬까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주문하면 여러 아문이 제대로 무어(撫御)하고 있지 못한 것이 노출될까 싶어 주문을 꺼린다고 하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두 가지 일 중 어느 것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얼핏 듣기에 여러 아문의 기색이 이 조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진 등의 아문에 보고하면 각 아문이 저들대로 처치할 뿐이니 군문(軍門)에게 보고한다면 군문의 일은 반드시 병부(兵部)에 행이(行移)되므로 혹시 제주(題奏)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남쪽의 일은 평조신(平調信)이 죽은 뒤로 사기(事機)가 자못 달라졌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남쪽은 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조신이 죽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기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아들 경직(景直)이 또 다시 은연중 협박하는 태도가 있으니, 이 뒤에 뜻밖의 요구가 있으면 매우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근래 북도에 분쟁이 있음으로 해서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보니 마치 남쪽은 잊어버린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저번에 장계(狀啓)를 보니 요왜(要倭)가 '평수뢰(平秀賴)가 폐출되었다.'고 하였다는데, 과연 사실인지 모르겠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그 장계의 내용은 곧 수뢰를 폐출하고 그의 둘째 아들을 세우려는 의도이지 이미 그렇게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하고, 기자헌과 윤방이 아뢰기를,"신이 본 바로는 이미 그렇게 된 일로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소견도 수뢰는 이미 폐출되어 식읍(食邑)으로 가고, 둘째 아들이 관백(關白)이 된 듯하다."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수길(秀吉)은 만세의 원수입니다. 가강(家康)은 임진년에 관동(關東)의 군사는 한 명도 바다를 건너보내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하였으니 본디 수길에 비길 바는 아닙니다. 적사(賊使)가 이처럼 오가는데도 저들의 사정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수뢰가 폐출되었는지의 여부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번에 사람을 차출하여 어떤 일을 핑계로 대마도에 들여보낸다면 저들의 내막을 혹시 탐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을 차출하여 보내야 하는가?" 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꼭 유정(惟政), 손문욱(孫文彧)과 같은 무리를 차출하여 보내지 못하더라도 그저 영리한 사람으로 차출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 또는 부산 첨사(釜山僉使)의 군관이라 일컬어 보내면 될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리상 나쁠 것이 없다면 보내도록 하라. 예전에도 양진(兩陣) 사이에 왕래를 폐하지 않았으니, 비변사가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좌의정 뜻은 어떠한가?"하니, 기자헌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괜찮다고 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미열한 사람을 보낼 수는 없다. 역관과 군관을 각별히 보내야 한다. 그런데 무슨 일을 칭탁하여 보내야 하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신들이 물러가서 의논하여 조처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다시 의논하여 조처하라."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를 이천문(李天文)으로 차정하였으나 이제 듣건대 천문은 주사(舟師)의 직임을 거치지 않았고 또 그 인물을 보니 차분하지 못한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미심쩍은 데가 있으면 당연히 개정하여야 된다." 하니, 윤방이 아뢰기를,"수사를 체차(遞差)해야 합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체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진연(進宴)에 관한 일은 대신이 진계하였는데도 아직 윤허하지 않으시니, 저희들은 매우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진하(陳賀) 때에 사람들의 심정이 다같이 친림(親臨)하시기를 원한 것만 보더라도 인심의 소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연하려 하는 것은 천리로 헤아려보나 인정으로 살펴보나 실로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하고, 류영경이 아뢰기를,"진연에 대한 일을 신들이 계달하려 하였으나 번거로울까 두려워 감히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마침 윤방이 아뢰었기 때문에 감히 아뢰겠습니다. 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40 년 동안 연락(宴樂)을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불행스럽게도 중간에 변란을 당하였기 때문에 연락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상한 일까지도 줄이셨으니, 신들이 어찌 상의 의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우리 나라 경사중 처음 있는 경사입니다. 진하하던 날 모두가 친림하시기를 바랐고 바깥 의논은 심지어 신들이 누차 진계하지 않는 것을 잘못되었다고까지 하니, 인정의 소재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연을 억지로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진연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뜻은 이미 다 알았다. 그리고 찬선(饌膳)을 꼭 차려야만 되는가. 이러한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이렇게 하지 않으면 상하간의 뜻이 어떻게 통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내가 계사를 보고 아랫사람의 뜻을 알았으니, 그 계사에 대한 비답을 보면 웃사람의 뜻도 알 것이다. 그런데 어찌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억지로 해서는 안될 일을 어찌 기어코 강행하려고 하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중삭연(仲朔宴)은 지금 실시하려 합니다. 공신에게는 음악과 꽃을 내리려 하시면서 상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여 이처럼 굳게 거절하시니 아랫사람인들 어떻게 마음 편하게 연회를 즐길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것은 공신을 우대하는 뜻이다. 공신에게는 내가 친히 잔을 잡고 권하고 싶으나 내가 연회에 참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 나는 국가의 변란을 만났는데 어찌 공신과 다름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잔치를 내리고 공신이 이것을 받는다는 것은 곧 좋은 일이다."

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상의 뜻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너무 지나치다고 합니다. 일이란 중도를 얻는 것이 귀중한 것이니 쾌히 윤허하소서."하고, 류근이 아뢰기를,"법전에도 '위에서 진연을 받지 않으면 아래에서도 연회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신시(申時) 초에 파하였다.【원전】 25 집 152 면

 

선조39/02/14(계축)

예조가 아뢰기를,"지난번 조강에서 지사(知事) 황진(黃璡)이 '정원의 계사에 「모화관(慕華館)에서의 영조의(迎詔儀)에는 종친․문무 백관으로 되었을 뿐 유생이란 두 글자가 없고 태평관에서 유조의에는 문무 백관․유생으로 되었을 뿐 종친이란 두 글자가 없다.」고 하여, 예조로 하여금 일체 시행토록 하라는 윤허를 받았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전에 유생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모화관으로 보내고 나머지 반은 태평관으로 보내었는데 행례는 그때나 이제나 마찬가지이니 이번에도 종친과 유생을 전례대로 첨가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나, 상께서 '종친은 말하지 않더라도 문무 백관에 포함되어 있지만 유생은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㰡고 전교하셨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한 바,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은 '평소에는 조사가 올 적에 유생을 반으로 나누어 모화관과 궐정(闕庭)에서 행례를 하였으나 난후에는 폐지한 채 거행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결례이다. 이번에는 유생을 서울에다 조금 모아서 평소의 예에 따라 마련하여 거행하는 것이 좋겠으나 오직 상의 처분에 달렸다.' 하였고,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어제 황진이 탑전에서 아뢴 내용을 듣고서는 즉시 유생을 반으로 나누어 행례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계달하였다. 그러나 상의 처분에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조처하여야 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5 집 163 면

 

선조39/03/06(갑술)

좌부승지 최염(崔濂)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대군이 탄생한 뒤에 진하하는 것은 전례가 있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거행할 것을 품계하였습니다. 이른바 전례라는 것은 지난 세종 대왕 때 광평 대군(廣平大君)․평원 대군(平原大君), 영응 대군(永膺大君)이 처음 탄생하였을 적에 모두 진하를 거행한 예가 있었는데 이것이 전례로서 의심없이 명백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윤허를 받들지 못하고 있으니 군정(?情)이 서운해 할 뿐만 아니라 조종조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를 폐하고 시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미안스럽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기에 황공하게 감히 여쭙니다."하니, 전교하기를,"이처럼 아뢰니 마땅히 따르겠다."하였다.【대신은 곧 역신(逆臣) 류영경(柳永慶)이다.】【원전】 25 집 167 면

 

선조39/04/05(계묘)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의논드리기를,'신이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이번 서계(書契)는 실로 평경직(平景直) 등이 우리 나라를 위협함으로써 가강(家康)에게 용납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갑자기 그들의 말에 따라 그들의 국내 사정이 안정되기도 전에 사신을 보낸다면, 의리상 옳지 못할 뿐만 아니라 뒷날 반드시 무궁한 후회가 있을 것이니, 이 점이 바로 신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신사(通信使)라는 명칭 대신에 어떤 다른 말로 칭탁하여 사람을 차출해 들여 보내서 대마도의 바램을 위로해 주는 한편 일본의 사정을 탐지한다면, 병가(兵家)의 임기 응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안 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국서(國書)가 없으면 저들이 필시 응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국서를 보내려 할 경우 무슨 말로 조어(措語)를 하고 누구 앞으로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점이 무척 난처합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우선 박대근(朴大根)으로 하여금 이런 곡절을 가지고 조사(措辭)하여 귤왜(橘倭)에게 상세히 물어보게 한 다음 어떻게 답하는지를 살펴보고 나서 의논해 처리해도 늦지 않을 듯싶습니다."하였다.【원전】 25 집 175 면

 

선조39/04/07(을사)

우승지 송준(宋駿)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본조에서 '왕세자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한 조목은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가령 중국 사신이 만나보기를 청할 경우, 그 사이의 예모나 관복 그리고 서로 만나는 일의 편부(便否)에 대해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본조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또 '대신에게 의논해 보니,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중국 사신이 왕세자를 만나겠다고 청할 경우, 상견하지 않을 수 없다. 예모와 관복을 예조로 하여금 미리 마련해서 계품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러하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지난 정유년 무렵에 양 경리(楊經理)와 진유격(陳遊擊)이 왕세자와 상견했는데, 그 당시 관복은 오모(烏帽)와 흑포(黑袍)로 마련하여 접대했다 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국사(國事)가 소란하고 전란이 끝나지 않아 관복 또한 미처 갖출 수 없었기 때문에 오모와 흑포로 나가서 접대했지만, 지금은 사체가 전일과는 완전히 바뀌어 백관들이 모두 의장(儀章)을 갖추고 있는데 유독 왕세자만 그대로 모(帽)와 포(袍)를 착용해 일반 신료들의 복장과 동일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극히 미안합니다. 신들의 얕은 소견으로는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착용하고 상견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감히 상의 재결을 품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중국에서 허락하지 않아 아직 책봉을 받지 못했는데, 마음대로 익선관과 곤룡포를 착용하고 중국 사신을 만나는 것은 안 될 일인 듯하다."하였다. 【원전】 25 집 177 면

 

선조39/04/09(정미)

우승지 송준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상께서 '중대한 의주(儀註)를 개정하는 일에 대해 마감하지도 않고 경솔하게 무단히 부표(付標)했으니, 어찌 이렇게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전에 양 천사(梁天使)같은 사람이 없어서 이 주례(酒禮)를 고쳐 놓지 않은 것이겠는가. 그리고 처음에는 중배례를 양사가 일시에 행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부사가 한 잔을 마신 뒤에 회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어 더욱 온당치 못한 듯싶다.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여 아뢰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은 벽제(碧蹄)로 나아가 수의할 수가 없었고, 좌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모두 '예조로 하여금 급속히 고쳐 마감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이른바 고쳐 마감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하였다. 【원전】 25집 179 면

 

선조39/04/11(기유)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허욱(許頊), 부제조 윤방(尹昉)이 문안하니, 평안하다고 답하였다.【원전】 25 집 179 면

 

선조39/04/11(기유)

류영경(柳永慶)이 행주하였다. 약방 도제조 류영경, 제조 허욱, 부제조 윤방이 문안하니, 평안하다고 답하였다.【원전】 25 집 179 면 【원전】 25 집 180 면

 

선조39/04/15(계축)

우승지 송준이 아뢰기를,"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중국 사신에게 더 머물기를 청하였더니, 양사가 말하기를 '대신까지 보내어 머물기를 청하니 19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합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5 집 182 면

 

선조39/04/19(정사)

예조가 아뢰기를,"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세자 책봉을 청하는 정문(呈文)을 하겠다고 상소한 일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입계하니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백관이 정문하자 조사가 이미 다시 써오도록 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생들이 이렇게 진소(陳疏)한 이상 참작해서 시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오직 상이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견이 이와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나에게도 대략 의견이 있으니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일은 가능한 한 성의(誠意)를 쌓아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 천명(天命)이 있다면 인위적으로 수고할 필요가 없다. 중국 조정에서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심을 결단함에 있어 반드시 한두 마디 말을 듣고서 좌우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문을 하는 것이 이익되는 바가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더구나 부사(副使)의 위인을 보건대 상대하여 말하기가 쉽지 않은 자이니, 정문을 물리친 비답을 보면 상상할 수 있다. 만에 하나 그들이 힘을 써주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이 나이라 혹시라도 협제(脅制)하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면 손상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유생은 장수(藏修)하는 선비이니, 조정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지금 유생으로 하여금 정문하게 한다면, 어찌하여 도성 백성으로 하여금 서로 이끌고 가서 호소하게 하지 않는가. 인군(人君)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사체가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만을 살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고 현인이 없겠는가마는, 지금 만약 정문을 허락하지 않으면 필시 말을 만들어내는 간신(姦臣)이 있을 것이다."하였다.【원전】 25 집 185 면

 

선조39/04/20(무오)

묘시에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막차에 들어갔다. 왕세자가 필선 이순경(李順慶)을 보내 문안하였다. 조금 뒤에 양사가 남별궁(南別宮)에서 나왔는데 모두 교자(轎子)를 타고 함께 이르렀다. 상이 막차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와 기다렸다. 양사가 들어오자 상이 배례(拜禮)하기를 청하였다. 양사가 말하기를, "작별 인사입니까?"하니, 상이 말하기를,"전송하는 인사는 당연히 연회를 파한 뒤에 할 것이고, 상견례(相見禮)를 하고자 합니다."하자,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수고를 끼쳐드리고 싶지않습니다."하였다. 이에 읍(揖)을 하였다. 상이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음악을 연주하였다. 상이 주례(酒禮)를 행한 뒤에 이어 완배례(完杯禮)를 하였다. 상이 찬안(饌案)을 양사에게 조진(助進)하자 양사도 찬안을 상에게 조진하였다. 상이 소선(小膳)을 양사에게 조진하자 양사도 소선을 상에게 조진하였다. 상이 재신(宰臣)의 행주(行酒)를 청하였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이 행주하였다. 부사가 말하기를,"차마 이별할 수 없어 오래 앉아 있다 보니, 벌써 술이 취했습니다. 사양했으면 합니다."하니, 상이 말하기를,"존교(尊敎)를 어기기 어려우니, 재신의 행주는 정지하고 다시 행주하기를 청합니다."하자, 양사가 말하기를,"분부대로 하겠습니다."하였다. 【원전】 25 집 186 면

 

선조39/04/20(무오)

우승지 송준(宋駿)이 아뢰기를,"성모(聖母)에게 존호를 올린 데 따른 우리 측의 진하하는 문제와 출발 날짜와 순부(順付)하는 것의 편부(便否) 문제, 그리고 방물을 재정(裁定)하는 등의 항목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일로 대신에게 의논하였습니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은 의논드리기를 '성모에게 이미 존호를 올린 이상 예에 맞게 진하하는 문서 및 방물을 임인년의 예에 따라 미리 감정해 두었다가, 요동에서 사람을 차견해 등서해온 뒤에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中略- '이 두 가지 일을 합쳐서 함께 사은(謝恩)하되 문서는 반조(頒詔)를 사은하는 행차에 순부(順付)하고, 이미 마련한 한 건의 방물을 덜어내 성모에게 존호를 올린 축하 예물로 옮겨 봉한 다음 성절사의 행차에 순부하면, 한 건의 문서를 한 건의 진하하는 문서로 바꾸기만 하면 그만이니, 힘도 절약되고 일도 여유가 있게 되어 못미칠 걱정은 없게 될 듯하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논이 이러하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영상과 좌상의 의논대로 시행하라."하였다. 【원전】 25집 186 면

 

선조39/04/26(갑자)

사시에 상이 별전에서 침을 맞았다. 왕세자가 입시하였다.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허욱(許頊), 부제조 윤방(尹昉), 기사관(記事官) 임장(任章), 박증현(朴曾賢), 김성발(金聲發), 어의(御醫) 허준(許浚), 조흥남(趙興男), 이명원(李命源), 침의(計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이 입시하였다. 침을 맞고 나서 오시 초에 파하고 나왔다. 【원전】 25 집 188 면

 

선조39/04/29(정묘)

왕세자가 입시하였다.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허욱(許頊), 부제조 최천건(崔天健), 기사관 임장(任章), 박증현(朴曾賢), 김성발(金聲發), 어의(御醫) 허준(許浚), 이명원(李命源), 조흥남(趙興男), 침의(針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이 입시하였다. 침을 맞고 나서 사시 말에 파하고 나왔다,. 【원전】 25 집 189 면

 

선조39/05/02(기사)

진시 말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왕세자가 입시하고,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류영경(柳永慶), 제조 허욱(許頊), 부제조 최천건(崔天健), 기사관(記事官) 임장(任章), 박증현(朴曾賢), 김성발(金聲發), 어의(御醫) 허준(許浚)․이명원(李命源)․조흥남(趙興男), 침의(針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이 입시하였다. 침을 다 놓고 사시(巳時) 정각에 물러나왔다.【원전】 25 집 190 면

 

선조39/05/04(신미)

사시(巳時) 초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왕세자가 입시하고,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허욱(許頊), 부제조 최천건(崔天健), 기사관(記事官) 임장(任章), 박증현(朴曾賢)․김성발(金聲發), 어의(御醫)허준(許浚), 이명원(李命源), 조흥남(趙興南), 침의(針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이 입시하였다가 상이 침을 다 맞고 나서 오시(午時) 초에 물러나왔다. 【원전】 25 집 190 면

 

선조39/05/06(계유)

사시 초에 상이 별전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왕세자가 입시하고, 약방 도제조 류영경, 제조 허욱(許頊), 부제조 최천건(崔天健), 기사관 임장(任章), 박증현(朴曾賢), 김성발(金聲發), 어의(御醫) 허준(許浚), 조흥남(趙興南), 이명원(李命源), 침의(針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이 입시하였다가 침놓기를 마치자 유시(酉時) 초에 모두 물러나왔다. 【원전】 25 집 191 면

 

선조39/05/09(병자)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위의정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허수(許첥)가 부산(釜山)에서 이미 들어왔으니 대마도(對馬島)의 서계(書契)에 지금 회답을 해야 하는데, 이는 중대사라 상량(商量)하여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지금 정고(呈告) 중인데 신들이 감히 단독으로 할 수 없으니, 기자헌을 간곡히 타일러 함께 참여하도록 하소서."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원전】 25 집 192 면

 

선조39/05/17(갑신)

류영경(柳永慶)의 의논은 다음과 같다."어리석은 신의 꽉 막힌 소견은 10여년 이래 이미 모조리 진달하여 지금은 아뢸 말이 없습니다. 다만 근래에 조정의 의논이 모두 '평수길(平秀吉)이 이미 죽고 가강(家康)이 당국하여 스스로 모든 일을 수길의 소위와 반대되게 한다고 하는데, 대마도의 왜가 이 말을 가지고 화화를 요구하면서 독촉이 급하니, 이때에 만약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면 무서운 독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위협을 당한 후에 허락하느니보다 먼저 잘 도모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이 역시 백성을 위한 계책이니 신이 어찌 감히 저번 소견을 고집하여 변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전일 비변사에서 여러 당상과 회의할 때 예조에서 서계(書契)를 만들어 사람을 차출하여 일본에 들여보내어 한편으로는 대마도의 노여움을 풀어주고 한편으로는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여 후일 처치하는 바탕을 삼아야 한다고 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사(措辭)는 일에 의거하여 바르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나라의 큰 일이어서 자세히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조정 신하들이 각기 소견을 이뢰니, 여러 사람의 의논을 참고하여 다시 정하는 것이 무방항 듯합니다. 귤지정으로 하여금 가강의 서계를 가지고 오게 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역시 간단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손문욱(孫文彧)의 말을 들으니, 작년에 그들 무리가 일본에 갔을 때 가강이 서계를 써서 부치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조정의 분부가 없다 하여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귤적이 박대근(朴大根)에게 한 말을 보년 '평조윤(平調允) 부자(父子)가 이미 죽었으나 어찌 여당(餘黨)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을 보면 대마도가 화호하기에 급하여 능을 범한 도적을 혹시잡아 보낼지도 모릅니다. 우리 나라의 차마 말하지 못할 통분은 실로 능침의 변고에 있으니, 처음 모의한 적은 비록 잡아서 죽이지 못하더라도 만약 능침의 한 웅쿰 흙이라도 훼손한 자를 찾아 죄를 따져 처형시키면 묘사(廟社)와 신인(神人)의 통한을 조금은 풀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손문욱 같은 자가 귤지정에게 가서 도리를 밝혀 개유하고 적이 들어주면 우리의 처치에도 역시 근거를 얻게 됩니다. 참작하여 취사하는 것은 상께서 재량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원전】 25 집 195 면

 

선조39/05/23(경인)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허욱(許頊), 부제조 최천건(崔天健)이 아뢰기를,"지금 의관을 통하여 삼가 들으니, 전일 왼편이 시고 아파서 침을 맞으셨고 온천수(溫泉水)에 담근 후에 다리에서부터 어깨와 귀밑까지 기운이 오르내리며 시고 아프다고 하셨다니, 신들은 근심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의관들과 상의해 보니 성후를 자세히 살핀 뒤에야 침구(鍼灸) 여부를 의논하여 아뢸 수 있다고 합니다. 어의(御醫)와 침의(鍼醫)에게 차비문(差備門) 밖에 나아가서 다시 하교를 받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특별히 말할 만한 증세는 없는데 아마 습냉(濕冷)한 기운에 저촉되어 다시 일어난 듯하다. 급히 침을 맞고 쑥뜸을 뜨고자 한다. 기(氣)가 오래가면 치료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침술은 침의에게 물어서 그에게 기술을 다하게 해야지 다른 의원이 간섭하게 해서는 안된다. 또 손가락의 병 역시 냉약(冷藥)을 많이 복용한 소치인 듯하여 매우 염려된다. 가을에 가서 침구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고자 하니, 외방에 침술을 지닌 자가 있으면 빠짐없이 불러다가 수시로 의논하라."하였다. 【원전】 25 집 200 면

 

선수39/06/01(무술)

신흠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당시 김계(金稽)란 자가 상소로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할 것을 청하였는데, 류영경(柳永慶)이 이것을 가지고 아첨하려고 신흠이 현재 종백(宗伯)인 점을 감안, 사람을 시켜 먼저 흠의 의사를 떠보도록 하였다. 이에 신흠이 정색하면서 말하기를,"이 문제는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이 있는데 어찌 이의(異議)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하니, 물은 자가 당황하였으며, 마침내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원전】 25 집 698 면

 

선조39/06/25(임술)

호조의 계목(啓目)에,"국가의 경비는 오로지 세입(稅入)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국가로서는 이보다 더한 급무(急務)가 없는 것입니다. -中略- 호조의 계목에, 계하하신 것을 점련하였습니다. 대신과 의논하니,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복심법(覆審法)은 경솔히 폐해서는 안되고 하지중(下之中)으로 억지로 정하는 것 역시 백성에게 불편할 것 같다. 위의 재결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이 이러하니 위에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하였다.【원전】 25 집 220 면

 

선조39/06/27(갑자)

송준(宋駿)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정원의 계사에 대해 '뒷날 규식이 될 우려가 없지 않으니 계사에 의거, 대신에게 강정하도록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에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이미 영조(迎詔)라고 했으면 등황 조서라고 하더라도 영칙의를 참용(參用)하여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들의 의견은 영조의 가운데에서 대략 가감하여 행하는 것이 무난할 것 같은데, 면복(冕服)과 개독례 등의 절목(節目)은 폐할 수 없을 것 같다. 무도(舞蹈)․산호(山呼) 등의 조항에 이르러서는 없애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평상시 망궐례(望闕禮)에도 행하고 있는데 영조례 때에만 뺀다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 이 등황 조서를 봉영(奉迎)하는 것은 조사(詔使)가 직접 반포하는 것과는 그 예(禮)가 같을 수 없으니, 교외(郊外)에서 지영(祗迎)하는 것은 하지 말고 태평관(太平館)에 위차(位次)를 설치하여 놓고 지영하는 예를 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하였고,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은 병 때문에 수의(收議)하지 못하였는데, 대신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위에서 재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의논대로 하라. 그러나 앞뒤가 다르게 되면 양신이 괴이하게 여겨 화를 내게 될지도 모르니 이것이 걱정스럽다. 본조에서는 다시 참작하여 시행하라."하였다.【원전】 25 집 222 면

 

선조39/07/01(무진)

이상의(李尙毅)가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본조에서 이번 등황 조서(謄黃詔書)를 맞이하는 예에 대하여 아뢰었는데,【계사는 6월 30일에 보인다.】 전교하시기를 '교영(郊迎)이 만약 옳다고 한다면, 나가 맞이하지 못할 사정이 아니니, 역관으로 하여금 조사(措辭)하게 해선 안 된다. 이 뜻을 잘알라.'고 하셨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했더니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천하의 경사는 한결같지만 일에 따라 경중의 구분이 없지 않다. 때문에 조서를 반포할 적에는 흠차(欽差) 사신이 직접 조서를 받들고 오는 경우도 있으며, 성직(省直)의 각 아문에 나누어 보내면 다시 관원을 차출하여 조서를 등황(謄黃)하여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명나라에서 먼저 차등을 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당면한 일에 있어서도 일률적인 예를 쓸 필요는 없지만, 이미 조서를 맞이하는 예와 같이 한다면 사체가 중대한데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가 아니 받을 것인가는 논할 것도 없이 교외에서 맞지 않고 태평관에서 맞이하는 것은 행사가 구차하고 간략하므로 역시 앞뒤가 다르다는 혐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신들의 전날 의논은 오로지 상의 몸 조섭을 중히 여겼을 뿐이며 다른 뜻은 없었다. 지금 정원의 계사를 보건대, 매우 주밀하고 신중하다고 하겠다. 의당 의주(儀註) 중에 있는 교영하는 한 조문을 구례에 따라 마련하여 미리 일을 아는 역관으로 하여금 잘 주선하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하였고, 좌의정 기자헌(奇自獻)은 병으로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을 상이 재량하여 시행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윤허한다. 그러면 교영하겠다."하였다. 【원전】 25 집 226 면

 

선조39/07/01(무진)

심희수를 좌의정으로, 허욱(許頊)을 우의정으로, 서성(徐픸)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허욱은 용렬하여 특별한 장점은 없고 다만 언행을 삼갈 뿐이었다. 그런데 류영경에게 붙어 등급을 뛰어넘어 좋은 벼슬을 얻어 총재(?宰)에까지 올랐는데 얼마 후 류영경이 끌어들여 재상을 삼으니, 조야(朝野)에서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류영경이 패하자 허욱 또한 삭출(削黜)당했다.【원전】 25 집 698 면

 

선조 201 39/07/04(신미)

예조가 아뢰기를,"이번에 등황 조서를 맞이한 후에 사은할 것인지의 일에 관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영의정 류영경은 '제후국은 중국의 지방과 사체가 차이가 있다. 등황 조서를 요동으로부터 보내온게 이번만이 아닌데, 조종조에서 맞이하는 예를 행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두양신이 옴에 있어서 비록 앞뒤의 예가 다를까 혐의하여 조사가 직접 반포하는 의식을 전용(專用)하려고 하지만 과연 예에 합당할지 모르겠다. 어찌 사은의 예까지 아울러 경솔히 행할 수 있겠는가. 잠시 후일을 기다려 조용히 결정하는 것이 온당하겠다.'고 하였고, 우의정 심희수는 '전란 후에 온 등황 조서가 이미 두세 번에 이르지만 중국에 가는 진하사 편에 사은까지 맡긴 일만 있었고 사은의 의절은 행한 적이 없었다. 지금 전에 없는, 과도히 융성한 전례를 새로이 만들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상께서 재결하심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원전】 25 집 229 면

 

선조39/07/14(신사)

호조의 계목(啓目)에,"계하를 점련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류영경, 우의정 심희수가 의논드리기를, " '불행하게도 이런 물건이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나왔다. 한두 번 은광을 파내면 이익은 그지없겠지만 폐단 또한 그지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들은 감히 가볍게 의논드릴 수 없다. 삼가 상의 재가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이 이와 같습니다. 상께서 재량하여 시행하심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본조의 뜻은 어떠한가? 회계하라."하였다. 【원전】 25 집 234 면

 

선조39/07/20(정해)

영의정 류영경, 우의정 심희수가 아뢰기를,"삼가 다시 복상하라는 명을 받고 별도로 써서 아룁니다. 다만 복상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므로 전에 올렸던 단자도 아울러 입계합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원전】 25 집 238 면

 

선조39/08/23(기미)

조강에 《주역》 해괘(解卦)의 구이(九二)를 강하였다. 상이 그 뜻을 묻자, 이유홍(李惟弘)이 아뢰기를,"여우는 간사한 짐승으로 소인에 비유한 것이니, 임금이 중직(中直)한 도를 얻은 뒤에야 정(貞)하고 길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사냥하여 세 마리의 여우를 얻은 것인가? 간사한 자를 얻어 정직한 도를 행한다는 뜻은 쉽게 이해가 가면서도 미묘한 뜻은 모르겠다."하였다. '짐을 질 사람이 수례를 탔으니 도적이 온다.[負且乘致寇至]'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짐을 질 사람이 외람되게 수레를 탔으니 도적이 빼앗는다는 뜻이다. 거기에 말한 승(乘) 자는 천승(千乘), 만승(萬乘)의 승(乘) 자가 아니고 타는 수레를 말한 것인가?"하니,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그렇습니다. 이것은 타는 수레를 말한 것입니다."하고, 이유홍은 아뢰기를,"이 괘는 모두 소인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하였다. 강을 마쳤다.【원전】 25 집 253 면

 

선조39/08/23(기미)

류영경이 아뢰기를,"가강(家康)의 서계(書契)가 이미 대마도에 도착하여 장차 나오려 한다고 합니다. 당초 능침(陵寢)을 범한 왜적은 평조윤(平調允) 부자라고 들었는데, 그것은 귤지정(橘智正)과 박대근(朴大根)이 서로 말할 때에 말 끝에 나왔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평조윤 부자란 말은 내가 못 들었다."하였다. 영경이 아뢰기를,"박대근은 헌부의 아전인 박연수(朴連守)의 아들입니다.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에 있을 때 박연수가 왜적과 사이가 좋아 서울의 대가(大家)까지도 편히 살게 하였지만 결국 왜적에게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서울에 있는 왜적의 소행을 박대근이 자세히 압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조윤 부자라는 말이 박대근에게서 나왔는가?"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평조윤 부자가 어떤 왜적과 함께 앞장서서 능침을 범하였다는 말은 대근이 귤지정과 함께 말하는 사이에 나왔는데, 평조윤의 부자는 이미 죽었고 그 당여(黨與)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귤지정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가강의 서계는 믿을 수도 없고 능침을 범한 적이라는 것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죄를 지은 사람을 능침을 범했다고 하여 잡아 보낼 수도 있으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왜적의 꾀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잡아 보낸 것이라면 우리 나라가 어찌 그 진위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받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근래 대마도의 정형(情形)을 보면 강화에만 급급한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강화에 급급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평의지(平義智)는 행장(行長)의 딸과 이혼을 하였으나 이미 행장의 사위였고, 평경직(平景直)은 행장의 선봉으로서 가강과 서로 싸우다가 패하여 모두 가강에게 뜻을 얻지 못하였고 또 어쩌면 대마도를 차지할 뜻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강화하는 일로 가강에게 속죄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전계신(全繼信)을 보내어 왜인의 본초(本草)를 구해보게 하여 만약 우리의 뜻과 다른 점이 있으면 그 문서를 고쳐 주기를 청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미 거론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고치기가 쉽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계신이 고치기를 청하면 저 사람들은 곧 따를 것이니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다만 사신을 미리 정하여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사신을 보낸다면 중국에 고하여야 하는가?㰡니, 류영경이 아뢰기를,㰡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진주사(陳奏使)를 먼저 중국에 보내야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지난번 병부(兵部)의 이자(移咨)에, 귀국에 일이 있으면 스스로 처리하라고 하였으니, 지금 중국에 고하더라도 지휘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신을 일본에 보내고 한편으로는 중국에 진주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반드시 중국에 고하여 결정을 기다린 뒤에 일본에 통사를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저 사람들이 너무 지연됨을 의심할 것이니,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한편으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중국에 고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적(夷狄)은 비유하면 밤과 낮이 찾아오는 것 같아 거절할 수 없다. 그러나 강화를 한 번 허락하면 왜노들의 왕래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니, 우리 나라의 잔약한 힘으로는 형편상 지공(支供)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절영도(絶影島)에 머물게 하여 접대하면 저들은 필시 그들을 섬 가운데에 유폐시킨다고 할 것이고, 육지로 내려오게 하면 몰래 물건을 가지고 장사하는 폐단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니, 오늘의 계책은 어떻게 하여야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왜선이 와서 머물면 온 나라의 장사꾼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몰래 상통하면서 사고 파는 폐단을 이루 금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강화를 허락하면 섬 가운데 두지는 못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절영도에 머물게 할 수 없으면 부산은 괜찮겠는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이 계획은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하고, 이유홍은 아뢰기를,"절영도의 일은 신이 잘 압니다. 전일에 귤지정이 와서 밤이면 몰래 물건을 어선에 싣고 나와서 박대근을 시켜 값을 정하여 매매하게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옛날 태평할 때는 경관(京館)과 부산 두 곳에 항상 머무는 수가 적어도 수백 인을 밑돌지 않았다. 이제 만일 전과 같이 된다면 지공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경오년 이후로 접대하는 일은 많이 감축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약조를 정하여 감축하는 것이 의당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만약 감축한다면 자들은 반드시 서계를 올려 옛 규정대로 하기를 원할 것이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저들이 중국에 진공(進貢)하겠다고 청하면 어떻게 조처합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이것은 어렵지 않다. 이 일은 전례가 없었다."하자, 성영이 아뢰기를,"전례에 없는 일은 버틸 수가 있지만 허다한 물건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 폐단을 염려하여 거절한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류영경은 아뢰기를,"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전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관문(關門)을 닫고 거절한다면 모르겠거니와 지금 이미 왕래를 허락하여 그것을 중국의 뜻이라고 핑계한 지가 이미 5~6년이나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거절하면 난처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우리 나라의 병력으로 막을 수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은데 백성을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는가.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 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서북(西北) 지방에도 걱정이 있으니 수년 내에는 혹 무사할지라도 계속 이같으면 육진(六鎭)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육진의 수령을 특별히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국토가 작고 삼면으로 적의 침입을 받으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조정에 지당한 의논이 있을 것이니 비변사와 상의하여 정해야 한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통신사(通信使)로 칭할 것이 아니라 통유사(通諭使)로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성영은 아뢰기를, "증 영의정 이황(李滉)이 성학 십도(聖學十圖)로 병풍을 만들어 전하께 올렸습니다. 그 사람의 학문은 근세에 얻기 어려우니, 유사로 하여금 성학 십도를 인출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한가한 시간을 틈타 보시어 유신(儒臣)을 잊지 않는 뜻을 보이소서."하였다.【원전】 25 집 253 면

 

선조39/09/02(무진)

예조의 계목에,"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윤승훈(尹承勳), 행 판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은 '송대(宋代) 복원(?園)의 의논 때에 선유의 정론이 있었으니, 나의 어리석고 얕은 소견으로는 감히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 위에서 재결하시기 바란다.' 하고,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 '전대에 이 의논을 위에서 행한 경우는 한대(漢代)의 애제(哀帝)․안제(安帝)․환제(桓帝)․영제(靈帝) 뿐이고 아래에서 논한 사람은 정이(程?)․주희(朱熹) 등 유신(儒臣)들인데, 어찌 감히 정이․주희의 의논을 저버리고 환제․영제의 일을 성명(聖明)께 바라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하찮은 말을 지지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재결하시기 바란다.'하였습니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은 '삼가 유신들이 상고해 낸 역대에서 행한 전례(典禮)를 살피건대, 한(漢) 이후로 방계로서 들어가 대통(大統)을 이은 임금 중에 혹 계통(系統)에만 전념하고 사은(私恩)에는 미진한 사람도 있고, 소생(所生)에는 융성하게 하였으나 대의(大義)는 손상이 있게 한 사람도 있는데, 다 본받을 것이 못된다. 오직 송대(宋代) 영종 황제(英宗皇帝)가 복왕(?王)을 숭봉한 전례만이 가장 선왕(先王)이 예법을 만든 의리에 맞다. 대개 그때에 진유(眞儒) 정이(程?)가 상소하여 논열(論列)함으로써 경(經)에 의거하여 예(禮)를 정했으며 뒤에 효종 황제(孝宗皇帝)가 수왕(秀王)을 숭봉할 때에도 또한 이 예를 따랐으니, 이것은 왕가(王家)에서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정법(定法)이다. 그러므로 당초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는 전례를 의논할 때에 송나라의 옛일에 따라 강정(講定)하였으니, 정례(情禮)가 둘 다 지극하고 은의(恩義)가 아울러 극진한 것이다. 만약 상소한 자의 말과 같이 한다면 사은에 있어서는 융성하더라도 대의에 있어서는 어긋날 것이니, 나는 감히 쉽사리 의논할 수 없다. 위에서 재결하시기 바란다.'하였습니다. -中略- 대신들의 의논이 이러하니, 위에서 재결하여 시행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5 집 256 면

 

선조39/09/10(병자)

류영경(柳永慶)이 정승이 된 뒤에 심희수가 찬성(贊成)으로서 늘 류영경의 집에 가서 함께 정승에 오르기를 꾀했다. 심희수는 본디 노래를 잘 부르므로 류영경이 술을 먹이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심희수가 소리를 질러 크게 노래부르자 그 소리가 사방 이웃에까지 들렸다. 류영경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인데 류영경은 듣고 칭찬하였으나 화답하지는 않았다. 그가 아첨하느라 천대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이 듣고서 비평하기를 '중신(重臣)으로서 류가(柳家)의 가동(歌童)이 되었다.'하였다.

심희수가 정승이 된 뒤에 김제남(金悌男)을 복상(卜相)하려 했는데, 류영경이 말하기를 '그러면 안팎의 권세를 다 그에게 돌릴 것인가. 안된다.'하였다. 심희수가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류영경이 김제남을 복상하려 하였는데 내가 말렸다.' 하였다. 이것은 김제남으로 하여금 자기가 끌어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류영경을 원망하도록 하는 반면 바깥 사람들로 하여금 류영경을 미워하게 하고 명예는 자기가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회답사(回答使)를 전송하는 날 여유길(呂裕吉)이 뭇사람이 있는 가운데에서 크게 말하기를 '류 정승이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을 복상하려 하였는데 그렇게 됐다면 일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나 심 정승이 듣지 않았다 한다.' 하였다. 그때 원임 대신(原任大臣) 중에 그것을 비난한 자가 있었는데, 심희수가 민망하여 말하기를 '나는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으로 하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연흥 부원군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하였다. 원임 대신이 듣고 또 말을 꾸미는 것을 비난하니, 심희수가 말이 막혀서 말하기를 '나는 허공언(許功彦)으로 하였는데 사람들이 김공언(金恭彦)이라 잘못 전하였다.' 하였다. 허성(許筬)은 그 말을 믿고 류영경을 원망하였다. 대개 허성의 자(字)는 공언(功彦)이고 김제남의 자는 공언(恭彦)인데 음이 서로 같으므로 심희수가 이를 인해서 또 허성을 속인 것이다. 허성이 뒤에 꾸민 말임을 알고 그의 변화무쌍함을 미워했다. 대개 처음에는 청평 부원군이 연흥 부원군이라 잘못 전해졌다고 둘러대고 또 공언(功彦)이 공언(恭彦)이라 잘못 전해졌다고 둘려대려 하였으니, 몸은 셋이고 입은 넷인 자라 하겠다. 그때에 김제남을 복상하려 한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정승이 된 뒤에 지위가 제 위에 있는 자는 반드시 밀어내고 스스로 오르려 한 것이다. 허성이 일찍이 길가 고을의 늙은 창기라고 비평한 것은 그가 간사하게 아첨하였기 때문이었다.【원전】 25 집 260 면

 

선조39/09/14(경진)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류영경(柳永慶), 제조(提調) 한준겸(韓浚謙), 부제조(副提調) 이상의(李尙毅), 기사관(記事官) 유학증(兪學曾), 조명욱(曺明홸), 유호증(兪好曾), 어의(御醫) 허준(許浚), 조흥남(趙興男)․이명원(李命源), 침의(鍼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 류계룡(柳季龍)이 입시하였다.【원전】 25 집 263 면

 

선조39/09/16(임오)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한준겸(韓浚謙), 부제조 이상의(李尙毅), 기사관(記事官) 유학증(兪學曾), 조명욱(曺明?), 유호증(兪好曾), 어의(御醫) 허준(許浚), 조흥남(趙興男), 이명원(李命源), 침의(鍼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 ․류계룡(柳季龍)이 입시하였다. 사시 말에 침맞는 일이 끝났다. 【원전】 25 집 264 면

 

선조39/09/18(갑신)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한준겸(韓浚謙), 부제조 이상의(李尙毅), 기사관(記事官) 유학증(兪學曾), 윤형언(尹衡彦), 조명욱(曺明홸), 어의(御醫) 허준(許浚), 조흥남(趙興男), 이명원(李命源), 침의(鍼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 류계룡(柳季龍)이 입시하였다. 침을 맞는 일이 끝나고 사시(巳時) 말에 파하였다. 【원전】 25 집 265 면

 

선조39/09/20(병술)

약방 도제조 류영경, 제조 한준겸, 부제조 이상의, 기사관 유학증(兪學曾), 이현(李俔), 조명욱(曺明홸), 어의(御醫) 조흥남(趙興男), 이명원(李命源), 침의(鍼醫) 남영(南嶸), 허임(許任), 김영국(金榮國), 류계룡(柳季龍)이 입시하였다. 침을 맞는 일이 끝나고 신시(申時) 말에 파하였다. 【원전】 25 집 266 면

 

선조39/10/01(병신)

홍문관 부응교 조정립(趙正立)이 향리에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립은 깨끗한 절개를 지키면서 조용히 지내려 했을 뿐 영달을 즐기지 않았다. 류영경(柳永慶)이 권력을 훔쳐 잡은 이후로는 시사(時事)가 날로 변하였는데, 그가 끌어들여 기용한 자들은 모두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없는 무리들뿐이었다. 이 때문에 정립은 더욱 벼슬에 뜻이 없어서 여러 번 전한(典翰)과 사인(舍人)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원전】 25집 699 면

 

선조39/10/11(병오)

류영경(柳永慶), 허욱(許頊)이 의논드렸다."이번에 묶어오는 도둑은 진가를 참으로 가리기 어렵습니다. 가짜 도둑인데 그 거조(擧措)를 중하게 한다면 참으로 속는 것이 되고, 조금이라도 참으로 범한 것이 있는데 헐하게 처치한다면 의리에 있어서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저들이 이미 능을 범한 도둑이라 하여 보냈고 우리도 능을 범한 도둑으로 여겨서 받는다면 헌부하는 일은 사체(事體)로 헤아려보아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하나, 종묘․사직에 고하는 것으로 말하면 상세히 살펴서 처치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위에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원전】 25 집 273 면

 

선조39/10/30(을축)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류영경(柳永慶), 제조(提調) 한준겸(韓浚謙), 부제조(副提調) 이선복(李善復)이 아뢰기를, "근일 성후(聖候)가 어떠하십니까? 손가락이 불편한 것은 사지 끝의 증세이기는 하나 오래 회복되지 않으시니, 신들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와서 문안합니다."하니, 평안하니 문안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25 집 279 면

 

선조39/11/01(병인)

대마도 왜인 마고사구(麻古沙九)․마다화지(麻多化之) 등을 저자에서 목베었다. 처음 왜추(倭酋) 원가강(源家康)이 국정을 독단하고 한결같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소행과는 반대로 하여 계속 피로인(被擄人)의 쇄송(刷送)을 허락하는가 하면, 이어 차왜(差倭) 귤지정(橘智正)을 보내 부산에 도착한 뒤 통신사의 회복을 요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가강의 국서(國書)가 없었으므로 조정에서는 범릉(犯陵)한 왜인을 잡아 보내고 가강의 국서도 가져와야 화의를 의논할 수 있다고 하고 먼저 사람에게 보내 이를 알렸다. 이에 가강이 비로소 국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 "전하가 일찍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오게 허락하시어 이곳 60여 주의 인민으로 하여금 화호(和好)의 실상을 알게 하신다면 피차간에 크게 다행이겠습니다."하였다. 또 대마도 왜인 중 사형에 처할 죄인이었던 마고사구(麻古沙九), 마다화지(麻多化之) 두 사람을 범릉왜(犯陵倭)라고 속여 국서와 함께 내 보내왔다. 당시 류영경이 수상(首相)으로서 이것을 종묘(宗廟)에 고하고 포로를 바치고자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류영경이 시기를 틈타 아첨하려는 계략인 줄 알고는 있었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았다. 이때 동부승지 박동열(朴東說)이 상소하기를,"천도(天道)가 다시 호운(好運)을 맞아 적이 바야흐로 화(禍)를 끼친 것을 뉘우치고 범릉한 원수를 포박해 보내기까지 하여 전일의 화호를 되찾으려 하니, 신인(神人)의 해묵은 분노가 일조에 풀리게 되어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에 경사가 되는 것이 정말 크다고 하겠습니다. -中略- 하필 죄인을 경중(京中)으로 끌고와 진짜 죄인을 얻은 것처럼 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위신을 잃고 수모를 받게 될까 깊이 걱정되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하니,

상이 그 소를 내리어 의논케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진위(眞僞)를 막론하고 국문해 본 다음 그 정상이 과연 진범이면 바로 헌부례(獻?禮)를 거행하여 종묘에 고해야 할 것이고, 진범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또한 적이니 바로 참수(斬首)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은 광명정대하게 처리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야 하니 의심을 갖고 처리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병조가, 경상 감사와 병사에 알려 부산에 군사를 모아 수군과 육군의 위용을 크게 떨치게 하여 두 왜인을 해상에서 접수한 다음 연도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병졸을 내어 호위해서 송치하도록 하고 또 선전관(宣傳官), 금오랑(金吾郞)을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토록 청하였다. 상이 국청(鞫廳)을 사복시(司僕寺)에 설치토록 하고 류영경(柳永慶)을 위관(委官)으로 삼아 국문케 하였다. 마고사구는 공술(供述)하기를 '도주(島主)에게 죄를 입어 바깥 마을에 쫓겨나 있다가 갑자기 밤에 포박되어 보내졌다.'고 하였고, 마다화지 또한 공술하기를 '임진난 때 종군(從軍)하지도 않았는데 도주에게 죄를 얻어 바깥 마을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포박되어 보내졌다.'고 하면서 모두 불복하였다. 류영경이 계속 낙형(烙刑)과 압사(壓沙)를 가하니, 두 왜인이 큰소리로 호소하기를, "저희들 무리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나, 처음에 만약 도주가 속여서 보내는 것을 알아다면 비록 배를 갈라 죽더라도 어찌 나올 리가 있었겠습니까.'하며, 원통함을 호소해 마지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대마도의 왜인이면 누군들 우리 나라의 적이 아니겠는가. 도주가 이미 포박하여 바쳤으니, 길거리에서 효수(梟首)하라."하고, 드디어 명하여 이들을 목베었다. 【원전】 25 집 699 면

 

선조39/11/16(신사)

우승지 이선복(李善復)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능침을 범한 적이 들어온 뒤 묘사(廟社)에 고할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행 판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 행 지중추부사 심희수(沈喜壽)는 '전일 의논드릴 때 우견(愚見)을 대략 개진하였으니 묘당에서 참작하여 조처하기에 달려 있다. 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고, -中略-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은 '신들의 소견은 전일 의논을 드릴 때 이미 대략 진달하였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에 「적이 오면 추국하여 그 실상을 알아내어 과연 진범이라면 즉시 헌부례를 행하고 종묘에도 고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매우 윤당하신 말씀으로 신들은 감히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일이니 군의를 절충하여 시행해야 한다. 상의 재량에 달렸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능침을 범한 죄율(罪律)에 어찌 괴수와 추종자의 구별이 있겠는가. 적에게는 괴수와 추종자의 구별이 없는 것이라면 묘사에 고함에 있어 어찌 속이는 것이라고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만약 이 적을 평수길(平秀吉)이라 하여 고한다면 그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단지 사실에 의거하여 정직하게 고할 따름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의 무덤을 남에게 도굴당했다면 수천 명의 도적 모두는 응당 그 아들이 손수 베어 살을 저며야 할 자들이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을 다 잡을 수 없게 되었고 다행히 한두 명을 잡았다면, 아들된 자는 실성하여 미친 듯 뛰면서 부모의 묘에 가서 통곡하고 손수 죽여서 원수를 갚겠는가, 아니면 가만히 서서 냉소하면서 '이는 묘를 도굴한 괴수가 아니라 수종한 적일 뿐이니 이들에 대해 노할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렇게 하고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의(不義)요 불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진범 여부를 논할 따름이지 묘사에 고하는 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나의 소견은 이와 같다."하였다. 【원전】 25 집 286 면

 

선조39/11/18(계미)

유공량이 위관(委官)【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말로 아뢰기를,"왜인들을 낙형(烙刑)으로 엄하게 국문하였으나 역시 바른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옥체(獄體)나 죄명으로 말한다면 의당 다시 다른 형문을 가하여 기어코 사실을 밝혀야 되겠으나, 왜인들이란 성질이 모질어 잘 참아내는 데다가 그 말이나 사색으로 볼 때 끝내 자백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그만두고 별안간 진짜 도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우선 바른대로 말할 때까지 계속하여 내일도 다시 압사(壓沙) 등 형문을 가해야 합니까, 아니면 전에 계청한 대로 공초한 내용에 의거해서 귤지정에게 힐문한 뒤에 조처해야 합니까? 저들이 아무리 자백하지 않더라도 끝내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귤지정에게 힐문한 뒤에도 죽음은 면치 못할 것이니, 신들은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여쭙니다."하니, 답하기를,"반드시 승복하지 않고 죽을 것이다. 의논하여 조처하라."하였다. 【원전】 25 집 287 면

 

선조39/11/20(을유)

우부승지 유공량이 추국청의 말로 아뢰기를,"왜인들을 조처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오늘 회의하였으나,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은 복제(服制)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고 원임 대신(原任大臣) 가운데도 혹 사고나 질병 때문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같이 막중한 일에 일제히 참석하지 않은 것은 사체에 온당치 못하니, 내일은 원임 대신과 영의정 류영경을 모두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원전】 25 집 288 면

 

선조39/11/22(정해)

류영경(柳永慶), 허욱(許頊), 한응인(韓應寅)이 서계하기를,"두 왜인이 아무리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들 역시 적이니 벨 수 있습니다. 벤 뒤에 그들의 공초 내용을 가지고 귤지정에게 말해주거나 혹은 대마도 회답 서계에 언급하여 '너희들의 하는 일이 매우 불성실하다. 그러나 왕도(王道)는 크고 넓어 서로 계교하려 하지 않는 까닭에 너희들의 청을 마지못해 따른다.'고 하고, 가강(家康)에 대해서는, 그의 서계에 능적에 관한 조항을 대마도에 미루면서 상관이 없는 듯이 하였으니 답서에는 생략하고 언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묻는다면 사신이 말을 만들어 대답하게 하는 것이 제왕으로서 오랑캐를 대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 같으며 훗날 사변에 대응하는 사기(事機)에도 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신(諸臣)의 서계 중에 반드시 장책(長策)이 있을 것이니, 참작하여 재결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였다.【원전】 25 집 289 면

 

선조39/12/01(을미)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경섬(慶暹), 서장관(書狀官) 정호관(丁好寬)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원가강(源家康)이 신사(信使)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은 사행의 명칭 붙이는 것을 어렵게 여겨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가강이 서계(書契)를 보내 굳이 청하므로 드디어 회답(回答)이란 이름으로 이들을 파견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라의 원수를 갚지도 못한 상태에서 먼저 신사(信使)를 허락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다. 전 참판 윤안성(尹安性)이 시를 지어 우길에서 준 전별시(餞別詩)에,

회답이란 사명 띠고 어디로 향하는가 오늘 그대의 행차를 나는 모르겠네

한강에 나가 강 위를 바라보라 두 능의 송백 가지가 솟지 않았으리.

하였는데, 한때에 널리 애송되었다. 당시는 류영경이 오래도록 권력을 잡았던 때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다. 남쪽 변방의 어느 수장(水將)이 배 한 척의 쌀을 류영경에게 보내면서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량미라고 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이항복이 이를 듣고 그 배에 실은 것을 거두어 도감에 실어 들였다. 또 어떤 무부(武夫)가 류영경에게 뇌물을 바치고 만호(萬戶)의 벼슬을 얻었는데 이름이 같은 자가 와서 다투어 숙배(肅拜)하려고 했으므로 듣는 이마다 실소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윤안성이 또 시를 지어 기롱하였는데,

도감은 배 한 척의 쌀을 거저 얻었고 만호 두 명이 와 숙배 다투네

이같은 말이 새외에 들린다면 동왜와 북적은 저절로 평정되겠네

하였다. 【원전】 25 집 699 면

 

선조39/12/09(계묘)

예조의 계목에,"점련하였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영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행 판중추부사 윤승훈(尹承勳), 행 지중추부사 심희수(沈喜壽)는 '삼가 상교(上敎)를 보건대 매우 윤당(允當)하여 다른 의논을 드릴 것이 없다. 오직 상께서 재결하실 뿐이다.' 하고, -中略-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은 '판부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상께서 재결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은 '여러 잡류(雜類)들 가운데 대략 등급을 매겨야 할 일이 없지는 않으나 이미 근거할 만한 절목(節目)이 없다면 아울러 서얼의 전례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의당하다. 상께서 재결하실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는데, 입계하자, 의논대로 하라고 하였다. 【원전】 25 집 292 면

 

선조39/12/12(병오)

우승지 이선복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본조의 계사에, 정미년에 실시할 중시(重試)와 별시(別試)의 길일(吉日)을 가려 점련한 계목(啓目)에 대하여 전교하시기를 '중시 뒤에 별시를 보인다 하니 무슨 일로 별시를 보인다는 것인가? 예조에 묻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중시와 별시를 당초 설치한 본의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조(本朝)의 《등과록(登科錄)》에는 「중시를 보여 뽑을 때에는 으레 별시를 아울러 거행하여 동시에 방방(放榜)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난 해에 이미 마련한 공사(公事)대로 택일(擇日)하여 입계한 것이다.' 하니, 전교하시기를 '중국에는 별시가 일찍이 있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기습(氣習)이 경박스러워 해마다 별시를 보이는데 어떤 해는 두 차례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학자들이 독서에는 힘을 쓰지 않고 우리 나라 문인(文人)들의 글을 표절하기에만 힘을 기울여서 문장을 꾸며가지고서는 요행으로 등제(登第)할 계책을 삼고 있다. 선비를 길러 등용하는 도리가 이러하지 않을 듯하여 늘 미편하게 여겨온 지 오래였다. 근년에 이르러 과거를 자주 실시했을 뿐더러 금년에 이르러서도 두 번이나 보였고 또 앞으로 중시와 별시를 보인다고 하니 크게 사리에 어긋나는 짓이다. 이번 중시와 별시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행 판중추부사 윤승훈(尹承勳), 행 판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은 '상교(上敎)가 윤당(允當)하여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은 《대전(大典)》의 규정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생에게 대거(對擧)를 아울러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한 때의 은명(恩命)에서 나왔던 것이 그대로 성례(成例)가 되어서일 것이다. 지금 받든 상교는 지극히 윤당하다.' 하고, 영의정 류영경은 '상교가 지당하다. 선왕조(先王朝)에서는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보였으면 중시만을 보이는 것이 규례였다.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상께서 재결하실 뿐이다.' 하고, -中略-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은 '매번 중시를 보일 때에 반드시 별거(別擧)를 겸해 보이는 것이 어디에 근거하여 규례로 정해졌는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선왕조에서도 단지 중시만을 보이고 취사(取士)하지 않은 때도 있는 데이겠는가. 상교대로 정미년 중시에 별시를 겸해 보이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다. 상께서 재결하실 뿐이다.'라고 하였는 바, 대신들의 뜻은 이와 같았습니다. 등과기(登科記)를 자세히 상고해 보건대 중시를 보인 각 해에는 모두 별거를 겸해 보였으나, 단지 중묘조(中廟朝) 정묘년과 명묘조(明廟朝) 병오년의 해만은 중시만 보이고 별거가 없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하니, 계사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5 집 293 면

 

선조40/01/01(을축)

성영(成泳)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성영은 조정에서 볼 만한 것이 없이 오직 지조없이 세력에 붙좇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사당(詐黨)으로 지목하였는데, 류영경에게 붙어 이 직을 제수받았다. 【원전】 25집 700 면

 

선조40/01/13(정축)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아뢰기를,"상수연은 지난해 정월에 계청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그 후 미루며 거행하지 않은 지가 지금까지 1년이나 되니, 많은 사람들의 답답함과 민망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다행히 지금 길일(吉日)을 가려 설행하게 되었으나 또 다시 내연은 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답답함과 민망함이 전날보다 심합니다. 이번 수연은 전고에 드문 성례입니다. 반드시 외연은 내연을 아울러 설행한 다음에라야 예와 인정에 합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유사와 근신들이 간청해 마지 않은 것이니, 성명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양찰하시어 속히 윤허를 내려 주소서."하니, 답하기를,"내연을 아울러 설행하여 더욱 번거롭고 요란스러워지게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외연만을 설행하는 것이 옳다."하였다.【원전】 25 집 302 면

 

선조40/02/19(임자)

상이 이르기를,"관서 방면이 더욱 심히 공허해졌는데,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겠는가?"하니, 류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신이 호종할 때 일찍이 그 지방을 보니, 강변(江邊)이 거의 다 비어 있었는데 근년들어 그 전보다 더욱 심해졌습니다. 경원(慶源)으로 국경을 넘어 오는 오랑캐도 옛날에 비해 온순하지가 않은데 요즘엔 홀온에게 쫓겨 현성(縣城)에 와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는 예사로 우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경원 부사를 재략이 있는 사람으로 가려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비국(備局)에서 의논하여 천거하라."하였다. -中略- 한준겸(韓浚謙)이 아뢰기를, "신들 역시 그런 염려가 있습니다만 진짜이든 가짜이든 간에 그냥 놔두고 볼 뿐입니다."【역시 미진하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가강이 그대로 있다면, 사신이 왕래하더라도 필시 해가 없을 것이다. 저들은 위아래의 분수가 없이 서로 쟁탈하는 짓을 계속하고 있는데, 가강이 국권을 잃고 수뢰(秀賴)가 얻었다면 사신이 치욕을 받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니, 바깥의 의논은 어떠한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상께서 '임기 응변을 일삼는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잡혀 간 사람에 대한 쇄환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저들이 반드시 수만 명을 보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조정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 "병사를 만들 수도 있고 백성으로 놔둘 수도 있습니다."하였다. -中略- 유원이 아뢰기를,"이것이야말로 대신이 할 일인데, 신이 어떻게 감히 그 사람을 지적하겠습니까?"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강계 판관(江界判官)을 문관으로 파송할 경우 신지제(申之悌)가 그 직임에 적합한데, 다만 70세된 노친이 집에 있다고 하는 것이 염려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그렇다면 다른 인물로 바꿔라. 어렵지 않은 일이다."하였다.【원전】 25 집 310 면

 

선조40/03/01(갑자)

한효순(韓孝純)을 이조 판서로, 박홍로(朴弘老)를【뒤에 홍구(弘耈)로 고쳤다.】 병조 판서로 삼았다. 효순과 홍로는 모두 류영경에게 아부하여 영경이 끌어주었다. 【원전】 25 집 700 면

 

선조40/04/01(계사)

최천건(崔天建)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천건은 류영경의 당인데 영경이 패몰하자 성영(成泳), 송응순(宋應洵) 등과 함께 모두 죄를 얻었다.【원전】 25 집 700 면

 

선조40/04/14(병오)

예조가 아뢰기를,"홍문관의 차자에 대한 회계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전교하였으므로 대신에게 문의하였더니,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나는 본디 배우지 못하였고 예문(禮文)에는 더욱 어둡다. 종묘 제도의 중한 예법을 어떻게 감히 참여하여 논의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옛 제도도 세대마다 각기 동일하지 않았으니 우리 나라의 전래된 제도를 굳이 고칠 것은 없을 것 같다. 만약 협착한 것이 걱정이라면 전번 제도에 의거하되 조금 넓히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으니 위에서 재탁하기 바란다.' 하였고, -中略-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유속(流俗)에 화합하였다.】은 '종묘의 제도를 개정하는 것은 사체가 극히 중하여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니, 조정의 의논을 널리 거두어 적의한 것을 시행함이 합당하다. 위에서 재탁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中略-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는 병이 있어서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의 의도가 이와 같으니 위에서 재탁하여 시행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의논이 우리 나라의 의논과 다른 것 같다. 이렇게 한다면 뒤에 반드시 말썽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찌 새로 만든 제도를 좋아하겠는가. 이 일은 아마도 이루기 어려울 것 같다."하였다. 【원전】 25 집 324 면

 

선조40/05/03(을축)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은 말하기를 '종묘의 제사에 서서 행례하면 늙고 병든 사람은 감당할 수 없으므로 상께서 특별히 유념하시어 연중(筵中)에서 물으셨으니 이는 진실로 제사에 임하여 공경을 지극히 하고 아랫사람을 인(仁)으로써 보살피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종조에서 모든 제사에 서서 행례한 지 이미 오래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고치는 것은 미안할 듯하다. 오직 상의 재단을 기다려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습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25 집 331 면

 

선조40/06/16(정축)

의금부가 아뢰기를,"남편을 죽인 죄인 물단(勿丹)이 이미 자복하였으니, 그가 살던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는 것을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일에 대하여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신과 의논했더니,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는 의논하기를 '이미 의거할 만한 규례가 없으니 감히 경솔히 헌의할 수 없다. 오직 상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하였고, -中略-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은 '강상의 변이 주군(州郡)에 생기면 그 읍호를 강등하고 그 수령을 파직하는 것이 율문에 실린 것은 아니나 우리 나라에서 행해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번에 남편을 죽인 죄인 물단이 이미 자복하여 형을 받았으니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남편을 죽인 것과 아비를 죽인 것이 똑같이 시역(弑逆)이므로 그 사이에 차이를 두는 것은 불가한 듯하다. 그러니 응당 행할 절목을 거행해야 마땅하다. 설혹 전례에 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금부로 하여금 다시 상의 확정하여 알맞게 처리해서 인심을 경계하고 윤기(倫紀)를 중히 하면 매우 다행이겠다. 그러나 오직 상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하고, -中略- 행 판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은 병 때문에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러하니, 상께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의논이 같지 않으니, 다시 의논해 참작하여 처리하라."하였다. 【원전】 25 집 348 면

 

선조40/08/23(계미)

예조가 아뢰기를,"본조가 '신묘(新廟)가 이루어진 후에 양묘(兩廟)를 이안(移安)하는 일을 하루 안에 한다고 하더라도 태묘(太廟)를 먼저 하고 영녕전(永寧殿)을 뒤에 할 것인지 아니면 일시에 함께 할 것인지 모르겠다. 일시에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선후의 차서는 반드시 미리 강정해야 할 것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한 데 대해 윤허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덕형(李德馨),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은'원조(遠祖)로부터 차례로 내려오는 것이 마땅하다. 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윤승훈(尹承勳)은 '사당을 세움에 있어서는 태묘를 중히 여기는 것이니 태묘를 먼저 이안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고,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은 '신들이 삼가 한유(韓愈)의 체협의(??義)를 살피건대 「자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먹을 수는 없다.」는 말이 있고, 또 「할아버지는 손자로 하여 높아지고 손자는 할아버지로 하여 굴하게 되는 것이니, 신도(神道)에 구해보면 어찌 인정(人情)에 멀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으로 살펴보면 이안하는 날 영녕전을 먼저 하고 태묘를 뒤에 하며 조묘(?廟)의 두 분 신주는 최후에 별도로 모시는 것이 정리로나 예의에 있어 합당할 듯하다. 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기자헌(奇自獻)은 '묘제(廟制)는 태묘가 참으로 중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태묘와 영녕전을 일시에 세웠으니 영녕전의 4왕(王)을 먼저 모시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고,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심희수(沈喜壽)는 '예문(禮文)에 준거할 만한 명문(明文)이 없으니 참으로 경솔히 의논드리기 어렵다. 그러나 종묘의 제도는 태묘를 중히 여기는 것이니, 태묘의 신주를 먼저 모신 연후에 영녕전의 신주를 이안하는 것이 선대(先代)를 추숭(追崇)하는 의리에 있어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하다. 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견이 이와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알았다. 삼공(三公)의 의논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원전】 25 집 359 면

 

선조40/10/09(무진)

해돋을 무렵 왕세자가 문안하려고 동궁에서 나오는데 내인(內人)이 상의 환후가 위급하다고 전언하였다.【미명(未明)에 상이 기침하여 방밖으로 나가다가 기급(氣急)하여 넘어졌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수레에서 내려 급히 답려가 입시하였다.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최천건(崔天健), 부제조 권희(權僖), 기사관(記事官) 목취선(睦取善), 이선행(李善行)․박해(朴海), 어의(御醫) 허준(許浚), 조흥남(趙興男), 이명원(李命源)이 입시하고 말을 전하는 내관과 약을 가진 의관들이 침실 밖 대청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도 스스로 입시했다.】 상이 일어나지 못하고 의식이 들지 않으니, 청심원(淸心元), 소합원(蘇合元), 강즙(薑汁), 죽력(竹瀝), 계자황(鷄子黃), 구미청심원(九味淸心元), 조협말(?莢末), 진미음(陳米飮) 등 약을 번갈아 올렸다. 상이 기후가 조금 안정된 후에,"이 어찌된 일인가, 어찌된 일인가." 하고 급히 소리지르니, 왕세자가 손을 저어 좌우를 나가게 하였다. 약방 도제조 이하가 합문 안으로 물러나 대령하였다. 【원전】 25 집 369 면

 

선조40/10/09(무진)

신시(申時)에 상의 호흡이 다시 가빠지니 시약청 도제조 류영경, 제조 최천건, 부제조 권희, 기사관 목취선, 이선행, 박해, 어의 허준, 조흥남, 이명원이 입시하고, 내관, 의관 등과 김제남도 스스로 입시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하자 청심원, 소합원, 강즙, 죽력, 계자황 등 약을 번갈아 올리니 상의 호흡이 조금 안정되었다. 류영경 이하가 모두 합문 안으로 물러갔다.【원전】 25 집 369 면

 

선조40/10/09(무진)

상이 봄부터 불편하여 오래도록 조섭(調攝)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침에 일어나 침방을 걸어나오다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다. 세자가 막 대내(大內)에 들어가 문안하려 했는데, 상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궁인의 전갈을 받고 가마에서 내려 달려가 입시(入侍)하였다. 약방 도제조 류영경 및 어의(御醫) 허준(許浚) 등이 모두 침문(寢門) 밖에 들어와 여러 차례 약을 올리니 상의 증세가 조금 안정되었다. 이에 세자가 좌우를 물러나게 하여 류영경 이하가 모두 나가 합문(閤門)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날이 저물 무렵 상의 병세가 다시 위독해졌다. 류영경 및 허준 등이 입시하여 약을 올리자 한참 만에 안정되었으므로 드디어 모두 물러나왔는데, 세자는 그대로 대내에서 밤을 보내면서 시질(侍疾)하였다. 【원전】 25 집 701 면

 

선조40/10/11(경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회계하기를,"신들이 삼가 비망기를 보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황공하여 품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께서 여러 달 동안 조섭하시어 즉시 쾌복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점차 수라를 드시어 원기가 회복되어 가니 온 나라 신민이 평복될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만 의외에 이번에 갑자기 이런 명을 내리시니 신들은 몹시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는 조섭중에 계시더라도 적체된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이런 점은 염려하지 마시고 심기를 화평하게 하여 조섭에 전념하시면 종묘와 사직이 은밀히 도와서 성후(聖候)가 저절로 강녕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들의 소원일 뿐만 아니라 군신(群臣)의 뜻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이와 같이 하고서 조섭하고자 한다면 이는 먹기를 거절하면서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가련키 그지없다. 그러던 중에 심병이 갑자기 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몹시 민망스럽다. 오직 이 일념뿐 그밖에 다른 생각은 없다."하였다.

영의정 류영경,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이 회계하기를,"신들은 삼가 내전의 하교를 보고 황공스러운 심정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신들의 민망한 마음은 이미 대전의 비망기에 대한 회계에 모두 아뢰었습니다. 그 밖에는 달리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하니, 언서로 답하기를,"계사(啓辭)는 지극하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날에 비교할 수 없다. 만일 이 일로 인하여 심려를 많이 써서 더욱 손상된다면 후회해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니 몹시 민망스럽다. 다시 바라건대, 대신은 깊이 권도(權道)를 생각하여 힘써 상의 명을 받들어 오늘날의 옥체를 조섭하는 소지를 만들면 몹시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겠다."하였다.【원전】 25 집 370 면

 

선조40/10/11(경오)

상이 삼공(三公)을 명소(命召)하여 빈청(賓廳)에 모이게 하고 하교하기를,"나의 병이 이와 같으니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세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할 것이다. 만약 어렵다면 섭정(攝政)하도록 하라."하니,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韓應寅) 등이 아뢰기를,"성후(聖候)가 자연히 강녕(康寧)해질 것이니, 막중한 거사를 감히 준봉(遵奉)치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얼마 뒤에 중전(中殿)이 다시 언서(諺書)로 전교하기를,"원컨대 대신들은 성교(聖敎)를 따라 조섭하는 데 편안케 하라."하니, 류영경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끝내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이날 원임 의정(原任議政)인 이산해,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윤승훈, 기자헌, 심희수 등도 빈청에 모였는데 모두 류영경에게 휘척(揮斥)당한 나머지 비변사로 피해 나가서 삼공의 의계(議啓)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허욱, 한응인 및 여러 대신들이 또 빈청에 모였는데, 류영경이 약방에 있으면서 허욱과 한응인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삼공이 지금 회의하여 다시 아뢰어야 하겠는데, 어느 곳이 적당하겠습니까."하니, 여러 대신들이 그 뜻을 깨닫고 모두 피해 나가려고 하자, 이원익이 말하기를,"빈청은 시임(時任)과 원임(原任)이 자리를 함께 하는 청사(廳舍)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에 있다고 하더라도 시임들이 공사(公事)를 하는데 무슨 방해가 된다는 말입니까."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말하기를,"오늘날의 형세상 피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하고, 드디어 서로 이끌고 나갔다. 대개 이는 류영경이 다른 논의가 있게 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단지 허욱의 무리와만 약속해서 아뢰려 했기 때문이었다.【원전】 25 집 701 면

 

선조40/11/01(경인)

양사가 송석경(宋錫慶), 류경종(柳慶宗)을 논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 상의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으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허준(許浚)이 어의(御醫)로서 약을 알맞게 쓰지 못했다 하여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이에 사간 송석경과 장령 류경종이 허준의 죄를 논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옥당(玉堂)이 경종의 피사(避辭) 가운데 잡약(雜藥)을 너무 많이 제조해 함부로 썼다는 한 조목은 당사자를 모함한 것이라고 논하여 체직시켰다. 이에 김대래(金大來)가 석경을 대신하여 사간이 되었는데, 마침내 앞장서서 논하기를 '석경 등이 「약을 잘못 썼다.」는 논의를 가탁(假托)하여 서로 창화(唱和)하면서 때를 보아 몰래 선동하여 뒷날 남에게 화를 전가시킬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하며, 사헌부와 말을 맞춰 석경 등의 파직을 청하니,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당시에 류영경이 약방 도제조였으므로 경종 등이 먼저 허준을 논한 다음에 류영경의 지위를 동요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대래가 류영경의 응견(鷹犬)으로서 급히 경종 등을 공격하였으니 류영경을 위해 사람들의 입을 틀어 막는 것이 이와 같았다. 류영경이 권력을 독차지한 세월이 이미 오래 되어 당류(黨類)가 대각(臺閣)에 가득 차 있었으므로 자기에게 저촉되는 말만 나오면 곧바로 쳐서 제거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의 분노가 더욱 거세어졌는데, 류영경이 패몰하게 되자 대래 또한 죄를 입고 죽었다. 【원전】 25 집 702 면

 

선조40/11/14(계묘)

약방 도제조 류영경, 제조 최천건, 부제조 권희가 아뢰기를,"신들이 모두 불초한 사람으로 본래 의약에 어두워 시약(侍藥)한 이래로 황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도 푼 적이 없습니다. 지금 대간(臺諫)이 인혐한 내용을 보니 약을 잘못 쓴 죄를 의관에게 돌렸습니다. 상의 환후에 약을 쓰는 것은 의관이 주관하였다고 하더라도 신들이 동참하여 상의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 무죄한 사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그대로 재직할 수 없습니다. 상께서는 속히 신들을 파직시켜 물정을 안정시키고 내국(內局)을 소중하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정양하고 계신 때에 이처럼 소란이 있는 것은 모두 신들이 잘못한 소치이니 더욱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하니, 답하기를, "대간이 허준을 논죄하고자 하는 진의를 모르겠다. 이는 그에게 약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 정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허준은 별로 잘못된 약을 함부러 쓴 죄가 없다.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25 집 374 면

 

선조41/01/01(기축)

전 공조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기를,"신이 삼가 소문을 듣건대 지난 10월 13일 상께서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거나 섭정하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는데, 영의정 류영경이 마음속으로 원임 대신들을 꺼린 나머지 물리쳐서 모두 내보내고 참간(參看)하지 못하도록 했는가 하면, 여러 번 방계(防啓)을 올리면서 유독 시임(時任)과 더불어 함께 처리하였으며 심지어는 중전께서 언서(諺書)로 전지(傳旨)를 내렸을 때에도 바로 회계(回啓)하기를 '금일의 전교는 실로 군정(群情)에서 벗어난 것이니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까지 하였고, 대간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경계하고 정원과 사관(史館)에게도 그대로 성지(聖旨)를 비밀에 부쳐 전파되지 못하게 하였다 합니다. 류영경이 어떠한 음모와 흉계를 가지고 있기에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 한단 말입니까. 아, 중전의 사려깊은 분부야 말로 전하의 뜻을 깊이 체득하여 국가의 원대한 계책을 도모한 것이니, 비록 옛날의 고후(高后)나 조후(曹后), 마후(馬后), 등후(鄧后) 같은 훌륭한 후비(后妃)들도 이를 능가하지 못할 것인데, 류영경이 아무 거리낌없이 극력 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춰서는 안 될 성지(聖旨)를 감추고 축출해서는 안 될 원임들을 축출했는데, 이런 소문들이 경외(京外)에 전파되자 여론이 해괴하게 여기며 분해하고 있습니다.

아, 나랏일은 일가(一家)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고 원임이 함께 계문하는 예(例)가 또한 있습니다. 신은 류영경이 무슨 뜻으로 원임들을 참석하여 알지 못하게 했는지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 나라의 임금에게 유고(有故)가 생길 경우 세자가 대행(代行)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고금의 통규(通規)입니다. 신은 류영경이 무슨 목적으로 군정(群情)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였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대간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면 그것은 나라의 정사(政事)가 아니고, 그 일을 정원과 사관이 함께 사사로이 감추었다면 사당(私黨)이 있는 것만 알았지 왕사(王事)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신은 자세히 아뢰어 볼까 합니다.

전하께서는 종사(宗社)의 중대함을 깊이 생각하시고 옥체의 안후를 헤아리시어 세자에게 위임한 다음 한가롭게 조호(調護)할 것을 생각하셨으니, 성상의 분부야말로 청천의 백일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신민들이 마땅히 같이 들어야 할 것이고, 만물이 함께 볼 수 있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원임 대신들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도리어 참석해 알 수 없게 하였으니, 그 음흉하게 숨긴 정상은 다시 감출 수 없이 명약관화하다 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뒷날 장차 스스로 사미원(史彌遠)이 되어 우리 동궁을 제왕(濟王)으로 만들려는 속셈인 것입니다. 류영경은 동궁에 대해 모해(謀害)하려고 한 정상이 이미 탄로난 것을 스스로 알고서 날마다 시기하며 더욱 틈을 내려고 획책하고 있으니, 그가 못할 짓이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하께서는 류영경이 동궁을 우리 임금의 아들로 다시 대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형세로 볼 때 장차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간계(奸計)를 이루어 마음이 쾌하게 된 연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대간이 말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류영경의 조아(爪牙)이기 때문이고, 대신이 묵묵히 끌려가는 것은 류영경의 우익(羽翼)이기 때문이며 정원과 사관이 사사로이 성지(聖旨)를 감춘 것은 류영경의 복심(腹心)이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위에 고립된 채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어진 후사가 있어도 장차 서로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빨리 류영경이 동궁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한 죄를 거론하시어 상형(常刑)을 바르게 하심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하고 종사에 다행이 되게 하소서."하니, 상이 크게 노하며 정원에 도로 내려 보냈다.

영의정 류영경이 상소하기를,"신이 삼가 정인홍의 소를 보건대 오로지 신이 동궁을 동요시켜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 했다고 지목하여 멋대로 악명(惡名)을 가하면서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신하로서 이처럼 하늘과 땅에 가득 찰 원통한 일을 당했으니, 만약 밝은 하늘 아래에서 명백히 판별하지 않는다면 살아서도 이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고 죽어서도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상을 번독케 함을 혐의롭게 여긴 나머지 이 절박한 심정을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10월 상께서 오래 조섭하시던 끝에 갑작스레 병환이 생기셨으므로 신하들은 황망하여 조치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신이 약방 제조로서 바야흐로 차비문 안에 있었는데, 정원에서 삼공을 명소(命召)하셨다는 교지를 전해 주고 이어 밀부(密符)가 내려왔습니다. 이에 신이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과 더불어 합부(合符)한 뒤에 차비문 밖에서 대명(待命)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정원이 빈청에 물러가 기다리도록 말을 전하기에 신은 좌상, 우상과 함께 빈청에 나아갔는데, 그때는 이미 원임 대신들이 있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전위(傳位)하거나 섭정하도록 하라는 하교를 받들고 삼가 생각해 보건대 창황(蒼皇)한 때에 특별히 이러한 명을 내리신 것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근본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장차 성지(聖旨)에 따라야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단지 상께서 만기(萬機)를 친히 다스리지 못한 지 겨우 하루 이틀 정도 되었을 뿐이고 우연히 생긴 병세라 자연 하루 이틀쯤 지나면 거의 완쾌되실 것이기에 이러한 신하들의 간절한 소망에 바탕하여 말씀드렸던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왕세자도 이러한 명이 있으셨다는 것을 듣고 근심스럽고 황망한 나머지 한층 더 안타깝고 절박한 심정으로 음식을 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무릇 신민으로서 그 누가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신들이 상의 명을 준봉(遵奉)치 못했던 곡절은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원임 대신을 물리쳐서 참간(參看)을 못하게 하고 여러 차례 방계를 올리면서 유독 시임과만 함께 처리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빈청에 도착하기도 전에 원임 대신들은 이미 나가버렸으니 이른바 물리쳤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신은 실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께서 이미 삼공을 명소하셨고 신들도 삼공을 명소한 밀부(密符)를 감정(勘定)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회계(回啓)하는 일은 시임의 책임이기 때문에 신들이 서로 상의하여 회계하였습니다. 그 뒤 그 비망기와 회계한 초안은 곧 사인(舍人) 오백령(吳百齡)으로 하여금 원임 대신들이 모인 장소에 가져가 보이게 하였는데, 원임들이 한꺼번에 참간하지 못했던 것은 형세가 그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대간에게 알리지 않도록 경계했고 정원과 사관은 성지가 오래 전파되지 않도록 비밀에 부쳤다.' 하였습니다. 보통 비망기를 삼공에게 내릴 경우 회계한 뒤에 비망기와 계초(啓草)를 주서(注書)가 가지고 가는 것이 관례이고 그 뒤에 대간이 알리거나 알리지 않는 여부는 대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왕세자는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인효(仁孝)하여 춘궁(春宮)에서 덕을 쌓은 지 17년에 신민들이 함께 떠받들고 종사(宗社)를 부탁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홍이 감히 전위하고 섭정하는 일을 가탁하여 몰래 화(禍)를 떠넘기려는 계책을 도모하고 흉참한 말을 지어내면서 못할 말이 없이 하였습니다. 신이 모함을 당한 이 일은 신 한 몸에만 화가 미치는데 그치지 않고 실로 종사에 관계된 것입니다. 이 탄핵 상소가 있음으로부터 심골(心骨)이 다 함께 놀라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신을 사패(司敗)에 내리시어 실상을 추핵(推?)케 함으로써 신의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인홍의 소를 보니 흉참하기 그지없어 도대체 이해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닌데, 내가 심병(心病)이 있어 자세히 보지도 못한 채 그냥 힐끗보고 지나쳤을 뿐이다. 그 가운데에는 나와 관련된 말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또한 그것이 무엇 때문에 한 말인지 알지 못하겠으니 더욱 음울하고 참담하기 그지없다. 인홍은 무고히 군심(君心)을 동요시키고 영상(領相)을 모함하였는데, 생각건대 소인배들 가운데 영상을 모함코자 하는 자가 유언 비어를 만들어 내어 남쪽에 전파시키자 인홍이 이를 철습(쿀拾)하여 상소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가 한 말은 따질 것도 못되지만,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일을 만들어 내어 지친(至親)간에 이로 인하여 의심을 일으켜 틈이 벌어지게 하였으니, 조정이 혹시라도 조용해지지 못하게 되면 크게 불행한 일이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서 떳떳하다면 천만인이 떠들어대더라도 혐의를 둘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전교(傳敎)는 원래 삼공에게만 전하도록 했던 것이지 범범하게 대신들에게 전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처럼 떠들어대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경은 마음을 편히 하여 직책에 임하고 염려하지 말라."하였다.

충청도 유생 이정원(李挺元) 등이 상소하기를,"적신(賊臣) 류영경은 성질이 음험하고 교활하여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는데도 영상의 자리를 점거하고 이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귀신이나 사람이 함께 분하게 여긴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전 참판 정인홍이 죽음을 무릅쓰고 의로운 상소를 올린 덕택에 바른 논의가 멀리 펼쳐져 온 나라가 서로 경하하고 현륙(顯戮)에 처함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성지(聖旨)가 아직 내려지지 않아 군정(群情)이 더욱 우울해지고 천지가 장차 막힐 지경이 되었으니 우리 나라의 2백 년 종사가 끝내는 반드시 이 적의 손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흉괴(凶魁)가 오래도록 권세를 도둑질하여 뿌리가 이미 공고해졌는데 기세가 치성하여 세상을 꼼짝못하게 하고 있으니, 조야(朝野)가 벌벌 떨며 그 음험한 함정에 떨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마음으로는 그의 그릇됨을 알면서도 입으로는 감히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원임 대신들을 멋대로 부르고 물리치기까지 하는데 대각(臺閣)과 근시(近侍)가 모두 그의 지시를 받으니 국세(國勢)의 위태로움이 아침 이슬과 같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그 누가 기꺼이 그를 건드려 위험에 빠질 것을 무릅쓰고 한번이라도 전하를 위해 입을 열려고 하겠습니까.

인홍이 일단 말씀드린 뒤로 흉당이 조금도 거리낌없이 더욱 방자해져서 간관(諫官)의 직책에 있는 자들도 대죄(待罪)하지 않고 있으니 임금을 무시한 방자한 태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 하겠습니다. 서리를 밟으면서 장차 얼음이 얼 것을 경계하지 않으니 앞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화란이 닥쳐올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속히 류영경의 죄를 바로잡아 신민의 분을 쾌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은 정인홍의 여론(餘論)을 수습하여 대신을 무함하니, 이는 물여우처럼 남을 음해(陰害)하는 자의 사주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조정의 대체(大體)에 대해서는 유생이 감히 망령되이 말할 성질이 못 된다."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정인홍이 세자로 하여금 속히 전위(傳位)받도록 하고 싶어하는데, 스스로는 세자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할지 모르나 실은 너무도 불충한 짓을 한 것이다. 제후의 세자는 반드시 천자(天子)의 명을 받은 연후에야 세자라고 이를 수 있는데, 지금 세자는 책명(冊命)을 받지 못했으니 이는 천자가 불허한 것으로서 천하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위를 받게 되어, 중국 조정에서 '그대 나라의 이른바 세자에 대해 천조에서 아직 책봉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대 국왕이 사사로이 전위하였으니 그대 국왕의 직위도 또한 천자의 직위로구나. 그대 국왕이 마음대로 처단할 바가 아닌 것을 세자가 어찌 감히 스스로 받는단 말인가. 그 사이에 그렇게 하는 무슨 까닭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가?' 하고 그릇되게 불측(不測)한 이름을 세자에게 가하고 대신을 힐문한다면 장차 어떻게 결말을 짓겠는가.

내 입장에서는 단지 내 몸의 우환 때문에 물러나고 싶지만 국가를 도모해야 할 대신의 입장에서야 어찌 용의주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대신의 처리를 조망(躁妄)한 사람이 염려한 것에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대신들이 어찌 다만 구군(舊君)이 물러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할 뿐이겠는가. 지금 인홍의 소 때문에 내 마음이 편치 않아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고 낮이면 밥을 먹지 못하는데, 대신과 대간 시종도 직책을 수행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니, 전에 없는 변고라 하겠다."하였다.

류영경이 또 상소하여 분변할 것을 아뢰니, 상이 타이르는 내용으로 비답하였다. 삼사(三司), 정원, 예문관이 모두 소장을 올려 인홍 등을 공척(攻斥)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양사가 드디어 인홍의 유배를 청하고, 또 인홍이 이이첨, 이경전(李慶全)의 음흉한 사주(使嗾)를 들었다 하여 그들도 모두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원전】 25 집 702 면

 

선조41/01/02(경인)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신병으로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렸다. 그 글에 "국가의 안위(安危)는 매우 중대하니 정승의 진퇴를 경솔히 할 수 없다. 어찌 자그마한 병으로 인하여 갑자기 큰 책임을 내던지는가. 경은 풍채가 빼어나고 바르며 기량(器量)이 단응(端凝)하여 마치 외로운 독수리가 가을 하늘을 날듯 풍진(風塵) 밖에 멀리 벗어났고 빛나는 구슬이 물 속에 있는 듯 진흙의 흔적이 스스로 끊기었으니 실로 종묘의 보배요 국가의 선비이다. 청렴 결백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분서(粉署)와 금규(金閨)에서 명성이 드높았다.

지난번 국가가 많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충신의 대계를 힘입었었다. 해변 고을 다스리라는 명을 받고 따뜻이 위무한 것이 몇 해였으며 영남(嶺南)에 군량을 수송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사헌부에 있을 때엔 추상(秋霜) 같은 탄핵을 했고 이조(吏曹)에 있을 때도 문밖에 청탁배가 몰리지 않았다. 청송(靑松)은 본래 정절(貞節)이 있으니 한서(寒暑)로 인하여 변하지 않고 백옥(白玉)은 스스로 결백하니 어찌 조습(燥濕)으로 인하여 변하겠는가. 몸에 간직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일을 시행함에 반드시 통달하게 된 것이다. 이에 정승 선발하는데 뽑혀 적석(赤챲)의 반열에 올랐다. 존망(存亡)의 대기(大機)는 노공(潞公)처럼 잘 결단하는 경에게 맡겼고 문무(文武)의 여러 일은 구준(寇準)처럼 큰 계획을 지닌 경에게 의뢰했다. 조정에서는 모범으로 삼았고 국가에서는 초석으로 여겼는데, 조심스러운 시기에 어찌 갑자기 물러간다는 상소를 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해가 다하도록 시약(侍藥)했으니 실로 많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고 몸을 바쳐 국가에 충성하였으니 반드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노고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뜻밖의 재앙이니 어찌 낫지 않는 병이겠는가. 생각건대 현재의 위급한 시세는 옛날에 비해 더욱 어렵다. 북쪽 오랑캐의 소식이 여러 번 왔으니 매우 급박하고 일본의 편지가 장차 도착할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국사(國事) 보살피는 걱정을 어찌 다 열거하겠으며 거꾸로 매달린 백성의 고통을 낱낱이 말하기 어렵다. 해어진 옷 꿰매는 것은 물이 새는 배보다 늦출 수 있지만 섶을 옮기는 것은 집이 불에 타기 전에 해야 한다. 장양(張良)의 벽곡(?穀)은 아마도 시기가 아닌 듯하고 오교장(午橋莊)에서 한가히 즐기는 것은 어찌 해서야 되겠는가. 의리상 희비를 같이해야 하니 원컨대 병을 참고 견디며 출근하라. 신(神)이 보호하여 약을 쓰지 않고도 병이 낫는 기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빨리 나를 도와 줄 것을 생각하고 나로 하여금 곤경에 빠져들게 하지 말라. 아, 힘써 정승에 머물러 위임한 뜻을 몸받고 소절(素節)을 힘써 끝내 광제(匡濟)의 공을 이룩하라.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 것이 옳겠으므로 이에 교시하니 잘 알도록 하라."하였다. 지제교 민경기(閔慶基)가 지어 올린 것이다.【원전】 25 집 380 면

 

선조41/01/03(신묘)

영의정 류영경이 두 번째 정사(呈辭)하니, 답하였다.㰡지금이 어느 때인데, 영의정이 또 사직하려고 하니 장차 국사(國事)는 어떻게 하는가. 나는 현재 병으로 누워 있다가 경이 정사한 것 때문에 고민하느라 병이 점차 심해지는데, 경이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여러 해 심병(心病)을 앓고 있는 것을 경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마땅히 조리하여 속히 출사하고 나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㰡 【원전】 25 집 380 면

 

선조41/01/04(임진)

홍문관이 아뢰었다.㰡삼가 생각건대 행 대사간 남이신(南以信), 사간 이지완(李志完), 헌납 황경중(黃敬中), 집의 류희분(柳希奮), 지평 남복규(南復圭)․이척(李쾩), 대사헌 황섬(黃暹)이【류영경의 처남으로서 음흉하고 간교하다. 실로 위험한 계책을 주동하였는데 목을 보존했으니 또한 요행이다.】 모두 인혐(引嫌)하여 물러갔습니다. 구성은 간사한 정철에게 붙어 훌륭한 선비를 죽였으니 왕법(王法)으로 논하면 실로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데, 어찌 일시의 작은 공로로 경솔히 그의 죄를 방면하여 조정의 대열에 두겠습니까. 봉군(封君)의 명령이 한 번 내려지자 혈기 있는 무리가 일제히 분개하니 양사(兩司)에서 논한 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삭탈 관직시키자는 것을 비록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론이 이미 일어났으니 이는 그 사이 경중(輕重)의 차등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침 병이 있어 함께 사퇴하지 못한 것은 형편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언관을 경솔히 체직시킬 수 없습니다. 대사간 남이신, 사간 이지완, 헌납 황경중, 대사헌 황섬, 집의 류희분, 지평 남 복규․이척을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재가를 바랍니다.㰡【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원전】 25 집 380 면

 

선조41/01/05(계사)

약방(藥房)이 아뢰기를,㰡삼가 의관(醫官)에게 내린 분부를 보았는데 감기가 거의 나았다고 하셨으니 기쁘고 경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오래 진어(進御)하는 약은 전일의 계사(啓辭)대로 의논해 아뢰어야 옳으나 이는 시급한 약과 같지 않고 오래도록 진어(進御)해야 할 약인데, 도제조 류영경이 마침 병으로 말미 중에 있습니다. 어약(御藥)을 의논해 결정하는 것은 막중한 일이니 신들이 쉽게 결정하지 못하겠기에 황공스럽게 감히 품의합니다.㰡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원전】 25 집 381 면

 

선조41/01/07(을미)

약방 도제조 류영경(柳永慶), 제조 최천건(崔天健), 부제조 권희(權憘)가 아뢰기를,㰡근일 성후(聖候)가 어떠하십니까? 오래 진어(進御)할 약은 금일 의논하여 결정하겠습니다. 신들의 성후를 상세히 알려고 감히 여쭙니다.㰡하니, 답하기를,㰡원래 증세는 가감(加減)이 없고 감기 증세는 거의 나았으나 약간 여기(餘氣)가 있을 뿐이다. 음식은 약간 구미(口味)가 도는데 만일 약 중에 무우를 꺼리는 재료가 들어간다면 장차 음식을 폐할 것 같으니 고민스럽다. 다만 근일 대변은 변비가 심하고 소변은 자주 본다.㰡하였다.【원전】 25집 381 면

 

선조41/01/18(병오)

전 공조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기를,㰡신이 멀리 남쪽 지방에 있으면서 옥후(玉候)가 미령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난 봄부터 뜨음하여 일을 전일처럼 결재하여 적체하지 않는다고 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의외에 생긴 병이므로 당연히 물약(勿藥)의 기쁨이 있으리니 약을 쓸 것 없다고 여겼습니다. -中略- 다만 종사의 위험한 상황이 명확히 눈 앞에 있고 국가 존망의 기미가 조석에 박두했으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겠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입을 열어 거의 죽게 된 시기에 국가에 보답하려는 것이고, 고식적으로 부시(婦寺)의 충성을 하여 덕으로 임금을 사랑한다는 대의(大義)에 아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신이 삼가 도로에서 듣건대 지난 10월 13일에 상께서 전섭(傳攝)한다는 전교를 내리자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마음 속으로 원임 대신을 꺼려 다 내어 쫓아서 원임 대신들로 하여금 참여하여 보지 못하게 하였고 여러번 방계(防啓)를 올리고 유독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공모하였으며 중전(中殿)께서 언서(諺書)의 전지를 내리자 㰡금일 전교는 실로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온 거사이니 명령을 받지 못하겠다.㰡고 즉시 회계(回啓)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정원과 사관(史館)으로 하여금 성지(聖旨)를 극비로 하여 전출(傳出)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니, 류영경은 무슨 음모와 흉계가 있어서 이토록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아, 중전의 깊고 진실한 분부는 전하의 뜻을 깊이 몸받았으니 국가를 위한 원대한 계획은 비록 옛적 송(宋)나라의 고후(高后)․조후(曺后)와 한(漢)나라의 마 태후(馬太后)․등 태후(鄧太后)처럼 어진 황후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류영경이 힘을 다해 가로막고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마땅히 비밀로 하지 않을 성지(聖旨)를 극비로 하고 내쫓지 않을 원임 대신을 내쫓았으니 중외(中外)에서 전해 듣고 여정(輿情)이 놀라고 분개합니다. 아, 국사(國事)는 한 집안의 사적인 일이 아니므로 원임 대신이 참여하여 듣는 준례가 있습니다. 류영경이 원임 대신을 참여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뜻인지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임금께서 연고가 있으면 세자가 국가를 감독하는 것은 고금의 통례입니다. 류영경이 여러 사람의 뜻 밖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대간이 듣지 못한다면 국정(國政)이 아니고 사적인 일입니다. 정원과 사관이 함께 비밀로 하였으니 이는 사당(私黨)이 있는 것만 알고 왕사(王事)인 줄은 알지 못한 거사입니다.

신이 상세히 진달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종사의 중대함을 깊이 생각하고 옥후(玉候)를 헤아려 세자에게 위임하고 한가히 조섭하려 하셨으니, 성명(聖明)의 하교가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습니다. 신민들이 마땅히 함께 듣고 만물이 모두 보아야 하는데 더구나 원임 대신으로서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음흉하고 속인 작태와 심사를 멋대로 부린 정상은 불을 보듯 환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아, 류영경은 실로 간사한 자이지만 원임 대신들도 어찌 잘못이 없겠습니까. 정사에 이미 참여하여 들을 수 있었다면 어찌 류영경의 방자함을 듣고도 묵묵히 쫓겨나기를 마치 양떼처럼 할 뿐입니까. 대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빈청에서 널리 의논하는 것은 바로 권간(權奸) 횡포의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인데 끝내 이와 같다면 장차 저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심지어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온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른바 여러 사람의 뜻이란 무엇을 지적한 것입니까. 만약 사당(私黨)이 원치 않는 바였다면 다만 소수 무리들의 음모와 간계(姦計)로 여러 사람의 뜻이라 지적하여 임금의 이목(耳目)을 속인 것입니다. 만약 온 나라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혹 전위(傳位)하고 혹 섭정(攝政)하여 인심을 결집시키고 국가의 근본을 안정시키며 옥후(玉候)를 조섭하여 완쾌되는 경사를 빨리 부르는 것은 조정 신하들의 뜻이고 서울 남녀들의 뜻이며 온 지방 백성들의 뜻인데, 혈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같은 뜻을 여러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한 것이니 이는 현저하게 무군(無君)의 마음이 있어 감히 합조(탍朝)의 울음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상의 뜻을 먼저 정하고 여러 아들 중에서 선택하여 세자의 지위를 바룬 일이 전하께서 아들을 잘 알고 한 것이 아닙니까. 의인 왕후(懿仁王后)가 자기 소생처럼 무육(撫育)하여 옥책(玉冊)에 실은 것이 전하의 본 뜻이 아닙니까.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갔을 때에 분조(分朝)를 명하여 대조(大朝)와 소조(小朝)라 이름하고 감국 무군(監國撫軍)을 위임하여 백관들이 신하라고 일컫게 한 것이 전하의 분명한 분부가 아닙니까. 들어와 병을 간호하라 명하고 㰡생각해도 이에 있고 다른 자를 구해봐도 이에 있으며 명언(名言)도 이에 있고 성심(誠心)도 이에 있다.㰡 여긴 것이 전하의 훌륭한 생각이 아닙니까. 세자가 입시(入侍)한 후로 밤중에 눈물을 흘리며 이슬을 맞고 서서 하늘에 원성(元聖)의 명(命)을 빌은 정성은 전하께서 아시는 바가 아닙니까. 대저 이 몇 가지 일은 성상의 마음으로 사랑한 바이고 하늘이 본 바이며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인데, 류영경의 이간질이 이와 같으니 이는 세자를 업신여긴 것이고 천하를 배반한 것입니다. 옥체의 병이 비록 완쾌되지는 않았으나 차츰 회복되는 것도 세자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소치입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감읍하지 않는 자가 없어 모두가 㰡성상의 올바른 교훈이 이와 같고 세자가 효성으로 상하를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으며 성부(聖父)가 현자(賢子)를 둔 것이 이와 같으니 국가의 복(福)이 무궁하다.㰡고 합니다.

물정(物情)의 다소(多少)로 말한다면 전섭(傳攝)하고 병환을 조리하는 일은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원하는 바인데 나라 사람 이외에 다시 여러 사람의 뜻이 있겠습니까. 그 말을 가지고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후일 장차 스스로 사미원(史彌遠)이 되어 우리 동궁(東宮)을 제왕(濟王)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류영경이 스스로 세자를 해치려는 정상이 이미 폭로된 것을 알고 시기(猜忌)가 날로 극심하니 자신을 위한 모략이라면 못하는 짓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류영경이 다시 우리 임금의 아들을 세자로 여기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형세는 장차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간사한 계책을 이룩하여 마음이 상쾌한 뒤에야 말 것입니다.

삼가 조정에 의당 칼을 청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10월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소식 듣기를 기다렸으나 그런 사람이 없으니, 현재 요로(要路)에 있는 자 모두가 류영경의 사인(私人)으로 류영경이 있는 줄만 알고 전하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며 차라리 전하를 저버릴지언정 차마 류영경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간으로서 말하지 않은 자는 류영경의 조아(爪牙)이고 대신으로서 묵묵히 따르는 자는 류영경의 우익(羽翼)이며 정원(政院)과 사관(史館)으로서 사사로이 성지(聖旨)를 숨긴 자는 류영경의 복심(腹心)입니다. 전하께서는 대신들을 팔 다리로 삼아야 하는데 대신들이 이와 같고 대간을 이목(耳目)으로 삼아야 하는데 대간이 이와 같으며 정원은 후설(喉舌)로 사관은 춘추(春秋)로 삼아야 하는데 정원과 사관이 또 이와 같아 전하께서는 위에서 고립되어 개미 새끼 하나 의지할 곳이 없고 어진 아들을 두고도 장차 보호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치는 자도 류영경이고 전하의 종사(宗社)를 망치는 자도 류영경이며 전하의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자도 또한 류영경입니다. 아, 참으로 세자가 당초부터 선택되어 사자(嗣子)가 되지 않았더라면 또한 한 명의 왕자일 뿐입니다. 어찌 동요시키고 위태롭게 하는 걱정이 이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처음에는 선택하여 사자(嗣子)로 세우고 끝내는 불측(不測)한 곳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니, 전하께서 일개의 흉신(兇臣)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다고 장차 현사(賢嗣)에게 화(禍) 끼치는 것을 면치 못하겠습니까.

송 고종(宋高宗)은 말세(末世)의 중주(中主)였고 또 질병이 없었으니 종실(宗室)의 아들 보안 왕(普安王)을 선택하여 사자(嗣子)로 삼고 인하여 손위(遜位)하면서 '훌륭한 사람을 얻어 부탁하니 나는 여한이 없다.'고 하였는데, 사신(史臣)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특별히 기록했고 군자는 요순(堯舜)의 선위(禪位)라고 칭송하였습니다. 지금 세자가 권섭(權攝)하는 것은 친한 것으로 말하면 친생자이고 인품으로 말하면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덕이 있으며 시기로 말하면 옥후(玉候)가 미령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효성스러운 친아들에게 옥후가 미령한 때를 당하여 전섭(傳攝)하고 병을 조리한다는 명이 있으면 대신들은 마땅히 순종하기를 제대로 못할까 염려해야 하는데, 도리어 못된 마음을 품고 사(私)를 공(公)이라 하여 여러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하니 이런 짓을 한다면 무슨 짓을 하지 못하겠습니까.

더구나 지난번 난리 중에 소조(小朝)가 남쪽으로 내려가 무군 감국(撫軍監國)하여 일국의 촉망을 오래 받았었는데, 대가(大駕)가 돌아오신 뒤에는 세자로 환위(還位)하였으니 전일의 법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사리(事理)가 정대합니다. 지금 권섭(權攝)하는 것은 바로 옛 일에 비추어 시행한 것이라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데, 류영경이 속이고 저지하여 억제하고 남몰래 사주하며 멋대로 위협하고 내쫓아 한 번의 눈짓으로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을 행하였습니다. 흉악함이 김안로(金安老)보다 심하여 항간에서 그를 지목하여 앞으로 차마 말 못할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이는 바로 세력이 성하여 다스리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류영경이 이러한 짓을 하는 것은 전하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굳히고 국가를 멋대로 하려는 계획이 아닙니까. 이러한 것이 용렬하고 어두운 임금의 시대에 있다면 실로 멋대로 할 수 있겠지만 전하의 건강(乾剛)은 모든 사사로움을 굴복시키고 전하의 명석은 구석구석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데 감히 이와 같으니 신은 매우 의혹스럽습니다. 실로 어리석고 망녕된 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혹 믿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주역(周易)》에 '지나칠 정도로 방비하지 않으면 이어 해칠 것이니 흉하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종사(宗社)의 대계를 깊이 생각하시고 다시 과거의 전철을 거울삼아 간흉들의 정상을 명찰하시어 더욱 엄밀히 방비하고 혹 지나칠까 염려하지 마소서. 류영경이 세자를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 죄를 빨리 들추어 정당한 형벌로 다스려 계은(繼恩)과 창령(昌齡) 같은 간흉으로 하여금 후일에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여 국본(國本)을 견고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켜 억만년토록 끝없는 경사를 이룩하소서. 만약 신의 말이 지나친 생각이라고 여겨지면 먼저 망언(妄言)의 죄로 사형시켜 간사한 무리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소서. 그러면 신은 성명(聖明)의 밑에서 옳게 죽는 것이고 류영경의 흉화(兇禍)에 죽는 것이 아니니 실로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고 한스럽게 여길 바가 아닙니다.

신은 실로 예로부터 권간(權姦)의 죄를 직언(直言)한 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장강(張綱)이 양기(梁冀)를 탄핵하고 호전(胡銓)이 진회(秦檜)를 죽일 것을 청한 것으로 말하면 모두 음해(陰害)를 입어 혹심한 화를 당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옛 사람은 임금을 시해한 이웃 나라의 역적에 대해서 비록 늙어 벼슬을 그만둔 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토벌할 것을 청했는데, 더구나 본조(本朝)에 있는 임금을 배반하고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흉적을 어찌 산직(散職)에 있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성명(聖明)을 저버리며 불충한 신하가 되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천지 귀신의 책망을 범하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신은 지극히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계(啓)자를 찍지 않고 도로 정원에 내렸다. 【원전】 25 집 383 면

 

선조41/01/20(무신)

예조가 아뢰기를, "고묘(告廟)하는 것과 상량문(上樑文)을 대신에게 의논하니, 모두가 '옛적에 건설이 있으면 점을 쳐서 길흉을 정하고 제사를 지내어 귀신에게 고하였으니 지금 이 예(禮)를 행하는 것은 안될 것 없다. 다만 상량문은 당초부터 예의(禮儀)에 관계 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중고(中古)에 나온 듯하니 송도(頌禱)의 유의(遺意)를 따르고 예에 있고 없는 것을 묻는 것은 부당할 듯하다. 성상의 재결을 바란다.' 하였습니다. 영의정 류영경은 병으로 수의(收議)하지 못했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후토(后土)에 제사지내는 것은 당연히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상량문도 짓게 하여 옛적 송도의 뜻에 의거하여 상량하는 날에 아울러 거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다만 상량문은 몽고(蒙古)의 일이니 어찌 인용하여 준례를 삼겠는가."하였다. 【원전】 25 집 385 면

 

선조41/01/21(기유)

헌납 성시헌(成時憲)과 정언 구혜(具?)가 아뢰기를,"신들은 모두 못난 자로서 언관에 있는데 지금 전 참판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영의정 류영경을 극악한 사람으로 여기고 대간을 류영경의 조아(爪牙)로 여겼습니다. 신들이 현저하게 비방을 당한 것이 이토록 극심하니 결코 뻔뻔스레 그대로 재직할 수 없습니다. 신들을 파직시키라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이경기(李慶셢), 지평 송석조(宋碩祚)․황근중(黃謹中)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전 참판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영의정 류영경을 힘써 비방하고 극악하다는 명목을 씌웠으며 또 대간을 류영경의 조아(爪牙)로 여겼습니다. 신들이 모두 못난 자로서 대간의 반열에 있는데, 현저하게 비방을 당한 것이 이토록 극심하니 뻔뻔스레 그대로 재직할 수 없습니다. 신들을 파직시키라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영의정 류영경이 상소하기를,"삼가 신이 전 참판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낭자한 말은 오로지 신이 세자를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으로 지목하고 멋대로 악명(惡名)을 가한 것이 이르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신하가 이처럼 천지에 끝없는 원통함을 당하고도 만약 천일(天日)의 아래에서 명백히 분별하지 않는다면 살아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고 죽어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니 어찌 번거롭히는 것으로 혐의하여 지극히 절박한 말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작년 10월에 상께서 오래 조섭하던 끝에 감기 증세가 갑자기 발생하니 모든 신하들이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신은 약방 제조로서 차비문 안에 있었는데, 정원이 삼공을 명소한 전교를 전하고 이어 밀부(密符)를 내리기에 신이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과 함께 부절(符節)을 맞춰본 뒤에 차비문 밖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정원이 전언(傳言)하기를 빈청에 물러가 기다리라고 하기에 신이 좌상, 우상과 함께 빈청으로 나아가니 원임 대신은 이미 없었습니다. 신들이 전섭(傳攝)한다는 전교를 받고 삼가 생각건대 창황한 이때에 특별히 이러한 명령이 있으니 종사를 위한 대계(大計)로서 근본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다 여겼습니다. 신들이 성지(聖旨)를 순종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다만 상께서 몸소 만기(萬機)를 다스리지 못한 것은 겨우 하루 이틀뿐입니다. 우연한 감기 증세는 자연 약을 쓰지 않고도 회복되어 하루 이틀이면 거의 나을 것입니다. 여러 신하의 큰 소망이 오직 여기에 있는데 내지(內旨)가 갑작스레 이때에 내렸습니다. 회계(回啓) 중에 이른바 금일의 전교가 여러 사람의 뜻밖에 나왔다고 한 것은 실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더구나 왕세자가 이러한 명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하던 중에 더욱 민망스러워 식사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모든 신하와 백성이 누가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신들이 준수하지 못한 것은 곡절이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의 말에 원임 대신을 쫓아내어 참관하지 못하게 하고 여러 번 방계(防啓)를 올렸으며 유독 시임 대신과 함께 하였다고 하는데, 신들이 빈청에 미처 이르지 않았을 때 원임 대신은 이미 나갔으니 이른바 쫓아냈다고 한 것은 신이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께서 이미 삼공을 명소하였고 신들도 또 삼공을 명소한 부절을 맞춰 보았습니다. 그때 회계(回啓)하는 일은 마땅히 시임 대신이 해야 하므로 신들이 상의하여 회계하였고, 그 비망기와 회계한 초고(草稿)는 즉시 사인(舍人) 오백령(吳百齡)으로 하여금 원임 대신이 모여 있는 곳에 가지고 가서 보이게 하였습니다. 원임 대신이 한때에 참관하지 못한 것은 형편이 그러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대간이 듣지 못하게 하고 정원과 사관이 성지(聖旨)를 비밀로 하여 오래 전출(傳出)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평상시 비망기로 삼공에 내리면 회계한 후에 비망기와 회계한 초고를 주서(注書)가 으레 가지고 갔으니, 그 후에 대간이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는 대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왕세자의 총명과 효성은 천성(天性)에서 나왔고 춘궁(春宮)에서 덕을 기른 지 17년이나 되었으니 신민이 모두 추대하는 바이고 종사를 부탁할 바입니다. 본래 세자로 결정되어 국가의 근본이 이미 견고한데 인홍이 감히 전선(傳禪)의 일을 핑계삼아 은밀히 화(禍)를 전가시키려는 계책을 도모하고 참혹한 말을 지어내기에 극성을 부리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이간질이 이와 같다고 하였고, 시기가 날로 극심하다고 하였고, 음모와 비밀 계책이라고 하였고, 위태로움을 꾀하는 계책이 이미 탄로되었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의 흉악함과 기만은 차마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 들을 수 없는 바입니다. 인홍이 이 말을 한 것은 지적한 것이 무슨 뜻이며 모함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성명(聖明)은 위에 있고 원량(元良)은 아래에 있으면서 사랑하고 효도하니 양궁(兩宮)의 흡족한 즐거움은 비록 왕계(王季)와 문왕(文王)의 부자(父子)라도 더할 수 없습니다. 인홍이 감히 터무니없는 망극한 말로 다만 신을 모함하려고 하며 궁극한 흉악에 스스로 빠지는 것은 알지 못하였으니 그 계책은 참혹하고 그 마음은 망녕됩니다. 사미원(史彌遠)은 송(宋)나라의 적신(賊臣)인데 인홍이 신에게 비유하였으니 모함한 정상이 극심하다 하겠고, 심지어 제왕(濟王)의 일을 들어 비교하지 못할 곳에 비교하였으니 그 마음 둔 바를 더욱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신은 외람되게 못난 자로서 지나치게 천은(天恩)을 입어 정승 지위에 있은 지 지금 이미 7년이 되었습니다. 오래도록 현로(賢路)를 방해하고 죄가 산처럼 쌓여 전후 비방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오직 반성만을 생각하고 일찍이 스스로 진술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모함당한 것은 화(禍)가 일신에 미칠 뿐만 아니라 실로 종사(宗社)에 관계된 것입니다. 이 상소가 있은 후부터 심골(心骨)이 함께 놀라고 간담(肝膽)이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석고 대죄한 지 이미 며칠이 지났는데도 형벌을 주지 않으니, 신하로서 이러한 악명(惡名)을 지고 하루라도 씻지 못하면 이는 하루의 역신(逆臣)이 되는 것이니 성명(聖明)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신을 형관에게 내려 실상을 조사해서 신의 죄를 바로잡고 사람들의 말에 보답하소서. 몹시 원통하고 떨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극히 흉악하나 다만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심병(心病)이 있어 똑바로 보지 못하고 슬쩍 보아 넘겼을 뿐이다. 그 중에 나에게 관계된 말이 있었으나 또한 말한 까닭을 모르겠으니 더욱 음흉하다. 인홍이 이유없이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영상을 모함하였으니, 여러 소인 중에 영상을 모함하려는 자가 유언 비어를 조작하여 남쪽 지방에 전파시킨 것을 인홍이 주워 모아 이 상소를 한 것인가. 그 말을 비록 따질 만한 것이 못되지만 무사(無事)한 중에 일을 만들어 내어 지친간에 부득불 이로 인하여 의심하고 틈이 생겨 조정이 혹 조용하지 못하면 큰 불행이다. 스스로 반성하여 떳떳하면 비록 천만 명이 떠들더라도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또 전교한 일은 원래 다만 삼공에게 전하게 한 것이고 범연히 대신에게 전한 것이 아니다. 저 떠드는 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경은 안심하고 출사하고 개의하지 말라."하였다.

충청도 유생(儒生)인 진사(進士) 이정원(李挺元) 등이 상소하였다."삼가 생각건대 적신(賊臣) 류영경은 음흉하고 교활한 자질로 끝없이 극악한 죄를 졌으면서도 정승 지위를 점거하고 천지간에 살아 있어 귀신과 사람들 모두가 분노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전 참판 정인홍이 의리로 목숨을 거고 멀리서 정론을 올렸으니 온 나라가 서로 경하하며 현륙(顯戮)을 기다렸는데, 이미 여러 날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성지(聖旨)가 없으니 여러 사람들의 울분이 하늘에 닿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2백 년 종사가 끝내 이 역신의 손에 무너져야 합니까. 신들이 보건대 흉악한 자들이 오래도록 실권을 장악하여 뿌리가 견고하고 기세를 마구 부려 세상을 속박하니, 조야(朝野)가 겁을 먹고 그들에게 피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음 속으로는 그들의 잘못을 알지만 입으로는 말하지 못합니다. 원로 대신들은 그가 호척(呼斥)하는 대로 따르고 대각(臺閣)과 근시(近侍)는 그가 턱으로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여 국가의 위태로운 형세는 마치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누가 그들의 칼날에 맞서서 전하를 위하여 한 번 입을 열려고 하겠습니까. 인홍이 이미 말한 뒤에 흉당(兇黨)은 더욱 방자하여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고 언관(言官)으로 있는 자도 또한 대죄(待罪)하지 않으니 임금을 업신여기고 방자한 태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현저합니다. 서리 밟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굳은 얼음이 이르게 되는 것이니 앞날의 화(禍)는 아마도 차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초야(草野)에 있으며 성상의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교활한 자가 국가를 멋대로 하고 임금을 속이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아직까지 한 마디도 진동(陳東)처럼 아뢰지 못했으니 신들이 전하를 저버린 것도 매우 많습니다. 진심이 있으므로 울분이 격동하여 맹세코 이 역신과 함께 살지 않으려고 궁궐에 나와 호소하며 임금의 위엄을 범합니다. 전하께서는 빨리 류영경의 죄를 바로잡아 신민(臣民)의 울분을 상쾌하게 하소서. 신들은 몹시 절실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홍문관 전한 김대래(金大來)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양사(兩司)가 아울러 인혐하여 물러갔습니다.【위에 보인다.】 왕세자가 춘궁에 든 지 지금 17년이 되어 천의(天意)도 이미 결정되고 인심도 이미 귀속되었으니, 진실로 본시 악하고 무례한 자가 아니면 누가 감히 그 사이에 다른 뜻을 두겠습니까. 국가가 불행하여 사림의 분열과 인심의 불측함이 이미 극도에 다달아 못하는 바가 없이 터무니 없는 일로 모함합니다. 유언 비어를 만들어 온 나라에 전파시킨 것이 일조 일석의 일이 아닙니다. 정인홍의 상소가 이때에 갑자기 나와 심지어 류영경이 세자를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했다는 것으로 죄를 삼았고 허다한 말이 지극히 흉악하니 신하로서 차마 듣지도 차마 말하지도 못할 바입니다.

아, 성상의 자애도 지극하고 세자의 효성도 지극하여 양궁(兩宮) 사이에 화기(和氣)가 넘치니 온 나라 신민이 누가 억만 년 끝없는 경사라고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류영경이 진실로 그런 죄가 있다면 이는 종사의 적(賊)이니 사람마다 그를 죽일 수 있으나 만약 이런 죄가 없다면 반드시 간사한 자가 이 근거없는 말을 조작하여 초야에 있는 사람의 손을 빌어 흉악한 계책을 남몰래 성사시키려는 데서 나온 것이니 그 계책이 또한 교묘하지 않습니까. 류영경의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말 할 것도 못되는데 심지어는 양궁(兩宮)의 말을 들추어 우리 성상의 골육(骨肉)을 이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아, 송(宋)나라 사람이 이른바 '희령(熙寧)과 원풍(元豊)의 구신(舊臣)들은 간사하고 교활한 소인이 많아 후일 부자(父子)의 의리로 위를 이간시킬 자가 있을 것이다.㰡 한 것과 불행히도 근사하니, 어찌 몹시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지금 이 상소는 류영경 한 사람을 모함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일망타진하여 국가에 어진 사람을 하나도 없게 만든 뒤에야 그만두려 하는 것입니다. 대간이 아울러 비난을 당한 것이 실로 당연한 바니 어찌 근거없는 말로써 경솔히 언관을 체직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질병이 생기는 것은 사람이 면하기 어려운 바이니 함께 피혐하지 못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또 그 당시 형의 상(喪)을 당하여 애통한 중에 있어 미처 지어 올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형편입니다. 다만 까닭없이 짓지 않은 데 대해서는 이미 추고(推考)한 준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간이 응당 추고할 잘못이 있으면 형편상 재직하기 어렵습니다. 헌납 성시헌, 정언 구혜, 장령 이경기․남복규, 지평 송석조, 황근중은 모두 출사하라 명하시고, 사간 이필영은 체차하소서. 재가를 바랍니다."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원전】 25 집 385, 386 면

 

선조41/01/22(경술)

좌의정 허욱과 우의정 한응인이 아뢰기를, “지난해 10월 11일에 신들이 원임 대신과 함께 빈청에 있다가 삼가 삼공을 명소한 전교를 듣고 밀부(密符)를 맞춰본 뒤에 즉시 차비문 밖으로 나갔더니, 영의정 류영경이 시약청에서 나와 모여 앉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또 빈청으로 가서 모이라는 전교를 내렸으므로 신들이 류영경과 빈청에 나아갔더니 원임 대신은 이미 나가버렸습니다. 전섭(傳攝)한다는 전교를 받고 이어 내전(內殿)의 언서(諺書)를 받고는 신들은 놀라 몸둘 바를 모르고 정신이 달아났습니다. 회계(回啓)할 때에 상의하며 조어(措語)하여 다만 신하의 지극한 심정을 진달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일호(一豪)라도 그 사이에 다른 생각을 두었겠습니까.

지금 전 참판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신들의 계사(啓辭) 중에서 한 토막의 글을 끄집어내어 허다한 말을 만들고, 심지어는 류영경이 세자를 동요시키고 신들은 아첨하며 따랐다고 하였으며 또 우익(羽翼)이 됐다고 지목하였습니다. 류영경이 이미 이로써 죄명(罪名)을 받았으니, 그 우익이 된 자는 그 죄가 동일합니다. 어찌 류영경에게 죄를 모두 돌리고 구차스럽게 정승 지위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빨리 신들을 파직시키라 명하소서. 조섭(調攝)하시는 이때를 당하여 번거롭게 아뢰는 것이 미안한 줄은 잘 알지만 이미 남에게 비방을 받았으니 성상께 스스로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몹시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하니,

답하기를,"인홍의 말은 마치 실성한 사람이 한 것과 같으니 극히 마음이 아프다. 영상을 모함했을 뿐 만 아니라 일시의 대간과 시종을 모두 당파라 지목하여 일체 죄망(罪網)에 얽어 넣었으니 이는 일망 타진하려는 계책이다. 그 마음의 악독함이 이와 같으니 경들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하였다.

장령 남복규(南復圭)가 아뢰기를, "전 참판 정인홍이 영의정 류영경을 극악한 말로 극력 비방하고 심지어는 대간이 그의 조아(爪牙)가 되었다고 배척하였습니다. 못난 신도 언관으로 있는데 마침 흉통을 앓아 동료들과 함께 일시에 피혐하지 못했으니 신의 잘못이 더욱 큽니다. 뻔뻔스레 그대로 재직할 수 없으니 신을 파직시키라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25 집 386, 387 면

 

선조41/01/23(신해)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이토록 국가가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실정 밖의 말을 들었으니 반드시 마음에 불안할 것이다. 내가 몹시 가슴 아프게 여긴다. 미안하게 여기지 말고 안심하고 출사할 일로 사(師)에게 찾아가 유시하라."하니, 설서(說書) 김성발(金聲發)이 하령한 뜻으로 사(師)에게 찾아가 유시하자, 사(師) 류영경이 달(達)하기를,"하령한 뜻이 지극히 간곡하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망극한 모함을 당하여 원통함이 뼈에 사무치므로 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원전】 25 집 387 면

 

선조41/01/24(임자)

지평 송석조(宋碩祚)가 아뢰기를,"신이 삼가 이정원 등의 상소를 보니, 대간이 류영경의 지시를 받았다 하고 또 언관의 직책에 있는 자도 대죄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간의 반열에 있으면서 남의 추한 비방을 받았으니 뻔뻔스레 재직할 수 없습니다. 어제 마땅히 동료들과 함께 일시에 사피했어야 하는데, 마침 감기가 들어 병이 돌발하였습니다. 또 신의 아비 송응순(宋應洵)이 옥당의 장관으로 있고 신도 사헌부의 직책에 있으니, 부자(父子)가 함께 삼사(三司)에 있는 것은 마음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대간이 처치할 때에 이르러서도 또한 참여하지 못하므로 사체가 구차하고 방해되는 일이 많이 있어 더욱 몹시 미안합니다. 사유를 갖추어 사피하려고 이미 사단(辭單)을 정원에 올렸으니, 사단을 올렸으면 행공(行公)하기 어려운 형편으므로 명을 받고도 출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원에서 대사헌 박승종(朴承宗)의 사단이 또한 들어왔다 하여 신의 사단을 돌려주니 진퇴 양난이었습니다. 지금 비로소 와서 사피하니 태만한 신의 잘못도 매우 큽니다. 결코 그대로 재직할 수 없으니 신의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영의정 류영경이 상소하기를,"삼가 신이 흉금을 털어놓고 상소한 것은 명백히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려 기꺼이 형벌을 받으려고 한 것인데, 성상의 은혜가 하늘 같아 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따스한 뜻으로 위로하고 심지어 안심하고 출사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신은 더욱 황공하고 민망하여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신이 무고를 당한 것은 어떠한 죄악입니까.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바이고 신인(神人)이 모두 죽이려고 하는 바입니다. 분변하기 전에는 역신(逆臣)이니 결코 시간을 지연시켜 구차히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번거롭힘을 피하지 않고 두 번이나 호소하는 이유입니다.

당초 전섭(傳攝)한다는 명이 내려지자 여러 신하의 심정도 모두 몹시 민망스럽다 하였고 왕세자도 이 명을 듣고 한없이 당황하였습니다. 신이 좌우와 함께 상의하여 회계(回啓)하였으니 이는 실로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에 그만둘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계사(啓辭) 중의 말을 전용하여 이토록 교묘하게 끄집어내어 죄를 삼으니, 설령 그때 원임 대신이 꼭같이 참관하였다면 말없이 봉행하기를 정인홍이 말한 것처럼 하였겠습니까. 인홍도 사람입니다. 만약 이때의 곡절을 알았다면 비록 남의 사주를 받았다라도 그의 모함이 어찌 이토록 심하였겠습니까. 신의 나이 60에 임박하여 백발이 종종 있고 지위가 정승에 올랐으니 분수에 만족합니다. 구구하게 비는 바는 오직 국가의 안녕과 조정의 화합에 있는데, 인심은 흉악하고 세도(世道)는 점점 험난하니 신과 같은 자는 비록 세상에 있더라도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 번 물러갈 것을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했고 성은(聖恩)을 탐하여 지금까지 머뭇거려 이러한 악명(惡名)을 받았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아, 예로부터 소인에게 모함당한 신하가 어찌 적겠습니까마는 지금 신이 모함당한 일은 더욱 원통합니다.

이정원의 상소로 말하면 신을 적신(賊臣)이라고 배척하였으니 이는 신을 해치려는 간사한 자가 그의 정상이 성명께 모두 드러날까 염려하여 백방으로 모의하고 간교한 짓을 부려 반드시 그 계책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신을 사구(司寇)에게 맡겨 낱낱이 조사한 뒤에 형벌에 처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은 천지의 부모이시니 신이 모함에 빠진 것을 가엾이 여기고 신이 변명하는데 급급한 것을 살피시어 빨리 명백히 조사하라는 명을 내려 신의 죄를 바로잡고 사람들의 말에 보답하소서. 신은 몹시 원통하고 두려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경(卿)이 모함당한 실정과 인홍의 상소에 흉모(兇謀)가 들어있는 정상은 하늘의 해도 환히 아는 바이고 일국의 상하도 모두 아는 바이다. 어찌 간사한 자의 술책을 따져 변핵(辨탢)을 거행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의심스러워야 조사하는 것인데, 이미 자취가 없으니 이는 바로 모함이다. 또 무엇을 조사하겠는가. 통탄할 만한 것은 간사한 자의 흉악한 계책이 이르지 않은 바가 없어 임금까지 관련시켜 말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무군 반역(無君叛逆)의 무리이다. 조만간 반드시 탄로날 것이니 하늘이 어찌 이토록 간사한 자를 용납하겠는가. 마땅히 전지(前旨)를 따라 개의치 말고 안심하고 출사하라."하였다.【원전】 25 집 387, 388 면

 

선조41/01/25(계축)

정언 조명욱(曺明욱)이 아뢰기를,"신진(新進) 소신은 본래 학식이 없으니 언관의 중책은 이미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전 참판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영의정 류영경은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했다고 하여 극악한 이름을 붙이고 정원은 그의 사당(私黨)이라고 하여 심각하게 논했습니다. 하나는 '사적으로 성지(聖旨)를 숨겼다.'하고, 하나는 '영경의 심복(心腹)이다.'하였으며, 하나는 '왕사(王事)인 줄은 알지 못한다.'하고, 하나는 '정원은 후설(喉舌)로 삼아야 하는데 정원이 이와 같아 전하께서는 위에서 고립되었다.'고 하여 죄명을 열거한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의 모함과 흉악한 말은 실로 따질 만한 것이 못되지만, 신의 아비 조탁(曺倬)은 바로 그때 승지였습니다. 아버지가 비방을 당하였는데 자식이 언관의 직책에 있는 것은 사리(事理)로 헤아려 보건대 몹시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준례에 따라 사직서를 올리는 것은 회피하는 자취가 있는 것 같아 은명(恩命)에 사은하였지만 반복해서 생각해보니 결코 그대로 재직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시키라 명하소서."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요즘 이 일로 내가 미령한 가운데 분분하게 상소하여 조섭도 하지 못하겠다. 흉악한 일을 다시는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옳다."하였다.홍문관 부제학 송응순(宋應洵), 전한 김대래(金大來), 수찬 신광립(申光立) 등이 상차하기를,"삼가 신들이 전 참판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영의정 류영경이 세자를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고 죄안(罪案)을 만들어 진신(搢紳)을 모함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까지 관련시켰고 허다한 말이 지극히 흉악하여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바입니다. 신들이 상소를 본 뒤로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니, 인홍이 과연 길에서 듣고 이 말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남의 사주를 받고 이런 모의를 한 것입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인홍이 마음먹은 바를 신들이 비록 알지는 못하지만 상소 중의 말을 추리고 신들이 직접 본 것을 참작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작년 10월 9일 성상의 감기 증세가 오래도록 조섭한 끝에 갑자기 발생하자, 대소 신하들이 당황하여 모두 넋을 잃고 궁궐에 나아가 있어서 다시 조정의 체통이 없었습니다. 이틀 후 11일에 삼공을 명소한 전교가 있었고 이어 밀부(密符)를 내렸습니다. 그때 영의정 류영경은 약방 제조로서 차비문 안에 있었고 좌의정 허욱과 우의정 한응인은 여러 대신들과 빈청에 모여 있다가 소명을 받고 밀부를 맞춰본 뒤에 삼공이 모두 차비문 밖에 모였습니다. 정원이 또 삼공은 빈청에 가서 모이라는 전교를 전하였습니다. 삼공이 미처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 때에 녹사(錄事) 한 사람이 먼저 가서 삼공이 내려온다고 고하자, 원임 대신 중에 혹은 서편의 벽 뒤로 피해 들어가려는 자도 있고 혹은 비변사로 피해 나가자고 말하는 자도 있더니, 즉시 비변사로 나가버려서 삼공이 빈청에 도착하였으나 원임 대신이 모두 있지 않았습니다. 전섭(傳攝)한다는 명령이 그 뒤에 내려졌는데, 저 상소 중에 이른바 모두 물리쳐서 참관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 것은 과연 무슨 말입니까. 당시 명소한 자는 다만 시임 대신이고 전섭한다는 명도 시임 대신에게 내렸으니, 회계할 때에 시임 대신과 상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저 상소 중에 이른바 시임 대신들만이 상의했다고 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는 신들이 당시 궁궐에 있으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 그러하였습니다. 심지어 상소 중에 여러 번 방계(防啓)를 올렸다고 말하였으니, 신들은 더욱 통분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성후가 미령하여 오래도록 조섭 중인데도 모든 업무가 혹시라도 결여될까 염려하시고 종사의 대계에 더욱 힘써 이렇게 전섭의 하교가 있었으니, 이는 비록 성상께서 근본을 공고히 하고 위태로움을 진정시키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하의 지극한 심정으로 헤아려 보면 어찌 안심하고 순종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므로 명령을 내렸을 때에 대소 신료들이 당황하고 민망스럽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왕세자도 강원(講院)에 하령하기를 '망극하고 미안한 전교를 또 오늘 내렸으니 민망스러운 내 심정 어찌 한이 있겠는가. 원컨대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의를 다하여 모든 동료들과 함께 협동해서 호소하여 반드시 성상의 뜻을 돌이키도록 하라는 뜻으로 사부에게 찾아가 유시하라.' 하였고, 다음날 또 하령하여 다시 사부로 하여금 기어이 성상의 뜻을 돌이키고야 말게 하였습니다. 이는 신들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신 광립(光立)도 궁관(宮官)으로 있었기에 이로 인해 사부에게 왕래하였고 하령한 일도 《강원일기(講院日記)》에 기록되어 있으니, 세자가 전섭(傳攝)을 굳게 사양한 것이 지극한 정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써 보면 대신들의 방계도 또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회계 중에 이른바 여러 사람의 뜻밖에 나왔다는 것은 세자의 뜻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정인홍이 이를 트집잡아 구실로 삼았으니 또한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저 상소 중에 또 정원과 사관(史官)이 성지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나 이 사이의 곡절은 정원의 계(啓)와 사관의 상소에 이미 다 말하였습니다. 이를 어찌 류영경이 아는 바이겠습니까. 현재 성상이 위에 있고 세자가 아래에 있으면서 자애와 성효가 지극합니다. 양궁(兩宮) 사이가 화기 애애하고 더구나 우리 왕세자는 춘궁(春宮)에 오른지 17년이 되어 인심이 이미 귀속되고 천의(天意)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책명(冊命)은 내리지 않았으나 황제의 칙서가 여러 번 내린 것은 중조(中朝)가 다 아는 바이고 종사가 의탁한 바입니다. 누가 감히 그 사이에 다른 뜻을 두겠습니까. 지금 인홍의 상소는 류영경을 모함하기 위한 것이지만 임금을 동요시키고 양궁(兩宮)을 이간시킨 죄에 스스로 빠진 것은 알지 못하였으니, 그 계책은 교묘하지만 실은 망령된 것입니다. 아, 성상의 자애가 이미 이와 같고 세자의 성효가 또 이와 같으니, 비록 인홍과 같은 자 백 명이 교란시킨다 하더라도 어찌 이로 인해 의심하여 틈이 생길 리가 있겠습니까.

대저 인홍이 멀리 천리 밖에 있는데 어찌 다만 길에서 듣고 이렇듯 형상이 없는 불측한 말을 하였겠습니까. 그 사이에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류영경이 7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남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제재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울분을 안고 있는 자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으니, 시기를 틈타 일망 타진시키려고 한 것이 일조 일석의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재령(載寧)의 옥사(獄事)로, 중간에는 성벽(聖璧)의 방(榜)으로, 끝에는 약방(藥房)의 일로 모함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그의 간교한 계책을 이루지 못하자, 지금 계사(啓辭) 중의 한 토막을 끄집어 내어 사실 무근한 말을 만들어서 중외에 전파하고 먼저 인홍의 손을 빌려 남모르게 흉악한 계책을 시도하였고, 또 이정원(李挺元)의 무리를 사주하여 마치 초야(草野)의 공론처럼 만들고 자웅(雌雄)이 화답하듯 서로 표리가 되어 위로는 성상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인심을 동요시켜 반드시 불측한 죄로 모함한 뒤에야 말려고 하였으니, 만일 이 무리들이 그 계책을 이루었다면 그 화가 어찌 국가를 텅 비게 하는데 그쳤을 뿐이겠습니까.

다행히도 성명께서 간사한 정상을 통촉하시기를, 하나는 '여러 소인 중에 류영경을 모함하려는 자가 유언 비어를 만들어 남쪽 지방에 전파했다.' 하였고, 하나는 '영상을 모함할 뿐만 아니라 일시의 대간과 시종을 모두 죄에 빠뜨리려고 했다.' 하였으며, 하나는 '간사한 자의 흉악한 계책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 임금까지 관련시켜 말하였으니 이는 실로 무군 반역(無君叛逆)의 무리이다.' 하였고, 이정원의 상소에 답하는 데 이르러서는 '남의 흉악한 사주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일국 신민들만의 복이겠습니까. 실로 종사 만세의 무궁한 경사입니다. 간흉들의 간담이 이미 어둡고 어두운 곳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다만 성상의 하교에 또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는 밥을 먹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몹시 미워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상께서 현재 조섭 중에 있으면서 갑자기 이러한 하교가 있으시니, 신들은 더욱 염려되고 민망스러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아, 세자를 동요시키는 것은 천하의 극악(極惡)이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천하의 대죄(大罪)인데, 인홍이 이로써 무고(誣告)하였으니 실로 형벌을 면하기 어려우나 이는 다만 남의 사주를 받아 그의 지시를 따른 것뿐입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 비어를 태공(太公)과 소공(召公)도 알지 못했으나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하여 죄인을 잡았으니, 금일의 죄인 잡는 것이 또한 어찌 요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이 염려하는 것은 인홍과 정원(挺元) 등의 계책이 이미 천일(天日)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앞으로 다시 어떠한 간모와 흉계가 천만 뜻밖에 나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북쪽의 오랑캐가 날뛰어 봄철의 방비가 몹시 시급하니 성상이 염려해야 할 바이고, 조정이 빈틈없이 준비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므로 과거(科擧)를 실시하는 것도 이를 위한 것입니다. 사방의 과거 응시자가 서울에 운집하였는데, 흉악한 상소가 들어온 후로 위로는 재상부터 아래로는 대간까지 자기 직책에 불안하여 기상이 비참하고, 과거보는 날짜를 두 번이나 물려 많은 선비들이 기다리며 원망하는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은 토붕 와해의 형세가 조석간에 이를까 염려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종사의 소중함을 생각하시고 더욱 호오의 분별을 명백히 하여 간사한 자를 통쾌히 근절하여 조정을 편안히 하고 빨리 과거를 실시하여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그러면 국가가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재가를 바랍니다."하니,

답하기를,"세자는 명위(名位)가 이미 결정되었고 천명(天命)과 인심이 이미 귀속되었으며 우리 부자(父子)의 지정(至情)은 틈이 없는데, 하루아침에 간사한 소인이 이처럼 동요시키고 이간시키니, 내가 이로 인하여 몹시 마음이 아프다. 하늘이 보살펴 흉악한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조정을 몹시 혼란시켰으니 그 계책이 참혹하다. 차사(箚辭)는 마땅히 다시 깊이 생각하겠다."하였다.【원전】 25 집 389 면

 

선조41/01/25(계축)

성영(成泳)을 겸 지춘추관사로, 이정구(李廷龜)를 겸 동지춘추관사로 삼았다.【본래 악독한 정철(鄭澈)을 추앙하고 또한 지위를 잃을까 염려하여 류영경에게 아첨하며 따랐다. 윤승훈(尹承勳)이 늘 말하기를 '정인홍이 상소한 뒤 류영경의 두 번째 차자는 정구의 손에서 나왔다.'고 하였다.】【원전】 25 집 390 면

 

선조41/01/26(갑인)

정언 구혜가 내계하기를,"신들이 삼가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그 뜻은 대개 류영경을 모함하려고 하는 것인데 임금을 동요시키고 지친(至親)을 이간시킨 정상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예로부터 소인이 집정자를 모함하고 자기의 사사로운 일을 성취시키고자 한 자가 한없이 많지만 이처럼 지극히 흉악하고 교활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저 인홍은 남의 사주를 들어 시행한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는 실로 몹시 간사한 자가 흉계를 품고 유언 비어를 날조하여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의 손을 빌어 남몰래 흉악한 계책을 성취시키려고 한 것이니 몹시 애통한 일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작년 초겨울 성후가 미령하여 전섭(傳攝)한다는 명을 내릴 때, 약방(藥房)이 약을 잘못 썼다는 말과 전섭(傳攝)을 방계(防啓)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이 모두 이산해(李山海)의 집에서 나왔으며, 이경전(李慶全), 이이첨(李爾瞻)의 무리가 낮에는 흩어지고 밤에는 모여 백방으로 모함을 꾀한 것은 입이 있는 자는 모두가 말하고 귀가 있는 자는 모두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류경종(柳慶宗)에게서 약을 잘못 썼다는 논란이 갑자기 이때에 나왔으니, 경종은 바로 그들의 붕당(朋黨)입니다. 일국의 공론이 모두 이경전과 이이첨의 흉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으므로 그때 대간의 계사(啓辭) 중에 이른바 뜻을 잃은 무리라고 한 것은 이를 지적하여 말한 것인데, 군자가 소인을 다스릴 때에는 항시 너무 후하여 우선 그대로 두고 논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음흉한 무리들이 흉악함을 반성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계책을 성취시키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또 근거가 없고 불측한 말로 남몰래 인홍에게 사주하였으니, 인홍은 바로 산해(山海)의 심복입니다. 한 번 그 말을 듣고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일을 도맡아 터무니 없는 거짓을 꾸미는 데 온갖 힘을 다했고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하는데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영경 한 사람을 모함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로서 차마 말하지도 듣지도 못할 일로 동요시키고 이간시키는 데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이정원(李挺元)의 상소에 연명한 사람으로 말하면 대부분 그 무리들의 친속(親屬)이니, 이 상소가 그들 무리에게서 나온 것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어찌 사림(士林)에게만 화를 전가시킬 뿐이겠습니까. 종사(宗社)에까지 화가 미칠 것이니, 이를 생각하면 심장이 다 찢어지는 듯합니다.

아, 우리 세자는 천성이 효성스럽고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으며, 위로는 천자에게 아뢰어 천자가 알고 아래로는 팔방(八方)에 고하여 팔방이 추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온 중국 장수들이 몸소 뵙지 않은 자가 없으니 이는 천하가 본 것이고, 무군(撫軍)의 명을 받고 재조(再造)를 도왔으니 공로가 종사에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결정하고 천자께서 알며 천하가 보고 종사가 의탁하였으니, 위태로운 시기에 선위(禪位)한다는 전교를 내려 근본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계획은 전하의 원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사부에게 간절히 유시하여 전교를 내릴 때 지성으로 임금의 뜻을 돌이키도록 한 것은 세자의 효성스러운 심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전교와 세자의 말은 비록 문왕(文王)의 지극한 사랑과 지극한 효도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설령 인홍의 무리들이 곁에 있었다 한들 아무 말없이 전교를 받들기만 하고 방계(防啓)하지는 않았겠습니까. 아니면 운운한 것처럼 순종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심사를 추구해 보건대 만약 다른 일로 류영경을 모함하면 해치지 못하고 반드시 부자간(父子間)의 일로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킨 뒤라야 이에 제거할 수 있다 여겨 마침내 근거없는 말로 불측한 화를 구성하여 시배(時輩)를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으니, 만약 전하와 같은 아버지, 세자와 같은 아들이 아니었다면 양궁(兩宮)이 틈이 생기지 않았겠으며 사류가 어육(魚肉)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임금이 신하에 대하여 간사한 자 모르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면서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간흉들이 더욱 꺼리는 바가 없어 장차 계속하여 일어나 반드시 국가를 전복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양궁을 이간시키고 사림에게 화를 전가시킨 그들의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참판 정인홍, 전 사인(舍人) 이경전(李慶全), 전 정랑 이이첨을 아울러 우선 멀리 귀양을 보내어 국시(國是)를 정하고 인심을 진정시키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경상도 유생(儒生) 생원 하성(河惺)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생각건대 적신(賊臣) 류영경이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파당을 심어 임금을 저버리고 국가를 그르친 죄는 천지에 용납하지 못할 바이고 신인(神人)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외람되게 정승 지위에 있은 지 지금 벌써 7년으로 세력이 막강하여 위복(威福)이 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감히 '누구가 어떻다.'는 말을 못하니, 위급한 화(禍)가 조석에 박두하였습니다. 신들이 천리나 되는 곳에서 와서 시사(時事)를 목격하고 마음을 다한 상소를 올리며 간사한 자의 처벌을 기대하니 삼가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지난날 류영경이 한 일은 조보에 실려 있고 여러 사람의 입에 전파되었으니 이목(耳目)이 있는 자 누가 보고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설령 그가 한 짓이 과연 광명 정대하다면 사람들이 자연 말이 없을 것이니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여론이 통분하고 정론이 이미 나왔으면 류영경은 마땅히 궁궐 아래에 거적을 깔고 천벌(天罰)을 기다려야 하는데, 감히 흉설(兇說)을 과장하고 공론을 변론하며 심지어는 임인년 탑전(榻前)의 말을 발췌하여 감정을 끼고 모함했다 지적하여 성상을 속이고 자기 죄 면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그 임금에게 무례한 짓하는 것을 모면 어찌 감정 품은 것을 기다린 뒤에 말하겠습니까. 그 말은 궁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사(三司)는 공론이 있는 곳인데 서로 비호하여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기고 흉악한 자와 파당을 짓는 데 기탄이 없다는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전 참판 정인홍은 어려서부터 힘써 배우고 산림(山林)에서 도(道)를 지키다가 훌륭하신 임금을 만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천재 일시(千載一時)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홍이 성상께 보답하러는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나이 70이 넘어 조석간에 죽게 되었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염려하는 성심은 죽기를 한하고 더욱 독실하고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바를 말하였으니, 어찌 그 사이에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뜻을 두었겠습니까. 다만 그의 염려가 깊었으므로 생각이 지나쳐 충의(忠義)의 심정을 남김없이 말하였으니, 이는 다만 종사(宗社)의 안위(安危)만을 생각하고 그 말이 임금 범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 바는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그 정상을 용서하지 않고 도리어 흉악함 모함이라고 하교하였으니 신들은 매우 의혹스럽습니다. 상세히 진달하겠습니다.

작년 10월 11일에 전교하신 일은 상께서 비록 삼공(三公)에게만 내렸다고 하셨으나 당초부터 마땅히 비밀로 할 일이 아니라면 앉아 있는 원임 대신을 어찌 몰아 낼 수 있습니까. 지금 원임 대신이 이미 빈청에 있지 않았었다고 해명하나 몰아냈는지의 여부가 사방에 전파되었으며, 좌상과 우상이 대죄(待罪)할 때에 류영경을 두려워하여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했으니, 정원과 사관(史館)이 비밀로 하여 발설하지 않고, 대간이 감히 즉시 배척하지 못한 것이 무엇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류영경이 임금을 속이고 가리운 정상을 전하께서 듣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류영경은 지난번 성상이 미령한 때를 틈타 다만 정부(政府)의 분부(分付)로 백관을 호령하고 감국(監國)의 일을 스스로 담당하였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인홍이 논한 바 권섭(權攝)은 다만 지난번 옥후가 미령하신 잠시 동안을 말한 것이고 전위(傳位)를 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세자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면 비록 천자의 책봉(冊封)이 있지 않았더라도 무군 감국(撫軍監國)하는 것은 바로 분수 안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임진 왜란에 일찍이 모든 업무를 감독하였는데 더구나 시탕(侍湯)한 여가에 하루 이틀 좌우에서 품의 결정하는 것이 무엇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인홍의 뜻은 여기에 그쳤을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지난번 비망기를 한 번 내리자 모든 사람들은 실망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일개의 적신(賊臣)을 무엇 하잘 게 있어 뜻밖에 이러한 전교를 내리셨습니까. 종사는 그 사이에 터럭만큼도 용납할 틈이 없이 위태하니 신들은 한심하게 여깁니다. 인홍의 상소는 본래 전하의 사직을 안정시키려는 것인데 성상께서 불안하게 여기시고, 본래 전하의 조정을 안정시키려는 것인데 대신과 대간이 불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류영경이 동요시킨 것이고, 대신과 대간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류영경이 교란시킨 것입니다. 2백 년 이래로 류영경처럼 교활한 자가 있지 않았으니, 금일 전고에 없었던 변고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홍이 위로는 임금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고 감히 이 상소를 올렸으니 이는 실로 동방(東方)의 독행지사(獨行之士)입니다. 상께서 또한 초목도 그 이름을 안다고 하신 전교가 있었으니, 전하께서 인홍을 대우한 것이 지극하다 할 수 있습니다. 전에 이르기를 㰡임금이 훌륭하면 신하는 정직하다.㰡 하였으니, 인홍이 숨기지 않고 모두 다 말한 것은 또한 성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적신(賊臣)이 감히 '신을 모함하였으나 스스로 몹시 흉악한 곳에 빠졌다.' 하고, 또 '이는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하여 이를 갈고 입술을 떨며 분노를 쌓고 있으니, 반드시 같은 무리를 사주하여 죄로 얽고 무찔러 죽인 뒤에야 말 것입니다. 아, 훌륭한 사람은 천지의 기강(紀綱)인데 흉적의 손에 맡기어 멋대로 하게 두었으니, 국가의 불행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서울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었기에 흉악한 무리들이 횡행 천하하는 작태를 익히 보았습니다. 적가(賊家)의 자질(子姪) 무리가 대중이 모인 가운데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며 '반드시 인홍을 죽인 뒤에야 일이 안정된다.'고 하였으니, 신들은 이로써 불측한 화가 있을 줄을 압니다.

류영경의 죄악을 불가불 모두 열거해야 하겠습니다. 한없이 뇌물을 탐하여 모든 이익을 망라하고 뇌물은 산처럼 쌓여 그의 문전은 마치 시장과 같으며, 풍기(豊基)의 소굴이 계씨(季氏)보다 부자이고 이조와 병조의 임명은 모두 그 손에서 나오며 탐관 오리는 모두 그의 문객(門客)입니다. 백성들의 고혈(膏血)이 모두 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송되는 것은 신들이 함께 영남에 있으면서 귀와 눈으로 보고 들은 것입니다. 한 도(道)가 이와 같으니 다른 도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자제와 사위 조카들은 모두 높고 좋은 벼슬을 차지하고 인척과 친척도 모두 고관의 옷을 입었으며 벼슬 길에 포진되어 있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니, 비록 제멋대로 권세를 부린 두헌(竇憲)과 양기(梁冀)라도 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경고하여 재앙이 거듭 이르러 물은 넘치고 산은 무너지며 풍재(風災)와 한재(旱災)가 있고 요성(妖星)과 흰 무지개가 생기며 겨울에 우뢰가 나고 나무 가지가 얼어붙는 변고가 거의 해마다 일어납니다. 남쪽의 왜적과 북쪽의 오랑캐가 호시 탐탐 틈을 기다리니 백성들이 두러워하여 이삿짐을 지고 서 있는데, 류영경은 일찍이 재앙을 없애고 적을 막는 방법은 꾀하지 않고 다만 공사(工事)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는 것으로 정승 업무의 능사(能事)로 삼고 있으니, 이는 성명께서 잘 아시는 바입니다.

아, 류영경의 죄악이 이토록 극심한데 그들의 뿌리가 견고하고 우익(羽翼)이 기세를 부려 전하로 하여금 위에서 고립되게 하고 국사(國事)는 날로 어쩔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가게 하니, 신들은 가슴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빨리 류영경의 죄를 바로잡아 중외(中外)의 울분을 상쾌하게 하시면 종사도 매우 다행이겠고 조야(朝野)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호서(湖西) 유생(儒生)들의 상소에 답하기를 㰡조정의 대체를 유생이 망녕되이 말하지 말라.㰡고 하셨다 하니, 신들이 성상의 하교를 봉행하여 입을 다물고 물러가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충정(衷情)에 격동하여 말을 재제(裁制)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들의 말이 실정에 지나친다고 여기시면 신들은 차라리 형벌을 받아 망언(妄言)하는 자의 경계가 될 뿐이니, 전하께서는 더욱 살피소서. 신들은 몹시 절박하고 두려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너희 무리가 비록 백 번의 상소를 올리더라도 어찌 이로써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현혹되겠는가. 다만 흉악하고 간사한 심사가 드러날 뿐이니 너희들은 망언하지 말라. 다만 누구의 사주를 받아 이 상소를 하였는가? 하늘의 해가 위에 있으니 솔직하게 지적하여 대답하라."하였다.【원전】25집 390면

 

선조41/01/28(병진)

경사도 유생 진사 정온(鄭蘊)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직도(直道)를 용납하기 어려운 것은 예로부터 모두 그러했으니, 대신(臺臣)들이 정인홍를 귀양 보내자고 청한 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성상이 위에 있으면서 본래부터 은혜로 대우하였는데, 30년 간의 군신(君臣) 사이가 하루아침에 남남이 된 것입니다. 신들이 부득불 오운(五雲)의 아래에 호소하는 것은 다만 인홍의 원통함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전하를 위하여 안타깝게 여기기 때문이니 삼가 전하께서는 신중히 살피소서.

인홍은 본래 강직한 성품으로 일찍이 군자의 풍도(風度)를 들어 미력이나마 국가를 보호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평소 생각이었습니다. 비록 산림(山林)에 있었으나 한결같은 마음은 왕실(王室)에 있었으므로 매번 조정에서 한 번의 정령(政令)이라도 실수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일찍이 걱정하는 기색이 모습에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더구나 세자는 국가의 근본이고 일찍 세운 것은 원대한 계획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데, 류영경이 집정한 7년을 보건대 이정구가 한 번 책봉을 청한 후로는 일찍이 재삼 건의하여 기필코 요청을 이룩할 수 있는 계획을 하지 않고 방치해 두고 망각하고 있으니, 이미 대신이 국가를 위하여 근본을 견고히 하는 도리를 잃었습니다. 인홍이 임금을 아버지 대하듯 사랑하는 충성으로 이미 범진(쮭鎭)의 모발을 희게 하였고 이강(李綱)의 팔뚝에 피를 내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미령하신 때에 권섭(權攝)한다는 명령이 갑작스레 내렸고 순종하자는 뜻이 또 내전(內殿)의 하교에 간절했으니, 대신들은 마땅히 광명 정대하게 처리하고 조치하여 조정의 상하로 하여금 모두가 보고 듣게 하여 성지(聖旨)가 따를 만하면 받들어 주선하고 따를 만하지 못하면 방계(防啓)했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류영경이 사사로운 일로 보아 깊이 감추고 선포하지 않아 원임 대신으로 하여금 듣지 못하게 하였고 대간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여론의 의혹이 더욱 심한 것입니다. 설령 류영경이 비록 일호(一毫)의 사의(邪意)가 없었다 하더라도 숨긴 자취가 이와 같다면 남들이 의심하는 것은 바로 자초(自招)한 것입니다. 대저 사람이 악한 짓을 비록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하더라도 사람들이 들어 알지 못하는 자가 없는데 더구나 조정의 윗자리인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 끝내 숨기고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엄폐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면 그때 대사헌 홍식(洪湜)이 주서 차지(注書次知)를 가두고 내지(內旨)를 숨긴 상황을 힐문하였으며, 류간(柳澗)․송석경(宋錫慶)의 계사 중에도 또한 굳이 비밀로 할 것이 아니데 비밀로 하였다는 말이 있고, 한림(翰林) 하번(下番) 이선행(李善行)이 내지(內旨)가 내린 것을 상번(上番)에게 고하지 않았으므로 김성발(金聲發)이 고하지 않은 까닭을 힐문하였습니다. 원임 대신이 쫓겨난 데 대해서는 원임 대신이 아직까지 있는데 전하께서 어찌하여 그 곡절을 물어 진위를 밝혀내지 않으십니까. 이는 모두 조보(朝報)에 발표되고 전파된 데서 나와 원근(遠近)이 모두 보고 들은 것입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들은 것을 인홍이 듣고 온 나라 사람들이 본 것을 인홍이 본 것이지, 어찌 일찍이 어느 사람이 퍼뜨린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인홍을 등용한 지 오래되었으니 또한 그의 사람됨을 알 것입니다. 인홍의 병통은 마음이 고집스럽고 편벽되어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 데 있으니, 이것이 바로 미워하는 자가 많고 사랑하는 자가 적은 이유입니다. 충의로운 마음이 늙도록 쇠하지 않았으니, 금번의 일은 다만 간사한 자취를 파괴하고 위태로운 형세를 안정시켜 종사(宗社)에 충성하고 국가에 근본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다만 그 상소 중의 말은 몹시 분개한 데서 나와 과격한 곳이 없지는 않습니다. 비록 명주(明主)의 알아줌을 믿었다 하지만 잘 깨우치는 도리에는 실로 어긋났으니, 이로써 죄를 준다면 인홍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마는, 남의 사주를 받고 거짓으로 공론이라 핑계하여 우리 임금 부자(父子)를 이간시키고 우리 임금 조정을 혼란시킨다는 것으로 말하면 천지 귀신이 위에서 굽어보고 곁에서 지켜보니, 만에 하나라도 그럴 리가 없고 만에 하나라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인홍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고 출세를 즐겨 하지 않았으며 성상의 은혜에 감격하여 혹은 출사(出仕)하고 혹은 출사하지 않았으나 일찍이 1년 동안을 조정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이가 73세나 되어 한 발자국 옮기는데 천리를 가는 것처럼 여기고 아침 저녁 지내는데 10년을 지내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며 담박한 취미는 일개 시골 중과 같습니다. 다만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일찍 죽고 고독한 손자는 나이 20도 되지 않았으니, 조정에 무슨 희망이 있어서 남을 모함하려고 하겠습니까. 아, 인홍의 말은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니, 말로써 죄를 얻어 먼 지방으로 귀양가 죽는 것은 실로 그가 마음속으로 달게 여겨 유감 없이 여기는 바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전하께서 보위에 오른 지 40년 동안 절의(節義)의 풍도(風度)를 배양하였는데,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현저하게 일컬을 만한 자는 최영경(崔永慶), 정인홍(鄭仁弘) 두서너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류영경은 이전에 죽고 인홍이 이후에 귀양간다면 후세에 반드시 아무 선비를 죽이고 아무 선비를 귀양보낸 것이 아무 시대에 있었다고 말할 것이니,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어떻게 해명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류영경이 죽은 것은 전하께서 죽인 것이 아니고 모두가 일시의 간흉(姦兇)들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몇 년이 못되어 성상께서 통촉하시어 남김없이 누명을 씻어 주니 사관(史官)은 기록하고 온 나라 사람들은 칭송하였습니다. 전일 류영경의 일을 뉘우친 마음이 금일 인홍의 일을 뉘우치는 단서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돌이켜 생각건대 궁벽한 시골에 비바람치고 길은 험난하니 위급한 목숨이 길 위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면 전하께서 비록 뉘우치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임금을 잊지 못하는 인홍의 충성을 살피시고 결코 다른 뜻이 없었던 인홍을 용서하여 우뢰 같은 위엄을 거두시고 특별히 말감(末減)시키는 법을 따르시면 종사도 다행이고 국가도 다행이겠습니다. 신들이 위태로운 말을 아침에 하면 참혹한 화(禍)가 저녁에 이르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정직한 선비가 원통함을 품고 국사(國事)가 날로 잘못되는 것을 목격하였으니, 차라리 말을 하여 진동(陳東)과 같이 죽음을 당할지언정 차마 말하지 않고 전하를 저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복고 대죄하니 스스로 몸둘 곳이 없습니다. 신들은 몹시 절박하고 두려운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니, 계(啓) 자를 찍지 않고 도로 정원에 내렸다.【원전】 25 집 391 면

 

선조41/01/29(정사)

의정부 영의정 류영경이 아뢰기를,"삼가 생가건대 신은 국가를 섬기는 데 형편이 없고 처세술에 어두워 여러 사람의 비방을 자초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 남에게 모함을 당하여 거의 불측(不測)한 죄에 빠지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성명(聖明)이 위에 있어 빠짐없이 통촉하셔서 전후 성상의 비답은 뜻이 엄명하여 간사한 자들의 정상이 거의 폭로되었고 신의 원통함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신은 마음으로 황송하고 감격스러워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국가가 불행하여 조정의 의논이 갈라진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임진년 간에 신이 이조 판서가 되어, 조정이 분리되고 어그러져 기상이 불미스러움을 목격하고는, 의논이 몹시 어긋나고 일 저지르기를 좋아하는 자가 아니면 힘써 고루 등용시켜 함께 삼가고 협력하는 분위기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정승이 되어서도 또한 일찍이 진정시키고 조화시키는 데 유의하여 오래 폐직(廢職)된 사람까지도 모두 소통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이 조정을 화합시키려는 구구한 뜻은 절실하였지만 역량이 부족하고 마음과 같이 일이 잘 되지 않아 사부(士夫) 사이에 분열이 더욱 심하니 실지(失地)한 사람들은 모두 신에게 원망을 돌려 못할 소리 없이 헐뜯고 모함하여 갈수록 심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인홍이 감히 근거없는 불측한 말을 만들어 신의 죄목을 삼았으나 공론이 이미 발로됨에 따라 흉계가 점차 탄로되니, 하성(河惺)은 인홍과 연혼(連婚)한 자로서 전일의 말을 바꾸고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어 신의 죄를 첨가시켜 기필코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죄가 있고 없는 것은 하늘이 굽어 살피니, 신은 많은 변론을 하지 않겠습니다.

통분스러운 일은 작년 초겨울에 전섭(傳攝)한다는 전교를 위태로운 시기에 특별히 내리자 인심은 이로 인하여 더욱 안정되고 근본은 이로 인하여 더욱 견고해지니 이는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이 하는 바로서 특출한 일입니다. 모든 신민들이 감격스러워 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동궁(東宮)의 효성스러운 마음으로서는 이 명령을 들은 후로 당황하고 민망스러워 몸둘 곳이 없는 것처럼 여기고, 신들로 하여금 성심으로 호소하여 반드시 성상의 뜻을 돌이키도록 하였습니다. 신들이 성지(聖旨)를 준수하지 못한 것도 또한 왕세자의 지극한 뜻에 연유한 것이고 천리와 인정으로 헤아려 보건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홍은 감히 신하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일로 말을 꾸며 신을 해치려는 계획을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모두 조정을 모함하려는 자의 소행이고 인홍은 다만 그의 사용물(私用物)이 되었을 뿐이니 어찌 엄히 꾸짖을 것이 있겠습니까. 고요히 조섭하는 이때를 당하여 신이 이 한가지 일로 재삼 번거롭게 아뢰니 지극히 미안한 줄을 알지만 악명(惡名)이 몸에 있어 스스로 누명 씻기에 급급하여 말이 중복되어도 중지할 줄 모르니 신의 사정이 딱합니다.

대저 신이 성명을 만나 은혜가 융성하자 연연하고 머뭇거려 7년 동안을 물러가지 않았으니 현로(賢路)에 방해될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조물자(造物者)의 시기(猜忌)가 없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모함을 당한 나머지 심신이 상해서 어리석은 듯 미친 듯하여 인사 불성인데, 열흘 이래로 차츰 심해지니 결코 봉직할 도리가 없습니다. 정부(政府)의 중한 지위와 내국(內局)의 겸직(兼職)을 이미 오래도록 비워두었으니, 더욱 황공하고 민망합니다."하니,

답하기를,"비록 옛날의 대현(大賢)이라도 또한 소인의 비방을 면치 못한 이가 있으니, 경은 안심하고 이를 개의하여 사퇴 할 생각을 하지 말라. 내외(內外)에 일이 많은 이때를 당하여 더욱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라. 다만 소인으로서 조정에 잠복하여 흉악한 짓을 하려는 자는 불가불 제거하고 숙청하여 후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저 작은 것을 차마 처단하지 못하면 대모(大謀)를 혼란시키는 것이고 풀을 제거하는데 뿌리를 없애지 않으면 끝내 다시 나는 것이다. 소인의 성품은 남 해치기를 즐겨 하고 일 저지르기를 좋아하여 자신이 죽지 않으면 그치지 않으니 그러므로 악한 자 다스리는 법을 부득불 엄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만약 구차스럽게 임시 방편으로 처리하면 후일 다시 이보다 큰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만약 저들이 일망 타진하여 일시의 명사(名士)를 모두 모함한다면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예로부터 신하가 임금을 이간시키고도 천벌을 면할 수 있었는가. 나는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 이는 참으로 신하가 목욕하고 토죄(討罪)를 청할 일이다."하였다.【원전】 25 집 392 면

 

선조41/02/01(무오)

김대래(金大來)를 홍문관 직제학으로, 목장흠(睦長欽)을 사헌부 집의로, 최유원(崔有源)을 홍문관 전한으로, 황경중(黃敬中)을 홍문관 교리로, 기협(奇協)을 홍문관 부교리로,【협은 아첨해가며 류영경을 섬겼고 협의 누이동생은 허욱(許頊)의 자부(子婦)였다. 협이 두 집을 왕래하면서 정인홍을 정국(庭鞫)하자는 의논을 힘써 주장하며 선동하여 큰 옥사(獄事)를 이루려고 하였다.】 이사경(李士慶)을 사간원 정언으로, 성시헌(成時憲)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류영경이 여러 대신들의 말로 아뢰기를,"고례(古禮)에 부인(婦人)의 손에서 임종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대신들의 뜻이 모두 이와 같으므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하고, 또 여러 대신들의 말로 아뢰기를,"예문(禮文)에 모두 안정하고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입시(入侍)케 하소서."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울면서 나왔는데, 잠시 후 곡성(哭聲)이 안에서 밖에까지 들리자 여러 대신 및 궁궐 뜰에 있던 자가 모두 통곡하였다.【원전】 25 집 393 면

 

선조 부록 “선조실록”의 수정을 청하는 대제학 이식의 소(疏)

대제학 이식(李植)의 소

역사는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이요 만세의 귀감으로서 천서(天픊)와 천질(天秩)의 의거하는 바요 민심과 사론(士論)에 관계된 것이니,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 -中略- 그 말년에 쓴 류영경, 정인홍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감히 일월(日月)의 밝음을 더럽히고 천지의 위대함을 가리는 격이 되었으니, 바로 장채(章蔡)가 선인(宣仁)을 무고(誣告)한 것과 동일한 간인(姦人)의 행적으로서 더욱 신자가 차마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사고(史庫)의 장서는 외인(外人)이 두루 엿볼 수 없었으나 전후로 《실록》을 상고해 볼 때의 사신(史臣)들이 눈으로 보고 서로 전한 것이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사가(史家)에 있어 천고의 일대 변고라 하겠습니다.

신은 삼가 상고하건대 계해년 반정(反正) 초에 연신(筵臣) 이수광(李첱光), 임숙영(任叔英) 등이 곧 수정(修正)하기를 청하여 이미 성지(聖旨)의 윤허를 받았고, 이듬해 봄에 상신(相臣) 윤방(尹昉)과 재신(宰臣) 서성(徐픸) 등이 연달아 거듭 청하자, 모두 윤허하여 속히 거행토록 하셨으니, 이 일을 중하게 여기시는 성의가 이에 더할 수 없었습니다. -中略- 삼가 원컨대 성명께서 이 점을 자세히 살피고 유념하시어 묘당에 자문하신 뒤 속히 재가(裁可)해 주신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원전】 25 집 705 면

 

광해00/02/01(무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추후 들어왔다. 【원전】 31 집 259 면

 

광해00/02/02(기미)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윤승훈(尹承勳), 류영경(柳永慶), 기자헌(奇自獻), 심희수(沈喜壽), 허욱(許頊), 한응인(韓應寅) 등이 대비전에 아뢰기를, "신들이 선조(先祖)의 실록을 조사하여 보니, 예종대왕(睿宗大王)께서 성화(成化) 기축년 11월 28일 진시(辰時)에 승하하였는데, 미시(未時)에 거애(擧哀)하였고 이날 신시(申時)에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 즉위하였습니다. 선조의 고사가 이와 같으니, 오늘 거애한 뒤에 왕세자께서 의당 사위(嗣位)하는 절차를 행하여야 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겠다."하였다.【원전】 31 집 259 면

 

광해00/02/02(기미)

내전(內殿)이 유교(遺敎) 1봉(封)을 내렸는데 외면에 쓰기를 '류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 등 제공(諸公)에게 유교한다.'고 하였다. 유교의 내용은, "부덕한 내가 왕위에 있으면서 신민(臣民)들에게 죄를 졌으므로 깊은 골짝과 연못에 떨어지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는데 이제 갑자기 중병(重病)을 얻었다. 수명의 장단(長短)은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어서, 낮이 가면 밤이 오는 것처럼 감히 어길 수 없는 것으로 성현(聖賢)도 이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단지 대군(大君)이 어린데 미처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걱정스러운 것이다. 내가 불행하게 된 뒤에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니, 만일 사설(邪說)이 있게 되면, 원컨대 제공들이 애호하고 부지(扶持)하기 바란다. 감히 이를 부탁한다."하였다. 살피건대 류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등은 모두 왕자(王子), 부마(駙馬)의 인속(姻屬)들이었기 때문에 이 유교가 있었던 것인데 이 일곱 신하의 화(禍)는 실상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원전】 31 집 259 면

 

광해00/02/02(기미)

류영경이 들어와서 아뢰기를,"달(達)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해가 저물어가고 있으니 속히 행례하라."하였다. 송응순 등이 또 아뢰기를,"예로부터 제왕은 어좌에 오르지 않은 분이 없었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내가 이 전상으로 올라왔으니 어좌에 오른 것과 다름이 없다. 해가 이미 저물었으니 속히 행례하기 바란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 "정시(正始)하는 처음에 대례(大禮)가 제대로 모양을 이룰 수 없게 되었으므로 군정(群情)이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선왕(先王)께서 어좌에 오르지 않았던 것을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 차마 어좌에 오르지 못하겠다."하였다. 대사헌 박승종(朴承宗), 대사간 이효원(李效元) 등이 아뢰기를,"속히 어좌에 오르시기 바랍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힘써 억지로 따를 수 없다는 뜻으로 이미 대신에게 하유하였다."하였다. 류영경이 아뢰기를,"군정이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으니 삼가 힘써 따르시기 바랍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조종조 때에도 어좌에 오르지 않은 분이 있었던 것을 뜰에 있는 원로 재신들은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다. 해가 이미 저물고 있으니 속히 행례하라."하였다. 허욱이 아뢰기를,"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대신이 어떻게 감히 이렇게 아뢸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군정을 힘써 따르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어좌 앞에 서 있으면 대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류영경이 네 번째 아뢰기를,"군정을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나아가 속히 행례하라."하니, 류영경이 아뢰기를,"군정이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힘써 따르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여러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기 때문에 <죽기를 한하고 거절하려 했으나> 힘써 따르는 것이다."하였다. 【원전】 31 집 259 면

 

광해00/02/03(경신)

홍문관 부제학 송응순(宋應洵), 직제학 김대래(金大來), 전한 최유원(崔有源), 응교 이지완(李志完), 부교리 민덕남(閔德男),기협(奇協), 부수찬 임장(任章), 정자 목대흠(睦大欽)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이렇게 망극한 슬픔을 당하였으니, 신하된 자로서는 의당 정신없이 뛰어 다니면서 공역(供役)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습전상(襲奠床)이 더럽고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지 않았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은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헌부는 법을 집행하는 관사(官司)로서 당초 논열(論列)하지 않고 있다가 공의(公議)가 거듭 발론되기에 이른 뒤에도 오히려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단지 추고하여 파직시킬 것만을 청함으로써 책임을 면할 방도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놀랍고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사헌 박승종(朴承宗), 장령 이경기(李慶셢), 남복규(南復圭), 지평 황근중(黃謹中), 신광립(申光立)을 아울러 체차시키소서."하니,

대답하기를,"해관(該官)의 태만스러움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내가 실로 통분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헌부가 이미 추고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만일 이로 인하여 체차시킨다면 대관(臺官)의 체모가 가벼워질 것 같기 때문에 따를 수 없다."하였다. 대사헌 박승종 등이 이 때문에 피혐하면서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간원이 계청하여 모두 체차시켰다. 이때 최유원이 류영경의 당여를 축출시키기 위해 해관이 삼가지 않은 것은 헌부가 살피지 않은 것에 연유된 것이라는 내용으로 잇따라 소장을 올려 탄핵하였다. 【원전】 31 집 260 면

 

광해00/02/07(갑자)

류영경(柳永慶)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원전】 31 집 261 면

 

광해00/02/09(병인)

경상도 유생(儒生) <생원> 강인(姜?) 등이 소장을 올렸다. "신들이 삼가 정인홍(鄭仁弘)의 상소를 살펴보건대 내용이 기휘(忌諱)를 범촉했으나 충심(忠心)을 극진히 진달한 것인데 류영경(柳永慶)이 첫째는 유감을 품은 것이 작지 않다고 하고 둘째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화(禍)의 씨앗을 빚어 내고 없는 죄상을 꾸며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왕의 성명(聖明)함으로도 일식(日蝕)․월식(月蝕) 같은 오판이 있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간사한 자들의 망극한 짓이 너무도 극심합니다. 신들은 국사가 이렇게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어 연명(連名)으로 된 소장을 올려 천청(天聽)이 깨닫게 되기를 기대했었습니다만 갑자기 승하하시었으므로 울부짖으며 통곡해도 미칠 길이 없으니, 이는 참으로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슬픔이요 종묘 사직의 불행인 것입니다. 인홍은 금년에 73세로 질병이 그칠 날이 없어 도중(道中)에 풍상(風霜)에 시달리는 것을 결단코 감당할 수 없으니, 하루아침에 죽어 원한을 품고 황천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신들은 이것이 성세(聖世)의 누가 되는 것이 작지 않으리라고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제일 통분스러운 것은 그 가운데서도 이효원(李效元)․김대래(金大來)의 무리가 이간시킨다는 한 마디를 날조한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화심(禍心)을 부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인홍이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곡진히 살피시고 간당(奸黨)들이 기망(欺罔)하는 정상을 통촉하시어 속히 찬축시키라는 명을 정지시키소서. <그로 하여금 죽어가는 목숨을 연장시켜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원전】 31 집 262 면

 

광해00/02/10(정묘)

영의정 류영경이 첫 번째 정사(呈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원전】 31 집 262 면

 

광해00/02/12(기사)

정언 이사경 등이 아뢰기를,"자전, 중전께서 내리신 성지(聖旨)는 반드시 대전(大殿)을 먼저 거친 뒤에 계하해야 합니다. -中略-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은 본디 흉악한 사람으로 오래도록 권병(權柄)을 잡고 있으면서 성총(聖聰)을 옹폐시켰으므로 권세와 기염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손톱과 어금니 같은 복심들이 조정에 많이 끼어 있게 되었고 인척과 족척(族戚)들이 현요직에 포열되어 있으며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언로를 막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지적하지 못하였으며 도로의 사람들이 간흉으로 지목하였습니다.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지 않는 짓이 없었고 헤아릴 수 없는 흉모(凶謀)를 숨기고 있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정승의 자리에 버티고 있는가 하면 악역(惡逆)을 토죄하는 법전을 거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가 날로 과격해지고 있습니다. 공의(公議)는 막기 어려운 것이니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라는 것으로 어렵게 여겨서는 안되고 국상(國喪)을 당하여 슬퍼하는 때라는 것으로 혐의해서도 안 됩니다. 류영경의 관직을 삭탈시키고 문외 출송시켜서 <여정(輿情)을 통쾌하게 하고 공론(公論)을 펴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산릉에 대한 일은 내가 정원에 내린 것이다. 단, 대행 대왕의 행장(行狀)은 내가 본 뒤에 자전께서 정원에 내렸다. 따라서 색승지가 반드시 내간(內間)에서 있었던 곡절을 상세히 살필 수 없었기 때문에 미처 계품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우연히 살피지 못한 일에 불과한 것이니, 파직시키고 추고할 것이 없다. 민희건은 바로 선왕(先王)께서 부리던 환관이고 또 호성 공신(扈聖功臣)인데, 어떻게 유찬(流竄)시킬 수 있겠는가. 버려두는 것이 가하다. 영상이 어찌 그러하겠는가. 아뢴 내용이 지나치다. 선조의 구신은 경솔히 논할 수 없으니 아울러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263 면

 

광해00/02/12(기사)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이 소장을 올려 류영경의 죄 아홉 가지를 수죄(數罪)하고 벨 것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영상이 어찌 그러하기에 이르렀겠는가. 논한 것이 지나치다. 선조의 대신은 경솔히 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또 듣건대 아버지 때의 신하를 고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옛부터 그런 말이 있어 왔다. 선왕께서 류 정승을 태보(台輔)에 발탁한 지가 지금까지 7년이나 되는데 그 동안 의지한 것이 갈수록 돈독하였었다. 그런데 이번 승하하신 지 아직 한 달도 되기 전에 갑자기 죄준다면 아버지가 친애하던 신하는 죽이지 않는다는 뜻에도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또한 기구신(耆舊臣)을 대우하는 도리에도 어긋난다.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하였다. 【원전】 31 집 263 면

 

광해00/02/12(기사)

이축은 본디 성품이 용렬하고 비루하였는데 류영경의 권세가 없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소장을 올려 죄주기를 청함으로써 정인홍(鄭仁弘)의 당여들에게 아첨하였다. 그 내용에,"신이 말을 하면 화(禍)가 뒤따를 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외람되이 훈적(勳籍)에 참여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충성을 바치기 위해 부월(斧鉞)을 피하지 않고 아룁니다."했는데, 이 내용을 들은 이들은 모두 웃었다. 【원전】 31 집 263 면

 

광해00/02/13(경오)

행 대사헌 김신원(金信元), 장령 윤양(尹讓), 지평 민덕남(閔德男), 헌납 윤효선(尹孝先), 정언 이사경(李士慶), 임장(任章)이 합계하기를,"영의정 류영경은 본디 흉험(兇險)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정승 자리에 웅거하고 있으면서 안으로는 궁금(宮禁)과 교결하고 밖으로는 사당(私黨)을 심어 권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성총(聖聰)을 옹폐하여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언로를 막았습니다. 그리하여 권세와 기염이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으므로 길가는 사람들도 간흉으로 지목하였는데,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오랠수록 더욱 극심하여 흉칙하고 비밀스런 계모를 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화심(禍心)을 품고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신인(神人)이 다함께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정승의 자리에 그대로 있게 한 채 악역을 토죄하는 법전을 거행하지 않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분노가 갈수록 격해지고 있습니다. 공론은 막기가 어려운 것이니, 속히 관직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시키소서. 원흉(元兇)이 죄악을 저지름에 있어 하지 않는 짓이 없었는데, 화(禍)를 즐기는 간사한 무리가 그의 우익(羽翼)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 형세가 또한 어찌 불어나고 덩굴져 도모하기 어려운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김대래(金大來),이유홍(李惟弘), 이효원(李效元), 성준기(成俊耆) 등이 복심이 되기도 하고 손톱과 어금니가 되기도 하여 주야로 모여 획책한 것이 귀역들과 다른 것이 없었으며, 홍식(洪湜)․송보(宋숮)는 그의 사주를 받아 조정을 어지럽혔습니다. 행 호군(行護軍) 이효원(李效元), 행 부호군 이유홍(李惟弘), 사인(舍人) 성준기(成俊耆)는 아울러 삭탈 관작하여 문외로 출송시키소서. 이조 참판 홍식, 이조 정랑 송보도 또한 삭탈 관작하여 악역의 당여가 된 자들을 경계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영상에 대해서는 이미 윤허하지 않는다는 뜻을 하유하였다. 이효원 등에 대해서는 이런 때에 죄줄 수 없지만 공론이 이러하니, 파직만 시키라."하였다. 【원전】 31 집 263 면

 

광해00/02/13(경오)

홍문관 부제학 송응순, <전한 최유원(崔有源), 응교 이지완(李志完), 교리 황경중(黃敬中), 부교리 기협(奇協), 부수찬 성시헌(成時憲), 정자 목대흠(睦大欽)이> 차자를 올리기를,"영의정 류영경이 외람되이 정승의 자리에 있은 지가 7년이나 되었는데 그 동안 조강(朝綱)을 멋대로 휘둘렀고 위복(威福)을 자기 마음대로 하였으며 척리(戚里)의 연줄을 인연하여 권세와 기염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제들과 친인척들이 현요직에 포열되어 있게 만들었고 한때의 대각(臺閣)이 모두 턱짓으로 부리는 가운데로 들게 하였으며 조가(朝家)의 작상(爵賞)을 공로를 갚고 은혜에 보답하는 자료로 삼는 등 군상(君上)을 기망하는 짓을 안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탐욕스러운 것으로 말하면 사방의 이익을 육지로 실어나르고 물길로 운송하여 왔으며 흉포한 것으로 말하면 꺼림없는 짓을 멋대로 하여 일국의 인심을 이반시켰으며 정론(正論)을 증오하고 사류(士類)를 마구 공척(攻斥)하여 그 화가 반드시 국가를 망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거기다가 화심(禍心)을 숨기고 흉도들을 불러모아 주야로 모의하였으니, 모든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그 누가 팔을 휘두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언관(言官)이 문외로 출송시킬 것을 청한 것은 실로 공공의 의논에서 나온 것입니다. 《역경(易經)》에도 '국가를 창건하여 계승해 감에 있어 소인(小人)은 기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 끝없이 이어갈 큰 역복(曆服)을 이어받은 즈음에 있어 악역을 토죄하는 법전을 엄히 하지 않음으로써 그지없이 사특한 거간(巨奸)을 도성 안에 거처하게 한다면, 장차 어떻게 민심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고 조정을 엄숙하고 맑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공론을 따르시어 여정(輿情)을 통쾌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영상은 바로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니, 경솔히 논할 수 없다. 또 듣건대 아버지 때의 신하는 바꾸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다. 선왕께서 여러 신하들 가운데서 발탁하여 수태(首台)의 자리에 앉힌 지 이제 7년이 되었고 그 사이 의지하신 것이 더욱 돈독하였다. 이제 선왕께서 서거하신 지 겨우 열흘이 지났는데 갑자기 죄를 준다면 아버지가 친히 하던 신하는 죽이지 않는다는 의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원로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어서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하였다. 【원전】 31 집 263 면

 

광해00/02/13(경오)

지평 정광성(鄭廣成)은 아뢰기를,"삼가 함흥 판관 이귀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이 매우 옳아서 진실로 성명(聖明)한 시대의 약석(藥石)이 되는 것이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하루인들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이, 류영경(柳永慶)의 여러 해 동안 누적되어 온 죄상을 두루 수죄(數罪)하고서 대간이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공척하였습니다. 신이 외람되이 간직(諫職)을 맡았고 또 논사(論思)하는 자리를 더럽혔는데, 그동안 남의 뒤만 따라 다니면서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답하기를,"이귀의 말이 광직(狂直)하였으니, 진실로 가상히 여겨 받아들임으로써 언로를 열어야 한다. 단, 그대는 선조(先朝)에서 대간과 시종을 역임하였으니,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1 집 264 면

 

광해00/02/14(신미)

양사가 합계하기를,"류영경(柳永慶), 김대래(金大來), 이유홍(李惟弘), 이효원(李效元), 성준구(成俊耈)는 삭출시키고 홍식(洪湜), 송보(宋숮)는 삭직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대신이 논박을 받으면 사세가 행공하기 어려운데 이런 때에 상위(相位)를 오래 비워둘 수도 없다. 영상은 체차하라. 이효원 등은 이미 파직시켰으니 삭출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하였다.【원전】31집 265면

 

광해00/02/14(신미)

옥당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의 삭출을 청하니, 답하기를,"이미 체차하였다. 삭출시킬 수는 없다."하였다.【원전】 31 집 265 면

 

광해00/02/15(임신)

장령 윤양, 헌납 윤효선, 지평 정광성․민덕남, 정언 이사경, 임장 등이 합사(合司)하여, 류영경(柳永慶), 이효원(李孝元), 이유홍(李惟弘), 성준구(成俊耈)는 삭출시키고, 홍식(洪湜), 송보(宋?)는 삭직시키라고 계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은 이미 체직시켰으니 삭출할 필요가 없다. 이효원 등에 대해서는 윤허한다. 홍식 등에 대해서는 아울러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옥당도 또한 차자를 올려 류영경 등의 일에 대해 논하니, 답하기를,"따를 만한 일이면 따르지 않겠는가. 이미 체직하였으니 삭출시킬 필요가 없다."하였다.【원전】 31 집 266 면

 

광해00/02/16(계유)

양사가 류영경을 삭탈 관작하고 문외로 출송시키며 홍식, 송보 등도 삭탈 관작할 것을 계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사간 박이서(朴彛敍), 장령 윤양(尹讓), 헌납 윤효선(尹孝先), 지평 민덕남(閔德男), 정광성(鄭廣成), 정언 이사경(李士慶), 임장(任章)이었다.】살피건대 이에 앞서 임해군이 음란하고 난폭한 짓을 멋대로 하고 류영경이 권세를 독점하여 나라를 병들게 했으므로 정인홍이 소장을 올려 영경을 논하다가 찬배당한 데 대해 사람들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대행 대왕이 승하한 지 겨우 10여 일만에 대각(臺閣)이 의논을 바꾸어 임해를 대역(大逆)으로 무함하고 류영경을 파출시키고 정인홍을 복구시키는 것을 마치 혁명(革命)을 일으켜 바꾸어 놓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조야(朝野)가 도리어 차탄하면서 마음 아파하였다.【원전】 31 집 266 면

 

광해00/02/17(갑술)

양사가 합계하여 류영경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로 출송시킬 것과 홍식, 송보의 관작을 삭탈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류영경은 파직시켰다. 홍식은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이미 파직시켰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송보의 일은 윤허한다."하였다.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을 삭출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다."하였다. 【원전】 31 집 267 면

 

광해00/02/18(을해)

 

양사가 합계하여, 류영경을 삭출시키고 홍식을 삭탈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일은 지나치게 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고 말은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미 파직시켰으니 삭출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홍식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을 삭출시키고 정인홍 등을 석방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파직시켰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정인홍 등은 선왕이 승하하신 지 20일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감히 경솔하게 석방할 수 있겠는가. 이는 따를 수 없다."하였다.【원전】 31 집 267, 268 면

 

광해00/02/19(병자)

양사가 합계하여, 류영경을 삭출시키고 홍식을 삭탈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에 대해서는 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죄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고 벌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는 것이다. 이효원(李效元) 등을 이미 삭출시켰는데 홍식을 그들과 똑같이 다스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미 파직시켰으니 서용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을 삭출시키고 정인홍 등을 석방시킬 것을 청하고 또 홍식 이하 여러 사람들의 죄를 논하니, 답하기를,"차자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류영경이 죄가 있기는 하지만 이에 선왕 때의 구신(舊臣)이고 이미 파직시켰으니 공론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홍식 등은, 류영경이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누군들 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추종하지 않았겠는가. 만일 그때의 명사(名士)들 가운데 죄의 유무와 경중을 따지지 않고 일일이 무겁게 다스린다면 남아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선 버려두도록 하라. 정인홍 등은 석방할 수 없다. 중도 부처하라."하였다. 이때 삼사에 인망이 있는 사람이 기용되어 참여하기는 했지만 대개는 모두가 영경의 잔당들이었는데 이들이 도리어 영경 등을 공격하는 것으로 공을 삼았다. 이른바 청북(淸北)은 처음에는 별다른 형적이 없었다. 단, 먼저 류희분에게 붙은 사람은 곧 청현직을 잃지 않았다. 【원전】 31 집 269 면

 

광해00/02/20(정축)

양사가 <합사(合辭)하여> 류영경을 삭출시키고 홍식을 삭탈시킬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은 관작을 삭탈하라. 홍식에 대해서는 윤허한다."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을 삭출하고 홍식 등을 삭탈할 것과 정인홍 등을 석방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다."하였다.【원전】 31 집 270, 271 면

 

광해00/02/21(무인)

양사가 합계하여 류영경을 문외로 출송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대신(大臣)이 이미 중한 논박을 받아 관작이 삭탈되었으니 사세상 도하(都下)에 그대로 있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이에 억지로 따른다."하였다.【원전】 31 집 272 면

옥당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에 대해 쾌히 공론을 따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이미 중론(重論)을 입어 관작을 삭탈하였으니, 사세상 도하(都下)에 있기는 어렵다. 이에 억지로 힘써 따른다."하였다.【원전】 태백산본

 

광해00/02/23(경진)

정언 이사경이 아뢰기를,"변변치 못한 미천한 신이 언지(言地)에 대죄하고 있으면서 이런 때를 당하여 사사로운 혐의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中略- 신이 은미하게 아울러 논하자는 뜻을 언급했었습니다만 동료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아서 드디어 중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정(物情)이 모두 통분스럽고 답답하게 여겨 온편치 못한 처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교리 황경중(黃敬中)은 감히 사의(私意)로 은밀히 헤아려 신을 가리켜 해묵은 혐의 때문에 시기를 노려 보복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공공연히 사람들에게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황근중의 형제에 대해 실낱 같은 혐의도 없습니다. 저들이 류영경의 앞잡이가 되었으므로 나랏사람들이 침뱉으면서 더럽게 여기는 것이니, 대론(臺論)이 발의된 것은 실로 공공(公共)의 의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사대부 사이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추잡한 욕설로 드러내어 언관(言官)을 공척함으로써 일을 논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이 외람되이 무릅쓰고 있는 관계로 남에게 경시당한 데서 온 소치에 불과한 것이니, 속히 신을 파직시켜 대간의 체면을 중하게 만드소서."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원전】 31 집 278 면

 

광해00/02/25(임오)

이필영(李必榮)을 장령으로, <【인품이 간사하였는데 류영경의 심복이 되었다.】> 윤형언(尹衡彦)을 정언으로 삼았다. 【원전】 31 집 279 면

 

광해00/02/27(갑신)

사간 박이서, 헌납 이호신, 정언 임장이 아뢰기를,"류영경의 죄악이 이미 찰대로 가득 찼는데도 신들이 당초 죄를 논할 적에 단지 삭출시킬 것만을 청하였으니, 실형(失刑)한 것이 큽니다. 윤허를 받고난 뒤에는 여러 날을 미적거리면서 가죄(加罪)를 청하는 것을 지체시킴으로써 여정이 더욱 격분하게 만들어 놓고서도 어제서야 비로소 준례에 따라 인피하였으니,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인홍을 석방시키고 관작을 회복시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의 바람에서 나온 것인데 지난번 헌부에서 석방시키라는 명을 받자마자 신들이 갑자기 관작을 회복시키라는 청을 중지하였으므로 사류(士類)들이 서운해 하고 물의(物議)가 시끄럽게 일었으니, 신들의 잘못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결단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원전】 31 집 280 면광해00/02/29(병술)

이시언(李時彦)을 대사헌으로,【인품이 청고(淸苦)하여 직기(直氣)가 있었다.】 최유원(崔有源)을 집의로, 조정립(趙正立)을 사간으로,【인품이 정직하여 조정이 괴란되는 것을 보고 행신을 온전히 하기 위해 물러갔으며, 공명 때문에 마음을 더럽히지 않았다.】송석경(宋錫慶)을 장령으로, 류경종(柳慶宗)을【인품이 어리석고 패려스러웠다.】 장령으로, 이성(李惺)을 헌납으로, 임연(任?)을【인품이 음험하고 패악스러웠다.】 지평으로, 권반(權盼)을 지평으로, 김치(金緻)를 정언으로, 송순(宋諄)을【인품이 간사하고 괴퍅스러웠다.】 이조 참의로, 박이서(朴彛敍)를 부응교로, 윤국형(尹國馨)을 좌윤으로,【인품이 관후하여 장자(長者)의 풍도를 지녔다.】 정사호(鄭賜湖)를【기국이 작았다.】 우윤으로, 이호신(李好信)을 수찬으로, 최기남(崔起南)을 수찬으로, 남이공(南以恭)을<【일찍이 류영경의 모주(謀主)가 되어 전후로 조정을 탁란시켰었는데 영경이 패몰하자 또 외척(外戚)인 류희분(柳希奮)에게 빌붙었다.】> 전한으로, 이충양(李忠養)을 필선으로, 김신국(金藎國)을【일찍이 류영경의 모주가 되어 조정을 탁란시켰었는데 영경이 패몰하자 남이공․박이서와 함께 외척에게 아첨하여 빌붙었다.】 보덕으로, 조명욱(曺明홸)을<【인품이 간사하고 아둔하고 용렬하였다.】> 문학으로 삼았다.【원전】 31 집 281 면

 

광해00/03/02(기축)

양사가 아뢰기를,"급제(及第) 류영경은 본디 흉패스러운 사람으로서 간사하고 교활한 짓을 하면서 오래도록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죄악이 찰 대로 찼습니다. 안으로는 궁금(宮禁)과 교결하고 밖으로는 사당(私黨)을 심어 권병(權柄)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성총(聖聰)을 옹폐하였으며, 조아(爪牙)와 복심(腹心)이 모두 화현직(華顯職)을 점유하였고 인척(姻戚)과 자제(子弟)들을 요직에 포열시켜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공척하여 제거하고 언로를 틀어막았으므로 권세와 기염이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고 도로(道路)의 사람들이 지목하였습니다.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갈수록 더욱 극심하여 흉칙하고 비밀스런 계책을 획책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책봉(冊封)을 주청하는 것은 더없이 중차대한 일인데도 국정을 담당한 지 7년이나 되면서 단 한 번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으며, 조사(詔使)에게 정문(呈文)하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지닌 마음인데도 공의(公議)를 저지시키고 은밀히 상신(相臣)을 중상하였습니다. 지난해 전섭(傳攝)하게 한 명은 실로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한 것으로 푸른 하늘의 밝은 태양과 같아서 신서(臣庶)들이 다함께 같이 들은 것인데, 비밀로 해서는 안 되는 비망기를 비밀로 하였고 축출해서는 안 되는 원임 대신을 축출하였습니다. 회계(回啓)할 때에 이르러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덮어 숨기면서 군정(郡情)의 생각 밖에서 나왔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음흉하고 궤비(詭秘)스럽게 한 정상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헤아릴 수 없는 화(禍)가 조석(朝夕)에 박두해 있어도 온 조정이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인홍이 자신을 잊고 국가를 위하여 정직한 말을 숨김없이 다했는데 영경이 감히 뻔뻔스레 스스로 해명하면서 변핵(卞탢)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형적이 없는 것으로 죄에 얽어넣어 사류(士類)들을 찬축하였고 기필코 옥사(獄事)를 일으켜 장살(캓殺)하고서야 그만두려 하였으니,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어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먼 변방에 안치(安置)시켜 조금이나마 신인(神人)의 분노를 통쾌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니 너무 야박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양사가 아뢰기를,㰡좌의정 허욱(許頊)은 본디 일개 비부(鄙夫)였는데 종처럼 류영경을 섬겨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명기(名器)를 욕되게 한 것이 진실로 너무 심합니다. 일찍이 전형관(銓衡官)으로 있을 때에는 영경의 사주를 받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공격하여 쫓아내었고 같이 악한 짓을 하는 자들을 끌어들여 기용해서 널리 사당(私黨)을 심어서 흉세(凶勢)를 도와 이루게 하였습니다. 정인홍이 소장을 올린 뒤에 이르러서는 말을 꾸며 대죄(待罪)함으로써 천총(天聰)을 기망하는 한편 흉당들과 큰 옥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여 사류들을 장살함으로써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니, 그 계책이 공교하고도 흉참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관작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여정(輿情)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관작을 삭탈하소서."하니, 답하기를,"좌상은 인품이 중후하고 마음가짐이 근신(謹愼)한데 어찌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있겠는가. 논한 내용이 지나치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문학 조명욱(曺明홸)은 전에 정언으로 있으면서 피혐할 적에 류영경에게 아첨하여 빌붙어 정인홍의 상소를 남을 무함하는 음참(陰慘)스러운 이야기라고 하면서 원흉(元兇)을 신구(伸救)하다가 공론에 죄를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지금 본직에 제수되자 물정(物情)이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역옥(逆獄)을 추국하는 것은 일각이 급한 것인데 시임 대신(時任大臣)이 정고(呈告)한 탓으로 여러 날 정폐(停廢)하고 있어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시임 대신이 출사하는 동안 원임 대신(原任大臣)으로 하여금 주야를 가리지 말고 전적으로 추국하도록 위임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윤허한다. 파급되는 것이 너무 많다. 조명욱은 우선 놔두라." 하였다.【원전】 31 집 282 면

 

광해00/03/03(경인)

사헌부와 사간원이 류영경을 안치시키고 허욱의 관작을 삭탈시킬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전】 31 집 282 면

 

광해00/03/04(신묘)

<양사가> 합사(合司)로 류영경을 안치시킬 것을 계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허욱의 관작을 삭탈시키라고 합계하니, 답하기를, "대신이 논박당하면 사세상 출사하기 어려운 것이니, 체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원전】 31 집 283 면

 

광해00/03/05(임진)

양사가 류영경을 안치시키라고 계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합계(合啓)로> 허욱의 관작을 삭탈시킬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허욱은 이미 체차시켰으니, 관작을 삭탈하는 것은 과중하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전】 31 집 283 면

 

광해00/03/06(계사)

양사가 류영경을 안치시키라고 계청하니, 답하기를,"삭출시키자는 공론이 이미 시행되어 시비가 정하여졌는데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뭐 있는가. 논하지 않는 것이 옳다."하였다. 합계로 허욱의 관작을 삭탈시키라고 청하니, 답하기를,"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283 면

 

광해00/03/07(갑오)

<양사가> 합사하여 류영경을 안치시키라고 계청하고 허욱을 삭탈시키라고 합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가, 류영경에게 가죄(加罪)할 것을 두 번째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양사에서 류영경을 안치시키라는 의논을 따르라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원전】 31 집 283 면

 

광해00/03/08(을미)

양사가 류영경을 가죄(加罪)할 것을 계청하고 합계로 허욱을 가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31 집 283 면

 

광해00/03/09(병신)

양사가 류영경을 가죄(加罪)할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부모가 사랑하던 것을 나도 사랑하고 부모가 존경하던 것을 나도 존경하는 것은 견마(犬馬)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류영경은 선왕께서 의지하던 대신인데 그에게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차마 먼 변방에 안치시킬 수 있겠는가. 이는 따를 수가 없으니, 의당 나의 뜻을 알고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하였다. 합계하여 허욱의 관작을 삭탈하라고 청하니, 답하기를,"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양사가 다시 아뢰기를,"류영경에게 가죄하소서."하니, 답하기를,"따를 수 없다는 뜻을 이미 다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과 허욱에 대해 쾌히 공론을 따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부모가 사랑하던 것을 나도 사랑하고 부모가 존경하던 것을 나도 존경하여야 한다. 견마(犬馬)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사람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류영경과 허욱은 선왕께서 믿고 의지하던 신하이니, 저들에게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차마 먼 변방에 안치시키고 관작을 삭탈할 수 있겠는가. 이는 따를 수 없으니 나의 뜻을 유념하여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하였다.【원전】 31 집 284 면

 

광해00/03/10(정유)

양사가 류영경에게 가죄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선조(先朝)의 대신을 너무 야박하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의도 중한 것이니 이에 억지로 따른다. 중도 부처(中途付處)하게 하라."하고, 또 허욱의 관작을 삭탈시킬 것을 계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고 답하였다.>【따르지 않았다.】【원전】 31 집 284 면

 

광해00/03/12(기해)

옥당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허욱에게 죄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나의 뜻은 이미 유시하였다."하였다.【원전】 31 집 284 면

 

광해00/03/13(경자)

양사가 류영경에게 가죄할 것을 계청하고 허욱의 관작을 삭탈시킬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과 허욱을 안치시키라. 삭탈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원전】 31 집 284 면

 

광해00/03/14(신축)

합사하여 류영경을 안치시키라고 계청하고 허욱의 관작을 삭탈시키라고 계청하니, 답하기를,"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은 혹 죄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야박하게 대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렇게 미루어 온 것이다. 그러나 공의가 날로 격해져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막기 어려우니, 마지못해 억지로 따른다."하였다. 【원전】 31 집 284 면

 

광해00/03/15(임인)

"류영경은 죄가 있다고 하지만 멀리 귀양보내는 것도 과중하다. 어찌 안치시킬 것까지야 있겠는가. 멀리 귀양만 보내라."<양사가> 합사하여 류영경을 그대로 안치시키라고 계청하니, 답하기를,"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284 면

 

광해00/03/16(계묘)

양사가 류영경을 위리 안치시키라고 계청하니, 답하기를,"멀리 귀양보내는 것도 너무 과중한데 위리시킬 필요가 뭐 있겠는가. 사리에 의거 헤아려 보건대 이렇게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위리하지 않더라도 그가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라."하였다.【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원전】 31 집 285 면

 

광해00/03/16(계묘)

<양사가 다시 류영경을 위리 안치시키라고 청하니, 답하기를,"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태백산본

 

광해00/03/17(갑진)

양사가 류영경을 위리 안치시키라고 계청하니, 답하기를,"내가 아끼는 것은 대신을 대우하는 체면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로 버틴 날짜가 오래여서 <도리어 미안스러운 점이 있으니> 이에 따른다."하였다. 【원전】 31 집 285 면

 

광해00/03/18(을사)

류영경을 경흥(慶興)으로 정배하였다. 【원전】 31 집 285 면

 

광해00/03/21(무신)

생원 이사호(李士浩)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적신(賊臣) 류영경의 죄는 위로 하늘에까지 사무쳤다는 것을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라는 것으로 오랫동안 천주(天誅)를 지체시키고 있으니, 이는 실로 여정(輿情)이 다함께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더더욱 통분스러운 것은 대악(大惡)은 제거되었지만 도당들이 번성한 그것입니다. 삼사(三司)의 중요한 지위에 이들이 가득히 포열되어 날뛰면서 겉으로는 역적을 토죄한다는 이름을 가차하면서 속으로는 당여들을 비호할 계교를 품고 있는가 하면 자신이 화(禍)를 당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 창을 뒤로 돌려 자기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김신국․남이공은 류영경의 모주(謀主)인데도 죄를 면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올바른 지기(志氣)를 지닌 사람이면 통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오늘날 시종(侍從)․대간(臺諫)으로 있는 자 가운데 영경의 잔당들이 반이 넘으니, 이는 영경의 의논이 아직도 조정에서 행하여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속히 원흉의 도당들을 축출하고 법을 바루는 문을 활짝 여소서."하였다. 소장을 봉입(捧入)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원전】 31 집 286 면

 

광해00/03/22(기유)

유학(幼學) 소명국(蘇鳴國)이 상소하여 류영경을 베고 이홍로의 죄를 국문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상소의 내용은 모두 알았다. 류영경, 이홍로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이미 의논하여 조처하였다."하였다. 【원전】 31 집 286 면

 

광해00/03/23(경술)

<소명국의 상소에 답하기를,"상소의 내용은 다 알았다. 류영경, 이홍로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이미 의논하여 처리하였다."하였다.> 【원전】 태백산본

 

광해00/03/23(경술)

정언 임장(任章), 장령 윤양(尹讓), 집의 이필영(李必榮), 대사간 박이장(朴而章)이 아뢰기를,"삼가 소명국의 상소 내용을 살펴 보건대, 류영경이 국본(國本)을 동요시켰으므로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어 절로 해당되는 상형(常刑)이 있는데도 전후 대각의 관원들이 마음대로 죄를 논하여 스스로 저앙(低昻)했다고 하면서 기척(譏斥)하는 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하니, 답하기를,"사퇴하지 말라."하였으나,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렸다.【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아울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원전】 31 집 286 면

 

광해00/03/25(임자)

집의 이필영, 장령 윤양, 정언 임장이 아뢰기를,"이사호의 소장에서 대간을 비난하여 공척하면서 류영경의 도당이라고까지 말하였는데, 신들이 영경의 도당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절로 공론이 있을 것이므로 분소(分疏)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옥당이 처치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신들이 공척당한 것에 대한 허실은 분변하지 않고서 상소에 없는 말을 끌어내어 실정에 지나친 것이라고만 말을 하면서 범연히 출사하게 하라고 청하였습니다. 신들이 매우 변변치 못하기는 하지만 무릅쓰고 있는 직책이 언책(言責)입니다. 애매 모호하게 직에 나아갈 수는 없으니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간 박이장은 아뢰기를,"삼가 옥당이 처치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상소에 없는 말을 끌어내어 류영경의 흉역(兇逆)에 대한 모의를 그의 문하에 출입한 사람이 어찌 모두 참여하여 들었겠느냐는 식으로 범연히 말을 하였습니다. 대저 처치할 즈음에는 반드시 피혐한 내용을 거론하여 처치하는 것이 바로 평상시 이미 정해진 법규인 것입니다. 신이 서울을 떠나 멀리 천리 밖에 있은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고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전연 거론하지 않고서 마치 신이 당시에 영경의 문하를 출입한 사람인 것처럼 하였으니, 더더욱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이러한데 어떻게 애매 모호한 상태에서 그대로 언지(言地)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나 아울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모두 출사하게 하라고 하니, 따랐다.】【원전】 31 집 286 면

 

광해00/04/06(임술)

장령 류경종(柳慶宗) 등이 아뢰었다."삼가 영중추부사 이덕형의 차자 내용을 보건대, 요즘 언관들의 죄를 낱낱이 들추었으며, 심지어는 '희망한다'는 등의 말도 들어 있었습니다. 전일에 언관이었던 신은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하던 때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뻔뻔스럽게 행공(行公)하여 직품(職品)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체차하소서."【원전】 31 집 292 면

 

광해00/04/07(계해)

헌납 임연(任?)이 아뢰었다."신이 삼가 영중추부사 이덕형의 차자 내용을 보건대, 시사(時事)에 허물을 돌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우선 부득이 변명해야 할 것을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中略- 평번(平反)해야 한다는 이원익(李元翼)의 말과 은의(恩誼)를 보존해야 한다는 정구․조정립의 말처럼 청하였다면, 전하께 바라는 것이 지극한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발표하였다고 허물하니, 이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 모호하게 하려는 것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㰡27일 이전에 날마다 탄핵의 논을 한 것은 그릇된 일이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 언관의 자리에 있지 않은 신은 사정을 자세히 모르겠으나, 다만 류영경의 죄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된 이상 하늘의 뜻으로 토벌하는 일은 하루가 급한 것입니다. 더구나 불안하고 의심스런 즈음에 흉측한 자들이 줄곧 나라의 권세를 잡고 있었으니, 뜻하지 않은 변란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급히 흉측한 괴수를 쳐버리고 우익(羽翼)들을 잘라버리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습니까. -中略- 역당들의 배격을 받은 신은 지난해 6, 7월 사이에 시골에 있었습니다만, 전하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자, 신은 풍교와 헌장을 다스리는 직임을 맡아 영경에게 죄를 더하기 위한 논핵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이른바 '희망㰡'는 말은 신에게도 해당되오니, 신의 직임을 체차하소서." 【원전】 31 집 292 면

 

광해00/04/13(기사)

지평 이민성(李民宬)이 아뢰기를,"삼가 변경윤의 소장을 보건대, 채용할 만한 말이 없지 않으나, 속뜻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개 류영경과 김공량을 하나의 구덩이로 만들어 사람들을 빠뜨리는 수단으로 삼으니, 계책이 지나칩니다. 7년 동안 정권을 잡은 영경이 멋대로 권세를 농락하자, 우둔하고 염치없는 사대부들이 뒤질세라 나아가 빌붙었습니다. 천거되거나 발탁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야비하고 더러운 일을 하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더러는 심복이 되어 끝까지 배반하지 않은 자도 있으며, 더러는 처음은 그와 합했다가 나중에는 다시 틀어진 자도 있으며, 더러 중상(中傷)을 두려워하여 부득이 들락거리는 자도 있어 여러 가지 형태였음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실정을 살피지 않고 모두 영경의 구덩이에 몰아 넣어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을 연루시킨다면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다행히 영경과 본디 반쪽 낯도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그의 문정(門庭)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옳고 그름의 단서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다만 공량을 논핵하는 일에 참여한 이유로 이미 뚜렷한 지척을 받았으니, 신을 파직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경전(李慶全)이 아뢰기를,"삼가 변경윤의 소장을 보건대, 추잡하게 헐뜯고 함부로 가한 배척은 오로지 신의 집안을 겨냥하였는데, 심지어는 '정여립(鄭汝立)과 친했다.'고 하였으며, 또 '홍여순(洪汝諄), 이홍로(李弘老), 김공량, 류영경의 모사가 되어 일의 단서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자라면 만 번 죽어도 부족한데, 어떻게 신의 한마디 말인들 용납이 되겠습니까. 남의 무고(誣告)를 받은 자는 자연 공론이 있는 법이니 먼저 스스로 변명하지 않아야 한다고 신은 생각하여, 집안에 조용히 있으며 신명(身命)을 보존하려 하면서 흑백 장단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이 있는 곳은 언관의 자리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부질없이 말을 하여 저들과 따지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파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1 집 295 면

 

광해00/04/14(경오)

홍문관 <교리 최기남(崔起南), 부교리 김광엽(金光燁), ․이호신(李好信), 수찬 이성(李惺) 등이> 상차하였다. "지난해부터 국가가 불행하여 조정에 죄를 지은 자도 있었고 군상을 거스른 자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역적의 변이 한때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이런 때이면 불령(不逞)한 무리들은 꼭 이를 사람을 빠뜨리는 구덩이로 이용했습니다. 지금 김공량과 류영경을 하나의 함정으로 만들어 고결하게 지조를 지킨 이이첨 같은 사람도 공량과 얼키었다고 지목해 버리니, 기타 목장흠(睦長欽), 대흠(大欽), 임장(任章), 기협(奇協)이 억울하게 연루된 자란 것은 변명하지 않아도 알 만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산해와 이이, 이 경자년에 얻은 죄는 실로 홍여순(洪汝諄)을 논핵한 일로 말미암은 것이며, 불측한 죄에 빠질 뻔한 것도 성궁(聖躬)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도리어 모위(謀危)의 죄명을 씌우니,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깊이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여 공량의 죄를 논핵하는 데 참여하였으니, 악명을 가한 것은 배척에서 나와 한 집안 사람의 이름이 소장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모두 사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류경종(柳慶宗), 윤길(尹셪), 류석증(柳昔曾), 이민성(李民宬), 이경전(李慶全), 임연(任?), 김치(金緻)를 아울러 출사토록 명하소서."【원전】31집 295면

 

광해00/04/14(경오)

이산해, 홍여순, 류영경, 이이첨은 본디 같은 당이었는데, 뒤에는 다시금 갈라져 서로 공박하여 혹은 대북(大北)이라 하고, 혹은 소북(小北)이라 하고, 혹은 골북(骨北)이라 하여 권력을 잡기 위해 다투며 모두들 모위(謀危)했다느니 상을 보호했다느니 하는 것으로 서로 반목하였다. 처음 정철(鄭澈)의 당을 공박할 적에는 실로 동지였는데 경윤이 일례로 논척한 것은 진실로 무분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옥당이 또 만년의 당을 나누는 일로 경윤의 평생을 평가했으니, 잘못이다. 【원전】 31 집 295 면

 

광해00/04/21(정축)

【사신은 논한다. 류영경이 나라의 권력을 잡았을 때는, 김신국(金藎國), 남이공(南以恭)이 모주(謀主)가 되더니만, 영경이 패한 뒤에는 김신국과 남이공이 맨 먼저 제창하여 창을 거꾸로 잡고 공격하면서 깊이 희분(希奮)과 결탁하여 날뛰고 기탄없이 굴었다. 청북(淸北)이니 탁북(濁北)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영경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고 난 다음, 남은 졸개들을 거느리고 영경의 무리를 공박하며 여력을 다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하였다. <대각에서 의기양양하게 굴면서 스스로 계책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었는데, 이런 짓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원전】 31 집 299 면

 

광해00/04/25(신사)

<의금부가 아뢰기를,"죄를 받은 사람들을 귀양보내지 않으면 물정을 시원스럽게 하기 어렵습니다. 아주 먼 북도 지역으로는 다만 6읍(邑)뿐인데, 류영경을 이미 경흥(慶興)에 정배하였으니, 남은 5읍 중에 한 곳에 정배해야 하겠으며, 남도의 제일 변방인 삼수(三水)나 갑산(甲山) 가운데 한 곳에도 정배해야 하겠습니다. 평안도 강변 4읍은 정배할 곳이 두 곳에 지나지 않으니, 전지를 받은 죄인 6인 가운데 4인은 서쪽과 북쪽에 정배하고, 2인은 남쪽 먼 지방으로 정배해야 합니까 아니면 인읍(隣邑)임을 가리지 않고 아울러 서쪽과 북쪽으로 정배해야 합니까?"하니, 참작해서 처리하라고 전교하였다.>【원전】 태백산본

 

광해00/04/27(계미)

이산해(李山海)는 지난 기축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화가 자신에 미칠까 두려워하여 궁금(宮禁)들과 인연을 맺고 떠도는 말로 거짓을 꾸미어 정철(鄭澈)을 모함하기를 '왕자를 옹립하려는 뜻을 가졌다.'고 하면서 왕의 형제들을 지적하니, 정철은 이로 인하여 죄를 받고 옥사는 조금 완화되었다. 임진(壬辰)의 변란이 일어나자 산해는 맨 처음 도성를 떠나자고 주창하였는가 하면, 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어진 자를 가리어 세자로 삼자고 청하였는데 이로 인해 스스로 정책 대공(定策大功)에 올랐다. 귀양살던 중에는 동궁을 생각한다는 시를 항상 지었다. '소신은 바라건대 얼른 죽지 않아, 몸소 강구에 격양가를 부르는 때를 보겠습니다.[小臣願勿須臾死 親見康衢擊壤辰]'는 시구를 유포하여 어여삐 보이려 하였다. 이때에 산해는 또 류영경에게 배척을 당했기 때문에 정인홍 등과 함께 성궁(聖躬)을 보호했다는 공을 내세웠는데, 왕에게 받은 사랑과 예우가 매우 높았다. 변경윤의 소장은 그런 일들을 지적함에 있어 매우 절실했기 때문에 산해는 또 이런 계사를 만들어 아첨하고 기원했던 것이다. 그의 평일 조정에서 하는 일들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이로부터는 소인들이 뒤엎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총애를 받는 궁중의 여인네들과 얼키어 먼저 역적을 모의했다고 남을 모함한 뒤 보호하겠다고 자임하며 심지어는 모후를 유폐(幽閉)하고 충신과 어진이를 귀양보내고 죽이기까지 하였는데, 그 유래는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원전】 31 집 303 면

 

광해00/05/08(계사)

집의 이경전(李慶全)은 아뢰기를,"신이 대구 부사 정경세의 소장을 보니, 그 가운데 한 조항에 '누구는 정책(定策)을 자신이 했다고 하는데, 지금 그의 아들은 모관(某官)이 되었고 그와 같은 당파인 사람은 모관이 되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한 '그의 당파인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이른바 '정책(定策)'이라는 것은, 삼가 생각건대 다음과 같은 것 때문에 말하는 듯합니다. 전하께서 잠저(潛邸)에서 동궁(東宮)에 들어오실 때에 신의 아비가 마침 수상(首相)으로 있었고, 류영경(柳永慶)이 흉모(兇謀)를 꾸밀 때에 마침 그들이 반드시 가장 먼저 제거하고자 하였으므로, 모르는 사람들은 보고 들은 것을 전파하며 정책(定策)한 집이라고 일컫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황공하여 용납할 곳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이른바 '스스로 담당했다.'는 것은 실로 어떤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경세가 신을 마주 대하고 넌지시 타이르기를 '모름지기 천공(天功)을 탐내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여 마음을 비우도록 하라.' 하였다면, 신은 반드시 스스로 힘써 노력했을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물러나고 싶을 뿐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따지고 싶은 뜻은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하였다.【원전】 31 집 309 면

 

광해00/07/07(신묘)

홍문관 부응교 윤효선(尹孝先)이 상소하기를,"신은 금년 초봄에 여주(驪州) 고향 집에 돌아가 있다가, 갑자기 임금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달려서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곧바로 사간원 헌납을 제수받았습니다. -中略- 내가 비록 이 영부사(李領府事)와 교분은 없지만 마땅히 바로 가서 만나보겠다. 다만 내가 대간으로서 바야흐로 합사(合司)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하고 있어 일찍 출근하였다가 늦게 퇴근하는데, 영부사의 집이 성문 밖에 있어 언제 그 집에 가겠다고 기필하기가 어렵다. 그렇긴 하지만 영부사가 대신으로서 이렇게까지 나라를 걱정하여 대간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고자 하니, 내 필경 알현하고 서로 의논하겠다." 하니, 이귀(李貴)가 알았다고 하고 갔습니다. -中略- 이에 신 등은 이런 따위의 내용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여겨 피혐한 것이지, 실지로 덕형이 '내용이 상세하고 치밀하지 못하다.'고 한 말 때문에 피혐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두어 가지에 의거해 보아도 이귀의 말이 진실하고 적당하지 않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귀는 곧 말하기를, '덕형이 별로 앞뒤로 말을 다르게 한 잘못이 없고 신도 효선에게 잘못 전달한 것이 없는데, 효선이 들은 것에 그 뜻을 잃어버린 점이 없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는 신이 빈말을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中略- 삼가 원하건대 속히 현재의 직책을 파직하도록 명하여, 거짓말을 조작하여 대신을 모함하고 군부를 속이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하니, 답하기를,"이때 사람들의 말을 어찌 다 따질 것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1 집 325 면

 

광해00/08/11(을축)

집의 이이첨(李爾瞻), 헌납 이성(李惺)이 아뢰기를,"류영경(柳永慶)의 죄는 이미 하늘에 통하므로 사람마다 토죄하여도 되고 보면, 주살할 것을 청하는 일에 있어서는 진실로 하찮은 혐의스러움은 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들은 다같이 모함을 입고 헤아리지 못할 화를 당할 뻔하였으므로, 또 논열(論列)의 속에 참여를 한다면, 세상에서 필시 공적인 의리를 빌려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 한다고 말하며 신들의 심사를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더라도 남들이 믿어 주겠습니까. 오늘날 양사가 영경의 죄를 논열하려고 하나, 신들은 결코 여기에 태연히 담당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비난을 무릅쓸 수 없습니다. 신들의 관직을 체면하소서."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대사간 송순(宋諄), 사간 류경종(柳慶宗), 장령 윤길(尹?), 박건(朴楗), 지평 김질간(金質幹), 김정남(金正男), 집의 이이첨(李爾瞻), 헌납 이성(李惺), 정언 박여량(朴汝樑)이 합사하여 아뢰기를,"급제 류영경(柳永慶)은 천성이 흉칙하고 패악한데다 또 음흉하고 간휼하여, 오랫동안 정승의 자리를 점거하고 있으면서 지은 죄악이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안으로는 궁금(宮禁)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사당을 심어서, 군상의 귀와 눈을 가리고 위복(威福)의 권리를 마음대로 휘둘러 그 기세가 대단하였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다 눈살을 찌푸리자, 그 자리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세월이 오랠수록 더 깊어져서, 나쁜 모의, 비밀스런 계획을 있는 대로 다 썼습니다.

우선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책봉의 주청은 곧 국가에서 그만둘 수 없는 막중 막대한 일임에도, 이정구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에 자신이 수상으로 있으면서 주청사를 보내는 일을 한 번도 계청하지 않고 5년이나 끌어 오다가, 명조(明朝)의 예부가 의아한 나머지 사질(査質) 사신을 내보내오는 치욕을 당하게까지 하였고, 병오년에 조사(詔使)가 나왔을 적에 대신의 정문(呈文)은 실로 신민이 다같이 원하는 바임에도, 자신이 수상으로 있으면서 회피할 계획을 품고서, 끝까지 저지할 수 없게 되자 발언한 상신을 몰래 중상하여 그 자리에서 안심을 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황제의 조칙에, 㰡공을 이루기를 기다려 보아서 책봉하라㰡는 등의 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조정 신하들이 미리 책훈(冊勳)을 하여 이것을 근거로 명조에 주청하려고 한 것임에도, 자신이 수상으로 있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막기만 하였는가 하면, 일호의 공로도 없음에도 도리어 부당하게 위훈(僞勳)을 차지하였고, 원손이 8세가 되면 봉호(封號)를 하는 것은 곧 선왕 때의 고사인데, 원손의 나이가 10세를 넘었음에도 자신이 수상으로 있으면서 끝내 봉호를 계청하지 않았으며, 선왕께서 1년 동안이나 편찮으시어 온 나라가 경황없어 함에도, 자신이 수상으로서 내국 제조를 겸임하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시약청 설치를 계청하지 않고 다른 의관들에게 약처방을 맡기어 준제(峻劑)를 많이 쓰게 하므로, 선왕께서, 㰡한 번 땅에 쓰러지고 나니 다시 떨치고 일어날 수 없다.㰡라는 전교를 내리시게까지 하더니, 마침내 빈천(賓天)의 아픔을 불러왔습니다. 또 지난해 10월 아주 위독할 당초 산천에 기도를 할 적만 해도 축문의 서두에는 의당 어휘를 써야 함에도 자기의 이름을 쓰려고 하였으니, 기도를 진작 설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흉칙한 그 심사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임시 섭정(攝政)의 명령에 있어서는 실로 종묘 사직을 위한 큰 계획에서 나온 것으로, 온 나라 신민이 다같이 알아야 함에도, 자신이 수상으로 있으면서 그에 대한 비망기를 숨긴 채 원임 수상을 내쫓고는 회계를 할 적에 극력 저지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아직 세자 책봉의 비준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섭정을 할 수는 없다고 하는가 하면, 또 뭇 신민의 뜻 밖에서 나온 일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 음흉함에 화가 눈앞에 닥쳐 온 나라가 겁에 질려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천리 밖에서 소를 올려 숨김 없는 직언을 하는 정인홍(鄭仁弘)을 힘입어 간담이 모두 드러나서 도망칠 수 없게 되었는데도, 그는 태연히 변명하고 나서서 변핵(辨탢)할 것을 계청하였습니다. 매와 같고 개와 같은 사당을 사주하여 터무니없는 모함을 꾸며 함정을 설치하고, 옥사를 일으켜 선량한 인사들을 일망 타진하여 다 죽이고서야 그만두려고 하였습니다. 정인홍의 상소에 보인 선량하다는 선비들은 모두가 전하를 보호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 죽이고 난 뒤에는 전하를 어디에다 두려고 하였겠습니까. 이때 종묘 사직은 너무도 위급한 순간이었다 하겠습니다.

급제 김대래(金大來)는 본시 독사같은 성품으로 윤기(倫紀)의 죄를 얻어서 사람의 축에 들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서는 원흉에게 빌붙어 심복을 약속하였기에, 나쁜 모의와 비밀스런 계획을 미리 알지 못한 것이 없었을 뿐더러, 늘 제집에서 사당(私黨)을 불러 모아 차마 옮길 수도 차마 들을 수도 없는 패역(悖逆) 범상(犯上)의 말을 만들어 퍼뜨린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뼈에 사무치도록 괘씸해 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또 정인홍이 소를 올린 뒤로는 정국(庭鞫)의 논의를 오로지 주관하여 기필코 선량한 인사들을 다 죽이려고 하였으니, 그의 흉악하고 잔인함은 그지없습니다. 남의 신하로서 이같은 죄악을 진 이상, 하늘과 땅 사이에 하루도 숨을 쉬도록 놓아두어서는 아니됩니다. 류영경․김대래 등을 모두 법률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명하소서. -中略- 급제 이홍로(李弘老)는 본래 흉험하고 패망한 사람으로 용만(龍灣)에서 올린 소만 해도 언사가 부도덕하고 심적(心迹)이 드러나서 끝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게 되자, 감히 여색에 관한 일로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어서 망극한 계책을 세우는 등, 하도 흉악하고 잔인하여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코 안치를 시키고 말 수는 없습니다. 나국 정죄할 것을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류영경 등은 당초에 이미 참작하여 정죄하였으므로 더 논할 필요가 없고, 기자헌의 일은 대신의 파직이란 역시 중대한 일인데 대접을 어찌 그처럼 너무 심하게 할 수 있겠는가. 번거로운 논의를 말라. 이홍로는 바닷섬 속에 안치하였는데 어찌 꼭 나국을 하여야 된다는 말인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전】31집 338면

 

광해00/08/12(병인)

양사가 이홍로는 나국 정죄하고, 기자헌은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류영경, 김대래는 법률대로 처단할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 김대래 등은 곧 선왕조의 대신이자 시종신이다. 비록 죄가 있기는 하나 이미 북변으로 안치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죄악을 징계하기에는 족하다. 어찌 꼭 법률대로 처단하여야만 되겠는가. 기자헌은 국가에 관련된 죄도 별로 없이 불행히 집안의 변고를 만나 궂은 말을 선동하여 앞뒤로 글발을 올렸다가 죄목에 빠져들었으니, 이는 흉계속에 말려든 것이다. 논의가 너무 지나치다. 홍로의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다 안다. 죄를 들추어 주토(誅討)하려면 어찌 구실이 없겠는가마는, 여색에 관련된 일을 꼬집어 내어 글발에다 써서 사람의 이목을 더럽히었으니, 차마 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차마 듣기조차 못하겠다. 그러나 이미 바닷섬으로 유배한 이상 그냥 둔들 무엇이 나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이홍로, 기자헌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하고, 왕세자의 책례도 속히 거행할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사람을 다스림에 있어서 너무 심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번거로운 논의를 말라. 소상 뒤에 거행하겠다는 뜻으로 종전에 이미 의정하였으니, 아직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원전】 31 집 339 면

 

광해00/08/13(정묘)

양사가 이홍로를 나국하고, 전 좌의정 기자헌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류영경, 김대래를 법률대로 처단할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류영경의 죄목은 조정의 공론에서 나온 것이지 나는 그 일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다. 진하(陳賀)의 일에 있어서는 그때 나는 동궁으로 있고 영경은 사부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선왕의 뜻을 기쁘게 위로하려고 궁관(宮官)을 사부에게 보내어 계청하여 거행하도록 한 것이므로, 이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 이 일은 함께 거론할 필요도 없거니와, 대개 윤허하지 않겠다는 뜻은 이미 다 하유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김대래는 어찌 죽이기까지 하라는 말인가. 기자헌은 파직만도 너무 지나치고, 이홍로는 나국할 만한 일이 별로 없으므로 모두 그냥 두는 것이 옳겠다."하였다. 【원전】 31 집 339 면

 

광해00/08/14(무진)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이미 하유하였으니 그만 번거롭히라고 답하였다.【원전】 31 집 339 면

 

광해00/08/15(기사)

양사가 기자헌은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이홍로는 나국으로 하고, 류영경, 김대래는 의율 처단할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사람을 다스림에는 너무 심하게 할 필요가 없으므로, 법률 적용은 가볍게 시행하였다는 비난을 받는 편이 차라리 더 낫다. 번거롭게 고집을 부리지 말라."하였다.【원전】 31 집 340 면

 

광해00/08/15(기사)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김대래, 이홍로, 기자헌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옛날의 인군들이 상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은 것은 군신 관계를 존중하여서이다. 선왕조의 대신, 재신, 시종신이 비록 죄가 있다고 하기로서니 어찌 다 법률로 다스릴 수 있겠으며, 더구나 그 죄가 국가에 관계되지 않는 자이겠는가. 더더욱 논의할 것이 없다."하였다.【원전】 31 집 340 면

 

광해00/08/16(경오)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행 대사간 송순(宋諄), 사간 류경종(柳慶宗), 장령 윤길(尹?), 지평 김질간(金質幹), 헌납 이성(李惺), 정언 박여량(朴汝樑)이 합사하여, 류영경․김대래․이홍로․기자헌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니, 이미 하유하였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부제학 정협(鄭協), 교리 홍서봉(弘瑞鳳), 수찬 임장(任章)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원전】 31 집 340, 341 면

 

광해00/08/17(신미)

대사헌 정사호(鄭賜湖), 행 대사간 송순(宋諄), 집의 이이첨(李爾瞻), 사간 류경종(柳慶宗), 장령 윤길, 지평 김정남(金正男), 헌납 이성(李惺), 정언 박여량(朴汝樑)․한찬남(韓纘男)이 합사하여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논계한 바가 과중하구나. 그만 번거롭히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원전】 31 집 341 면

 

광해00/08/18(임신)

좌승지 박진원(朴震元)이 정원의 뜻으로,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공론이 엄중하다고는 하지만 사체 역시 큰 것이다. 선왕조에서 의지하고 도와 주던 재신과 시종신을 어찌 차마 갑자기 중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이 이와 같다는 것을 정원은 알라."하였다. 대사헌 정사호, 행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윤길,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합사하여,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부제학 정협(鄭協), 부교리 박사제(朴思齊)․홍서봉(洪瑞鳳), 수찬 임장(任章)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그만 번거롭히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였다. 【원전】 31 집 343 면

 

광해00/08/19(계유)

부제학 정협(鄭協), 부응교 민덕남(閔德男), 부교리 박사제(朴思齊), 수찬 임장(任章)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따를 수 없다는 뜻은 이미 다 하유하였다. 그만 번거롭히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행 대사간 송순, 장령 윤길, 지평 김지남,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합계하여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따를 수 없다는 뜻을 이미 다 하유하였다. 그만 번거롭히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원전】 31 집 343 면

 

광해00/08/20(갑술)

행 대사간 송순, 사간 류경종,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합사하여,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부응교 민덕남, 부교리 박사제, 수찬 임장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을 공론을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이미 하유하였으니 그만 번거롭히라고 답하였다.

예문관 봉교 김성발(金聲發)이 차자를 올리기를,"신이 엎드려 삼사(三司)가 논의한 바를 보건대, 이는 실로 한 나라 공공의 논의인데 호소한 지 열흘이 넘도록 윤허의 소식이 아직도 감감하니, 신의 의혹이 자꾸만 심해집니다. <신이 사국(史局)에 있는 이상 차마 침묵만 지킬 수가 없습니다.> 대저 류영경의 그 흉악한 짓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그 중 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혼자서 마음 아파한 것만을 진술하겠습니다.

지난해 10월의 일입니다. 선왕께서 병세가 위독하시던 날 신이 예비의 사관으로서 궐내에서 대기한바, 11일에 가서 삼공(三公)을 불러들이라는 하교가 내려져서 빈청의 원임 대신들이 창황히 나오는데, 신이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어서 입법한 사관에게 물어본즉, 모른다고만 답하고 두세 번을 물어보아도 끝까지 초책(草冊)은 숨겨버리므로, 수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섭정(攝政)을 전달하는 교지였고 보면 이는 실로 온 나라 신민의 다같은 소원이 이루어진 셈인데도, 영경의 나쁜 위세가 그처럼 사관에게도 자행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때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었겠습니까. 정인홍(鄭仁弘)의 항소(抗疎)가 나온 뒤에는 흉계의 기염이 갈수록 치솟아 화가 눈앞에 닥쳤었습니다. 이때에 성상께서 불안하고 갑갑한 회포를 견디다 못하시어 궁관(宮官)을 보내어 잘 회유하라고 하명하시므로, 신이 설서로 있던 중 회유를 하러 그 집에 간즉, 신하된 자로서 의당 당장 뛰쳐 나와서 왕명을 배수(拜受)하여야 함에도, 영경은 신을 문 밖에 세워 둔 채 오랜 뒤에 나왔으며 말투가 하도 나빠서 마치 믿는 데나 있는 듯하였으니, 음흉하고 불측한 그 꼴상은 말하기조차 처참하였습니다.

심복을 맺어서 흉계를 조성하여 준 자가 진실로 한두 사람이 아니지만, 그 중 김대래가 가장 선두이고, 이홍로의 부도덕한 상소와 결탁한 계획은 말로 다할 수 없어서 세상에 그냥 살려둘 수 없으며, 기자헌은 재차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여 위복(威福)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이끗을 망라하고 원한을 보복하느라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쳤으니, 이는 공론이 날로 격렬하여지는 원인이자 국법으로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확고한 용단을 내리시어 공론을 쾌히 따르소서."하니, 답하기를,"차자를 보고서 공론이 다 같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나 선왕조의 대신이나 재신은 아무리 죄가 있다 하여도 내가 차마 중죄로 다스릴 수는 없다. 이래서 따르지 않는 것이다."하였다. 【원전】 31 집 344, 345 면

 

광해00/08/21(을해)

대사헌 정사호, 행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장령 윤길,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합사하여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부응교 민덕남, 부교리 박사제, 수찬 임장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김대래․기자헌․이홍로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원전】31집 345면

 

광해00/08/23(정축)

부응교 민덕남, 부교리 박사제, 부수찬 김지남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선왕조의 대신과 재신을 함부로 중형에 처할 수 없다. 기자헌은 이미 그 관직을 파면하였으니 논의가 너무 지나치다. 김대래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대사헌 정사호, 행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정언 박여량․한찬남 등이 합사하여,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선왕조의 대신과 재신을 함부로 중형에 처할 수 없다. 기자헌은 이미 그 관직을 파면하였으니 논의가 너무 지나치다. 김대래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31 집 346 면

 

광해00/08/24(무인)

홍문관 부응교 민덕남, 부교리 박사제, 부수찬 김지남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김대래, 기자헌, 이홍로 등을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우(虞)나라 때에도 사흉(四兇)의 죄를 다스림에 있어 귀양을 보내고, 축출을 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등 그 형벌이 일치하지 않았다. 지금 그 중 너무 심한자를 가려내어 이미 중률(重律)로 처치한 만큼, 공론은 이미 시행되었고 민심도 이제는 후련할 것이므로, 그 나머지 사람은 용서하여 주어서 체모를 유지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기자헌은 파직만도 너무 과중하니 번거로이 논집할 것 없다."하였다. 【원전】 태백산본

 

광해00/08/24(무인)

대사헌 정사호, 행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윤길,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한찬남이 합사하여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우나라 때에도 사흉의 죄를 다스림에 있어 귀양을 보내고, 축출을 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등 그 형벌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금 그 중 너무 심한 자를 가려내어서 중률로 처치한 만큼, 공론은 이미 시행되었고, 민심도 이제는 후련하여 졌을 것이므로, 그 나머지 사람은 용서하여 주어서 체모를 유지하는 편이 좋겠다. 기자헌은 파직만도 너무 무거우니 번거롭게 논집할 것 없다."하였다. 【원전】 31 집 346 면

 

광해00/08/25(기묘)

아성 부원군 이산해,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이항복, 행 판중추부사 윤승훈, 우의정 심희수, 청평 부원군 한응인(韓應寅), 해평 부원군 윤근수(尹根壽), 당흥 부원군 홍진(洪進), 연원 부원군 이광정(李光庭), 평천 부원군 신잡(申캈), 진원 부원군 류근(柳根), 완산군 이축(李軸), 예조 판서 박홍로(朴弘老), 전성군 이준(李準), 좌참찬 윤승길(尹承吉), 우참찬 서성(徐픸), 행 대사성 윤국형(尹國馨), 동지중추부사 권희(權憘), 능성군 구성(具宬), 행 사직 이천(李薦), 행 부사용 이정표(李廷彪), 행 부사맹 이문전(李文전)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삼사(三司)가 번갈아가며 글발을 올려 류영경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있으나, 복합을 한 지 열흘이 넘었는데도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나라의 여론이 날로 격렬하여지고 있는데도 천청(天聽)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삼사가 이미 갖추 개진한 이상 신들로서는 다시 더 여쭐 말씀도 없습니다만, 대저 남의 신하로서 이러한 죄명을 지고 나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쉬고 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날 선왕 때에 김안로의 죄가 공론으로 발의되자 즉시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었다가 곧장 사사(賜死)를 하였습니다. 대신을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이 실로 소소한 논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공론이 이미 발의된 뒤에도 곧장 처단하지 않을 경우 뭇 인심이 울분을 품어서 억누를 수 없게 되므로, 뭇사람과 함께 그를 버리는 일은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공론을 쾌히 따라서 국인(國人)에게 답하소서."하니, 답하기를, "류영경이 비록 죄가 있다고는 하나, 그는 바로 선왕조에서 의지하고 도움을 받던 대신인데, 어떻게 갑자기 중형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북방에 귀양을 보낸 것만으로도 그 죄악을 징계하기에는 족하다. 용서하는 것이 좋겠기에 이처럼 따르지 않는 것이다."하였다.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윤길, 지평 이민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 등이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공론이 매우 준엄하고 사람들의 분노가 날로 격렬하여 가고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를 비호하고자 애써 두둔하겠는가. 다만 남의 자식된 도리는 당연히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경이 비록 죄가 있다고는 하나 그는 선왕을 가까이서 보필했던 신하이다. 북방에 유배를 보내었으면 그 죄악을 징계하기에는 족하므로, 형률대로 하라는 계청은 내가 차마 못 들어주겠다. 더구나 기자헌의 일은, 말은 중도에 맞아야 하고 벌은 반드시 죄상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논의가 너무 지나치다. 윤허하지 않는다. 이홍로를 나국한다는 것도 미안스런 일이다. 번거로이 논집하지 말라."하였다.

부응교 민덕남, 교리 박사제, 부수찬 김지남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내가 즉위한 뒤로 선왕조의 대신들이 잇따라 죄를 입고 있는데,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의 마음속으로는 매우 미안하다. 더구나 기자헌은 귀양을 보낼 만한 별다른 죄도 없으니, 번거롭히지 말라. 이홍로는 이미 외딴 섬으로 유배하였으니, 우선 그만두라."하였다. 【원전】 31 집 346, 347 면

 

광해00/08/26(경진)

영의정 이원익 등 2품 이상의 관원들이, 류영경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공론이 비록 준엄하다고는 하나 나로서는 법을 다 시행하지 못하겠다."하였다. 사간 류경종,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 이홍로 등은 그들에게 죄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먼 변방으로 유배를 하거나 바다의 섬으로 안치를 한 것이니, 공론이 이미 받아들여지고 왕법이 이미 시행되었다. 어찌 꼭 죄율을 더 씌워야 된다는 말인가. 기자헌의 죄는 종사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므로 파직만도 이미 지나치다. 그만 논계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를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따르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이미 하유하였으니, 번거로이 논계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1 집 347 면

 

광해00/08/27(신사)

응교 권반, 부응교 민덕남, 부교리 박사제, 부수찬 김지남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으니 그만 번거롭히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집의 이이첨, 장령 윤길,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다. 그만 번거롭히는 것이 좋겠다."하였다.【원전】31집 347면

 

광해00/08/28(임오)

응교 권반, 부응교 민덕남, 부수찬 김지남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공론이 비록 준엄하다고는 하나 나의 심정으로는 차마 못하겠다. 더구나 기자헌은 귀양을 보낼 만한 별다른 죄가 없으므로 아직 따르지 않은 것이다."하였다.

아성 부원군 이산해, 영의정 이원익 등이, 류영경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지금 들으니, 모든 관료들이 다같이 조정에 나와 있다고 하니, 조정에 이론이 없고 국론이 하나로 모아졌다는 것을 알 만하다. 하나 류영경은 선왕조에 있어서는 대신이고 과인에게는 사부를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죄의 경중 대소를 일체 공론에 위임하고 나는 감히 간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먼 변방으로 내쫓은 이상 법은 시행된 셈이다. 어찌 꼭 죄율을 더 씌워야 된다는 말인가. 차마 따르지 못하겠다."하였다.

행 대사간 송순(宋諄)이 아뢰기를,"류영경은 국본(國本)을 위해하려는 음모로 대역 부도한 짓을 하였고, 기자헌은 사람을 해치고 나라를 해치려 인산(因山)을 마음대로 뒤흔들었으며, 이홍로는 터무니 없는 일을 꾸며내어 군부를 모함하였기에, 양사가 복합하여 토죄를 청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그저께 대신의 계사에서 류영경만을 논하고 기자헌․이홍로의 죄에 있어서는 다같이 군상와 종묘 사직에 관계된다며, 마치 논의를 꺼낸 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처럼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대신은 인군에 있어서 팔다리이고 대간은 이목인데, 이목이 살펴서 탄핵하는 일을 팔다리가 서로 승복하지 않고 스스로만 옳다고 끝까지 고집하며 감히 공공의 의논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형편상 언관의 자리에 구차스레 무릅쓰고 있으며 태연히 쟁변만 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침 신이 잇달아 부모의 기신(忌辰)이 들어서 진작 나아와 피혐하지 못한바, 과실이 더욱 큽니다.> 신의 관직을 체척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아성 부원군 이산해,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이항복, 행 판부사 윤승훈, 우의정 심희수, 청평 부원군 한응인이 아뢰기를,"기자헌, 이홍로에 대한 청죄(請罪)가 실로 온 나랏사람의 공론이기는 하나, 류영경의 죄는 더더욱 중대하고 또 대신의 사체(事體)는 대간과 나름대로 구별이 있기 때문에, 그 중차대한 것을 가지고 류영경을 청죄한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대간이 나름대로 논의할 수 있는 일이고, 또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서로 같거나 다른 것을 가지고 혐의쩍어 할 일이 아니므로, 대간이라고 해서 꼭 대신의 의견에 일치시킬 필요도 없고 대신 역시 대간의 의견에 꼭 일치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논의는 애당초 이견이 없어 단지 그 사체에만 의거하여 취사(取捨)를 하였던 것인데이겠습니까. 이번에 대간이 이 일을 가지고 사피까지 하면서 마치 신들과 서로 이견이 있었던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는 신들의 본뜻이 아닙니다. 미안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경들의 생각은 사체를 잘 아는 생각이다. 조정에는 나름대로 언책(言責)의 관원이 있는데 대신이 어떻게 사람마다 다 논할 수 있겠는가. 그 중 중대한 것만을 논의하면 공론은 저절로 확립되는 법이다. 미안하게 여기지 말라."하였다.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윤길,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아뢰기를, "대신의 계사는 류영경만을 거론하여 우선 반드시 그를 율문대로 처단하자고 말한 것인데, 이제 대사간 송순(宋諄)의 인피 계사를 본즉, 대간이 논의한 것을 대신이 함께 거론하지 않는 것이 혐의쩍어서 인피한 것입니다. 신들 역시 이대로 혐의를 무릅쓰고 처치할 수 없습니다. 신들의 관직을 체면하소서."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응교 권반, 부응교 민덕남, 부수찬 김지남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윤길,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 장령 박건이 함께 인혐을 하고 물러났습니다만, 근일 논의한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의 죄는 실로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그 사이에 어떻게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신이 류영경만을 거론한 것은 율문대로 청죄한 그 사체가 더욱 중대하기 때문이었지, 애당초 대간의 논의와 다른 의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간이 이 일을 논함에 있어 어찌 이러한 것을 가지고 피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부모의 사기(私忌)에는 나름대로의 식례가 있는 법입니다. 진작 피혐을 하지 않은 것이 무슨 잘못이 되겠습니까. 자리를 같이하여 논의에 참여한 자이거나 새로 모이게 된 자이거나 역시 피혐할 만한 혐의는 없습니다.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윤길,박건,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을>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1 집 348 면

 

광해00/08/29(계미)

대사헌 정사호가 아뢰기를, "<장령 박건이 밖에 나가 있다가 올라왔으므로 동료 관원으로서 즉시 상회례를 거행하여야 됨에도, 신이 마침 그때에 산증(疝症)이 아주 악화되어 움직일 수가 없어서, 가서 참석하려고 하면서도 끝내 가지 못하였습니다. 연이어 회좌(會坐)를 못함으로 해서 동료가 인혐을 하도록까지 하였으니, 신의 잘못이 큽니다. 그리고> 신이 삼가 어제의 대신 계사를 본바, 류영경만을 논하고 그 나머지 사람은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시 중차대한 사안을 먼저 거론한 것이지, 그 사이에 경중을 두고 취사 선택한 뜻은 없었습니다. 다만 삼사(三司)가 이미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 세 사람의 죄상을 똑같이 논열한 이상, 죄율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군상을 범하고 국가에 관계되는 죄임에는 마찬가지인데, 대신의 체모가 과연 대간과 구별이 있다고는 하나, 어찌 대론(大論)에까지 삼사와 다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백관을 거느리고 올린 계사에서 한 사람만을 논한다면, 그 나머지 두 사람의 청죄는 삼사의 말일 뿐 온 나라의 공론은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너무도 미안한 처사가 아니겠으며, 신들이 어찌 감히 신들의 말을 스스로 공론이라 하며 홀로 논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질병이 아직 조금도 낫지 않아서 동료들과 일시에 사피하지 못하였으므로, 신의 죄상이 더욱 큽니다. <결코 이대로 무릅쓰고 있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관직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행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박건, 윤길,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공론의 준엄함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다만 영경과 홍로를 용서하여 주었다는 것은 죽임을 면제한 것뿐이고, 기자헌은 죄상이 유배할 죄에는 이르지 않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이항복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류영경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경들이 누차 나와서 계청을 하니 공론의 준엄함이 더욱 돋보이기는 하나, 선왕조의 구신(舊臣)을 차마 갑자기 중형으로 다스리지는 못하는 것이 나의 심정이다. 이미 북방에 귀양을 보내었는데, 용서하기로서니 무엇이 나쁘겠는가."하였다. 응교 권반, 부응교 민덕남, 부교리 박사제, 부수찬 김지남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를 공론에 따라 쾌히 처단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31 집 348, 349 면

 

광해00/08/30(갑신)

아성 부원군 이산해, 좌의정 이항복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류영경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경대부들이 다같이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영경만 사사로이 비호할 수 있겠는가. 하나 이미 먼 변방으로 안치한 만큼, 죄악을 징계하기에는 족하므로 사형에서는 용서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대사헌 정사호, 행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박건, 윤길,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계청하니, 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응교 권반, 부응교 민덕남, 부교리 박사제, 부수찬 김지남 등이 차자를 올려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공론에 따라 쾌히 다스릴 것을 청하니, 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다고 합니다. 【원전】 31 집 349 면

 

광해00/09/01(을유)

영의정 이원익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연계하여, 류영경을 법에 따라 처단하라고 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다. 내가 차마 무거운 벌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상정(常情)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경들이 온 나라의 공의(公議)를 토대로 백관을 거느리고 와서 여러 날 동안 정청(廷請)을 하니, 이는 이른바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내가 감히 끝까지 비호하지 못하겠으니, 유배된 곳에서 스스로 자결하여 백성들의 노여움에 사죄하도록 하라."하였다.

<대사헌 정사호,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윤길, 박건, 지평 이민성, 김질간,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합사(合司)하여 류영경, 기자헌, 이홍로 등의 죄를 바르게 집행하라고 청하니, 답하기를,"영경의 죄에 대해 공의가 날이 갈수록 격렬해져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니, 내 어찌 끝까지 비호하겠는가. 다만 선조의 대신임을 생각하여 드러내놓고 중한 법으로 처치하지 못하겠으니, 유배된 곳에서 스스로 자결하여 중외에 사죄하도록 하라. 이홍로의 일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시 국문할 것이 없는데, 어찌 차마 안독(案牘)에 올리어 거듭 사람들의 이목을 더럽히겠는가. 역시 유배된 곳에서 죽게 하여 뒷날의 난적(亂賊)을 경계하라. 기자헌의 죄는 국가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나 불행히 가변(家變)을 만나 그런 것이니, 그 실정을 캐어보면 실로 용서할 만하다. 그러나 공의가 거듭 일어난 까닭에 일찍이 파직하였는데, 지금 와서 죄를 더하는 것은 너무 심한 듯하다. 삼사는 의당 나의 뜻을 알아서 과격한 논의를 진정하여 조정을 편안하게 하라."하였다. 【원전】 31 집 349 면

 

광해00/09/04(무자)

대사헌 정사호,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박건,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한찬남이 아뢰기를,"류영경은 지극히 음험하고 흉악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루도 천지 사이에 살려둘 수 없는데도, 삼사, 대신, 백관들이 여러 날 동안 복합하고서야 비로소 윤허받았습니다. 그러나 정형(正刑)하여 신인(神人)의 분함을 풀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면서, 죄안을 승전하여 입계한 뒤에 머물려두고 내려보내지 않은 지가 지금 3일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죄악이기에 벌써 죽였어야 할 흉악한 자를 이렇게까지 연명시킵니까. 한갓 중외 사람들의 마음이 의아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뜻밖의 환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빨리 밝은 명령을 내리어 신속하게 천벌을 행하소서."하니, 답하기를,"승전하여 입계하였을 때 마침 국기(國忌)와 대치되어 즉시 내려보내지 못하였으며,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그래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직 머물려 두었는데, 지금 내려보내겠다."하였다. 【원전】 31 집 350 면

 

광해00/09/05(기축)

의금부가 아뢰기를,"죄인 류영경을 유배지에서 자결하도록 하였습니다. 전례에 사사(賜死)하는 사람은 의금부의 낭청이 약물을 싸가지고 가서 전지(傳旨)를 유시하고 그대로 사약을 주어 죽게 하였는데, 자결하게 하는 경우는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며, 또 옛일을 들어서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의금부 낭청만을 보내어 전지를 유시하고 자결하도록 해야 합니까? 감히 여쭙니다."하니, 전교하기를,"류영경은 비단 선조의 대신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과거에 사부였다. 공의에 몰리어 내가 끝까지 비호하지 못한다마는, 그렇다고 차마 사약을 내리지도 못하겠으니, 이 계사에 따라 낭청을 보내어 유시하고 자진하게 하라."하였다. 【원전】 31 집 350 면

 

광해00/09/09(계사)

대사간 송순,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윤길, 박건, 지평 이민성, 헌납 이성, 정언 한찬남이 합사하여, 기자헌을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이홍로를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또 아뢰기를,】"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이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여 거의 종묘 사직을 전복시킬 뻔했던 흉악한 모습이 발각되어 스스로 천벌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심복이었던 김대래(金大來) 등도 이미 경중에 따라 정죄되었습니다. 비록 일정한 형벌을 바르게 집행하지는 못하였으나 신인(神人)의 분함을 아주 쾌하게 하였으며, 죄인을 체포하여 종묘 사직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으니, 국가의 다행스러움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위로는 종묘 사직에 고하고 아래로는 팔방에 교시하여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난신 적자는 그 죄를 도망칠 곳이 없음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신들이 듣건대, 중종조에 김안로(金安老)를 정죄한 뒤에 반교(頒敎)하고 진하(陳賀)한 일 등이 있어서, 교서와 전문(箋文)을 환하게 고찰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더구나 영경처럼 대역 무도한 자이겠습니까. 조종조의 고사를 따라 해조에게 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하니,

답하기를,"기자헌은 파직시킨 것도 너무 지나친데, 단지 물론이 거듭 일어나 서로 버티기가 미안한 까닭에 억지로 삭탈의 율을 시행한 것이니, 이 밖에 무엇을 더하겠는가.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 이홍로는 죄악이 환히 드러났으니 무거운 법으로 처치하는 것이 합당하나, 이 사람은 선조(先朝)의 재신이기에 차마 현륙(顯戮)을 가하지 못한 것이다. 논열이 이와 같이 그치지 않으니, 이것은 필시 나의 처치가 공의(公議)에 흡족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니, 이제 죽음을 용서하여 그대로 안치하여야 되겠다. 고묘(告廟)와 반교 등의 일은 전례를 인용하여 할 필요는 없다."하였다. 【원전】 31 집 352 면

 

광해00/09/10(갑오)

정언 한찬남이, 류영경에게 내린 비답을 환수할 것과 비답을 지은 지제교를 사판에서 삭거할 것과 호군(?軍)을 맡았던 내관(內官)을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비답을 환수하고 지제교를 추죄(追罪)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내관은 이미 추고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전】 31 집 353 면

 

광해00/09/11(을미)

<집의 이이첨, 사간 류경종, 장령 박건, 지평 김질간, 헌납 이성, 정언 박여량, 한찬남이> 합사하여, 이홍로는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류영경의 일을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기를 계청하니, 답하기를,"이홍로는 비록 목숨은 살려주었으나 섬 가운데에서 생을 마치는 것이 좋겠다. 잡아다가 국문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 류영경은 이미 그가 지은 죄에 의하여 죽었는데, 어찌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353 면

 

광해00/09/11(을미)

정언 한찬남이, 류영경에게 내렸던 비답을 환수할 것과 지제교를 사판에서 삭거할 것을 계청하니, 이미 유시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원전】 태백산본

 

광해00/09/12(병신)

합사하여<【좌목은 전과 같다.】> 이홍로를 잡아다가 죄를 정할 것과 류영경의 일에 대해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할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이홍로는 우선 그 드러나지 않아 밝히기 어려운 일은 접어두고, 단지 지난날 양사가 피혐하면서 언급한 용만(龍灣)에서 올린 소(疏) 가운데서 몇 조항의 말만을 들어도, 그 마음의 소재는 길에 다니는 사람도 모두 안다. 지금 잡아다가 국문한들 무슨 알아낼 실정이 더 있겠는가. 배소(配所)에서 사사하는 것이 좋겠다.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일에 대해서는 《실록》을 참고하여 처리하라."하였다. 정언 한찬남이, 류영경에게 내린 비답을 환수할 것과 지제교를 사판에서 삭거할 일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선조(先朝) 때 답한 비답을 지금 환수하는 것은 미안스럽다. 지제교를 삭거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원전】 태백산본

 

광해00/09/17(신축)

춘추관의 고계(考啓)를 인하여 전교하였다."류영경의 일을 사당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여 아뢸 일을 해조에 말하라." 【원전】 31 집 355 면

 

광해00/09/22(병오)

양사가 합계하여 아뢰기를,"적신 류영경(柳永慶) 등의 대역 무도한 죄는 신들의 논열에 이미 다하였으므로 감히 다시 세세하게 들지 않겠습니다. 영경 등이 위해(危害)를 꾀했을 때에 종사(宗社)가 망하지 않은 것이 마치 한 털끝을 당기는 것과 같았으며, 전하의 외롭고 위급함은 마치 열 개의 바둑알을 쌓은 것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은 누군들 팔을 휘두르고 크게 부르짖으며 영경의 살 한 점을 씹으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다행히 하늘에 계시는 조종(祖宗)의 혼령이 묵묵히 돕고 음으로 돌봐서 죄인을 체포하여 종사가 다시 편안하여졌으니, 위로는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는 신민에게 유시하여 신인(神人)의 분을 위로함은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예(例)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던 것인데, 유음이 이미 내린 뒤에 곧바로 하지 말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한갓 한 때의 공의(公議)만을 크게 거스른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난적의 죄를 당세에 완전히 들추어 내어 신명(神明)이 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여정(輿情)의 노여움을 풀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 김안로가 국모에게 위해를 꾀한 죄로 중종이 즉시 사사를 명하고, 그대로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등의 일을 행하였습니다. 주(周)나라의 무경(武庚)과 관숙(管叔), 채숙(蔡叔)은 백성에게 난을 부추긴 죄악으로 성왕(成王)이 베어 죽이고는, 선왕에게 고하고 천하에 크게 포고하였습니다. 더구나 영경 등의 죄악이 안로보다 백 배나 더하고 군부에게 위해를 꾀한 것이 무경, 관숙, 채숙보다 더한 데이겠습니까. 조종은 성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먹고 있는데 전하만은 조종의 일을 법으로 삼지 않으시니, 신들은 의혹스럽습니다.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서둘러 거행하도록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중외의 인심이 어찌 사당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한 뒤에야 쾌하겠는가. 하지않아 중도(中道)를 얻는 것만 못하다."하였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류영경의 죄를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은 이미 그 죄에 죽어서 공의가 벌써 시행되고 인심이 위로되었는데, 하필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내린 뒤에야 쾌하겠는가. 큰 예는 모름지기 가볍게 거행할 수 없기에 따르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356 면

 

광해00/09/24(무신)

양사가 합계하여 류영경의 죄를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큰 예는 가볍게 거행할 수 없으니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류영경의 죄를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내릴 것을 청하니,"이미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원전】 31 집 357 면

 

광해00/09/25(기유)

대사헌 정사호, 장령 박건, 정언 한찬남이 아뢰기를,"류영경 등의 죄는 종사(宗社)에 관계되는데 비록 정형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이미 죽었으니,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내리는 일은 옛 전례를 모방하여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일 합계하였는데도 윤허받지 못하여 군정(群情)이 끓어오르고 답답해 하며 공의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물의가 '이것은 사체가 중대하니 합사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여 이 때문에 오늘부터 합사하여 논계하자는 뜻으로, 박건과 한찬남이 어제 대사헌 정사호, 집의 권반, 사간 류경종, 헌납 윤수겸 등에게 편지를 써서 통지하였더니, 모두 알았다고 회답하였습니다. 지금 정사호, 박건, 한찬남은 대궐에 나아왔으나 그 밖의 각원들은 모두 병고(病故)가 있어서 와서 모이지를 못하였습니다. 신들의 성의가 부족하여 이미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고 또 여러 동료들과 회의하지 못하여 막중한 일을 점점 지연시켰으니, 이는 신들이 보잘것없어서 된 소치입니다.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들의 관직을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양사의 성상소가 함께 대궐에 나아가 같은 내용으로 입계하는 것을 합계(合啓)라고 하고, 양사의 많은 관원들이 함께 대궐에 나아가는 것을 합사(合司)라고 하는데, 그 실상은 다름이 없다.】【원전】 31 집 357 면

 

광해00/09/26(경술)

사헌부가 아뢰기를,"류영경의 죄는 종사에 관계되므로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결코 그만두지 못합니다. 합동하자는 의논은 이미 간통을 내었으니 궐하(闕下)에 나아간 이는 별로 지연한 잘못이 없는 것이고, 삼가 살핀 뒤에 마침 병고가 있어서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형편상 그러한 것입니다. 모두 인피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언관을 가볍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대사헌 정사호, 집의 권반, 사간 류경종, 장령 박건, 헌납 윤수겸, 정언 한찬남을 모두 출사하라고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31 집 357 면

 

광해00/09/27(신해)

양사가 류영경의 일을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꼭 해야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삼사의 의논이 이와 같으며 공론도 오랫동안 누를 수 없으니,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31 집 358 면

 

광해00/09/29(계축)

사간원이 아뢰기를,"역신 류영경이 이미 복죄되었으니 이제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일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다만 영경이 대역 무도한 짓을 하여 종사에 죄를 얻었는데 그의 이름이 아직도 훈적에 있으므로, 온 나라의 인심이 몹시 한탄하고 있습니다. 삭훈(削勳)을 명하시고, 이 한 조항을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말 가운데 아울러 삽입하여 신인(神人)의 분함을 쾌하게 하소서."하니,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청림령(靑林令) 고언백(高彦伯) 등은 모두 지극히 흉패한 사람으로서 역적 이진(李콫)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강인하고 거세게 형장(刑杖)을 참아내어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실로 역당의 괴수입니다. 언백의 아들이 교동(喬桐)에 있으면서 제멋대로 드나들어 종적이 비밀스러운데, 청림령의 아들이 도하(都下)에 있어 백성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으며 악한 성미를 함부로 부려 고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악역의 종자를 어찌 가까운 곳에 머물러 두어서 후일 뜻밖의 환난을 끼치게 하겠습니까. 해사로 하여금 모두 곧장 절도(絶島)에 귀양보내어 후회를 끊도록 하소서. 공신은 종사에 공이 있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지금 류영경은 종사의 위해(危害)를 꾀하여 이미 복죄되었으니 실상은 역신입니다. 역신의 이름을 훈적에 그대로 둘 수 없으며 삭훈(削勳)한 이유를 종묘에 고하는 글에 넣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부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삭거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삭훈은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하였다. 【원전】 31 집 358 면

 

광해00/10/01(을묘)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양사의 출사와 류영경 등의 삭훈 문제를 공론에 쾌히 따르기를 청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훈명을 추삭(追削)할 필요는 없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1 집 359 면

 

광해00/10/04(무오)

대제학 류근이 아뢰기를,"국가의 사명(詞命)은 반드시 계하 공사(啓下公事)가 있고 난 다음에 사신(詞臣)이 비로소 말을 만들어 지어내는 것입니다. 지금 예조의 계사에 단지 '죄인 류영경 등이 복죄되었기에 종묘에 고할 길일을 10월 2일로 택하여 아뢴다.'고만 말하였습니다. 교서를 지어낼 때에는 아무래도 범연히 류영경 등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정탈하고 난 뒤에 비로서 지어낼 수 있는데, 신은 어느 곳으로부터 정탈할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사명을 관장하고 있기에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이미 승전을 받들었으니 이를 근거로 지어내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류영경은 한 사람의 역신일 뿐입니다. 정당한 형벌을 내리지 않고 단지 자결하도록 하였으니, 신인(神人)의 분함이 아직 쾌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일이 하루가 급한데 다만 삭훈하자는 청만이 윤허를 받지 못하여 막중한 일을 두고 많은 날짜를 지체하니, 조야의 답답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전고의 일을 두루 보건대 몸에 큰 죄악을 짊어진 자는 갚아야 될 만한 작은 공이 있어도 공신의 대열에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영경이 녹훈에 함부로 기록된 것은 국민들이 아는 바이니, 기록할 만한 공은 없고 당연히 삭거할 죄만 있습니다. 속히 해부에게 명하여 허위 훈적을 삭제하여 깨끗하게 하고, 종묘에 교서를 반포할 교서 내용 중에 그 사유를 아울러 적어 넣으소서."하니, 답하기를,"사람에게 죄가 있을 경우에 죄는 죄이고 공은 공이니, 그 죄 때문에 그의 공을 추삭하는 것은 아마도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359 면

 

광해00/10/05(기미)

양사가 잇따라 아뢰어 류영경의 삭훈을 청하기를 <전과 같이 하고,> 또 신계로 논하기를,"첨지 정예남과 상의원 주부 박제남 등은 모두 잡류로서 한 때의 바쁜 수고가 있었으나, 기록할 만한 일이 별로 없는데도 중한 당상을 더하고 동반(東班)의 정직(正職)을 한 번의 도목정에서 주었으니, 한갓 관직이 분수에 넘칠 뿐만이 아닙니다. 통역관을 정직으로 삼은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니, 이러한 사실을 보거나 듣고 어느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정예남과 박제남을 모두 개정하소서."하니, 답하기를, "류영경은 선조(先朝)에서 책훈하였는데 지금 추삭하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다. 이미 죄를 받아 죽었으니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정예남 등은 참작하여 시상한 것으로 너무 중한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359 면

 

광해00/10/06(경신)

양사가 연계하여 류영경의 삭훈과 정예남, 박제남의 개정을 요청하니, 답하기를,"영경의 훈명은 추삭할 필요가 없다. 정예남은 쌓은 공로가 많고 박제남은 분주하게 수고한 일이 있어서 은전으로 갚은 것이니, 불가하지 않다.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원전】 31 집 359 면

 

광해00/10/07(신유)

부제학 송순, 전한 이이첨, 응교 이지완, 교리 이준 등이 상차하여 류영경의 훈적을 삭제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31 집 359 면

 

광해00/10/07(신유)

양사가 합계하여 류영경의 삭훈을 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의 훈명을 추탈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심한 듯하니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1 집 359 면

 

광해00/10/08(임술)

양사가 합계하여 류영경의 삭훈에 대하여 청하니, 답하기를,"류영경의 훈명은 추삭할 필요가 없을 듯한데 공론이 날로 격렬해지니, 역시 소견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31 집 360 면

 

광해00/10/12(병인)

충훈부가 아뢰기를,"본부 《등록》 가운데 공신으로 삭훈된 자의 죄가 무거우면 그의 영정(影幀)을 경회루(慶會樓)의 남문 밖에서 불살랐다고 하였습니다. 의당 이 예에 따라 류영경의 영정을 가져다가 시어소(時御所)의 외정(外庭)에서 불사르소서. 또 내장(內藏)된 회맹 녹권(會盟錄券)을 꺼내어서 영경과 여러 아들의 성명을 삭거한 뒤에 도로 들여놓으소서. 또 그가 받은 회맹록․교서축(敎書軸)과 전후의 원종 녹권(原從錄券)도 가져다가 그의 성명과 아들, 사위, 형제의 성명을 삭거하고 그대로 본부에 두소서. <이 뜻을 감히 여쭙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31 집 360 면

 

광해00/10/13(정묘)

류영경 등을 정죄한 뒤에 중외에 교서를 내렸다. 그 글에 이르기를,"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춘추(春秋)의 의리에 반역을 다스리는 것이 매우 준엄하나 천지의 자애로움은 만물을 살리는 것으로 주장을 삼기에, 이에 참작하여 자세하게 처리하며 백성에게 호소하기를 곡진히 한다. 난적의 무리가 고금에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마는, 류영경은 흉험하여 꺼리는 것이 없고 음휼(陰譎)이 많아서 밝은 시대를 어지럽히고 오랫동안 권력을 훔쳤으며, 사당(私黨)을 규합하여 몹쓸 귀신의 꾀를 더욱 펼쳤다. 체결을 굳건히 함으로써 세력을 이루고 멋대로 방자하게 굴어 악을 쌓으니,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그럴 듯하게 속임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고, 권력을 제멋대로 농락하여 눈을 휘번득이며 나 이외에 누가 있느냐고 하였다. 진실로 잃을까봐 걱정하면 못할 짓이 없는데 그 유래가 점진적이었으니, 누가 미세했을 때에 변별하겠는가. 신하는 역심(逆心)을 품으면 반드시 베는 것이고, 한(漢)나라의 법은 부도(不道)한 자를 무겁게 다스렸다. 선왕께서 나를 세자로 바르게 정한 것을 생각하고 중국이 나에게 유시한 칙서에 근거하여 잇달아 사신을 보내어 세자에 봉해주기를 청하니, 진실로 온 나라의 지극한 소원이었다. 수상(首相)에 무릅쓰고 앉아서 덮어두고 시행하지 않은 것이 5년을 지냈으니, 그의 정상(情狀)을 어찌 숨기겠는가.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해독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에 발설하지 못하다가 병오년에 조사(詔使)가 올 때에 이르러 백관들이 정문(呈文)하는 의식을 만났다. 비단 몸소 선창하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남의 앞서는 것을 매우 시기하였으며, 심지어 이미 장성한 원손(元孫)도 응당 행하여야 할 전례(典禮)를 저지하였다. 더구나 임금이 편찮으면 신하의 처지에 어찌해야 되는가. 처음에는 내국에 시약하는 청사를 설치하지 않았고, 끝에는 여지없이 패하여 일어날 수 없다는 전지를 걱정하지도 않았다. 독한 약을 과용하도록 맡겨두었고 도리어 대간의 평의를 억제하였으며, 복을 비는 글에는 그의 이름을 쓰려 하였고 전위(傳位)하는 명을 막기에 힘썼다. 어깨를 견주는 여러 재상을 쫓아내어 참여하여 듣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글을 짓는 신하를 사주하여 오랫동안 교서 내리기를 비밀히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였는데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마침 정인홍(鄭仁弘)의 봉장(封章)이 있어 사미원(史彌遠)의 일을 끌어 말을 하기까지 하였다. 문장에 부월(쯘鉞)을 기탁하여 마치 새매가 참새떼를 쫓는 것처럼 하였는데, 곧 상소를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장차 옥사를 일으켜 반드시 죽이려 하였다. 일을 예측하지 못하니 계책을 어떻게 세우겠는가. 나는 곧 궁료(宮僚)를 보내어 직분에 나아가기를 돈유하였는데, 저는 몰래 다른 뜻을 쌓아 거만스럽게 못 들은 체하였다. 선왕께서 애통하게도 승하하신 처음에 사제(私第)로부터 늦게 이르러서는 오히려 국가의 정치를 간여하면서 마치 죄가 없는 사람처럼 하니, 분함은 신인(神人)에게 극도로 올랐고 죄는 실상 종사(宗社)에 관계되었도다.

김대래(金大來)는 개돼지 같은 행실과 뱀, 전갈 같은 자질로, 천륜(天倫)에 득죄함으로 연유하여 사람축에 끼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았다. 저 원흉이 닦고 빚으며 길러서 원흉의 심복과 조아(爪牙)를 만드니, 영경이 아니면 대래가 될 수 없고 대래가 아니면 영경이 될 수 없었다. 길가는 사람들도 지목하니 천지간에 용납하기 어려운데, 오히려 집에 당을 모아 감히 패역스런 말을 멋대로 늘어놓았다. 일찍이 간원에 있으면서 공격하여 제거한 자는 어의(御醫)를 논핵하는 대관이었고, 곧바로 옥당에 들어가서 주장한 것은 선사(善士)를 터무니없이 얽어 정국(庭鞫)함이었다. 영경과 일체로 서로 도왔으니 그들의 죄는 균일하도다. 이에 본년 9월 9일에 김대래는 종성부(鍾城府)의 위리 안치한 곳에서 사사하였고, 9월 16일에는 류영경을 경흥부(慶興府)의 위리 안치한 곳에서 자진하도록 하였다. 인하여 훈적에서 호성 공신(扈聖功臣)의 호를 삭거하도록 명하였다. 예컨대 이유홍(李惟弘), 송보(宋?), 성준구(成俊耈), 이효원(李效元), 류성(柳惺), 구혜(具惠), 남복규(南復圭), 홍식(洪湜) 등은, 혹은 원흉의 조카로서 혹은 원흉의 친한 이로서 혹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혹 종이나 머슴같이 굴며 도깨비처럼 모이어 밤낮으로 경영하였으니, 이 어떤 사람들인가. 먼저 말하는 사람을 쫓아내어 으르렁거리며 화(禍)를 즐거워하고, 대관(臺官)을 물어뜯어서 마음을 쾌하게 하기도 하고, 각자들이 자신의 공이라 하며 국문하는 의논을 담당하여 팔을 휘젓기도 하였다. 의당 모두 사방의 먼 끝 지방으로 쫓아내어야 하므로 이미 삼위(三危)에 귀양보내어, 이유홍, 송박, 성준구, 이효원을 모두 위리 안치하고 류성, 구혜, 남복규, 홍식은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송언신(宋言愼), 이경기(李慶祺), 이정(李瀞), 박해(朴海), 이선행(李善行), 허욱(許頊), 최천건(崔天健), 성영(成泳), 송응순(宋應洵), 송준(宋駿), 류영근(柳永謹), 이덕온(李德溫), 황섬(黃暹), 류업(柳업), 신광립(申光立)의 경우는, 아비의 세력으로 전랑 자리를 억지로 차지하기도 하고 족속의 덕으로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오르기도 하였다. 인아(姻햡)의 인연으로 분수에 넘치는 청요직을 욕되게도 하고 덮어주고 적셔주는 도움으로 함께 재상에도 올랐다. 번갈아가며 헌장(憲長)․전장(銓長)이 되어 원흉의 기세를 빚어서 이루기도 하고, 분수에 넘치게 언관(言官)․사관(史官)에 섞여서 원흉의 지휘를 받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류는 등급을 나누어 죄를 주어야 되기에, 송언신은 관작을 삭탈하여 시골로 내려보내고, 이경기․이정․박해․이선행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여 동성문 밖으로 출송하고, 최천건․성영․송응순․송준․이덕온․류영근․황섬․류업․신광립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였다. 김안로를 사사한 일은 국모의 위해를 꾀함에 연유하였는데, 지금의 악역은 삼흉(三兇)보다 심하나 나의 토죄는 가벼운 법에 그쳤도다. 나머지는 모두 묻지 않겠으니 행여 스스로 안심할 것이다. 아, 조정이 청명하여졌으니 함께 외경의 아름다움에 이를 것이고 국세가 공고하여 영원히 아름답게 되기를 바라노라. 이에 교시하노니 아마 모든 것을 알았으리라."하였다. 【대제학 류근(柳根)이 제진(製進)하였다. 류영경이 7년 동안 권력을 잡아서 선류(善類)를 쫓아내고 간사한 무리를 진출시키니, 중외가 미워하고 원망한 지 오래되었다. 세자에게 위해를 꾀한 자취에 있어서는 현저하게 드러난 것을 보지 못하였으나, 정인홍의 상소가 한 번 올라오자 대역(大逆)을 얽어 만들었으니, 이 교서에서 나열한 것은 모두 대론(臺論)을 주워모아서 만든 말이다. 예컨대 시종 영경의 우익이 되어 갑자기 전형(銓衡)을 차지한 이로 최천건 같은 이가 없었으나, 천건은 정창연(鄭昌衍)의 혼가(婚家)로서 귀양가거나 죽음을 면하였고, 이효원과 함께 대장(臺長)이 되어 인홍 등을 탄핵하여 공격한 사람에 박승종(朴承宗)이 있으나, 이이첨(李爾瞻)의 혼가로서 삭출을 면하였다. 김대래는 늦게 진출하여 잠시 등용되었으니 송박 등에 견주어 가벼운 듯한데, 외롭고 한미한 까닭으로 영경과 같은 형률을 받으니 식자들은 애석하게 여겼다.】 【원전】 31 집 360 면

 

광해00/11/11(갑오)

충훈부가 아뢰기를," '고언백(高彦伯)․박명현(朴名賢)은 역적의 심복 장수였는데, 흉포하고 모질어 자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그대로 훈적(勳籍)에 둘 수 없다. 모두 그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라.'는 일로 본 충훈부가 승전을 받들었습니다. 청컨대 류영경(柳永慶)의 예대로 고언백․박명현의 영정(影幀)을 가져다 시어소(時御所)의 외정(外庭)에서 불태워버리소서. 그리고 안에 간직된 회맹록(會盟錄)을 내다가 언백과 명현의 성명과 그들의 여러 아들들의 성명을 삭제한 뒤에 다시 안으로 들여놓도록 하소서. 또 그들이 받은 회맹록과 교서축(敎書軸), 그들이 전후에 받은 원종 녹권(原從錄券)과 아들․사위․형․아우․조카들의 원종 녹권도 가져다 그들의 성명과 그들의 아들, 사위, 형, 아우, 조카들의 이름을 삭제한 다음 본 충훈부에 두소서. 이 뜻을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태백산본

 

광해00/11/12(을미)

살펴보건대 나덕윤은 본디 호남의 호족으로 향리에 살며 불법을 많이 저질렀고 김우성(金佑成)과 한패가 되었다. 처음에 류영경(柳永慶)에게 빌붙었다가 영경이 쓰러지자 다시 이이첨에게 빌붙었고, 뒤에 김우성과 사이가 벌어졌다. 그의 논의가 대체로 수시로 반복되었다. 【원전】 31 집 368 면

 

광해00/12/20(계유)

돌아보건대, 그가 무함을 입게 된 원인은 박성(朴惺)과 문경호(文景虎)의 소에서 발단된 것이었으나 이것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전해 들은 말들이었고, 죄안(罪案)에 얽어 빠뜨린 것은 사실 류영경(柳永慶)이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삼사의 벼슬아치들이 혹은 사직소를 내기도 하고 혹은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삼사가 텅 비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끝내 그 논의에 찬성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단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해서 그랬을 뿐이지, 반드시 모두가 성혼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혼이 죄를 입은 것에 대해 지극히 통탄스럽게 여기는 것은 백성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원전】 31 집 378 면

 

광해01/02/14(병인)

지평 정광성(鄭廣成)이 아뢰어 이승업을 정배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예빈시 주부 이우신(李禹臣)은 본디 천한 무리로, 류영경(柳永慶)의 권세에 의지하여 거리낌없이 방자한 꼴은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작년 정월에 대행 대왕께서 홍문관에 《유합(類合)》 등의 서책을 내려 글씨 잘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등사하게 하시고서, 등사를 시작하는 날에 또 거듭 㰡등사한 사람의 성명 및 등사한 장수를 자세히 아뢰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우신은 사관(寫官)으로서 가장 늦게 와서는 곧 '류 정승이 정인홍(鄭仁弘)을 변론하는 소를 올리는데 반드시 내가 와서 소를 쓰기를 바라니, 결코 이 곳에 머물러 책을 등사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관원(館員)들은 그의 말에 화가 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으나, 오히려 사체를 자세히 깨우쳐 주며 몇 자만이라도 쓰고 가라고 권하자, 그는 발끈 화를 내며 '나도 안다. 그러나 나는 영상의 분부만을 따를 뿐이니 어찌 전교를 돌아보겠는가.' 하고서 끝내 한 자도 쓰지 않은 채 옷자락을 떨치고 돌아갔습니다. 비록 옥당의 보통 서역(書役)도 그렇게 할 수 없는데, 그가 이미 상의 분부가 간곡하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감히 이와 같이 하였으니, 권신(權臣)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을 무시하고 국법을 모멸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국문해서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순양 부령(順陽副令) 이흔(李昕)은 사람됨이 패악하고 망령되어 국상 초에 음란하고 방종한 일이 있었으니 파직하소서. 양산 군수(梁山郡守) 이숙명(李첻命)은 사람됨이 분수를 넘어 오로지 가렴주구만을 일삼아 쇠잔하고 피폐한 고을이 날로 텅 비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도 관직에 두어서는 안 되니 파직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이우신은 파직하라.>"하였다. 【원전】 31 집 396 면

 

광해01/03/15(병신)

사간원이 아뢰기를,"국가가 군병을 설치한 것은 안으로는 서울을 숙위하고 밖으로는 변방을 방어하기 위함이니 그 원대한 계획이 진실로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中略- 그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더욱 자세히 강구해서 꾀를 부려 군역을 피하고서 편안히 놀고 있는 무리들을 조사해 찾아내어 궐군(闕軍)에 충정(充定)하게 하소서.

류영경(柳永慶), 고언백(高彦伯), 박명현(朴名賢) 등을 이미 훈적(勳籍)에서 삭제했으니, 그 사패 노비(賜牌奴婢)도 본사와 본관으로 돌려주는 것이 마땅한데, 충훈부가 계청하여 본부로 이속(移屬)한 것은 매우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내외 관사가 한결같이 탕진된 이 때를 당하여 한 사람의 노비도 관계가 있으니 훈작을 삭제한 사람들에게 내렸던 사패 노비를 일일이 본사와 본관에 환속시키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1 집 404 면

 

광해01/03/17(무술)

【사신은 논한다. 기협은 류영경(柳永慶), 기자헌(奇自獻), 허욱(許頊)의 문에 붙어 그들을 아비처럼 섬기다가 3흉(兇)이 패망함에 미쳐서는 직접 배격하였으니, 간사하고 반복 무상(反復無常)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자이다.>】 【원전】 31 집 404 면

 

광해01/03/26(정미)

【사신은 논한다. 당초의 화의(和議)가 진실로 사설(邪說)이었으니, 적이 물러간 뒤에 대의에 의거해 절교할 만했는데, 기미(羈縻)한다는 핑계로 다시 사설을 주창하여 수적(讎賊)과 서로 교통하여 왕래하니, 이는 모두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의 죄이다.】 【원전】 31 집 407 면

 

광해01/06/24(계유)

강홍립(姜弘立)을 우윤으로, 조정립(趙正立)을 집의로,【배수(拜受)하지 않았다.】 김지남(金止男), 이욱(李稶)을 장령으로, 임장(任章)【사람이 간교하고, 류영경(柳永慶)의 문하에서 발신(發身)하였다. 송석경(宋錫慶) 등이 허준(許浚)을 논핵할 때 정언으로 있으면서 변해가는 상황만 쥐처럼 엿보았다. 그가 피혐하는 말에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初不知]'라는 말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지목하여 말하기를 '초부지 대간(初不知臺諫)'이라고 하였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원전】 31 집 439 면

 

광해01/08/01(기유)

증광 별시(增廣別試)의 감시(監試)를 거행하였다.【선조 계묘년 감시 때 시관 이성길(李成吉)은 자신이 시지(試紙)에다 '근봉(謹封)'이란 두 글자를 써서 미리 그 친구인 이정험(李廷험)의 아들에게 주었고, 시관이 되어서도 역시 사정(私情)을 많이 부렸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다. 법으로는 마땅히 파방(罷榜)을 해야 했는데 류영경(柳永慶)의 아들 업(忄業)이 장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파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관이 아뢰어 이후로는 감시의 경우도 주초(朱草)로 바꾸어 쓰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을사년과 병오년의 두 과거 시험에서는 모두 바꾸어 썼다. 그러자 유생들이 대부분 필법(筆法)에 힘쓰지 않았는데, 이때 이르러 더욱 심해지자 대관(臺官)이 또 아뢰어 바꾸어 쓰는 법을 혁파하였다. 그러자 사대부의 자제들이 관아의 글씨 잘쓰는 하리(下吏)들을 서로 다투어 차지하여 대필시키려고 하니, 헌부에서 이 날 그들이 과거장에 들어왔는지의 여부를 적발하였다. 그러나 외람되고 잡스러운 폐단은 더욱 심해졌다. <아, 사습(士習)을 먼저 바로잡지 않고 그 말단을 다스리고자 하니, 헌부가 능히 법을 집행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심이 이러하고 국가의 기강이 이러하니, 세상의 쇠란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원전】 31 집 445 면

 

광해01/08/07(을묘)

경상도 관찰사 강첨(姜籤)이 치계하기를,"본도 우도(右道)의 유생 이명경(李明?) 등 98명이 연명으로 글을 올리기를 '삼가 생각건대, 만약 류영경(柳永慶)이 죄가 없는데 원통하게 죽은 것으로 여긴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신임 도사(都事)인 조명욱(曺明홸)은 원흉(元兇)의 새매와 사냥개 같은 자입니다. 이제 장차 여러 선비들의 과거시험을 주관하게 되었으니, 실로 이것은 성상의 도량이 포황(包荒)하며 천지(天地)가 장질(藏疾)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원흉이 이미 그 죄를 받았으니, 그 새매와 사냥개 노릇을 한 자는 그 처벌을 모면한 것만도 다행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임시로 선처를 하여 선비들을 욕되게 함이 없다면 마땅히 함께 과장에 들어가 성덕(盛德)의 시대에 인재를 선발하는 뜻을 받들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한 해를 늦게 과거에 이름을 올릴지언정 결단코 이 사람이 선발하는 시험의 거자(擧子)는 되지 않겠습니다.' 하였습니다. -中略- 문과 초시(文科初試)는 또 오는 8월 16일로 결정되었으니, 부득이 서둘러 조치를 해야만 제때에 과장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서둘러 결정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이조에 계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조명욱은 본래 사벽(邪僻)한 자로 류영경에게 붙어서 청현직을 차지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던 날 마침 정언으로 있으면서 그 상소를 지적하여 흉참하다고 하였으니, 왕법(王法)으로 그 죄를 따진다면 마땅히 북쪽 변방으로 내침을 받아야 할 것인데, 류희분의 집안과 결혼을 한 이유 때문에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다. 조정이 공의(公議)를 고려하지 않고 그를 좌막(左幕)의 직책으로 삼아 선비들을 선발하는 일을 맡도록 했는데, 대관(臺官)들은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못하였으니, 이는 류희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남의 선비들이 유독 정기(正氣)를 세워 그의 거자가 됨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니, 역시 아름답지 않은가.】> 【원전】 31 집 445 면

 

광해01/08/08(병진)

류공량(柳公亮)을【류영경의 무리이며 남이공의 심복이다.】형조 참판으로,【예방 승지(禮房承旨)로 두 번이나 조사(詔使)를 지냈기 때문에 특명(特命)으로 임명한 것이다.】 윤휘(尹暉)를 좌승지로, 이정험(李廷?)을 보덕으로, 윤양(尹讓)을 집의로, 최기남(崔起南)을 부교리로, 김치원(金致遠)을 정언으로 삼았다. 【원전】 31 집 446 면

 

광해01/08/15(계해)

경기 감사 김신원(金信元)이 치계하기를,"도내 여주에 사는 사간 윤효선(尹孝先)은 병이 무거워 상경을 하지 못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요즈음 조정 신하들의 출처(出處)를 보건대 조정립(趙正立)과 윤효선【효선은 기자헌(奇自獻)의 심복으로 간사한 자의 우두머리이다.】 등이 모두 기꺼이 벼슬하고자 하는 생각들이 없으니, 내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러한지 모르겠다. 처음 왕위에 올라 바른 정치를 도모하는 지금 인재를 내버림은 매우 불가하니, 그로 하여금 병을 조리하여 올라오도록 하라."하였다.【살펴보건대 조정립은 선조(宣祖) 말년부터 향리에 물러나 살면서 시종 벼슬을 사양하였다. 윤효선은 본래 유자로 명성이 났으나 류영경(柳永慶)․기자헌 등과 교제를 맺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실패한 뒤에는 또 류희분과 박승종(朴承宗)에게 아첨하여 스스로 광해군을 보위한 공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류희분과 박승종이 이이첨에게 배척당하자 또 이이첨에게 붙어 이리저리 잘 보여 오랫동안 화려한 관직을 차지하였다. 간사하고 반복 무상함이 이와 같으니, 조정립 등과 대등하게 놓을 수 없다.】 【원전】 31 집 448 면

 

광해01/08/23(신미)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일곱 살에 능히 글을 지으므로 신동(神童)이라 불리웠다. -中略- 한때의 간사하고 탐욕스런 무리들로, 임국로(任國老), 홍여순(洪汝諄), 송언신(宋言愼), 이각(李覺), 정인홍(鄭仁弘), 류영경(柳永慶) 등으로부터 나아가 삼창(三昌)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비록 서로 갈라져 공격하기도 하고 시종 어긋나기도 하였지만, 궁내의 총애받는 자들과 결탁하여 선류(善類)를 배척 모함하는 것은 대체로 모두 이산해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원전】 31 집 449 면

 

광해01/09/21(기해)

헌납 임장이【류영경(柳永慶)의 문객(門客)이요, 기자헌(奇自獻)의 심복으로 얼굴을 바꾼 자이다.】 아뢰기를,"어제 본원에서 제좌(齊坐)하여 '능해군 구성은 사림에 죄를 얻어 특진관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아 초안을 갖추었는데, 성상소(城上所)가 예궐(詣闕)한 뒤 집에 있던 동료의 의견이 같지 않아 입계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언관에 자리에 있으면서 동료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여 공의(公議)가 펴지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신은 본디 두통과 이롱증(耳聾症)을 앓아 왔는데 어제 마침 침을 맞느라고 동료들과 함께 와서 피혐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잘못이 큽니다. 태연하게 그대로 직책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여 내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물러가 기다렸다.】【원전】 31 집 455 면

 

광해01/09/21(기해)

집의 민덕남이【사람됨이 용렬 비루한데, 류영경과 기자헌이 정권을 잡았을 때, 청현의 직책을 차지했다.】 아뢰기를, "구성이 선비를 죽인 죄는 비록 백 년이 되더라도 실로 용서하기 어려워, 사림에서 오래될수록 더욱 통분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구성이 어찌 죄없는 재상의 반열에 끼여 경연의 자리에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구성을 공격함은 그 사이에 별로 다른 뜻은 없고, 오직 한줄기 공의(公議)를 부지하여 훗날 착한 선비들을 해치는 재앙을 막고자 해서입니다. 간원에서 논한 뜻은 실로 여기에서 나온 것인데, 정언 조희일의 피혐하는 말에는 편호하고 저지한 잘못이 없지 않았습니다. 처치하는 말은 그 잘못을 곧바로 들지 않아서는 안 되기에 신이 이 뜻으로 편지를 보내 통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동료들이 이 일 때문에 피혐을 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하게 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여 내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물러가 기다렸다.】 【원전】 31 집 456 면

 

광해01/10/26(갑술)

정인홍이 왕의 편당을 증오하는 유지가 이이첨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이런 논의를 하여 지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난리를 당하여 매우 걱정하고 정성을 다해 울부짖었다는 것은 바로 이이첨 등이 류영경(柳永慶)을 공척한 일을 지적한 것이다. 【원전】 31 집 463 면

 

광해01/11/30(정미)

남이공(南以恭)을<【지난 경자년 사이에 김신국(金藎國)과 붕당(朋黨)을 지어 조정을 마음대로 농락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을 지목하여 김․남(金南)이라고 말하였는데, 근래에는 박이서(朴彛敍)와 일을 함께 하므로 사람들이 또 남․박(南朴)이라고 일컬었다. 이조 판서 이상의(李尙毅) 이하가 그들의 지휘(指揮)를 받았다.】> 대사간으로, 최관(崔瓘)을<【사람됨이 조심스럽고 성실하여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였다.】> 부제학으로, <민인백(閔仁伯)을【탐욕스러움이 만족이 없었다.】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민경기(閔慶基)를【류영경(柳永慶)의 남은 졸개이다.】 영덕 현령(盈德縣令)으로,> 이경함(李慶涵)을 호조 참판으로, 홍경신(洪慶臣)을<【온화하고 아담하였다.】> 호조 참의로, 이수광(李첱光)을 도승지로, 윤경립(尹敬立)을 병조 참의로, 윤공(尹珙)을 사서로, 소광진(蘇光震)을 겸문학으로 삼았다. 【원전】 31 집 471 면

 

광해02/02/03(기유)

홍식(洪湜)이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홍식은 홍 귀인(洪貴人)의 오빠이고 홍여순(洪汝諄)의 조카인데, 위인이 탐욕스럽고 용렬하였다. 처음에 여순과 함께 남이공(南以恭) 등을 있는 힘을 다하여 공격하더니, 여순이 패하고 류영경(柳永慶)이 남이공의 당으로서 국정을 맡자, 도리어 경망스럽게 그에게 빌붙어서는 종처럼 섬기며 말하기를 "내가 전날에 했던 일은 잘못 귀신에게 홀려서였다."하였다. 그리고 탑전에서 김대래와 남이공의 원통함을 아뢰기까지 하였으니,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그의 처사가 이와 같았다. 그는 여동생이 후궁이 되고 아들이 옹주에게 장가를 들자, 임금의 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더하려고 벗을 불러 모으고 동아리를 끌어들여 조정을 흐리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㰡류영경에게 3명의 양자가 있는데 김대래(金大來)․이유홍(李惟弘)․홍식(洪湜)이다.㰡 하였다. 【원전】 31 집 489 면

 

광해02/02/08(갑인)

전라도 관찰사 박승종(朴承宗)이【류영경(柳永慶)의 당인으로 요행히 화를 면했다.】 치계하기를,"금구(金溝)에 사는 노인 최희연(崔希延)은 지금 75세인데, 무신년 2월 국상(國喪)이 난 처음에 관문(官門)에 이르러 거애(擧哀)하고 성복(成服)한 다음, 따로 한 칸의 집을 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수를 차려놓고 망곡(望哭)을 하는 등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아 한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진실로 가상한 일입니다.

무안현(務安縣)에 사는 사노 비내(非乃)는 지금 나이가 80인데 선왕이 승하하신 뒤로부터 최마복을 지어 입고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하고 있으니 그 정성이 가상합니다. 무지한 백성으로서 나이가 모두 70, 80세에 몸소 국상에 복을 입기를 이와 같이 하였기에 감히 계달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이 서장(書狀)을 보니 매우 가상하다. 잘 헤아려서 포장의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31 집 493 면

 

광해02/02/08(갑인)

민덕남(閔德男)을 사간으로,【덕남의 사람됨은 용렬한데 류영경 때는 오랫동안 청반(淸班)에 있었고 지금은 류희분에게 빌붙어 시망(時望)이 더욱 중해졌다.】 류경종(柳慶宗)을 집의로,【류경종은 전에 간관이 되었을 때 허준(許浚)의 일을 논하려 하다가 김대래(金大來) 등에게 배척당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청반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류희분(柳希奮)을 이조 참판으로,【류영경 때부터 늘 청반에 있었는데 상이 즉위하자 그 권세가 막강해졌다. 그러나 정창연(鄭昌衍)이 전조(銓曹)의 장이고, 각각 당여를 두고 있으므로 희분이 누차 요직을 사양해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아전(亞銓)이 되자 다시 사양하지 않으니, <권세가 다 그 사람에게로 돌아 갔다.> 대저 왕이 즉위한 뒤에 전조는 정창연 부자와 류희분 형제가 서로 주고받는 자리가 되었으나 왕이 둘 다 용인해 주었으니 <시정을 알 만하다.>.】 오억령(吳億齡)을 병조 참판으로, 최현(崔晛)을 지평으로, 류희량(柳希亮)을 전적으로 삼았다. 【원전】 31 집 493 면

 

광해02/02/11(정사)

류경종(柳慶宗)을 동부승지로, 윤양(尹讓)을 집의로, 김지남(金止男)을 부교리로, 이극신(李克信)을 태안 군수(泰安君守)로 삼았다.【성질이 음험하고 탐학스러웠다. 류영경에게 빌붙어 갑자기 전랑 벼슬을 얻고 나서는 세력을 믿고 날뛰면서 기염을 부렸고 함부로 추악하고 더러운 짓을 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자 사간 최유원(崔有源)이 논핵하였으니, 자기편 속에서도 흡족하지 못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전】 31 집 495 면

 

광해02/03/09(을유)

윤방(尹昉)을 경기 감사로, <윤선(尹銑)을 종부시 정으로,> 이호신(李好信)을 집의로, 윤양(尹讓)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윤양과 김대래(金大來)는 모두 류영경(柳永慶) 시절의 명사(名士)였다. 윤양이 일찍이 대래더러 부황하고 행검(行檢)이 없다고 탄핵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대래가 다시 청반(淸班)에 오르자 시론(時論)은 둘 다 그대로 두었고 윤양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래가 영경을 위하여 허준(許浚)에 대한 일로 피혐하자, 윤양이 여기에서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대래는 죽게 되었으나 윤양의 청망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당초 류영경의 당(黨)을 소북(小北)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소북 중에 또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이 있었다. 대개 그 중에서 다소 강직하여 스스로 염치가 있다고 하는 자를 사람들이 청북이라고 칭하니 윤양과 같은 무리였고, 그 나머지를 탁북이라고 이르니 대래와 같은 무리였다. 류영경이 국가의 일을 담당하였을 때에는 형적(形跡)이 서로 다르지 않았었는데, 그가 패하고 나자 그의 죄를 논핵하였으니 그 계책이 치밀하다 하겠다. 지금 나와서 조정의 권력을 잡은 자들은 대개 이른바 청북이고 그 중에 혹은 탁북으로서 청북에 간 자가 있으니, 의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영경의 잔당이라고 한다.】 【원전】 31 집 506 면

 

광해02/03/21(정유)

류영경(柳永慶)은 오래도록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어진이를 해치고 국가를 병들게 하였다. <선왕(先王)께서 병이 심할 때에 현저하게 세자에게 불리하게 한 자취가 있으니, 인심이 일제히 울분하고 국론이 더욱 격분하였으나 권세에 눌려 그 죄를 성토하는 자가 없었다.>【장차 세자에게 불리하다는 말이 있으니,】 인홍이 은밀히 내지(內旨)를 받들고 항소(抗疏)를 올려 즉시 배척하니, 그 말이 준엄하였다. <임금을 진동시켜 간사한 싹을 미리 꺾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장하게 여기고 전일에 호응하지 않던 자도 그가 자신을 잊고 직언(直言)한 것에 대하여 모두가 승복하였으나 또한 혹자는 그가 미리 시사(時事)를 점쳐 감정을 풀고 곧은 이름을 팔려는 자라고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주상(主上)이 왕위를 계승하여 기축(機軸)이 크게 변하자, 인홍의 명성과 세력이 더욱 떨치고, 총애가 융성하여 다시 뽑아 이공(貳公)을 삼고 임금의 부름이 잇따랐으니, 인홍도 <또한 심히 사양하지 아니하고 일찍이 두 번이나 서울에 이르러 장차 벼슬을 하려는 자처럼 하였으나 시론(時論)이 갈래가 많고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으며 보좌하는 자도 또한 매우 많지 않으니 마침내 떠나갔다.>【인홍의 뜻은 대신 이덕형(李德馨)의 무리를 모두 제거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고, 또 왕이 아울러 류씨(柳氏)를 포용하기 때문에, 벼슬에 나아가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멀리서 이이첨의 큰 세력이 될 뿐이었다.】【원전】31집 512면

 

광해02/12/21(임진)

조탁(曺倬)이 《국조보감》을 진상하니, 상이 표범 가죽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국조보감》은 우리 조종조의 책이다. 상이 보고 싶어하였는데, 조탁이 마침 집에 보관해 오던 것이 있어 진상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조종의 《보감》 전서(全書)를 보니 매우 흐뭇하고 기쁘다."하고 인하여 표범 가죽을 하사하였다. 조탁은 이때에 우승지로 있었는데, 류영경(柳永慶)의 잔당(殘黨)으로서, 왕의 외척과 혼인을 맺은 관계로 지금까지 청로(淸路)에 적을 두고 있었다. 얼마 전 과거를 주관하면서 사정을 쓴 일로 엄중한 탄핵을 입었다. 대간의 평은 비록 그쳤지만 나라 사람들의 말은 아직 그치지 않았는데, 감히 태연히 임금에게 가깝고 친밀한 자리를 맴돌고 있으니, 수치를 모르는 자라고 사론(士論)이 비난하였다. 【원전】 31 집 591 면

 

광해02/12/22(계사)

오윤겸은 온후하고 <공손, 근면하며> 단정하고 <화락, 단아하며> 집안에서는 효성스러웠다. 관직에 임하여서는 청렴하고 근면하였으므로 온 세상의 <벼슬아치가> 존중하였다. <윤양은 흉적(兇賊)이 권력을 휘두르던 날에 홀로 서서 과감히 말하여 대래(大來)의 짐승과 같은 행동을 탄핵하였으니, 말이 비록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사론(士論)이 통쾌하게 여겼다.> 이덕형은 이희분(李希奮)과 친구 사이로 번번이 말망(末望)으로 낙점(落點)을 받았다. 사람됨이 온아하였으나 줏대가 없었으니, <대개 아첨하는 무리이다.> 류색은 류영경(柳永慶)의 친척이다. 류영경이 권력을 휘두르던 때에 사람들은 다 위세에 눌려 아첨하여 붙었으나, 그는 능히 현요직을 사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원전】 31 집 592 면

 

광해02/12/28(기해)

형조 판서 박승종(朴承宗)이 세 번째 사직서를 내니 휴가를 더 주었다. <국가의 제도는> 대신이 아닐 경우 세 번 고하면 체직하는 것이 전례인데, 체직하지 않고 휴가를 더 주었으니, 이는 특별한 은전이다. 승종은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의 잔당이다. 뭇 소인배들이 처벌되던 날에, 요직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리던 자의 인척으로서 쫓겨나는 벌을 면하였으므로, 당시에 이미 법망에서 빠져나갔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승종이 스스로 여론에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권세를 이용함으로써 꽤 은총을 받았으니, 남백(南伯)의 제수와 서전(西銓)의 임명이 다 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원전】 31 집 597 면

 

광해03/03/29(기사)

이에 앞서 조정에서 부사용(副司勇) 한교(韓嶠)가 병사(兵事)를 잘 안다는 이유로 그로 하여금 서변(西邊)에 가서 조련에 대한 일을 함께 논의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도성으로 돌아와 상소하기를,"수레, 기마병, 보병으로 오랑캐를 방어하는 법은 본래 중국 사람 척계광(戚繼光)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中略- 갑오년과 을미년 사이에 조정에서 혹 상의 하교로 인하여 성혼에게 벌을 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의 영상 류성룡(柳成龍)이 극력 저지하였고, 임인년에 이르러 류영경(柳永慶)이 정권을 잡은 후에 영남 유생 문경호(文景虎) 등이 서울에 와서 상소하여 성혼이 최영경(崔永慶)을 무함하여 죽였다고 하자, 이에 시론이 다투어 일어나고 안팎에서 부화뇌동하여 거의 깨뜨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영경의 옥사는 성혼이 파주로 돌아간 지 한참 뒤에 일어났고 또 종종 엄폐하기 어려운 다소의 명백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선왕께서 그것이 무함이었다는 것을 살피어 관작을 삭탈하고 단지 옆에서 나온 얘기에 근거하여 성혼의 죄를 정했는데, 류성룡이 극력 저지하였던 말과 류영경이 부화뇌동한 자취는 모두 신이 듣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홍로가 처음 그 말을 지어냈고 영경이 마침내 그 죄를 만들었으니 어찌 유림의 통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성혼의 원통함을 씻어주소서. 그러면 유독 사문의 다행일 뿐만이 아니요, 경대신, 체군신, 자서민의 도리에 있어서도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소의 내용은 모두 살펴보았다.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성혼의 일은 사람마다 쉽게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하였다. 【원전】 31 집 615 면

 

광해03/04/12(신사)

지평 박여량(朴汝樑)이 아뢰기를,"얼마 전 좌찬성 정인홍이 올린 차자는, 그의 스승 조식(曺植)을 노장(老莊)이라고 하는 변론을 밝히려고 하다 보니, 언사가 이일저일 언급하게 되어 이에 이른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봉차(封箚)를 채 봉입하기도 전에 등본(謄本)이 먼저 새어나가 사람들의 이목에 전파됨으로써, 서울 안이 시끌하고, 그 결과 관학의 유생들이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사설(邪說)이라고 공박하기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청금록》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은 바로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에게 시행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인홍에게 시행하다니, 인홍의 죄가 과연 여기에 이르렀습니까. 신은 실로 소시에 인홍을 스승으로 섬기어, 의리상 군부(君父)처럼 그를 섬겨야 될 처지인데, 어찌 뻔뻔스레 떠들어대면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정고(呈告)하여 체직을 청하자니, 지평 한찬남(韓纘男)이 이미 정고를 한 상태여서 일사(一司)가 한꺼번에 정고를 할 수 없으므로, 문을 닫아 걸고 집안에 틀어박혀 사람들의 견책을 기다리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동료의 간통(簡通)을 보니, 바로 인홍을 논핵하는 한 가지 사안이었습니다. 인홍은 소시적에 조식의 문하에 사사(師事)하여 도를 들은 것이 매우 일렀고, 크게 그 스승에게 추허(推許)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명묘(明廟)께서 인대(引對)하시던 날에 천거를 하기까지 하였으니, 그들 사제간의 제우(際遇)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몸은 비록 임하(林下)에 묻혀 있지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은 신명(神明)에게 물어봐도 이의가 없을 만큼 분명합니다. 그리고 매섭고 강직한 그의 태도는 노년에 이르러 더욱 신랄하여, 그가 전후로 일에 저촉되어 고생을 겪고 위험스런 상황까지 이르렀던 정상은 성상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이번의 차자는 단지 스승을 존숭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의도가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신이 지난해 종사(從祀)를 계청하던 때에 외람되이 본직에 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뒤를 따랐으니, 신이 두 선정(先正)에 대해서도 어찌 딴 뜻이 있겠습니까만, 스승을 위하는 마음만은 성정(性情)에 박힌 것이므로, 신은 감히 그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직임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1 집 620 면

 

광해03/04/15(갑신)

지평 박여량이 아뢰기를,"신이 전에 피혐한 계사에는 단지 소회를 말씀드리어 신의 직책이 갈리기를 바란 것이었을 뿐, 어찌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성상께서 즉시 전에 없는 하교를 내리셨기에, 신은 진정 황송스러운 나머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들으니, 옥당의 차자에서 '사실에 벗어나게 말을 하여 성덕에 누를 끼쳤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그저 길에서 떠도는 얘기대로 아뢰고 십분 제대로 살펴서 아뢰지 못했으니, 신의 죄 더욱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한시바삐 신의 직명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길에서 떠도는 얘기라는 것이 어떤 일을 말하는가?"하였다. 이에 박여량이 회계하기를,"길에서 떠도는 얘기란 류영경(柳永慶)을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신이 처음에 듣기로는, 영경이 종묘 사직에 관련된 죄로 인해 삭록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영경이 삭록되었다는 것이 헛소문이라고 합니다."하니 답하기를,

"어제 옥당의 의도를 살펴보니, 남의 입을 틀어 막으려고까지 하였다. 《청금록》에서 이름을 삭제한 일을 끝까지 숨길 수 있겠는가.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정 찬성이 《청금록》에서 삭명된 것이 확실하니 이는 놀라운 변고이다. 그밖에 끌어다 증명한 얘기는 그것이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에 전념하라."하니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1 집 623 면

 

광해03/04/16(을유)

홍문관 전한 이준(李埈) <이하가> 아뢰기를,"신들이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그 안에 '패거리를 짜고서 다른 쪽을 공박하는 뜻이 언사 밖에 넘쳐 흐른다.' 하였고, 박여량의 피혐 계사에 대한 비답에도 '사람의 입을 말조차 못하게 틀어막는다.'고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황공스럽고 놀라운 나머지 몸둘 곳조차 없습니다. 신들은 논사(論思)하는 자리에 있는 몸으로, 유생들이 공관(空館)을 하는 사태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이는 근세에 보기가 드문 변고입니다. 그런데 유생들을 금고하라는 명령이 실로 박여량의 피혐하는 계사에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신들의 차자에 여량을 함께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대체로 신하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불가불 신중해야 하는데, 여량이 그만 이름이 삭제된 적이 없는 류영경(柳永慶)을 함부로 끌어대어 성상의 노여움을 부추김으로써 이렇게 어지러운 소요가 일어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공론이 다함께 분히 여기는 바입니다. 신들이 전후로 논한 것이야말로 일국의 공론(公論)이자 공론(共論)인 것입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나마 편당의 사심을 두거나 남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신들이 보잘것없어 군부(君父)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함으로써 엄한 하교를 내리시게 하였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신들이 어찌 감히 그대로 논사하는 자리에 재직할 수 있겠습니까. 황공함을 누를 수 없어 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하니 답하기를,"논사하는 사이에 말이 공평 정대하지 않고 물아(物我) 간에 서로 시기하는 것은 군자가 쟁집하는 처사가 아닐 듯하다. 나의 견해가 이와 같기 때문에 그 말을 한 것이다. 죄가 종사에 관계된 영경에 대해서도 오히려 《청금록》에서 삭제까지는 하지 아니했는데, 정 찬성이 무슨 죄가 있다고 삭록까지 한단 말인가. 이 점이 몹시 놀라운 일이다. 대죄하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1 집 625 면

 

광해03/04/18(정해)

영의정 이덕형이 차자를 올리기를,"삼가 생각건대 근일에 선정(先正)이 지척을 당한 일을 중외의 사람들이 다들 놀랍고 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中略- 위해 분함을 씻고자 하다가 과격하게 행동하는 것이 잘못인 것을 잊은 것이니, 그 정상이 또한 용서를 해줄 만합니다. 그러니 만약 그 잘못을 논할 경우에는 마땅히 이치로써 변별해야지, 어찌 류영경과 관련지어 기어코 그의 이름을 끄집어 냄으로써 정인홍의 대거(對擧)를 삼는단 말입니까. 그들은 내심 필시 '영경의 죄가 종사(宗社)에 있고 인홍의 죄 또한 종사에 관계되니, 이것으로 병칭(쯂稱)을 하면 성상의 마음이 쉽게 움직이고 우리의 설이 먹혀들게 될 것이다.'고 여긴 것입니다. -中略- 신은 성상의 하교를 받들고부터 마치 연곡(淵谷)에 떨어진 심정이니, 지금 마땅히 스스로 자핵하고서 견책을 기다려야 하나, 다시 이렇게 구구한 생각을 아뢰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에 오직 전하를 성탕(成湯)이 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그러니 성명께서 좀더 살펴 받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황공하고 절박한 심정을 누를 수 없습니다. 결정을 내리소서."하니 답하기를,"부족한 내가 일에 어두워 임금답지 못한 까닭에 경들을 고달프게 하니 매우 미안하게 여긴다. 차자의 내용은 마땅히 유념하겠다."하였다. 【원전】 31 집 625 면

 

광해03/06/16(갑신)

승훈은 일찍 과거에 올라 청현직을 두루 거쳐 재상에 이르렀다. 위인이 강직하고 과감하여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였고 지론(持論)이 당파에 치우친 까닭에 식자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선묘(宣廟)의 존호를 의논할 때 자못 이론을 주장하고자 하여, 마침내 류영경에게 배척을 당하니 사론이 이 일로 그를 좋게 평가하였다. 【원전】 31 집 636 면

 

광해03/06/19(정해)

의령(宜寧) 사람 이종욱(李宗郁)이 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존현(尊賢)에는 성(誠)과 위(僞)의 구별이 있고, 시비(是非)에는 공(公)과 사(私)의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선현을 존숭한다는 명분에 가탁하여 거짓을 성의라고 하면, 선현을 높이는 일이라고 볼 수 없으며, 시비하는 설에 가탁하여 사를 공으로 여기면, 시비를 가린다고 볼 수 없습니다. -中略- 오늘날 인홍을 공박하는 자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사로운 분노를 품고서 기회를 틈타 앙갚음하려는 꾀를 부리고자 몹시 심하게 배척하면서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대체로 인홍은 일생 동안 강직한 자세로 살면서 어렵고 험난함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처사가 죽어가자, 정철의 간사한 정상을 논하였고, 국가의 근본이 위태롭게 되자 류영경(柳永慶)의 흉악한 음모를 깨뜨렸던 것입니다. 은의(恩義)를 온전히 하라는 설이 제기되어 대의가 거의 사라져 가던 판에 목욕 재계하고서 토죄를 청하여 뭇사람의 노여움을 건드렸으므로, 미운 마음이 쌓여 증오를 낳고 증오감이 쌓여 원망을 낳게 된 것입니다. 도당이 수가 많아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존현한다는 명분을 빌림으로써 유감을 풀 바탕으로 삼으면서, 사방의 소리를 모두 알아듣는 임금의 귀를 속일 수 있다고 여기고, 하늘의 해와 같은 성상의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여기니, 기어코 못하는 짓이 없이 온갖 수를 다 써서라도 자기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니, 저도 모르게 기가 막힐 일입니다. -中略-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건단(乾斷)을 시원스레 내리시고 명철하게 살피시어, 가탁한 명분을 존현하는 것으로 여기시거나 가탁한 설을 공론으로 여기지 않으시면, 사도(斯道)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하였는데 상이 소를 살펴보지 않은 채 도로 내렸다.【원전】 31 집 636 면

 

광해03/07/13(경술)

소광진(蘇光震)을 헌납으로, 이명(李溟)을 이조 좌랑으로, 남이준(南以俊)을 지평으로, 최기남(崔起男)을 부교리로, 오정(吳靖)을 이조 정랑으로, 정세미(鄭世美)를 수찬으로, 김상용(金尙容)을 형조 판서로 삼고, 특지(特旨)에 의해 박승종(朴承宗)을 병조 판서에 제수하였다.【이때 승종의 아들인 박자흥(朴自興)의 딸이 세자빈(世子嬪)에 뽑히기로 되어 있었는데, 류희분(柳希奮) 등이 그 당(黨)과 더불어 모의하기를 "류영경이 패하게 된 것은 우리 집안을 박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세자빈은 우리들과 가까이 지내니, 마땅히 정사를 위임하여 일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래도록 변동없이 누리게 되는 길이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승종이 맨 먼저 현직에 등용되었고 류씨(柳氏)와 뜻을 같이 함으로써, 점점 이이첨의 당과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원전】 31 집 640 면

 

광해03/07/22(기미)

"영천 군수(永川郡守) 정조(鄭造)는 몸에 중한 질병이 었어 오래도록 좌아(坐衙)를 폐한 까닭에, 백성들이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날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왕이 따랐다.【정조는 이언각(李彦慤)의 손자인데, 위인이 독하고 탐욕스러워 서관(庶官)으로 있을 때에 가는 곳마다 원성을 들었다. 이이첨과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면서 제일 가까이 지냈고, 일찍이 사동관(査同官)으로 있으면서 이이첨의 사위인 박자흥(朴自興)의 시권(試券)에 잘못 쓴 부분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서 사사로이 주필(朱筆)로 고쳐 놓았는데, 선조(宣祖)께서 그것을 보시고 크게 노하시어 금부에 내려 국문하였다. 그때 정조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누구의 시권인 줄 모르고서 한 일입니다." 하니 선조께서 이르기를 "이는 마치 바보 앞에서 진술을 하는 듯하다." 하고서 마침내 형신을 가하여 자복을 받아내고 자흥의 과거 급제를 삭제했다. 한편 정조는 먼곳에 귀양갔다가 사면을 받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원망하였다. 이이첨과 더불어 류영경(柳永慶)을 모함함으로써 후일의 복(福)을 노리고자 하여, 아우인 정규(鄭逵)로 하여금 영경을 공박하는 이정원(李挺元)의 상소에 동참하게 하였다. 이 일로 영경의 당에게 배척당하여서 하마터면 화(禍)에 걸릴 뻔하였는데, 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이이첨이 그를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있다고 하며 극력 천거하여 끌어들였다. 병을 칭탁하여 논파되었다가 얼마 후에 경관(京官)에 복직되었고, 청요직에 의망하여 제수함으로써, 그와 더불어 모의를 함께 하였다.】【원전】 31 집 641 면

 

광해03/08/04(신미)

경상우도의 진사 성박(成?) 등이 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삼가 보건대, 관학 유생들이 팔도 유생을 소집하여 함께 소를 올리고,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일어나 협공하면서, 정인홍(鄭仁弘)을 지척하기에 온 힘을 기울이며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中略- 류영경이 나라를 맡고 있을 때 종묘 사직이 위기 일발에 놓였는데도 조정의 대소 신하들은 수수방관하면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 채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여겼습니다. 그런데 무신년의 장소(章疏)를 도리어 트집잡을 거리로 삼고 있으니, 그렇다고 한다면, 종묘 사직의 안위는 걱정할 것이 못 되고 군신간의 대의는 돌아볼 것이 못 되고 만세의 명분은 바로잡을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까. -中略- 그러니 인홍의 도덕 역시 어찌 여럿이서 지껄이는 소리에 손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이 선현을 존중하고 도를 보위하려는 정성에, 아무래도 부득불 속시원히 변석하여 분명하게 분변을 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하였다. 전교하기를,"이 영남 유생들의 소를 살펴보니, 내 두려움을 누를 수 없다. 정 찬성이 문원(文元)․문순(文純)과 더불어 비록 동년배는 아니어도 또한 서로 보고서 아는 사이이고, 뿐만 아니라 현자(賢者)로서 현자를 논한 것이 안 될 것도 없는 일인데, 공박하는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온 힘을 기울이고 있으니, 정말 가소롭다.

지금 이 성박 등이 소자(小子) 후생(後生)으로서 또 망령된 말을 한껏 지껄임으로써, 한편으로는 선정(先正)을 공박하고 한편으로는 대신을 공박하면서, 마치 승부를 겨루고 패업(큹業)을 정하려는 자처럼 굴었다. 이 폐단을 바로잡지 아니하면 그 해로움이 장차 나라를 텅 비게 하고야 말 것이니, 어찌 참혹하지 아니한가. 근래 국가의 부정(不靖)한 단서가 으레 선비들로부터 시작되곤 하여, 내 매우 통탄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이 차자는 답을 아니한 채 내리니, 이 뜻을 정원은 알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1 집 644 면

 

광해03/08/28(을미)

사헌부가 아뢰기를,"청평 부원군 한응인은 지난 정미년 겨울에 적신(賊臣) 류영경과 함께 상부에 있었는데, 그때 선왕께서 몹시 위독하시어 종사의 대계를 신하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때 응인이 붓을 쥐고서 회계하는 글을 베껴 내면서, 시종 영경이 하는 대로 따라 흉악하고 패려한 말들을 손가는 대로 모두 써냈습니다. 그러자 동석(同席)한 자가 지워 없애기를 청하기까지 했는데도 응인은 한마디도 바로잡는 말이 없었고, 급기야 공론이 제기되어 일을 함께 한 사람들이 모두 형장(刑章)을 받았는데 한응인만 유독 죄벌을 면했습니다. 이것만도 놀랍기 짝이 없는데, 그만 잘못이 없는 원임 대신과 더불어 복상(卜相)하는 반열에 뒤섞여 참여하였으므로 물정이 통분하고 있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부호군 유혁은 전에 장령으로 있을 때 맨 먼저 중한 논의를 제기하면서 그 이튿날 진달하기로 약속을 해놓고는, 이튿날 아침에 도리어 부당한 혐의를 끌어대면서 기어코 체차되고자 하였습니다. 언관으로서의 풍채라고는 전연 없는 셈이니, 파직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한응인에 대한 일은 하필 뒤늦게 논할 것이 있겠는가."하였다.【원전】 31 집 647 면

 

광해03/08/29(병신)

사간원이 아뢰기를,"올해의 풍(風), 수(水), 황(蝗) 세 가지 재해는 근고에 없던 바이므로, 비록 진대(賑貸)하고 무휼(撫恤)하더라도 민생을 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스러운 판국인데, 이미 성릉(成陵)의 행행을 겪은 데다 또 계속해서 건원릉(建元陵)의 친제가 있습니다. -中略- 청평 부원군 한응인은 지난 정미년 겨울 사이에 선왕께서 편찮으실 때 종사의 대계를 신하들에게 물으셨는데 회계할 즈음에 시종 류영경의 흉악한 말을 따랐습니다. 그때 동석(同席)한 자가 지워 없애기를 청하였는데도 한마디도 바로잡는 말을 과감하게 꺼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공론이 제기되어서도 혼자서만 죄벌을 면하였으니 이것만도 극히 놀라운 일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만 복상(卜相)하는 반열에 참여하였으므로 물정이 놀라고 분통히 여기는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희천 군수(熙川郡守) 백대형(白大珩)은 위인이 패려하고 망령스러운 데다 외람스럽기까지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관직을 줄 수 없으니, 파직시키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한응인이 어찌 이렇게까지 했겠는가. 논한 바가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가. 설혹 잘못이 있더라도 이는 곧 선대 조정의 훈구 대신이니, 용서하여 그냥 두고 뒤늦게 논하지 말라.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녹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능에 배알하는 일은 근대의 능침을 불가불 서둘러 전알(展謁)해야 되는 데다 도로 또한 멀지 않으니, 어찌 후일을 기다리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648 면

 

광해03/09/04(경자)

사헌부가 <아뢰기를,"청평 부원군 한응인은 지난 정미년 겨울에 적신 류영경과 더불어 함께 상부(相府)에 있을 때, 선왕께서 병이 중하여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신하들에게 물으셨는데 응인이 붓을 쥐고 회계하는 글을 베껴 내면서 한결같이 영경이 하는 대로 따라 흉악하고 패려한 말을 손가는 대로 모두 써내자, 동석(同席)한 자가 지워 없애기를 청하기까지 했는데도 응인은 그 사이에서 한 마디도 바로잡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공의(公議)가 일어나게 되어, 그때 일을 함께한 사람들이 모두 다 형장(刑章)을 받았는데, 응인은 오히려 죄벌을 면하였고, 원로 대신과 더불어 재상을 뽑는 반열에 뒤섞여 참여하였으므로 물정이 놀라고 분통해 함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다. 남의 신하로서 이와 같은 대죄를 졌으면, 어떻게 일이 과거에 있었다고 핑계대거나 또 훈구라는 이유로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어렵게 여겨 지체하지 마시고, 한시 바삐 관작을 삭탈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이미 유시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청평 부원군 한응인을 삭탈 관작하라는 일로 연계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청평 부원군 한응인은 지난 정미년 겨울에 상부(相府)에 있는 몸으로서 선왕께서 병이 위독하신 날에 종사의 대계를 하순(下詢)하셨는데 회계할 즈음에 시종 적신 류영경의 흉악한 말을 따랐습니다. 그때 동석한 자가 지워 없애기를 청하였는데도 응인은 끝까지 감히 한 마디도 바로잡는 말을 꺼내지 아니하였으니, 남의 비위를 맞추어 아부한 자취가 분명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급기야 공의가 제기되어서도 혼자서만 죄벌을 면하였고, 얼마 전에 와서는 그만 복상하는 반열에 참여하였으므로 물정이 놀라고 분하게 여김이 이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습니다. 삭탈 관작하도록 명하소서. 올해의 바람, 물, 누리 세 가지 재해는 근고에 없던 바이므로 비록 진대(賑貸)하고 무휼(憮恤)하더라도 오히려 민생을 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스런 판국입니다. 그런데 이미 성릉(成陵)의 행행을 겪은 데다 또 건원릉의 친제가 계속되었으니, 바야흐로 이 수확하는 때를 맞아 기전(畿甸)의 민정(民丁)들이 응역(應役)하느라 분주하고 각도의 인부와 말이 기다리느라 오랫동안 서 있게 되어, 원망하고 고달파하는 정상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강릉, 태릉을 친제하시겠다는 명이 또 오늘 내렸는데 민생의 곤고(困苦)에 대해서는 비록 돌아볼 겨를이 없다손 치더라도, 옥체가 서리와 안개를 맞으면서 한 달 사이에 세 차례나 행행을 하는 것은 극히 미안한 일입니다. 강릉․태릉의 친제는 정지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헌부와 사간원에 답하기를,"이미 유시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648 면

 

광해03/09/05(신축)

<사간원이 아뢰기를,"지난 정미년 겨울에 선왕께서 위독하시어 종사의 대계를 상신(相臣)에게 하순(下詢)하셨는데 청평 부원군 한응인이 적신 류영경과 더불어 함께 앉아 회계하면서 '뭇 신하들의 기대 밖에서 나왔다.'는 등의 말을 모두 영경이 말한 대로 따르고 끝까지 한 마디도 바로잡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흉(大兇)이 권세를 농간함에 응인이 비록 감히 그 사이에서 별 도리가 없기는 했더라도, 비위를 맞춰 알랑거린 정상이 가릴 수 없을 만큼 분명합니다. 급기야 공론이 제기되어 동참한 자들이 모조리 죄벌을 받았으니, 응인이 어찌 혼자만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는 그만 복상(卜相)하는 반열에 참여하였으므로 물정이 놀라고 분하게 여김이 이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습니다. 어렵게 여겨 지체하지 마시고 어서 삭탈 관작하도록 명하소서."하고, 또 강릉과 태릉에 친제하는 것을 정지할 것을 아뢰니> 답하기를, "한응인의 일은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 능에 배알하는 일은, 근대의 능침일 뿐만 아니라, 전후로 배릉을 할 때 누차 이 능의 동구(洞口)를 지나면서도 아직껏 전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과연 인정상 편안한 바이겠는가. 도리(道里)가 그리 멀지 않으니 비록 조금 늦게 길을 떠나더라도 갔다가 돌아올 수 있고, 기민(畿民) 또한 경종(耕種)할 때가 아니니 그 사이에 충분히 품앗이를 할 수 있으며, 나의 건강도 지금 병이 없으므로, 물려 행할 수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1 집 648 면

 

광해03/09/12(무신)

사간원이 아뢰기를,"호군 황시(黃是)는 바로 원흉 류영경의 처남이니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워둘 수 없습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황시는 눈에 뛰게 드러난 죄가 없으니 번거롭게 논할 것이 없다."하였다.【원전】 31 집 649 면

 

광해03/09/14(경술)

지평 유활이 아뢰기를,"어제 동료들이 죄다 질병이 있어서 신이 성상소의 임무를 대행하면서, 전의 계사를 연계하겠다는 뜻으로 동료들에게 간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다들 잘 알았다고 답서를 보냈으므로 대궐에 나아가 진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사헌 류희분이 피혐한 글을 보건대, <'이미 「현저하게 스스로 저지른 죄는 없더라도…….」라고 해놓고서 또 「그 모의에 참여해 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단한 죄목인데도 통의(通議)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갔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적신 류영경이 이미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했다는 죄로써 왕형(王刑)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도당(徒黨)들이 혹 찬출되기도 하고 혹 안치되기도 하고 혹 주극(誅極)을 당하기도 하였으니, 그 적신의 일가 친속은 법으로 따져 마땅히 폐고(廢錮)되어야 하는데도 이미 너그러운 은전을 베풀어 그냥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친속이 된 자로서는 마땅히 시골에 숨어 살면서 그 몸을 보전해야 될 터인데 호군 황시가 버젓이 와서 은명에 사례를 하였기 때문에 대론(臺論)이 이미 발하여 그 직임을 파척하도록 청하였는데 성상의 비답이 '별로 눈에 띄는 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신이 생각하기에는 황시가 비록 못된 짓을 현저하게 스스로 저지른 죄는 없더라도 이미 적신의 처남이라고 한 이상, 그 흉악한 음모와 비밀스런 꾀를 어찌 알지 못했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여기어 이것으로써 연계하여 그 죄를 밝힌 것이었는데, 참여해 들은 것 또한 스스로 저지른 죄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첨입한 말은 곧 완석(完席)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꼭 통의(通議)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고서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동료의 피혐이 있게 하였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자기 견해만을 스스로 옳다고 여기어 태연하게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파척해 주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1 집 649 면

 

광해03/09/20(병진)

<의금부의 계목에,"전교에 운운하신 것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이때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변이 왕비(王妃)의 향군(鄕郡)에서 발생하여, 강호(降號), 저택(?宅, '집을 부수고 물웅덩이를 파는 것') 등의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우의정 이항복은 의논드리기를 '집을 부수고 그 자리를 파서 못을 만드는 법이 형서(刑書)에는 보이지 않고 주 정공(?定公) 때에 처음 시행되었는데 이 또한 정공이 스스로 창시한 것이 아니라 삼대(三代) 무렵에 서로 이어오면서 시행한 것입니다. 정공의 말을 살펴보면 단지, 신하로서 임금을 살해하거나 자식으로서 아비를 살해한 경우에만 그 집을 부수고 집터를 파서 못으로 만드는 형전을 시행하였을 뿐, 처가 지아비를 살해한 경우는 거론하지 않았으니, 그 의도가 필시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난리 이전에는 또한 이를 인하여 단지 아비를 살해한 집에 대해서만 시행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영부사 윤승훈(尹承勳)이 상세히 기억하고서 분명하게 말한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난리 후에 상신(相臣) 류영경이 처음으로 지아비를 죽인 경우에도 집을 부수고 못을 파야 한다는 논의를 제기하자 한때의 대신들이 삼강(三綱)은 똑같다는 설을 거론함으로써 지아비를 죽인 자에 대해서도 시행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공(周公)의 법에 왕의 친속을 살해하거나 그 부모를 살해한 것과 지아비를 죽인 경우를 형벌에서 분(焚), 고(睾), 작(작), 참(斬), 의(縊)로 나누어 만들었으니 그 부모를 죽인 경우와 지아비를 죽인 경우가 그 죄과(罪科)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아비를 살해한 경우와 지아비를 살해한 경우가 다른 것은 이것만 보더라도 매우 분명한 일입니다. 대개 지금 이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드는 법을 우리 나라에서 취하여 근거로 삼고 행하는 것은 단지 주정공의 논에 따른 것일 뿐, 다른 경서(經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별도로 의견을 세워 가지 위에 가지가 돋듯이 전에 행한 적이 없는 것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 문제는 신이 늘 불가하다고 여겨왔습니다. 왕후의 본관에서 비록 변이 발생하더라도 강호(降號)를 하지 않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전고(典故)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설혹 있더라도 내심 헤아리건대, 필시 한때의 특명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여깁니다. 무릇 이러한 일들은 본디 성(城)을 무너뜨려 백성을 부끄럽게 하자는 데서 나온 것인데 유사(有司)의 체모로서는 단지 법대로 강호하기를 청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습니다.<영의정과 심 판부사는 병 때문에 수의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의 논의는 이와 같은데,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아룁니다.>"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31 집 650 면

 

광해03/10/12(무인)

박홍도(朴弘道)를 정언으로, 조명욱(曺明욱)을【명욱은 류영경의 당파로 연좌되어 폐척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류씨를 통해서 점차 현용(顯用)되었다.】 수찬으로, 류활(柳活)을 사서로, 박정길(朴鼎吉)을 부수찬으로, <황여일(黃汝一)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남이흥(南以興)을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구인후(具仁텋)를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전식(全湜)을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삼았다. 【원전】 31 집 653 면

 

광해03/11/18(계축)

사간원이 아뢰기를,"해미 현감(海美縣監) 김성발(金聲發)은, 지난 무신년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이 정인홍(鄭仁弘)을 모함하던 날에, 설서(說書)로 춘방(春坊)에 입직하면서 상번(上番) 류영근(柳永謹)과 더불어 입달(入達)한 계사에 '인홍이 무함한 정상을 성상께서 통촉하시고 공론(公論)이 격발하여 죄인을 이에 붙잡아 이미 찬출(竄黜)의 법이 시행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 흉악한 무리에 아부하여 정인(正人)을 모함한 자취가 분명하여 숨길 수 없는데도, 그 본 모습을 숨긴 채 아직도 명위(名位)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라 하여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 것을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1 집 663 면

 

광해04/01/14(기유)

사헌부가 아뢰기를,"행 호군(行護軍) 이응해(李應?)는 본성이 거칠고 교활한데다 탐욕 방종스러운데,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을 노예처럼 섬겨 곤수(쥀帥)의 직임을 제수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주 목사가 되어서는 군민(軍民)을 착취하고 장인들을 침해하는 등 못할 짓이 없었는가 하면, 심지어 경내 어부들의 이름을 나열해 책자로 만들어 진주를 징수하였는데 큰 것은 새알만하였습니다. 혹시 작아서 견본과 같지 않을 경우에는 숫자를 배로 하여 물건을 징수한 바람에 아내와 자식을 팔기도 하므로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세 읍의 양마(良馬)의 숫자를 뽑아서 책자를 만든 다음 혹 값을 조금 쳐주고 억지로 사들이기도 하고, 혹 공공연하게 빼앗아 배에 가득히 실어 보낸 것이 전후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는 허다한 군관(軍官)과 하인에게 각기 베 1필씩을 주었다가 바다를 건넌 후에는 낱낱이 다시 받아들였으며, 만약 사고로 잃어버렸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진 말을 빼앗기도 하는 등 갖가지 탐욕과 횡포를 부린 정상을 언급하면 기가 막히고 듣는 자는 몸을 떱니다. 전일에 그에게 대략 벌을 주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서용하였으므로 물정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분개해 하고 있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온양 군수(溫陽郡守) 박동도(朴東燾)는 부임한 후에 오로지 수탈만을 일삼고 있으니, 파직하라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이응해는 오랫동안 호군으로 있었는데 무슨 탐욕과 방종한 짓이 있었는가. 논한 바가 지나치니, 윤허하지 않는다. <박동도는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3 면

 

광해04/02/02(정묘)

남탁은 일찍이 대간으로 있을 때 문려(文勵),강주(姜주), 채형(蔡衡) 등과 더불어 장흥(長興) 백성들의 은화를 받고, 병영을 이설(移設)하여 장흥 백성들의 폐를 덜어 줄 것을 계청했는데, 일이 탄로나서 국문을 받고 여러 차례 형신(刑訊)을 당했다. 그러다가 정미년 큰 가뭄에 옥사(獄事)를 완화시켜 주자는 논의가 있자 류영경(柳永慶)이 관대하게 방면시킬 것을 아뢰니 선조(宣祖)가 허락지 않다가 뒤에 허락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높은 벼슬에 등용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비루하게 여겼다. 수망(首望)으로 오를 때마다 사람들이 그 다음 망에 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필시 금을 훔쳤기 때문에 남탁의 다음에 올랐을 것이다.'라고 기롱할 정도로 식견이 있는 이들은 모두들 그와 나란히 의망(擬望)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왕은 그가 선왕 때 뜻을 펴지 못했다고 여겨 매우 관대하게 대하였다.

이정원은 괴산(槐山) 천인의 자식이다. 일찍이 본군에서 죄를 얻어 마땅히 죄를 받고 원지로 유배되었어야 했는데, 마침내 태학(太學)에 입학, 상소하여 류영경을 죽일 것과 정인홍(鄭仁弘)의 구원을 청함으로써 강직하다는 이름의 죄를 얻으려 하였다. 이때에 와서 급제하니 이이첨(李爾瞻)이 끌어들여 심복을 만들고 교서관 정자에서 건너 뛰어 강관(講官)에 제수하였다.

백대형과 임혁은 모두 지나치게 패려(悖戾)하고 행실이 보잘것없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이때에 와서 점차 수용되니 이첨이 모두들 사직에 공이 있다고 허여하였다. 【원전】 32 집 8 면

 

광해04/02/05(경오)

사헌부가 아뢰기를,"행 호군(護軍) 이응해(李應?)는 본디 성품이 거칠고 교활하여 탐욕만을 부리고 종처럼 역적 류영경(柳永慶)을 섬겨 절도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너무나도 조정의 수치입니다. -中略 이러한 사람은 의관(衣冠)의 반열에 있게 할 수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를 명하소서."하였다.【원전】 32 집 9 면

 

광해04/02/21(병술)

백함은 공초하기를, “윤주은(尹舟殷)의 아들이 8세인데 영특하고 재주가 있기 때문에 추대하려고 했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비록 승복했다고는 하나 다시 형신을 하는 것이 옳다. 어찌 여덟 살 난 아이를 추대할 이치가 있겠는가?"하였다. -中略- 왕이 이르기를,"경성(京城)을 범한 뒤에는 반드시 추대할 자가 있었을 것이다. 매양 윤안성(尹安性)이라고 말하는데 반드시 추대하려고 한 자를 바로 공초하라."하였다. 공초하기를, "류영경(柳永慶)의 아들 류선(柳선)이 영특하므로 윤안성이 이를 추대하려고 했습니다."하자, 왕이 이르기를,"추대되는 자는 한 사람뿐인데 번번이 말을 달리하여 혼란스럽게 아뢰었다. 다시 형문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17 면

 

광해04/03/04(무술)

류훤이 공초하기를,"류영근(柳永謹)이 직재(直哉)를 정거(停擧)시킨 적이 있었는데 신의 아비 류영경(柳永慶)이 영근과 친족(親族)이기 때문에 직재가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끌어댄 것 같은데, 신은 그의 얼굴도 모릅니다."하였다. 【원전】 32 집 24 면

 

광해04/03/18(임자)

유팽석이 바야흐로 체포되어 두려움으로 위축되어 있는 상태여서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신율이 꾀면서 지시하는 말을 듣기에 이르러서는 미덥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감히 어기지 못하고 모두 신율이 말한 대로 했기 때문에 그가 말한 내용이 장황하고 근거가 없는 것이 이와 같게 되었다. 형신을 가하기에 이르러서는 바야흐로 신율이 나를 속였다고 하면서 대질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묻지 않았다. 류영경(柳永慶)이 정승으로 있을 적에 신율이 또한 뜻을 얻지 못했었는데 바야흐로 역적 가문의 세 아들이 모두 아무 탈이 없는 것에 대해 이이첨 등이 시기하였다. 신순일이 이첨의 중표숙(重表叔)이 되고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이첨이 그 모의를 주관하여 먼저 조정에서 말하기를,"황혁도 마땅히 면할 수 없다."하였다. 황혁이 체포되어 올 때 사람들이 두 집안의 원수진 일로 증거를 대라고 가르쳐 주었으나 황혁이 신율의 권세와 기염이 이미 치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공손한 말로 죽음을 면하려 하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다. 【원전】 32 집 33, 34 면

 

광해04/03/20(갑인)

지평 강익문(姜翼文)이 아뢰기를,"개미처럼 하찮은 소신(小臣)이 거듭 부름을 받드니 감격스럽고 황송하고 두려워서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역적의 변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즉시 달려왔어야 합니다. -中略- 또 듣건대 역적의 괴수가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의 아들 류제(柳悌)를 대장으로 삼아 거사하려 했다고 하였습니다. 인홍이 전일 벌을 주자고 청한 자가 곧 적신인데 도리어 그의 아들과 모의하였단 말입니까. 신의 구구한 변명이 인홍에게 수치와 오욕만 끼치고 이렇게 친국하는 때를 당하여 번독스럽게 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따라서 뻔뻔스레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속히 신을 파직해 내쫓아 주소서."하니, 답하기를,"인홍에게 어찌 의심스런 것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잘 수행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34 면

 

광해04/03/26(경신)

황상이 공초하기를,"미열(迷劣)하고 나이 어린 제가 무슨 보고 들은 데가 있겠습니까. 단지 길에서 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우연히 써서 보냈을 뿐입니다. 시사(時事)를 알 만하다고 한 것은, 대북(大北)이 마땅히 성대해질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간택 날짜를 물려서 정했다는 것은 조보(朝報)를 보고 알았고 남별궁에 방이 걸렸었다는 것은 오촌숙(五寸叔) 황곤재(黃坤載)가 말했습니다만 지금은 이미 죽었습니다. 걸렸던 것은 '유대지(有大志)'라는 방이라고 했습니다. 대자, 소자는 대북(大北), 소북(小北)을 가리킨 것입니다. 류괴를 부관참시했다는 말은 류영경(柳永慶)을 부관참시한 것을 가리킨 말인데 그때 여염에 이런 낭설들이 전파되어 있었습니다. 방문(榜文)에 정인홍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힘입어 무사할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이는 그 방문에 대군(大君)을 추대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어리석고 망령된 소견으로 함부로 시정(時政)을 논하여 편지에 써서 보내기까지 하였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역적과 동모했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것입니다. 유팽석은 봉산(鳳山) 사람이고 군수 신율(申慄)은 저의 집 아버지, 할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있다는 말은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일입니다. 유팽석과 면대하여 분변해 밝히고 죽게 해주소서."하였다. 이어 1차의 형신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원전】 32 집 37 면

 

광해04/03/28(임술)

수륜이 공초하기를,"정(鄭), 류(柳)라고 운운한 것은 정인홍이 상소하여 류영경을 논하였을 적에 영경이 인홍을 죄준 때의 일입니다. 추숭할 때는 조정의 의논이 혹 그르다고 한 사람도 있었고 남인들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써서 황혁에게 통보한 것입니다."하였다.【원전】32집 38면

 

광해04/03/30(갑자)

신율이 처음 팽석과 은밀히 모의할 적에 김제세를 끌어대 역모를 한 것으로 그 정상을 바꾸었기 때문에 신율이 또 황(黃)․정(鄭)을 무고(誣告)하게 하여 사사로운 원수를 갚게 하였다. 그런데 어리석고 미욱한 팽석이 시종 한결같이 그의 말대로 하다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체로 정경세, 정인홍, 황혁 및 김직재, 류영경이 각기 서로 원수가 져서 서로 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신율이, 이들이 함께 역모를 했다고 무함하자 조정과 재야가 모두 그것이 허위인 줄 알고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대신(大臣), 추관(推官)이 모두 지엽적인 것만 논하여 구제했을 뿐 끝내 감히 무함한 정상을 곧바로 지척하지 못하였다. 【원전】 32 집 39 면

 

광해04/04/12(병자)

사헌부가 심희수를 파직시킬 것을 연계하고, 또 아뢰기를,"병조 정랑 윤조원(尹調元)은 역적 류영경(柳永慶)의 인척으로 영경이 권세를 휘두를 때에 온갖 아첨을 떨며 애걸하여 청로(淸路)에 소통되게 해줄 것을 자청하였는데 이를 들은 사람치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파직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윤조원은 체차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45 면

 

광해04/05/02(을미)

영천(榮川) 사람 이평(李坪)이 상소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지체하고 있는 잘못을 극론(極論)하면서 크게 아첨하는 말을 하여 상의 비위를 맞추었다. 상소의 대략은 류영경(柳永慶) 등을 추형(追刑)하고, 존호(尊號)를 올리고, 공신(功臣)을 녹훈하고, 역당(逆黨)의 흉서(兇書)를 중외에 반포하는 등의 일을 청한 것이다.【이평은 문신 이잠(李?)의 형이다. 이잠이 이이첨(李爾瞻)과 결탁하여 당시에 명관(名官)이 되었기 때문에 이첨이 이평으로 하여금 상소하여 이 일을 논하도록 하여, 스스로 자기의 공을 과시하고 여러 다른 당(黨)을 배척하고자 한 것이니, 이른바 '초야(草野)의 의논'이라는 것이다. 이평이 이로 인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녹훈(錄勳)도 되어 영화롭게 향리로 돌아갔는데,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죽으니, 사람들이 귀신이 죽인 것이라고 하였다.】【원전】 태백산본

 

광해04/05/03(병신)

대사헌 이하와 대사간, 사간, 헌납이 아뢰기를,"역신 류영경이 매우 흉악하여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자 꾀한 죄는 지난 무신년 3월에 백관이 이미 다 논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책봉(冊封)을 청하지 않고, 성상의 공훈을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의 혈기있는 자로서 누군들 마음이 쓰리고 애간장이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 나라를 중흥하여 하늘에 짝한 공적은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하니, 천지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적이 딴 뜻을 품어 성상의 공적을 엄폐하고 막아서 중국 황제께서 칙서를 내려 일임하신 뜻과 선왕께서 어진이를 택하여 부탁한 거조가 거의 헛되게 될 뻔하였으니, 그 계책이 참혹합니다. 흉악한 계책이 이미 이루어지자 역적 이진(李콫)이 뒤따라 일어났습니다. 의리가 막히고 전형(典刑)이 베풀어지지 않아 우리 나라의 신하들은 형제간의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공론을 삼고, 중국 사람들은 큰 아들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뜻으로 올바른 의논을 삼았습니다.

심지어 조사하고 대질하는 전에 없던 변고가 있기까지 하였으나, 일찍이 임금을 위하여 대의를 밝히는 말을 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영경(永慶)의 뿌리가 이미 깊어 그가 죽은 뒤에도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은 양사가 토죄하기를 청하던 날 혹 논의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때 정의(正義)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떳떳한 법을 흔쾌히 베풀지 못하여, 역적의 괴수로 하여금 목이 잘리는 벌을 면할 수 있게 하였고, 난적(亂賊)의 무리들로 하여금 징계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직재(金直哉) 등의 역적이 계속하여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신들이 역적을 다스린 것이 엄하지 못한 죄입니다. 국시(國是)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인심이 오랫동안 막혀서 초야에서 공론이 나날이 발의되고 있는데, 이평의 상소는 심지어 방관하였다고 대각을 헐뜯고 배척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이 직책을 다하지 못한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으니, 결코 구차스럽게 자리에 눌러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파척을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55 면

 

광해04/05/04(정유)

부제학 류간(柳간), 응교 류숙(柳潚), 교리 기협(奇協)․한찬남(韓纘男), 부교리 오정(吳靖)․조명욱(曺明홸), 수찬 홍방(洪푲),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역신 류영경이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자 모의한 죄악은 하늘에 이르렀습니다. 7년 동안 나랏일을 담당하면서 한번도 책봉을 청하지 않았고, 성상의 공을 엄폐하여 이정(츺鼎)에 새기지 않았으니, 반역을 도모하고 국법을 지키지 않은 정상은 분명하여 가릴 수 없습니다. 역적 이진(李콫)이 틈을 타서 딴 마음을 품고, 김직재(金直哉)가 뒤를 이어 난을 부채질하였으니, 그 근본은 모두 영경이 먼저 이론을 세운 것에 연유합니다.

무신년 토죄를 청하던 날 의리가 깜깜하게 꽉 막히고 공론이 엄하지 않아 매우 흉악한 역적으로 하여금 전형(典刑)을 면하게 하였으니, 왕법(王法)이 이로 인하여 거행되지 않고 국시(國是)가 이 때문에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훌륭한 공렬(功烈)을 세상에 드러내고 중국 황제의 돌보심에 답하며, 정의를 밝게 드러내어 목욕하고서 토죄를 청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신들은 논사(論思)의 지위에 있으면서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 초야의 신하로부터 방관했다는 배척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 하여 양사를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황공하여 대죄(待罪)합니다."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55 면

 

광해04/05/07(경자)

사헌부․사간원이 합사하여 아뢰기를,"역신 류영경은 정승의 자리를 도적질하여 차지하고 궁중의 하인들과 서로 통하여 재앙을 일으킬 마음을 속에 감추고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꾀하였으니, 그 지극히 흉악한 대역 부도의 죄는 머리카락을 뽑아도 다 세기 어렵습니다. 우선 그 중에 큰 것 만을 들어 말하겠습니다. 성상께서 춘궁(春宮)에서 덕을 길러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짐에 온 나라의 소원은 오직 책봉(冊封)을 받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승 노릇 하는 7년 동안 중국에 주청할 뜻을 갖지 않아 역적 진(콫)으로 하여금 반역할 마음을 갖게 하였고, 중국 조정이 의심하여 조사하고 대질하는 욕됨이 마침내 임금에게 미치게 되었으니, 이것이 첫번째 죄입니다. 조사(詔使)가 왔을 때에 대신이 글을 올리는 것은 세자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계책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는데, 몰래 다른 의도를 품고 감히 글을 올리는 것을 막으려 하다가 끝내 마음대로 못하자 도리어 중상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감국(監國)하고 무군(撫軍)하는 책임을 맡고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바람과 비를 맞으면서 어려움과 위험을 두루 겪으시고, 관우(關右)에 분조(分朝)하여 인심을 굳게 하고, 양호(兩湖)에 주둔하여 군무(軍務)를 다스리고, 중흥을 도와 구물(舊物)을 빛나게 회복하였으며, 선왕이 부탁한 뜻을 몸소 행하시고 중국 황제가 칙서를 내린 돌봄에 보답하셨으니, 신령스러운 공훈과 성스러운 업적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는 것을 힘껏 막아서 감히 하늘과 견줄 만한 공을 가리고 몰래 불궤(不軌)한 음모를 꾸몄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원손(元孫)께서 영특하시어 나라 사람들이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8세에 군호(君號)를 봉하고 10세에 혼인을 의논하는 것은 선대 조정으로부터 이미 성문화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흉악한 꾀를 부려 옛 관례를 따르지 않고 나이가 10살이 넘도록 끝내 혼례를 거행하도록 청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선왕이 여러 해 동안 편찮으셔서 위아래가 근심하여 어쩔 줄을 몰랐는데, 내의원의 도제조를 겸직하고 있으면서 시약(侍藥)하는 관청을 설치하지 않고 독한 약제를 써서 '크게 실패하였다.'는 말씀이 있게까지 하였습니다. 탄핵하는 논의가 거세게 일어나자 자기를 논의하는 것을 미워하여 주구(走狗)를 시켜 도리어 방자하게 반격하면서 한결같이 병을 숨기고서 하례를 드리려고까지 하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정상은 만인의 눈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죄입니다. 선왕의 병환이 위독한 초기에 기도드리는 축문(祝文)에 성상의 휘를 쓰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메우려 하다가 사람들이 말려서 마침내 자기 이름을 쓰지 못하였으니, 그 마음 둔 바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죄입니다.

왕위를 물려주어 섭정하게 하는 명은 종묘 사직의 큰 계책으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응당 훤히 알아야 할 것인데 비망기를 숨기고 조보에 내지 않았고, 원임 대신을 물리쳐 기어이 자기 뜻대로 하였으며, 회계할 즈음에는 힘을 다해 막으면서 심지어 아직 책봉이 인준되지 않았으니 왕위를 물려주어 섭정하게 할 수 없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또 참으로 여러 사람의 생각 밖에서 나온 것이라고 핑계하여 성교(聖敎)를 가로막고 백성의 여망을 두절시켰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 죄입니다.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닥치자 초야에 있는 충성되고 어진 이가 천리나 떨어진 곳에서 상소를 보내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여 흉악한 속셈을 타파하였는데, 뻔뻔스럽게 자신을 변명하고자 무리를 시켜 큰 옥사를 일으킬 것을 꾀하였습니다. 음흉한 꾀와 은밀한 계교가 이렇게까지 지극하였으니, 이것이 여덟 번째 죄입니다. 선왕이 승하한 날에 비밀 교지를 받았다고 칭탁했는데 행위가 거짓되고 은밀해서 아무도 그 본말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아홉 번째 죄입니다. 옛적에 임금이 승하하면 그날로 자리를 잇는 것이 사첩(史牒)에 분명하게 실려 있으며, 나라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즈음에는 더욱 잠시도 늦출 수 없는 것인데, 성상께서 즉위하려는 때에 영경은 늦추려고 일부러 곤룡포를 짜는 기간을 묻고 멀리 엿새 뒤까지 기다리자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 쓴 자취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었으니, 이것이 열 번째 죄입니다.

당초 치죄하기를 청하던 날에 왕법을 시행하지 아니하여 하늘에 닿는 죄를 짓고서도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므로 임금의 위엄이 서지 못하고 난적(亂賊)이 잇따랐던 것입니다. 원흉의 남은 무리들이 다시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정승이 되고 장수가 된다는 말이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에 나왔는데, 대대로 그 악을 이루다가 스스로 천벌을 받아 죽었던 것입니다. 나라의 떳떳한 형벌이 지난날에는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반역한 큰 죄가 오늘날 더욱 드러났으니, 만약 형서(刑書)에 실려 있지 않음을 핑계하여 그 이미 죽은 자를 베지 않는다면, 이 역적의 죄가 도리어 정여립(鄭汝立)․김척(金滌) 같은 무리의 밑에 있단 말입니까. 전일에 자결하도록 한 것은 다만 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히고 원수를 잊고서 사귄 죄를 다스리기에 족할 뿐입니다. 사형을 가하지 않고 우두머리를 벌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역적들이 장차 두려워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소급하여 전형(典刑)을 시행해서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시원히 풀어 주소서."하니, 답하기를,"소급하여 전형을 시행한다는 것은 형서에 나타나 있지 않고, 일이 너무 심한 듯하니, 어찌 굳이 오늘날 해야 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2 집 57 면

 

광해04/05/07(경자)

홍문관의 차자는 대개 류영경을 추형하라는 일이었는데, 답하기를,"소급해서 전형을 시행한다는 것은 형서에 나타나 있지 않고, 일이 너무 심한 듯하니, 어찌 굳이 오늘날 해야 하겠는가. 번잡스럽게 논하지 말라."하였다.【원전】 32 집 57 면

 

광해04/05/08(신축)

양사가 <합사하여>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을 연계하니, 답하기를,"이미 하유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영경을 추형하는 일을 아뢰니, 양사에 답한 것과 같은 내용으로 답하였다.【원전】32집 58면

 

광해04/05/09(임인)

옥당이 류영경에게 추형을 가할 일로 차자를 올리고, 또 정인홍이 이미 소명(召命)을 받았으니 역마(驛馬)를 타도록 하여 우대하는 뜻을 보일 일로 차자를 올렸는데, 입계하니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고, 또 하나의 차자에 대해서는 "차자의 내용을 잘 알았다.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32집 58면

 

광해04/05/09(임인)

양사가 류영경을 추형하도록 연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원전】 32 집 58 면

 

광해04/05/09(임인)

양사가 연계하기를,"신들이 어제 비망기에 '전후 역적을 추국할 때의 사람들에게 녹훈하라.'는 분부가 있었다는 말을 삼가 듣고, 신들은 진실로 성명께서 역적을 다스리는 엄한 의리를 보이고자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성상의 하늘에 짝하는 중흥의 공이 역적 류영경에게 막혔으니, 온 나라 신민들의 분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이같은 공렬이 있는데 신하로서 직분 내의 일을 가지고 먼저 공신에 녹훈되는 은총을 받는다면 누가 감히 스스로 그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아도 또한 미안하니,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하니, 답하기를,"예로부터 역적을 다스리고 공신을 녹훈했던 것은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이었으니, 심상한 뜻이 아니다. 결코 그만둘 수 없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하였다.【원전】32집 58면

 

광해04/05/09(임인)

황상(黃裳)이 황혁(黃赫)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였다."우상이 스무 번이나 정사(呈辭)하였으나, 상이 오랫동안 하교를 내리지 않다가 22일에 비로소 명을 내려 체차하였습니다. -中略- 지난번 대자(大子)가 소자(小子)의 나머지 당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여 괴수 류영경을 부관 참시 하자고 의논했으니, 최천건(崔天健)․류성(柳惺)의 무리들은 장차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그 나머지도 각각 차례로 거행될 것입니다. 대론(臺論)이 아침 저녁으로 일어나려다가 도로 그만두었습니다." 【원전】 32 집 58 면

 

광해04/05/10(계묘)

대사헌 이이첨, 집의 이성, 두 장령, 두 지평, 사간 박건, 헌납, 정언 정운호가 아뢰기를,"성상의 신령스러운 공적과 성스러운 업적이 역신 류영경 때문에 가려져서, 황제가 칙서를 내려 일을 이루도록 했던 뜻이 거의 허사로 돌아가게 되어, 끝내 조사하여 대질하는 변고를 초래하였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성상의 공업을 드러내는 데 급급해 하는 것은 중흥의 위대한 공업(功業)을 찬송하여 아름다움을 상에게 돌리려는 것 뿐 만이 아닙니다. 이는 대개 중국의 의심을 시원스럽게 풀고 임금이 당한 무고를 밝게 풀고자 하는 것입니다. -中略- 다만 거조가 마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후일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파척을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교명(敎命)이 이미 내렸으니 논공하는 일은 당연히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비밀리에 올린 계사는 예로부터 그렇게 했으니, 대신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59 면

 

광해 053 04/05/11(갑진)

양사가 <합사하여> 전계인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을 아뢰고, 새로 아뢰기를, "성상께서 임진년에 어가가 피난하는 날을 당하여 선왕의 감무(監撫)하라는 명을 받고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관우(關右)에서 분조(分朝)하여, 격문을 사방에 뛰워 군민을 모으고, 지형이 험준한 곳에 어가를 주둔하여 중국 군사를 기다리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큰 계책을 정하였습니다. -中略- 빨리 존호를 올리자는 청을 따르셔서 종묘 사직을 위로하고 신민의 여망에 답하소서."하니, 답하기를,"돌아보건대 내가 덕이 부족한데, 어찌 존호를 더할 수 있겠는가. 영경은 이미 귀양가서 죽었으니 법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하필 추형하려고 하는가."하였다. 【원전】 32 집 59 면

 

광해04/05/11(갑진)

홍문관이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로 차자를 올렸는데, 양사에 답한 것과 같은 내용으로 비답하였다. 【원전】 32 집 59 면

 

광해04/05/12(을사)

옥당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개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추후로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흔쾌히 공론을 따르기를 청하는 일이었다. 답하기를, "어제 이미 하유하였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하였다. 양사가 존호를 올릴 일과 류영경을 추형할 일을 연계했는데, 답하기를,"어제 이미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59 면

 

광해04/05/13(병오)

양사가 아뢰기를,"신들이 삼가 어제 빈청의 계사에 답한 것을 보니 '설령 공로가 있더라도 내가 세자의 지위에 있었으니, 봉훈(封勳)이 나에게 손익(損益)될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선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이미 분명한 교지를 내리셨다.'고 하셨는데, 신들은 서로 돌아보고 놀라며, 성상의 분부가 무엇을 지적하는지 몰랐습니다. 선왕께서 도감(都監)의 공훈(功勳)을 정하자는 계사에 대해서, 비록 세자를 낮추어서 신료들과 같이 하라고 답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예전의 규례를 상고하여 처리하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헤아리도록 말했으며, 끝내는 헤아려 처리하도록 분부하였습니다. 따라서 대신(大臣)이 된 자는 이해(利害)를 개진하고 반복하여 거듭 아뢰어 반드시 녹훈되도록 해야 마땅한데도, 역신 류영경은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감히 제멋대로 막아서, 이미 이런 공으로도 맹서(盟書)에 실려서 녹훈되지 못하게 하고, 또 이런 공으로도 중국 조정에 책봉(冊封)을 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中略- 오늘 조정의 신하들이 존호를 청하는 것은 대개 임금을 위하여 두터운 무고를 풀고 심한 수치를 씻어 만세의 공의(公議)를 세우고 백대의 강상을 부지하는 것이며, 일시의 여론을 흔쾌하게 하려는 것이니, 굳게 사양하지 말고 속히 현호(顯號)를 받으소서."하고, 영경을 추형하는 일을 연계하니, 답하기를,"많은 말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기록할 만한 공이 없는 것을 스스로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 어찌 무턱대고 현호를 받을 수 있겠는가. 원컨대 시끄럽게 하지 말아서 많은 일을 야기하지 말라. 나도 영경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미 귀양가서 죽었으니 추형할 필요는 없다."하였다. 【원전】 32 집 60 면

 

광해04/05/14(정미)

옥당의 차차는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을 추형하기를 청하는 일이었는데, 답하기를,"나의 뜻을 이미 하유하였다."하였다. 합사(合司)하여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과 존호를 올리는 일을 연계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하유하였다."하였다. 【원전】 32 집 60 면

 

광해04/05/15(무신)

양사가 피혐하며 아뢰기를,"오늘날 존호를 올리는 일은 실로 성상의 공적을 드러내고, 두터운 무고를 씻어 버리기 위하여 발의한 것이니, 성상의 공적을 엄폐한 류영경의 죄를 전적으로 토벌하기 위한 말을 진실로 명백히 만들어서 의리를 환히 진술해야 거의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빈청의 계사는, 성상의 공적을 들어내는 뜻만 데면데면 말하고 역신(逆臣)이 엄폐한 이유는 거론하지 않아, 삼사가 진달한 바와 크게 어긋났습니다. 이에 일세(一世)를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의심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소견을 고집하자니 제 의견만 옳다고 하는 꼴이 되니, 신들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엄폐하는 데 주로 뜻을 두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일을 서술하는 가운데의 말이니, 어찌 서로 어긋나기까지야 하겠는가. 논의가 너무 요란하여 온당치 않다.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의 차자는 대개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을 추형하여 흔쾌히 공론을 따를 일을 청하는 것이었다.

우의정 이항복이 아뢰기를, "맨 처음 존호를 청하자고 의논할 적에 양사의 계사를 보니, 류영경이 엄폐했다는 등의 말이 있어서, 신이 좌의정 이덕형에게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 보니 '듣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덕형이 말하기를 '논공(論功)이 절반도 끝나기 전에 나는 병으로 체직되어 그 뒤의 일은 들어서 아는 바가 없네. 그대는 원훈(元勳)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참여했으면서 어찌하여 내게 묻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빈청(賓廳)에 있으면서 이같은 기색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묻는 것이네.'라고 하였습니다.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고 했으니, 이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그의 집으로 찾아가 의논하니, 영경이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가 빈청에 이르러 뭇의논이 모두 같자 비로소 이에 따라서 그리 된 것인지 대개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뒤 얼마 있다가 물의가 더욱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이 신에게 사사로이 묻기를 '빈청과 양사의 계사가 말이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신이 응답하기를 '한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은 한정되지만, 천하의 말은 끝이 없는 법이다. 같은 한마디 말이지만 들은 자도 있고 듣지 못한 자도 있는 것이니, 다르다고 한들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설령 영경이 이처럼 엄폐하였더라도 이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 되어 하늘의 큼에는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성명(聖明)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하였습니다.

그저께 올린 양사의 계사를 보고, 신이 또 묻기를 '성난 목소리로 꾸짖어 좌절시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하니, 덕형이 말하기를 '전혀 이런 일이 없다.' 하고, 이어 대략 그 자초지종을 들어 아뢰었습니다만, 신은 끝까지 감히 이 한 조목을 계사에 두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덕형의 본뜻은 임금에게 고할 때에는 사실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감히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고 억지로 않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 이른 새벽에 신이 혼자서 대궐에 다다르니, 덕형이 이에 대한 의논이 있다는 것을 듣고 감히 대궐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남과 더불어 일을 계획하다가 실패했는데도 홀로 죄를 면하는 것은 신이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신이 이미 덕형과 함께 이마를 맞대고 상의했었으면서 덕형은 죄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은 백관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마땅하지 않음을 신이 알고 있습니다. 구구한 저의 의견이 비록 이와 같으나, 내일 나와보지 않기까지 한다면 이는 크게 물의를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압반(押班)하여 정청(庭請)하는 일은 원임(原任) 대신이 있으며, 백관을 거느리는 일은 본부의 찬성(贊成)이 있으니, 간절히 빌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직을 체차하여 일의 체모를 온당히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양사가 소요를 야기하여 경들이 제각기 불안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몹시 괴로워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지금의 이 정청은 원래 해야 할 일이 아니니, 경들은 출사하여 역옥(逆獄)을 다스리고 물러가 피하려는 계책을 하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60, 61 면

 

광해04/05/16(기유)

옥당의 차자에 답하기를,"따를 만한 일이라면 따르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하고, 추형(追刑)하라는 차자에 답하기를,"차자를 보니 말이 준엄하고 뜻이 정대하여 간악한 귀신의 간담을 깨뜨릴 수 있겠다. 다만 류영경의 흉악한 정상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알고 있으니, 하필 전형(典刑)을 소급해 시행해야만 명쾌하겠는가. 역적을 다스리는 것은 비록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형벌을 의논하는 것 또한 자세히 살펴야 한다. 의당 나의 뜻을 체득하여 번거롭게 고집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62 면

 

광해04/05/17(경술)

옥당의 차자는 대개 존호를 올리는 일과 역신 류영경에게 소급하여 전형(典刑)을 시행하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양사가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과 존호를 올리는 일을 아뢰니 "나의 뜻을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원전】 32 집 62 면

 

광해04/05/18(신해)

옥당의 차자는 대개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소급하여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공론을 흔쾌히 따르라는 일이었는데, <입계하니,> 윤허하지 않았다.【원전】 32 집 63 면

 

광해04/05/19(임자)

옥당의 차자는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소급하여 전형(典刑)을 시행하는 일에 흔쾌히 공론을 따르도록 청하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양사의 계사는 대개 역신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과 존호를 올리는 일이었는데, 답하기를,"따를 수 없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63 면

 

광해04/05/21(갑인)

옥당의 차자는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소급하여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공론을 흔쾌히 따르기를 청하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추형(追刑)하라는 차자에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63 면

 

광해 053 04/05/22(을묘)

양사가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과 전계인 존호를 올리는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평범한 대화 가운데에서도 공덕에 없는데 공덕을 칭송하는 것은 오히려 안 되는데, 감히 헛된 칭호를 올려서 사책(史冊)에 쓸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리가 너무나 분명하여 귀신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당 이 뜻을 알 것이니, 모름지기 다시 논하지 말라. 영경의 일에 있어서는 너무 지나친 일을 오늘날 할 필요가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존호를 올리는 일과 역신 류영경에게 소급해서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흔쾌히 공론을 따르라고 청하는 일이었는데, <입계하니,> 합사에 대한 답과 같이 답하였다. 【원전】 32 집 63 면

 

광해04/05/23(병진)

옥당의 차자는 존호를 올리는 일과 역신 류영경에게 소급해서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흔쾌히 공론을 따를 것을 청하는 일이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가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과 존호를 올리는 일을 아뢰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64 면

 

광해04/05/25(무오)

홍문관의 차자는 대개 존호를 올리는 일과 역신 류영경에게 소급해서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흔쾌히 공론을 따르기를 청하는 일이었다. 양사가 <아뢰기를,"신들이 류영경을 추형하자는 한 가지 일을 논하는데도 성상께서는 누차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고 거절하시니, 신들은 가슴이 답답하고 민망하여 더욱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신이 나라를 맡아서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자 모의하여, 열 가지 큰 죄를 지어 역적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애당초 삼사(三司)와 백관(百官)이 의논하지도 않은 채 동일한 내용으로 며칠 동안 대궐문 앞에 엎드려 형률에 의하여 처단하도록 청하였는데, 다만 배소(配所)에서 자살을 하도록 하여 끝내 정형(正刑)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그 당시에 쟁론한 바가 진실로 이미 번거로웠습니다. 대의(大義)는 어두워 잠식되고 인륜은 썩고 끊어져서, 국법이 시행되지 않은 지 지금 이미 5년이나 되었는데, 여론은 더욱 격앙되어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목베는 옛 법전을 거행하자고 대궐에 호소하고 연이어 상소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으니, 신들의 오늘 청 또한 이미 번거롭습니다. 임금을 위하여 역적을 다스리는 데에는 머리가 있고 발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목욕 재계하고 토벌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삼사가 일국(一國)의 공론을 가지고 땅속의 썩은 해골 하나를 베고자 하나 아직도 청을 얻지 못한 것은, 신들의 성의가 천박한 소치이니, 번거롭게 호소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성상의 비답이 하루를 윤허하지 않으면 하루를 번거롭게 하겠으며, 이틀을 윤허하지 않으면 이틀을 번거롭게 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에 굳이 청하는 것이며, 형벌을 시행하지 못한 것이 있기에 힘써 쟁론하는 것이니, 이것이 신들이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빨리 소급하여 전형(典刑)을 시행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신들이 정성은 참으로 천박하지만 말씀은 이미 다 드렸습니다. 여러 날 호소하였으나 성상의 들으심은 더욱 아득하니, 황공하고 답답하여 다시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임진년 변란은 실로 예전에 없던 변란이며, 전하의 공덕도 예전에 없던 공덕입니다.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하여 재차 종묘 사직을 안정시킨 공을 전하가 차지하지 않으면 누가 차지하겠습니까. 인(仁)과 효(孝)가 환히 드러나고 백성을 보호한 덕을 전하가 차지하지 않으면 누가 차지하겠습니까. 선왕께서 부탁한 뜻에 부응하고 중국 황제께서 한 지역을 지휘하라 하신 돌보심에 보답하여, 신령스런 공덕과 성스러운 덕이 하늘과 땅처럼 크고 해와 달처럼 밝으니, 몇 글자 존호의 칭호를 가지고는 진실로 만에 하나도 형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겸손하여 차지하지 않는 것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른단 말입니까. 지나간 역사를 상고해 보면 시대마다 각기 제도가 있었으니, 오늘날에 있어 제도를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선왕(先王)에 이르러서 이미 성문화한 법전이 있었으니, 오늘에 또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시일을 지체하고 연기하여 아직도 거행할 기약이 있지 않으니, 이 점이 바로 여론이 더욱 격해지고 신들이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적신(賊臣)의 역모로 성상의 공덕을 엄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국가의 불행과 신민의 분통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억울함을 밝게 씻고 공적을 드높이는 것을 진실로 일각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되니, 성상께서도 신들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흔쾌히 한번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류영경을 추형하는 일과 존호를 올리는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이목(耳目)을 맡은 관원의 책임은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허망한 칭호를 공도 없고 덕도 없는 나에게 더하려고 하니, 매우 괴이하다. 의당 나의 뜻을 살펴서 논하지 말도록 하라. 영경의 일에 있어서는 역적을 다스리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추형하는 거조는 아마도 다스려진 세상의 아름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억지로 다투지 말라."하였다. 양사가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소급해서 전형을 시행하라는 일을 재계하였다.【원전】 태백산본, 32 집 64 면

 

광해04/05/28(신유)

옥당의 차자는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소급하여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흔쾌히 공론을 따르기를 청하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 합사하여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과 존호를 올리는 일을 아뢰었는데, 입계하였다. 양사에 답하였다. "역적을 다스리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아 나랏일이 염려되고,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 밤낮으로 근심하고 있다. 공적이 없고 덕이 없는 임금에게는 결코 존호를 올리는 법이 없다.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반드시 이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니, 의당 나의 뜻을 알아서 모름지기 다시 논하지 말라. 류영경의 일에 있어서는 너무 지나친 짓을 굳이 썩은 뼈에다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원전】 32 집 65 면

 

광해04/05/29(임술)

홍문관의 차자는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소급해서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공론을 흔쾌히 따르기를 청하는 일이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의 계사는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소급해서 전형을 시행하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양사가 연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원전】32집 65면

 

광해04/05/30(계해)

옥당의 차자는 대개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에게 소급하여 전형을 시행하기를 청하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양사의 연계는 <대개 존호를 올리는 일과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이었는데, 입계하였다.> <합사에> 답하였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과인은 털끝만치도 말할 만한 업적이 없으니, 한갓 헛된 칭호만을 받는 것은 후세의 무궁한 비웃음을 취하는 것이다. 양사는 마땅히 나의 굳게 사양하는 마음에 생각을 바꾸어서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무턱대고 받기를 청하니, 양사가 나를 잘못되게 하고자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 말라. 류영경의 일에 있어서는 이미 죽어 해골이 되었는데, 어찌 굳이 추형하려고 하는가. 논의가 지나치다. 윤허하지 않는다."【원전】 태백산본, 32 집 66 면

 

광해04/06/01(갑자)

홍문관 <부제학 류순(柳洵) 등이 상차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옛날의 임금이 목을 베어 매달고 사지를 찢는 형벌을 설치한 것은 일부러 지나치게 참혹하고 각박한 조치를 취하려 한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당시 신민의 울분을 쾌하게 할 수 없고 훗날 난적들의 마음을 두렵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류영경의 죄과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도 근일 삼사(三司)가 논한 것은 단지 사직의 전복을 모의하였다는 것만 거론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관계된 한 가지의 죄만 있어도 오히려 주륙(誅戮)할 형구(刑具)들을 준비할 만한데, 이 열 가지나 되는 죄를 졌는데도 단지 배소에서 자처하도록 하여 살아서는 형륙을 면하고 죽어서는 사지를 온전히 하도록 해주셨으니, 이것이 뭇사람의 울분이 함께 격발하여 반드시 추형(追刑)을 시행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난역(亂逆)한 신하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임금을 무시하고 도리를 어긴 정상이 영경만한 자가 어찌 있었겠습니까. 이미 전고에 없던 죄악을 저질렀으니 전고에 없던 형벌을 시행한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부관 참시(剖棺斬屍)의 율문이 고례(古禮)를 상고해 보매 분명히 증거댈 수 있는데이겠습니까. 어찌 고례를 상고해 보매 증거댈 수 있을 뿐이겠습니까. 선왕께서 이를 시행하여 의심하지 않았고, 성상께서도 이미 따라 시행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유독 영경에 대해서만 이미 시행하던 중대한 행법을 오랫동안 꺼리시며 일국의 소청을 따르지 않습니까. 삼가 크게 문제삼지 마시고 빨리 추형(追刑)을 시행하소서. 처분만 바랍니다."하니>【재차 상차하여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이미 유시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67 면

 

광해04/06/02(을축)

양사가 존호 올리는 일을 연계하고, 또 류영경(柳永慶)을 추형(追刑)할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내 뜻은 전에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논하지 말라. 영경의 일은 그 역모의 징벌을 진실로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국법 또한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죽은 백골에 추형하는 것은 실로 율문에 실리지 않은 것인데, 어찌 오늘날 강요하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홍문관이 존호 올리는 일로 잇따라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내 뜻을 전에 이미 다 말하였다. 다시 더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또 류영경을 추형할 일로 잇따라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역적의 징벌을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국법 또한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죽은 백골에 추형하는 것은 실로 율문에 실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오늘날 강요하는가.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2 집 68 면

 

광해04/06/03(병인)

대사헌 이이첨, 집의 최동식, 사간 이성, 장령 한찬남, 김질간, 지평 조희일, 헌납 이창후, 정언 정운호, 김호가 나아가 존호를 올릴 것을 계청하고, 또 잇따라 아뢰어 류영경을 추형할 것을 청하니,"이미 유시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존호 올리는 일을 아뢰고, 또 류영경을 추형할 것을 계청하니 "이미 유시하였다. 그만들 논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68 면

 

광해04/06/04(정묘)

양사가 존호 올리는 일과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을 연계하니 답하기를,"이는 따를 만한 일이 아니니 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들 하지 말라. 영경의 일은 이미 죽은 백골에 형벌을 시행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中略- 【왕이 류영경을 죽이고 임해군의 옥사를 일으키고 나서부터 항상 신하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고 종실이 틈을 엿볼까 의심하여 주벌(誅罰)로써 뭇사람들의 마음을 누르고자 힘썼다. 사필(史筆)로 인한 옥사는 그 끌어댄 바는 비록 허망하였지만 일률적으로 얽어넣어 모면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이첨은 내심으로는 실로 이를 주장하면서 외면으로는 구제하는 척하였기 때문에 <그 무리가 왕왕 그의 너그러움을 칭송하기도 하였는데,> 이평(李坪)을 사주해 영경 등을 추형하는 일로 상소하게 하고, 또 이성(李惺)과 함께 김시언을 모함하여 임금의 뜻에 아첨한 일이 있고 나서야 중외가 모두 이첨에 대해 반목하게 되었다. 이에 이첨 또한 분연히 스스로 난적을 제거하고 군부를 높인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음으로써 당시의 충현(忠賢)이 차례로 화를 입어 살육의 화가 크게 일어났다.】 또 차자를 올려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을 연계하니 답하기를,"이미 죽은 백골에 벌을 내린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억지로 쟁집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68, 69 면

 

광해04/06/05(무진)

양사가 존호 올리는 일과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을 연계하니 답하기를, "어찌 아뢴 뜻을 모르겠는가. 다만 이것은 화급한 일이 아니니, 차차 생각하여 조처할 것이다. 우선 거론을 정지하고 역옥을 추국하라."하였다. 재차 아뢰니 "이미 유시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존호 올리는 일과 류영경을 추형하는 일을 연계하니 답하기를,"어찌 아뢴 뜻을 모르겠는가. 다만 이는 화급한 일이 아니니 차차 생각하여 조처할 것이다. 우선 거론을 정지하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69 면

 

광해04/06/06(기사)

양사가 존호 올리는 일과 류영경을 추형(追刑)하는 일을 연계하니 답하기를, "내 뜻을 이미 유시하였다. 영경의 일은, 애초 국법을 시행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추형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치 못하다. 그러나 삼사가 이렇게까지 오래 쟁집하니 사체에 방해가 있다.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원전】32집 69면

 

광해04/06/07(경오)

대사헌 이이첨(李爾瞻), 대사간 박건(朴楗), 사간 이성(李惺), 장령 한찬남(韓纘男), 김질간(金質幹), 지평 남이준(南以俊), 조희일(趙希逸), 헌납 이창후(李昌後), 정언 정운호(鄭雲湖), 김호(金?) 등이 와서 아뢰기를,"류영경을 추형(追刑)하는 일은 어제 이미 윤허받았으니 정여립(鄭汝立)의 예에 의하여 그 시신을 시가에 내놓고 백관을 죽 벌여 세워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보여야 합니다. 역적을 추형하라는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혈기를 가진 자로서 그 누군들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김대래(金大來)는 영경의 심복으로 그의 비호를 받아 그의 지시와 사주를 따름으로써 흉악하고 비밀스런 계략에 대해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사당(私黨)을 끌어모아 차마 들을 수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위를 범하는 패역스럽고 불순한 말을 내놓기까지 하였습니다. 먼저 의관(醫官)을 논했던 대간을 탄핵하여 겸제(箝制)의 방책으로 삼고, 또 상소한 충현(忠賢)을 모함하여 정국(庭鞫)의 논을 전제하는 등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고 한 죄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中略- 김대래․이홍로․김일승 등 세 역적을 영경을 추형하는 날 함께 형벌을 실시하여 신인(神人)의 분노를 쾌하게 하소서. 괴수를 추형한 다음에는 그 심복과 잔당을 의당 차례로 죄주어야 하는데, 당초 종묘에 고유하고 교서를 반포할 때에는 등급을 나누어 죄를 규정하고서, 끝내는 㰡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안정되게 하라.㰡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종에 고유하고 신민에게 유시한 밝은 교서를 지금 다시 제기하여 변개할 수 없으며, 또한 두 마음을 품은 자들로 하여금 모두 의구심을 품게 할 것입니다. 다만 국가에 관계된 죄는 전부터 상사(常赦)를 당하여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초(歲抄) 및 별세초(別歲抄) 때 모두 감히 서계(書啓)하지 못하였었는데, 근래에는 대의가 밝지 못하고 국법이 행해지지 않아 종묘의 고유에 언급된 삭탈 관작 이하의 역적 도당을 해조가 늘 예사 규례로 세초 때 모두 써넣고 있으니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종묘에 고유한 죄인은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일체 영영 서계하지 말도록 하는 <일을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여> 토역(討逆)의 법을 엄히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김대래 등에 대한 논박은 지나친 것 같으니,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전】 32 집 70 면

 

광해04/06/08(신미)

양사가 아뢰기를,"<역적을 추형하라는 하명이 내렸으니 혈기가 있는 자 가운데 누군들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김대래(金大來)는 류영경의 심복으로 그의 비호를 받아 지시와 사주를 따름으로써 흉악하고 비밀스런 계책에 대하여 참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사당(私黨)을 끌어모아 차마 말할 수도 차마 들을 수도 없는 위를 범하는 패역스럽고 불순한 말을 내놓기까지 하였습니다. -中略- 대래, 홍로 등에게 아울러 전형(典刑)을 추시(追施)하도록 명하소서."하니,"이미 유시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원전】32 집71 면

 

광해04/06/14(정축)

의금부가 아뢰기를,"류영경, 김대래, 이홍로 등의 시신을 파내어 압송해 올 일로 낭청을 파견해야겠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날씨가 개기를 기다려 파견하라."하고 이어 전교하기를,"흉하고 더러운 시신을 성 안에 들여다 늘어놓는 것은 타당치 못하니 성 밖 아무 곳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원전】 32 집 73 면

 

광해04/06/19(임오)

사헌부가 아뢰기를,"강상 대역(綱常大逆)의 죄에 관계된 자는 부대시참(不待時斬)을 하는 것이 곧 국가의 떳떳한 법입니다. 지금 이 류영경(柳永慶) 등 세 역적은 어떤 죄악을 범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추형의 명을 이미 내리시고는 날씨가 개기를 기다리라고 하신 까닭에 금오랑(金吾郞)을 아직 떠나보내지 않아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에 물의가 더욱 분개하고 답답해 합니다. 왕래하기에 멀지 않은 곳인데 어찌 날이 개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금부로 하여금 속히 정형(正刑)하여 신인(神人)의 분함을 시원히 풀게 하소서. -中略- 빨리 슬기로운 결단을 내려 시종 옥사를 삼가 신중히 하려는 훌륭한 뜻을 보이소서."하였다. -中略- 최유원(崔有源)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처음 역적 진(콫)이 내란을 음모할 때 입이 있는 자는 다 말하고 귀가 있는 자는 모두 들었습니다. 中略- 그 해 2월에 신이 욕되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양사와 함께 역신(逆臣)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허성(許筬)이 신에게 말을 전하기를 '임해(臨海)의 죄가 영경보다 높으니 하루 속히 멀리 출송해야 한다.'고 하기에, 신이 그 이튿날 직접 허성을 만나 같이 의논하여 조처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 칼과 쇠뭉치를 품고 들어가 화가 조석에 박두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와 같은 급변을 당한 상황에서 이미 지휘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오히려 또한 배회하고 관망하며 향배를 정하려 한다면 이것 또한 역적이니, 실로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中略- 삼가 성상께서는 두려워하는 이 심정을 어여삐 여겨 신에게 내린 책훈(策勳)의 명령을 빨리 거두어주소서."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모든 곡절을 다 알았다. 기미를 잡아 자신을 바쳐 사직을 안정시키는 데 뜻을 두었으니, 맹부(盟府)에 이름이 오르고 경종(景鍾)에 사적이 기록되는 것은 실로 사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안심하고 속히 의논 감정하여 현충(顯忠)의 전례가 오래 지체되지 않도록 하라."하였다.【임해군의 옥사는 처음에 유원(有源)이 척리(戚里)로부터 밀지(密旨)를 받아 여러 재신들에게 의논한 후 삼사로 하여금 발론하게 하였기 때문에 중외가 당시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윤효선(尹孝先)이 상소하기를,"신이 삼가 아룁니다. 무신년 역변 때, 역적 진이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병기를 들고 궐내에 침입하였다는 말이 중외에 널리 떠돌았으므로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헌납으로 승지 류희분(柳希奮), 전한 최유원(崔有源)과 왕래하며 상의하고 또 지평 민덕남(閔德男)에게 은밀히 말해주었는데, 그 때 삼사가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에 대해 아뢰고 있던 상황이라, 신이 최유원과 약속한 후 먼저 여러 대신의 집에 보내 미리 알리게 하고 이내 합사(合司)한 자리에서 발언한 다음 즉시 서찰로 옥당에 간통(簡通)함으로써 삼사의 논의가 하루 동안에 함께 일게 된 것입니다. -中略- 삼가 성상께서 곡진히 양찰하시어 공훈을 감정하라는 명령을 빨리 거두소서."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곡절을 다 알았다. 기미를 잡아 자신을 바쳐 이미 사직을 안정시키는 충의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를 포상하고 이름을 사적에 올림에 어찌 산하(山河)를 두고 맹세하는 의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토역(討逆)의 의논에 참여한 자는 모두가 왕실에 충심을 다한 사람이다. 사양하지 말고 등급을 나누어 서계하여, 국가에서 충성을 드러내고 수고에 보답하는 일이 지체되지 말게 하라. 시제에 관한 일은 유사가 스스로 알아 처리할 것인데, 그대가 어찌 혐의하는가."하였다.【사로가 류씨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이 시대의 무슨 일과 연관 되겠는가. 단지 정인홍(鄭仁弘)의 무리가 인홍을 추대하여 사호(四晧)의 공에 비하므로 남쪽 지방의 선비로서 시의에 부회하는 자들이 이 논란을 펴 시언을 모함하였는데, 실로 당시에 존중받던 효선(孝先)에게서 나온 줄을 알지 못했다. 효선은 <본래 드러난 선비로> 왕자의 사부를 가장 오랫동안 하였고 선조(宣祖) 또한 그를 어여삐 대해 주었다. 과거에 오른 후에는 기자헌(奇自獻)․류영경(柳永慶)의 사이에 주선하며 보좌하고 아첨하여 청반(淸班)을 두루 거치고, 오랫동안 전랑(銓郞)의 권병을 주도하였다. 영경이 패하자 또 류희분(柳希奮)에게 붙어 대옥(大獄)을 주창해 일으켜 임금의 비위를 맞추다가, 박승종(朴承宗)이 국혼(國婚)을 통하여 재기하여 병권을 잡자, 효선은 또 옛 친분으로 결합하여 안팎으로 모의하였다. 그 교유한 행동거지가 대체로 최유원(崔有源)과 같았으나 아첨함에 있어서는 더 심하였는데, 출제(出題)의 일로 시언(時言)과 함께 국문을 받다가 다행히 원훈(元勳)이란 이유로 풀려났다. 이로부터 임금의 신임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또 이이첨(李爾瞻)의 형세가 성대함을 보고 드디어 몸을 기울여 붙좇았다. 계축년 이후에는 끝내 류(柳), 박(朴)과 사이가 벌어짐으로써 이첨이 처음 대사헌으로 기용하여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주장하게 하였는데, 이윽고 폐모론이 좌절되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자, 중외가 지적하여 말하기를 '효선은 정조(鄭造), 윤인(尹휖)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효선은 또 내심 대간(臺諫)이 된 것을 두려워하여 점차 이첨의 뜻에 거슬렸다. 이첨이 내쫓아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가 졸하였는데, 사람들이 효선이 여기에서 나와 저기에 들지 못하였다 하여 '한데 앉은 사람'이라 불렀다.】【원전】 32 집 76 면

 

광해04/06/21(갑신)

예조가 아뢰기를,"류영경 등에게 추가 시행한 전형(典刑)은 이미 정여립(鄭汝立)의 전례에 의하였는데, 외부의 의논이 모두 종묘에 고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류영경, 김대래(金大來)의 경우는 처음 사사(賜死)할 때 이미 종묘에 고유하고 교서를 반포하였으나, 지금은 죄명이 전과 달라 정형(正刑)을 받았고, 이홍로(李弘老)는 뒤에 사사받았기 때문에 그 때 종묘에 고유하는 절차가 없었습니다. 이 일은 일정한 규례가 아니라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천단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원전】 32 집 77 면

 

광해04/06/22(을유)

【예조가 아뢰기를,】"류영경등을 추형한 일에 대해 고묘하는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니 좌의정 이덕형, 우의정 이항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감히 억단할 수 없다. 고사에 필시 의거할 만한 전례가 있을 것인데 미처 듣지 못하여 감히 의논드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성상께서 재량하소서."하니 답하기를,"고묘 후에 사방에 교서를 반포해야 할 것 같다."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유지(有旨)에,】 류영경 등에게 전형(典刑)을 추가 시행하는 뜻을 종묘에 고유한 후 사방에 교서를 반포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종묘 영녕전(永寧殿)․봉자전(奉慈殿)에 함께 택일하여 고유제를 지낸 후 이어 교서를 반포하되, 제문, 교서 등의 일은 예문관 및 각 해사로 하여금 살펴서 거행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원전】32집 78면

 

광해04/06/23(병술)

의금부가 아뢰기를,"류영경, 김대래, 이홍로, 김일승, 정의민 등을 이미 추형하였습니다. 사방에 전시하고 가산을 적몰하고 연좌인을 처벌하고 집을 헐어버리고서 못을 파는 등의 일을 대간의 계사대로 정여립의 전례에 의해 거행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이 상소하기를,"난신 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만, 지금 신의 혼가(婚家)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거적을 깐 채 두려워서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앞서 신축년 가을 역신 류영경이 형조 판서가 되었을 때 신의 아들 이현(李絃)과 혼인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신은 망녕되이 당시 그가 권세가 없다 하여 잘못 혼인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재상의 지위에 이르러 권세가 점점 성대해진 것입니다. 신이 본래 우매하고 졸렬하여 마음속으로 몹시 미워하다가 드디어 그와 소원해졌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결혼할 당시에는 비록 흉역의 모의가 훗날에 일어날 것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신이 불행하여 이미 그와 연혼(連婚)하였으니 죄를 도망할 곳이 없습니다."하니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78, 79 면

 

광해04/06/25(무자)

류영경 등을 추형한 일로 팔도에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왕은 이르노라. 역적의 흉악한 역모가 실로 종사에 관계되었으니, 임금이 주토(誅討)하는 법에 있어 생사(生死)에 차이를 둘 수 없다. 지난번에 비록 떳떳한 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으나 그 죄가 오늘날 더욱 드러나므로 추시(追施)의 법률을 들어 신명(申命)의 소리를 널리 고한다. 역적의 괴수 류영경은 음흉한 마음을 먹고 악한 성품을 기르며 천지 간에 난육(卵育)되었는데, 국가가 불행하여 이를 공경의 반열에 놓아두었다. 선조(先朝) 말년에 이르러 오랫동안 수상(首相)의 자리를 차지하여 밖으로는 당여(黨與)를 심으면서 위복(威福)의 권력을 휘두르고, 안으로는 궁정과 통하면서 날로 음흉한 계책을 부렸다. 그 멋대로 천단하며 총명을 가로막은 죄는 우선 거론하지 않더라도 화란(禍亂)의 계책을 품은 그 마음은 환히 드러나 가리울 수 없다.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이 너무도 많아 이루 말할 수 없다. 선왕께서 천조(天朝)에 명을 청하였는데 오랫동안 온 나라의 소원을 가로막았고, 백관이 조사(詔使)에게 글을 올린 것이 도리어 논의를 주도하던 자들의 의도에 맞추어주는 것이어서 심지어 이미 다 자란 원손(元孫)에 대해서도 응당 거행해야 할 의식을 중지시키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군부가 바야흐로 병중에 있었으니 신하로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했겠는가.

그럼에도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고 망령되이 강도 높은 약제만 썼으며, 한 번 패배한 교훈을 생각지 않고 축하의 의식만 베풀고자 하였다. 임진년의 훈공을 감정함에 이르러서는 감히 사사로운 뜻을 부렸으며, 도당(都堂)이 복계(覆啓)함에 이르러서는 상신(相臣)을 모두 다 내쫓았다. 자신의 이름을 기도하는 축사에 쓰고자 하였고, 위태한 즈음에 밀지(密旨)를 받았다고 핑계하였다. 정직하게 공척하는 상소가 거의 발생하게 된 위기를 타파하려 함을 꼬투리로 삼아, 처음에는 거만스레 차자를 올려 자신을 해명하였고 끝내는 옥사를 일으켜 장차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왕위를 계승하는 예를 늦추고자 하여 일부러 곤룡포(袞龍袍)를 짜는 기간을 물었으니, 이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이었겠는가.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의 잔악함이 합하여 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장수를 삼고 재상을 삼고자 부른 자는 모두가 그의 여얼(餘헡)이었으니, 그 자취를 밟아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이 모두가 난을 처음 주창하는 단계였다.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 때도 곧 닥치듯이 조짐이 전부터 차차 나타났었으니,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모두 그를 잡아 죽일 수 있다.

역적 김대래(金大來)는 이무기가 남몰래 독기를 쏘듯 하고 시랑이 은밀히 어금니를 갈듯 하며 영경에게 양성되어 그 문하에서 종노릇을 하였고, 영경의 심복이 되어 응견(鷹犬)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므로 대래가 아니었으면 영경이 될 수 없고 영경이 아니었으면 대래가 될 수 없었다. 항상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무리를 모아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발설하여 남의 입을 봉쇄하려 하였다. 먼저 의관(醫官)을 논했던 관원을 탄핵하여 사림(士林)을 일망 타진하고자 하였고, 이어 정국(庭鞫)의 의논을 주창하여 같은 악행을 서로 도와 이루었으니 그 죄악은 영경과 같다.

역적 이홍로(李弘老)는 음특한 자질로 악독한 계책을 성사시켰다. 궁금에 연줄을 대어 교묘히 은혜를 살 매개체로 삼으려 하고 원흉에 붙어 대번에 발탁될 바탕을 이루었다. 앞서 서로(西路)가 어지러울 때 차마 한 장의 허위 상소를 만들었는데, 그 위를 범한 패역스러운 말은 하늘의 해가 바로 통촉하였고 화란을 좋아하며 날뛴 태도는 길가는 행인도 아는 바이다. 그는 스스로 본심이 드러날 것을 감안하고 더욱 계략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 온갖 사단을 서로 얽어 불측한 모의를 경영함으로써 뭇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이상 세 역적은 그 죄과가 실로 동일하다. 일찍이 즉위한 처음에 미처 노륙(쩀戮)의 형법을 시행하지 못하여, 비록 제 집에서 자진하여 숨을 거두었으나 역적의 육체는 아직까지 지하에 완전하기 때문에 하늘과 백성의 뜻이 점점 더 분노하며 격해졌다. 생각건대 옛날의 토역(討逆)하는 일은 대부분 참시(斬屍)의 형을 썼는데, 실로 시조(市朝)에 진열하지 않는다면 어찌 난적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 이에 명하여 류영경․김대래․이홍로와 아울러 역적 김일승․정의민 등을 이미 본월 21일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능지 처참(凌遲處斬)하게 하고, 그 시체를 사방에 전시하고 가산을 적몰하고 연좌인을 처벌하고 집을 헐어버리고 못을 파는 등의 일도 율문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나라에 일정한 형법이 있으니 내 어찌 스스로 마음대로 하였겠는가. 이에 신료에게 은혜를 미루어 중외에 경사를 고하노라. 이어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고 자궁자(資窮者)는 대신 가자하라. 아, 오직 그 자신이 부르는 것이니 마땅히 화복의 문을 생각하며, 모두 유신(維新)을 일으켜 다함께 인수(仁壽)의 경지에 오르도록 하라.㰡하였다.

【류영경은 군부에게 아첨하여 오랫동안 나라의 권력을 잡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권간(權奸)이라 지목하였다. 선조(宣祖) 말년에 세자 책봉을 청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한 언급을 꺼리자, 영경이 저촉될까 두려워 감히 발론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이러쿵저러쿵 이론(異論)을 내세우는 자들이 모두 이것으로 모함의 계기를 삼으려 하였다. 영경은 성품이 음침하고 시기심이 있어 겸손한 마음으로 스스로 해명하려 하지 않으면서 불평하는 말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왕이 동궁에 있기를 더욱 두려워하자, 기자헌(奇自獻), 정인홍(鄭仁弘), 이산해(李山海), 윤효선(尹孝先) 등이 모두 보호를 자임하고 은밀히 동궁의 지도를 받으면서 모의가 몹시 주밀하였고, 심희수(沈喜壽) 역시 이것으로 이름을 얻었으되 동궁을 왕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경이 동궁을 붙좇지 않은 것은 왕에게 전복의 화가 있을 것을 미리 점쳐 종사를 위하려고 한 계책에서가 나온 것이 아니었고, 기자헌이 보호를 명분으로 삼은 것 역시 진정으로 국본(國本)을 위한 계책이 아니고 영경에게 배척당함으로써 뒷날 영경과 틈을 벌려 자신을 위하는 소지로 삼고자 함이었다. 그 거짓을 꾸미고 없는 일을 날조한 화는 끝내 주심(主心)으로 하여금 의혹․실성하게 하여, 위로는 부왕(父王)을 원수로 여기고 아래로는 신민을 질시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항상 성명을 보전하려 하지도 종사와 국가를 염두에 두려고 하지도 않게끔 하였다. 즉위한 후 역옥이 해마다 잇따라 조정에 가득한 공신이 모두 이를 통해서 책록되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논자들의 말이 '영경을 추형하고 정운 공신(定運功臣)을 책록함으로써 부자의 기강이 멸절되고 말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서궁(西宮) 유폐의 조짐이었다. 두셋의 이름난 재상이 그 사이에서 노력하였으나 감히 바로잡아 구제할 수 없었고, 대론(大論)이 일어날 즈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언하다가 축출을 당하였으니, 소인이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는 데에서 온 화와 군자가 기미에 어두움으로써 당한 실패가 천고의 한 귀감이 될 만하다. <김대래는 비록 영경을 붙좇았으나 이유홍(李惟弘), 최천건(崔天健)의 유에 불과한데, 오직 외로운 몸으로 당족(黨族)이 없고 또 류희분(柳希奮) 등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경과 함께 같은 율을 받았다. 사람들 또한 그 사람만 혼자 당한 것을 원통하게 여겼다.>】 【원전】 32 집 80 면

 

광해04/06/27(경인)

의금부가 아뢰기를,"류영경의 아들 류열(柳悅)과 이홍로의 아들 이승원(李承元), 이승형(李承亨), 이승업(李承業) 등이 모두 배소에 있으니, 본부의 낭청을 나누어 파견하여 잡아다가 처치하소서. 류업(柳업)은 분명히 폐질자이니 법전에 의하여 연좌를 면하게 함이 마땅할 것 같고, 이 밖에 그 죄가 응당 연좌되어야 하는데 누락된 자 및 김일승(金日昇) 등의 부자 이하 연좌자는 모두 경외의 담당관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후 처치함이 또한 마땅하겠습니다. 정의민이 살던 고을 평산(平山)과 김일승이 살던 고을 봉산(鳳山) 등의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는 일은 다른 전례에 의하여 거행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윤허한다. 류업은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평산, 봉산의 읍호 강등과 수령 파직의 일은 아직 거행하지 말라."하였다.【원전】 32 집 81 면

 

광해04/07/01(계사)

한성부가 아뢰기를,"역적 류영경(柳永慶), 김대래(金大來), 이홍로(李弘老) 등의 집을 헐어버리고 못을 파는 일로, 본부가 승전(承傳)에 따라 문기(文記) 및 <부(府)에 있는> 장적(帳籍)을 가져다 상고하니, 영경의 평소 살던 집은 동부 숭교방(東部崇敎坊)에 있는데 빈 대지 및 행랑 10여 칸만 있고, 난리 이후에 살던 집은 남부 성명방(南部誠明坊)에 있는데 이는 곧 영경의 처조카인 전 승지 황시(黃是)가 류정량(柳廷亮)에게 별급(別給)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기가 관의 서명을 거쳐 <발급되지> 않았으며, 또 병오년 장적에는 영경의 이름으로 입적되었고, 무신년에 영경이 죄를 입은 후 기유년 장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량의 이름으로 입적되었습니다. 황시는 정량의 이성(異姓) 사촌 대부이니 별급의 문서를 만들 수 없으며, 법전 내에 㰡부모․조부모․외조부모․처부모․지아비․처첩 이외는 모두 관의 서명을 거친 문기를 쓴다.㰡고 하였고 보면 이 문기는 관의 서명을 거치지 않았으니 법례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또 전계(傳係) 문기가 없으므로 사실을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더구나 병오년 장적에 영경의 이름으로 입적되어 있으므로 곧 영경의 집이라 할 수 있기에, 승전에 의해 <못을 파기 위해 헐어버리려 하였습니다.>【헐어버리고 못을 파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어제 금부(禁府)에 내린 비망기를 보니 몹시 황공합니다. 모처에 못을 파는 일은 우선 금부의 처치를 기다려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류영경의 집을 헐어버리고 못을 파는 일을 <재가받은 후> 전례에 의해 한성부에 이문(移文)하고, <그 후 이와 같은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어 가주(家主)의 이름자와 문권을 서로 대조 상고하여 처치할 일로 또 이문하였고, 그 다음은 본부가 알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하교를 받들건대 한성부로 하여금 다시 자세히 조사하라고 하셨는데, 옹주(翁主)의 집은 헐지 말고 영경의 본가만 못을 파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윤허한다. 이 일뿐만 아니라 다른 죄인의 집 역시 문권을 가져다 자세히 살펴 처치함으로써 뜻밖에 잘못 걸려드는 억울함이 없게 하라."하였다. 【영경의 손자 류정량(柳廷亮)이 옹주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원전】 32 집 82 면

 

광해04/07/03(을미)

사헌부가 아뢰기를,"사관(四館)이 선비들의 과거 응시를 정지시킨 것은 간위(奸僞)를 막고 사습(士習)을 바로잡으려는 것인데, 만약 남의 사주를 받았다거나 혹은 사사로운 혐의로 인하여 죄명을 얽어 만들어 남의 앞길을 막는 것이라면 어찌 크게 증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비를 시해한 여인 개미치(介未致)의 옥사는 애초에 실형(失刑)하였고, 뒤에는 역적 류영경, 김대래 등이 옥사를 뒤집음으로 인해 윤조원(尹兆源) 형제를 잡아다가 반좌(反坐)로 논죄하여 하루 안에 모두 곤장을 맞다가 죽었으므로, 공론이 지금까지 억울하다고들 합니다. 조원의 아들 윤유일(尹惟一)은 당시 강보에 싸인 어린 아이였으니, 무슨 허물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생원․진사의 복시에 응시하려 하자, 성균관 학유(學諭) 허수(許洙)가 역신이 옥사를 번복하던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서술하여 감히 그 아비가 억울하게 죽었던 죄명으로 유일의 과거 응시를 중지시킬 제목(題目)을 만들었으니 그 계책이 흉악하고도 참혹합니다. 이를 들은 자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있으니, 사판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윤조원 등의 죄악을 말하자니 기가 막힌다. 승복을 받아 형을 바루지 못하고 곤장을 맞다가 죽게 하였으니 실형(失刑)한 것이라 할 만한데, 그 아들에게 어찌 과거 응시를 허락할 수 있겠는가. 사관(四館)이 응시를 중지시킨 것은 체통을 세운 것인데 법관이 도리어 악종을 비호하고자 하여 법을 지키려는 사관을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내 매우 괴이하게 여긴다."하였다.

【개미치(介未致)는 고(故) 사간 윤백원(尹百源)의 딸이다. 백원이 중독되어 갑자기 죽자, 백원의 서제(庶弟) 조원(兆源) 형제가 개미치가 모살(謀殺)하였다고 고발하여 드디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는데, 옥사에 단서가 없었으므로 혹 억울한 일이라고 일컫는 사람이 있었다. 선종(宣宗) 때 개미치의 아들들이 상언(上言)하여 심리를 받아 조원 등이 모두 반좌(反坐)되어 죽었다. 조원이 일찍이 이이첨(李爾瞻)의 어렸을 때의 스승이었는데 이첨의 사람 됨됨이를 크게 칭찬하였으므로, 이첨이 또 그 옥사를 뒤집고자 하여 먼저 허수의 과거 응시를 정지한 일을 탄핵하였다. 개미치는 본래 옹주의 손녀로 그 자손이 궁중과 서로 통행했었기 때문에 왕이 두둔한 것이다.】 【원전】 32 집 82 면

 

광해04/07/04(병신)

대사헌 【이이첨】 이하가 아뢰기를,"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로서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고 일에 따라 밝혀 바로잡아 왔는데,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은바, 너무도 엄준하여 <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놀라 두려워하면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中略- 위관(委官) 류영경이 그 옥사를 전적으로 주관하면서 그 증거할 만한 문안이 없고 사간(事干)이 다 죽은 것을 이롭게 여겨, 발고장을 낸 그 아들 덕경은 놓아두고 즉시 조원 형제를 형신하도록 청하였습니다. -中略- 이 옥사의 곡절이 대개 이와 같은데 도리어 비호한다는 엄한 꾸지람을 받게 되었으니, 신들이 무슨 면목으로 풍헌(風憲)의 자리에 무릅쓰고 있어 그 죄를 초래하겠습니까. 신들을 파직하여 일을 당하여 망언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하니 답하기를, “한 사람의 악종(惡種)을 위해 선조(先朝)가 이미 완결한 옥사를 뒤집고자 하여 많은 말을 허비하니 너무 지나치게 애쓰는 것이 아닌가. 사직하지 말라."하였는데,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83 면

 

광해04/07/05(정유)

사간원이 아뢰기를,"대사헌 이하가 피혐하여 물러갔습니다. 개미치가 음행으로 윤리를 더럽히고 아비를 원수처럼 보았다는 소문이 당시에 자자히 드러났으며, 윤백원이 중독되어 즉사한 것이 실로 그 딸로 말미암았다는 실상이 분명 추안(推案)에 실려 있는데, 정형(正刑)을 미처 시행하기 전에 곤장을 맞다 죽었으니 온 나라 사람이 그 누군들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류영경이 뇌물을 탐하여 그 문안과 사간(事干)이 없음을 기화로 시역자의 친속과 더불어 감히 14년이 지난 후에 옥사를 뒤집어 그 발고장을 낸 친자는 놓아두고 먼저 무죄한 얼제(헡弟)를 얽어 넣었습니다. -中略- 대사헌 이이첨(李爾瞻), 집의 최동식(崔東式), 장평 류혁(柳?), 이사경(李士慶), 지평 이명(李溟), 남이준(南以俊)에게 모두 출사를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32 집 83 면

 

광해04/07/07(기해)

양사가 합계하기를,"역적 김제세는 이미 승복했으니 속히 형법을 시행하여 흉한 목숨이 한 시각이라도 더 연장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인데, 여러 역적에 대해 빙문(憑問)하기 위하여 목숨을 살려두고 있는 지 이미 반년이 지났습니다. -中略- 류영경의 집은 한성부의 아뢴 말로 보면 류정량(柳廷亮)의 소유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조정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흉역의 소굴이 완연히 아직까지 보전되게 하였으니, 보고 듣기에 더욱 해괴하고 여론이 더욱 분개하며, 자못 역적의 징벌을 엄하고도 분명히 한다는 의의가 없습니다. 빨리 해사(該司)로 하여금 앞서의 계하 공사(啓下公事)에 의하여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김제세는 마땅히 참작하여 조처하겠다. 집을 헐고 못을 파는 것은 도성 안에서는 예로부터 하지 않던 일인데 어찌 오늘날 강행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류영경의 집에 대한 일은 유사로 하여금 다시 살펴 조처하게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84 면

 

광해04/07/08(경자)

한성부가 아뢰기를,"<전교하여 운운(云云)하셨으므로,> 본부가 다시 류영경의 집을 조사한 결과, 성명방(誠明坊)의 집은 비록 황시(黃是)가 류정량(柳廷亮)에게 별급한 집이라 하나, 그 문기(文記)가 관의 서명을 거치지 않은 채 백문(白文)만 있을 뿐이고, 또 황시의 별급이 을사년에 있었으니 의당 류정량의 명의로 병오년에 입적되어야 하는데 류영경의 명의로 입적되었고, 무신년 영경이 죄를 입은 후 기유년 장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량의 명의로 되어, 전후의 어긋남이 이와 같습니다. 법전 내에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처부모, 남편, 처첩, 동생이 화회(和會)한 이외는 반드시 관에서 서명한 문서를 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황시는 정량에 대하여 이성(異姓) 사촌 대부이니, 그 문기가 관에서 발급이 되지 않은 것은 법례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또 황시가 한충남(韓忠男)의 처 심씨(沈氏)에게서 사들인 본문기가 없이 이미 병오년에 영경의 명의로 입적되었으니,> 이는 결코 영경의 집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평소에 살던 빈 대지 및 행랑(行廊)이 있더라도, 어떤 사람은 '생시에 들어가 모여 흉모를 꾸민 곳을 헐어버리고 못을 파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감히 아뢰니, <성상께서 결단하여 시행하심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옹주가 살았던 집이었음을 따질 것 없이 영경이 죄를 입기 이전에 살던 집이라면 몰수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본부는 다시 살펴 조처하라."하였다. 양사가 류영경 등의 집에 대해 앞서의 계하 공사대로 거행할 일을 합계하여 입계하니 답하기를,"집을 헐어버리고 못을 파는 것이 이미 조종조의 옛 규례가 아닌데, 어찌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논집하는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원전】 32 집 84, 85 면

 

광해04/07/09(신축)

양사가 류영경 등의 집을 앞서의 계하 공사대로 속히 거행할 일을 합계하여, <입계하였는데,>【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32 집 85 면

 

광해04/07/11(계묘)

양사가 류영경 등의 집에 대해 앞서의 계하 공사에 의하여 <속히> 거행할 일로 합계하여 <입계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85 면

 

광해04/07/14(병오)

의금부가 아뢰기를,"법전 내에 사위에 대한 연좌의 일을 <어떻게 조처하였는지를 상고하여 아뢸 일로 전교하시기에> 율문을 상고하니 '혼약한 딸은 따라서 연좌되지 않는다.' 하고, 사위는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알았다. 류영경의 사위 등을 기축년 정적(鄭賊)의 전례에 의해 살펴 시행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86 면

 

광해04/07/14(병오)

금부가 연좌 죄인 류항(柳恒)은 해남(海南)으로, 이승의(李承義)는 남해(南海)로, 류흘(柳屹)은 의주(義州)로, 소남(小男)은 경흥(慶興)으로 정배할 것을 아뢰었다.【류영경과 이홍로의 조카들이다.】 【원전】 32 집 86 면

 

광해04/07/15(정미)

의금부가 아뢰기를," '류영경의 사위를 기축년 정적(鄭賊)의 전례에 의하여 살펴 시행하라.'는 것으로 전교하였는데, 기축년 전례에 대해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습니다. 그 당시 추관(推官)․승지(承旨)․문사 낭청(問事郞廳)에게 물어 조처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원전】32집 86면

 

광해04/07/16(무신)

금부가 아뢰기를,"류영경의 사위 등을 정적(鄭賊)의 전례에 의해 살펴 시행할 일을, 전교에 의해 그 당시 추관, 승지, 문사 낭청에게 물으니, 우의정은 말하기를 '신은 이미 너무 늙어 정신이 흐릿한데다가 지금 동기간의 상을 당함으로써 어리둥절하여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정적에게 사위가 둘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하나는 김정일(金精一)이며 그 하나는 성명을 잊었는데, 모두 곤장을 맞다가 죽어 조정에서 다시 묻지 않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고, 공조 판서 이준(李準)과 진흥군(晋興君) 강신(姜紳)은 말하기를 '다만 정적의 출가하지 않은 딸 삼옥(三玉)이 육진(六鎭)으로 정배된 것이 기억날 뿐, 사위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류영경의 사위를 모두 삭탈 관작하고 문외로 출송하여 종신토록 금고하고, 이홍로와 김대래의 사위에게도 똑같이 시행하라."하였다.【원전】 32 집 86 면

 

광해04/07/17(기유)

전교하였다."류항(柳恒), 류흘(柳忔)은 위리 안치하지 말고, 역적의 괴수 류영경의 사위인 전 평사(評事) 유수증(兪守曾)과 학유(學諭) 이현(李쐾), 이홍로(李弘老)의 사위 송유조(宋裕祚), 권립(權립)은 모두 관직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함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하라. 역적> 김대래(金大來)의 사위 이응협(李應莢)은 판부(判付)에 의해 시행하여 <문외 출송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할 일을 의금부에 내리라.>" 【원전】 32 집 86 면

 

광해04/07/18(경술)

금부가 죄인 류열(柳悅), 이승형(李承亨)을 당고개(堂古介)에서 교수로 처형하고 아뢰었다.【류영경의 아들 류열, 이홍로의 아들 이승형, 이승원(李承遠)을 잡아다 죽였다.】【원전】 32 집 87 면

 

광해04/08/06(정묘)

사간원이 아뢰기를,"명분과 실제가 서로 부합되지 않으면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 잘못이 됩니다. -中略- 삼가 무신년의 공신을 감훈(勘勳)한 기록을 보니, 특별히 정인홍을 1등 공신에 녹훈하도록 명하였는바, 보고 듣는 사람치고 그 누가 충성을 현양하고 공로에 보답하는 성상의 거조에 승복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정인홍이 무신년에 올린 상소의 내용은 진(콫)의 역옥(逆獄)을 다스린 일과는 자연 다르며, 류영경(柳永慶)이 이미 세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그 역적을 토벌한 큰 공은 뒤섞어 시행하고 아울러 칭해서 실제의 자취를 민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대신들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마감하게 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이때 이이첨이 류영경을 죽인 것으로 원훈(元勳)의 다음을 차지하고자 하였으며, 또 명호(名號)를 달리해서 같은 동료들을 모두 녹공하고자 하여, 대사간 박건(朴楗)을 사주하여 이 논계를 하게 한 것이다.】 【원전】 32 집 90 면

 

광해04/08/14(을해)

전일에 사간 이성(李惺)이 비밀히 아뢰기를,"신은 이달 6일에 양사가 합계하는 것을 보고 한 차례 간통(簡通)을 보내고는 군기시에 갔었는데, 헌부가 피혐함으로 인해 합계하지 못하였습니다. -中略- 지난날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이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여 화가 조석간에 박두하였었습니다. 대사헌 이이첨은 본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에 정인홍과는 비록 서로 잘 알지 못하였지만 그가 물러나 있는 석현(碩賢)으로 정충 대절(精忠大節)이 있다는 이유로, 대사헌 박건과 더불어 신의 종제(從弟)인 사포서 별좌 이담을 보내어 정인홍에게 뜻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인홍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은 채 상소하여 불측한 화에 빠질 뻔하였던 것입니다. 그간의 곡절은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신의 이름을 세 사람 사이에 끼워넣어 성상께 아뢰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잘못되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현재 언관으로 있는데 이런 논의가 동료들에게 발론되었습니다. 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해 듣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감히 인혐하여 스스로 잘못을 밝히지 않은 채 석계(昔啓)에 동참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성상소> 김호의 아룀이 또다시 천만 뜻밖에 나왔습니다. 이는 신에게 있어서만 온당치 못한 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사람들이 반드시 놀라워할 것입니다. 신은 결단코 염치를 무릅쓰고 그대로 자리에 있어서 명기를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체직하라고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이때 김호가 이이첨의 문도(門徒)로서 혼자 아뢰어서 류영경을 주살한 데 대한 훈명(勳名)을 별도로 감훈할 것을 청하면서 이어 동당(同黨)들이 서로 호응한 상황에 대해 열거하였다. 그러자 이성 등이 서로 이어 사피하였는데, 실은 자신들의 공을 과장한 것이었다.】【원전】32집 93면

 

광해04/09/03(갑오)

권양(權瀁)이 상소하여 아뢰기를,"작상을 베푸는 것은 현명한 임금이 신중히 할 바이고 훈명(勳名)이 내려지는 것은 어진 선비가 피하는 바입니다. -中略- 지난해의 여러 역적들 가운데서 류영경이 으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역적들을 토벌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훈명(勳名)을 정하면서 유독 이 역적을 토벌한 공훈에 대해서만은 명호를 정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현재 성상께서 밝게 분별하시어 역모한 상황이 소상하게 드러났는데도 몰래 그를 부호(扶護)하면서 오히려 꺼리낌이 없습니다. 더구나 세월이 오래 지나 일이 흘러간 뒤에는 반드시 '류영경의 죄는 정인홍의 상소에서 근거로 삼을 것이 없었으므로 녹훈할 때 명호를 정할 수 없어서 익사 공신에 덧붙여 녹공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것은 정인홍의 충성심은 드러내지 못하고 역적을 보호하는 바탕이 되기에만 족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망령되이 헤아리면서 지나치게 염려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 은거한 훌륭한 선비는 도(道)로써 높여야 하는 것이며, 밝은 임금이 어진이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형식적인 것으로 하지 않는 법입니다. 성세(聖世)에 충성스럽고 어진 선비로는 단지 정인홍 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날의 임금과 신하들을 법으로 삼아 우악한 예로 대우하고 상주지 않는 것으로 포양하여, 책훈(策勳)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그로 하여금 종시토록 절개를 지킬 수 있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정인홍만 다행이겠습니까. 아마도 사문(斯文)의 다행일 것입니다.㰡"였는데, 왕이 녹훈 도감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 이이첨이 별도로 공신호를 세워 류영경을 주살한 공을 내세우려고 하였는데, 박승종(朴承宗) 등이 불가하다고 하고 대신들이 머뭇거렸다. 이에 단지 익사 공신의 명호에다【임해군의 옥사에 대한 공신이다.】 녹공하면서 정인홍을 말단에다 썼는데, 이는 실로 근거할 것이 없는 것이었다. 권양의 이 상소는 이이첨의 도당이 초고를 작성해서 올린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정운 공신(定運功臣)의 훈호를 별도로 세웠다. 【원전】 32 집 97 면

 

광해04/09/20(신해)

【정운공(定運功)을 감정하였다.】 전교하기를,"우상이 이미 출사하였으니 박여량(朴汝樑) 등의 공훈을 의논하는 일을 대신에게 말하라."하였다.【이때 박여량이 이미 죽었는데 정인홍이 차자에서 "당초에 박여량이 조보(朝報)를 신에게 보여주었으므로 신이 상소를 올려 류영경(柳永慶)을 논계했다."고 하였으므로, 왕이 정운 공신에 녹공하려 한 것이다.】 【원전】 32 집 108 면

 

광해04/09/22(계축)

정인홍이 이미 상소를 올려 저위(儲位)를 정한 것을 자신의 공으로 여겼으며, 또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서 한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이담(李憺)이 뒤늦게 신에게 말해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이첨 등이 또 정인홍이 그 말을 해서 자기들로 하여금 공이 없게 한 것을 원망하였으므로 정인홍이 또 이 차자를 올려서 두 가지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이에 이이첨의 심복들이 이로 말미암아 모두 녹공되었다. 왕은 자신을 돕는 자가 많은 것에 기뻐해서 모두 들어주었는데, 당초에 상소해서 류영경에 대해 논한 자들은 단지 정인홍과 그의 제자 한두 사람뿐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리고 그 상소는 선묘(宣廟)에게 저촉되고 저위(儲位)를 뒤흔들었으니 무슨 공이 있었겠는가. 더구나 이이첨의 무리들은 단지 류영경 당의 반대파이기만 할 뿐 한 글자도 드러낼 만한 것이 없었으니 어찌 말할 만한 공로가 있었겠는가. 【원전】32집 109면

 

광해04/09/25(병진)

사헌부가 아뢰기를,"지난번에 삼사에서 존호를 올릴 때 '성상의 위대한 공렬(功烈)이 오랫동안 적신(賊臣)에게 가리워졌었다.㰡는 것으로 주된 뜻을 삼기로 계청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옥책문(玉冊文) 중에는 생략하고 언급하지 않았으니 공론을 생각지 않음이 심합니다.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들 놀라고 있으니, 제술관을 추고하고 그 글 중에 고칠 만한 곳을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㰡옥책문 중에 이 일을 아울러 언급하는 것이 나는 옳은 줄 모르겠다. 헌부는 한갓 류영경을 깊이 죄줄 것만 알고 그것이 도리어 임금에게 욕이 돌아가게 하는 것인 줄은 모르고 있다. 물러가서 다시 생각해 보라."하였다. 【원전】 32 집 111 면

 

광해04/10/22(임오)

우의정 정인홍이 또 상차하기를,"신은 선왕조의 늙은 신하입니다. 지난 임인년에 신이 소명(召命)을 받고서 대궐 아래에 있었는데, 그때 신의 나이가 67세였습니다. -中略- 삼가 전하께서는 분발하시고 결단을 내리시어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며, 대신들을 아끼고 대관들을 잘 따라 주시어 항상 간언을 따를 것을 생각하고 간사한 말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시어, 한 마음으로 함께 헤쳐나가시면서 물에 빠지고 불에 타는 것을 구제하시듯 하소서. 그러면 어지러워지기 전에 제압하고 싹트기 전에 끊어버려서 구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아마도 진(진)이나 류영경, 김직재 같은 간흉들이 또다시 도성 안에 숨어 있으면서 몰래 흉계를 꾸밀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장차 각자 이심을 품을 것이니 누가 다시 전하를 위하여 그들을 토죄(討罪)하기를 청하겠습니까. 아무리 토죄하기를 청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노신이 가고 머무는 것에 개의치 마시고 일찌감치 스스로 도모하시어 조금도 늦추지 마소서."하였는데 답하기를,"차자를 살펴보고 경이 나라를 걱정하는 뜻을 모두 알고는 몹시 감탄하였다. 경의 병이 낫지 않았고 나 역시 일이 있어서 즉시 다시 만나보지 못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마음 편히 잘 조리하여서 나를 만나본 다음 나오고 물러갈 것을 결정하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119 면

 

광해04/11/30(기축)

영원군(靈原君) 박건(朴楗)이, 즉위 초에 류영경(柳永慶)을 논죄해서 배척한 삼사의 신하들을 모두 정운 공신(定運功臣)에 녹훈해야 한다고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대사헌 최유원(崔有源) 등이 쟁론하기를 "당초 삼사의 관원은 권흉(權凶)이 세력을 잃은 뒤에 발론했으니, 녹훈할 만한 공이 없다."고 하면서 그 명을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이 스스로 류영경을 주벌한 것을 가지고 사직을 안정시킨 큰 공으로 여겨 정인홍(鄭仁弘)을 추존하여 원훈(元勳)으로 삼고 자신은 그 다음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친한 사람을 모두 녹훈하면서 함께 모의했다고 하였으나 조정의 명사들이 매우 적었으므로 마침내 삼사의 신하들을 모두 녹훈하여 성세를 키우려고 하였다. 최유원은 바로 그 당시 논죄할 때 참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논의를 극력 저지하였는데, 대개 그와 함께 녹훈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였다. 당시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종(宣宗)의 부자가 전수한 것에 대해서 다른 의견이 없다. 그런데 이첨 등이 이를 빼앗아 자기의 공으로 삼고는 심지어 종사가 거의 망해가다가 다시 이어졌다고 하며 정운 공신(定運功臣)이라고 일컬었으니, 이것은 바로 부자간의 인륜이 무너진 것이다."하였다. 정인홍이 태연스레 받은 것은 진실로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으나, 정온(鄭蘊)은 바른 말을 하다가 도성을 떠난 사람으로서 전혀 회피할 줄도 모르고 끝내 사당(私黨)의 꼬임을 받아들였으므로 사론(士論)이 기롱하였다. 【원전】 32 집 143 면

 

광해04/12/01(경인)

지평 배대유(裵大維)․조존도(趙存道)가 아뢰기를,"어제 모인 자리에서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영원군(靈原君) 박건(朴楗)의 계사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한 일에 대해 논하려고 하였습니다. 신들의 뜻에는 '녹훈은 중요한 일이니 참으로 지나치게 많이 해서도 안 되고 빠뜨려서도 안 된다. 만일 박건의 계사에서 한 말과 같다면 비록 대신들과 다시 의논하더라도 무방할 것 같다.'고 여겨졌으므로 재삼 머뭇거리며 어렵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원이 시종 완강하게 거부하고 심지어는 일어나 피혐하려고까지 하였으므로 신들이 비로소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의논을 들으니 '전에 유원이 전한(典翰)으로 있을 적에 역신(逆臣) 류영경(柳永慶)이 곤룡포를 짠다는 핑계를 대고 즉위하는 대례(大禮)를 6일 뒤로 물려 행하려고 하자, 유원이 면전에서 큰소리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그의 흉측한 꾀를 꺾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삼사에서 시종 강력하게 변론한 공 중에 더욱 뚜렷이 드러난 것이다. 유원이 논의한 것은 혹 겸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훗날 공이 있는 자가 있을 경우 이러한 것 때문에 모두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들은 이러한 곡절을 알지 못하고 논계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나도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집 144면

 

광해04/12/03(임진)

지평 배대유(裵大維), 조존도(趙存道)가 아뢰기를,"역신 류영경(柳永慶)이 모략을 꾸며 종사를 위태롭게 하자 초야에서 의에 입각하여 배척하는 소장을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더욱 흉악한 위세를 부리며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초기에도 그는 여전히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조정을 지휘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즉위하는 대례를 곤룡포를 짠 뒤로 물려 행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삼사의 신하들이 의리를 들어 내쫓지 않았다면 역신의 흉악한 불길은 반드시 스스로 꺼졌을 리가 없으니, 그 당시에 어찌 다른 환란이 없었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역적을 친 일을 가지고 논한다면, 시작한 것은 초야의 선비들이 소장을 올린 것이고 끝마친 것은 삼사의 신하들입니다. 신들은 이번에 물의가 일어난 것 때문에 사유를 갖추어 인피하였습니다. 오늘 모인 자리에서 최유원이 반드시 연계하려고 하였는데, 신들은 구차스레 동조할 수가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144 면

 

광해04/12/26(을묘)

대사간 이성(李惺)이 아뢰기를,"신은 변변찮은 자로서 지나치게 성은을 입어 여러 차례 과분한 자리에 있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중략(中略)- 이 때 송석경(宋錫慶), 류경종(柳慶宗)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약방을 논죄하였고, 최유원(崔有源)은 류영경과 조정에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이유로 두문 불출하고 벼슬살이에 뜻을 끊어버렸습니다. 무신년의 위태롭고 의심스러웠던 즈음에 역신이 당시 수상으로 있었는데, 6일 뒤 곤의(袞衣)가 짜지면 즉위의 예를 거행하자는 말을 하였습니다. -중략(中略)- 그리고 사정이 위에 진달한 것과 같으므로> 형세상 그대로 언관의 자리에 무릅쓰고 있기가 곤란합니다. 신을 체직하라 명해 주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148 면

 

광해05/01/21(기묘)

정조(鄭造)의 동생 정규(鄭逵)가, 류영경(柳永慶)을 공격하는 이정원(李挺元)의 상소에 참여하였는데, 정조 역시 탄핵을 받았기 때문에 이첨이 '나라를 안정시킨 공이 있다.' 하였다. 【원전】 32 집 151 면

 

광해05/03/12(경오)

정운공신(定運功臣)이란 정인홍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을 논한 것 때문에 녹훈한 것이다. 왕이 동궁 시절에 실덕(失德)이 많아 선조가 다른 아들에게로 마음을 바꾸지나 않을까 의심하고는 외척의 신하인 류(柳), 정(鄭) 집안과 자못 결탁하여 몰래 의지하였다. 드디어 류영경이 동궁을 모해한다는 설이 있자 인홍이 그의 뜻을 엿보아 동궁 보호를 자임하고 상소하여 영경을 논하며 상의 뜻을 시험하였다. 선조가 과연 크게 노하고는 인홍의 당파를 모조리 목베려 하였는데, 대개 동궁이 당파를 심어 자기를 넘어뜨리는가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이 예측 불허의 지경이었는데 마침 상이 세상을 떠나 풀려났다. 【원전】 32 집 157 면

 

광해05/03/15(계유)

도승지 김시헌(金時獻)이 죽었다. 시헌은 천성이 낙천적이었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역학(易學)에 공력을 들였는데, 선조(宣祖)가 중히 여기었다. 일찍 대과에 장원하여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쳤다. 류영경(柳永慶)이 조정의 권한을 쥐자, 외직에 보임되기를 애써 구하여 산과 바다 사이에서 노닐었다. 조정에 되돌아와 얼마 있지 않아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성품이 이술(異術)을 좋아하고 첩을 많이 두었는데, 이것이 그의 단점이었다.【원전】 32 집 159 면

 

광해05/04/25(계축)

정인홍(鄭仁弘)이 지난 해 상차한 내용 가운데 "이진(李콫)과 류영경(柳永慶)과 김직재(金直哉)의 무리가 도성에서 접선을 하고 있다."는 말이 있었던 것을 가지고 이를 미루어 기미를 미리 밝혀내었다면서 수공(首功)을 주려고 하자 남이공이 매우 불평스럽게 여겼는데, 삼창(三昌)이 이 일로 인하여 공을 다투었다. 그 뒤에 남이공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응서가 도적질한 것을 자복한 것은 나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적에서 역적으로 변모된 것은 바로 이이첨의 작품이다." 하였는데, 이이첨 역시 이것을 가지고 자부하며 누차 장소(章疏)에 드러내곤 하였다. 【원전】 32 집 163 면

 

광해05/05/08(을축)

사헌부가 아뢰기를,"죄인 민희건(閔希騫)은 선왕께서 승하하시던 날을 당하여 어필(御筆)을 본떠서 밀지(密旨)라고 속인 뒤 류영경(柳永慶)에게 내줌으로써 대군을 보호하게 하였으니 당시의 정적(情迹)이 흉악하고 비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엄하게 국문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따랐다. 【원전】32집 172면

 

광해05/05/15(임신)

내관(內官) 민희건의 공초를 받았는데, 이르기를,"선왕께서 승하하시던 날 김 상궁(金尙宮)이 신과 이덕장(李德章)을 불러 종이 한 장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유서(遺書)이니 밖에 전하라.'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미 승전색(承傳色)에서 체차되었으니 감히 맡을 일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덕장이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상 앞에 가서 아뢴 뒤에 정원엔지 외처(外處)엔지에 내려 보냈습니다. 신이 글씨를 잘 쓴다고 하더라도 선왕의 필법과는 하늘과 땅처럼 같지 않습니다. 신이 쓴 비망(備忘) 등본(謄本)이 모두 사알방(司謁房) 한 곳에 있으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그 당시에 듣건대 '선왕께서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동기(同氣)를 사랑하라.」고 분부하신 것을 한 귀인(韓貴人)에게 맡기면서 성상께서 즉위하시기를 기다려 전해 드리도록 하였고, 일곱 신하에게 내린 유교(遺敎)는 대비전(大妃殿)에 전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대군을 보호하라고 분부를 내리신 것은 사랑하고 보살피게 하려고 하신 것에 불과할 뿐이니 그 사이에 무슨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환관이나 궁첩(宮妾)을 모르는 재상이 되어야 진정한 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류영경(柳永慶)은 꼭 그러했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신이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와 함께 흉악한 역모를 꾸미겠습니까. 이밖에는 다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㰡"였다. 【원전】 32 집 177 면

 

광해05/05/16(계유)

전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의 공초를 받았는데【응인은 7신(臣)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공초하기를, "유교(遺敎)를 받은 일에 대해서 당시에 미처 명백하게 변명하지 못했던 것은 신이 미혹하고 졸렬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교를 받았다 하더라도 신자(臣子)로서 어떻게 감히 역모를 꾀하겠습니까."하였다. 응인은 본래 겁이 많은데다가 오래도록 병에 시달려 정신이 흐렸으므로 눈물만 흘릴 뿐 적절히 대답할 줄을 알지 못했는데 심희수가 변호해 주어 옥에 내렸다.

박동량(朴東亮)의 공초를 받았는데 이르기를,"신이 비록 무식하고 형편없기는 하지만 궁궐과 인척 관계를 맺은 지 40년이 되어가는 동안 귀로 듣고 눈으로 직접 보아 왔던 만큼 마음속으로 감격하여 충성을 바치려는 마음이 자연 바깥 신하들과는 다르다 하겠습니다. -中略- 무신년에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역적 류영경(柳永慶)이 신에게는 노친(老親)이 있는 만큼 수릉관(守陵官)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제멋대로 옛 규례를 파기하면서 강제로 정하듯이 하였으니, 영경과 신이 의향과 자취에 있어 초(楚)나라와 월(越)나라 혹은 물과 불 이상으로 정반대의 입장에 처해 있었음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中略- 신이 류영경이나 김제남과 심사(心事)가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위에서 진달드린 것과 같은데, 신의 이름까지 기재되어 나오다니 그 사이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게 된 것인지 또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신년 이후로는 잇따라 능소(陵所)에 있었던 관계로 즉시 변론해 바로잡지 못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中略- 이른바 모의했다는 등의 일에 대해서 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설혹 신이 털끝만큼이라도 꾸며 망령되이 사실이 아닌 말을 한다면, 위에 태양이 빛나고 있으니 도피할 수도 없을 것이고 하늘에 계신 의인 왕후의 영혼 또한 몰래 신을 죽여버리고 말 것입니다."하였다.【원전】 32 집 178 면

 

광해05/05/17(갑술)

서성의 아들 달성위(達城尉) 경주(景주)는 옹주에게 장가들었고 그의 딸은 김제남의 아들 김규(金珪)에게 시집갔다. 그래서 서성이 연루된 것이 상대적으로 중하게 된 것이었다. 신흠의 아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류영경(柳永慶)의 아들 전창위(全昌尉) 류정량(柳廷亮)과 박동량(朴東亮)의 아들 금양위(錦陽尉) 박미(朴쭶) 및 경주(景켻)가 모두 임금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한응인(韓應寅)의 손녀와 허성(許筬)의 딸이 모두 왕자에게 시집갔고, 한준겸(韓浚謙)이 또 금상(今上)의 중궁(中宮)의 아비였다. 그래서 선조가 평시에 더 후하게 우대하였고 유교(遺敎)에서 특별히 언급했던 것인데, 7신(臣)이 당한 화는 모두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원전】 32 집 179 면

 

광해05/05/17(갑술)

이정귀가 공초하기를,"신은 평소 교유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늘 편당(偏黨)을 근절시킬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따라서 뒤섞여 지목을 받는 처지가 되더라도 신을 아는 자들은 모두 당이 없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中略- 신은 오래도록 궁료(宮僚)로 있었으며 또 일찍이 주청사(奏請使)의 일원이 되어 전하의 봉전(封典)을 주선하였는데 전후의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이 모두 신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중국 조정의 사람들이 심지어는 세자의 사신(私臣)이 아닌가 하고 신을 의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류영경(柳永慶)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였는데, 신이 그 동안 나라를 위해 쏟은 정성만큼은 신명(神明)에게 물어보아도 될 것입니다. 이번 역적들은 모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자들이고 이름도 대부분 처음 듣는 자들입니다. 재주도 없으면서 전하의 지우(知遇)를 받아 화려한 직함과 높은 품계를 한 몸에 모두 지니게 되었으므로 스스로 세상에 드문 은총을 받고 있고 보통이 아닌 군신(君臣) 간의 만남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신에게 무슨 불만스러운 일이 있다고 제남과 결탁을 한단 말입니까."하였다. 【원전】 32 집 180 면

 

광해05/05/18(을해)

심광세가 공초하였다."신은 정협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신이 이시익(李時益)과 절친한 관계로 역모를 알게 되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만, 시익은 그저 평범하게 알고 지내는 무인인데 어떻게 서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 리가 있겠습니까. 어떤 이는 신이 김제남과 인척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정협이 신의 이름을 듣고서 이렇게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만, 신은 제남과는 정적(情迹)이 소원하여 세시(歲時)에나 겨우 예의를 갖춰 만나보곤 하였을 뿐입니다. 신이 한원(翰苑)에 있을 때 류영경(柳永慶)이 권세를 휘둘러 신의 일가 대부분이 죄를 입었기 때문에 신이 시골에 물러나와 있다가 이어 외직(外職)에 보임되었는데 제남은 그 때 이미 국구(國舅)의 신분이 되어 문호가 한창 번성하였으므로 자연히 소원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안 현감(扶安縣監)으로 임명되어 하직할 때에도 찾아보지 않고 갔으므로 제남이 편지를 보내어 의아하게 여기기까지 하였는데 이것도 하나의 증거라 할 것입니다. 신이 사교성이 없어 권귀(權貴)들 보기를 싫어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일찍부터 나라의 은혜를 입고 만년에 들어 영광스럽게도 은총을 받게 되었으므로 늘 감격스러운 심정으로 보답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터인데, 무단히 쓸모없는 무부(武夫)와 역모를 꾀하다니 이치상으로도 그럴 수는 결코 없는 일입니다." 【원전】 32 집 182 면

 

광해05/05/22(기묘)

진사 이위경(李偉卿)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살피건대 신들이 역적을 토죄하는 일로 이달 19일 태학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다사(多士)가 공동으로 의논하여 이위경을 소두(疏頭)로 삼고 이상항(李尙恒)․이분(李퓃)을 소색장(疎色掌)으로 삼았으며, 장의(掌議)는 신경(辛暻)․성하연(成夏衍)이 일찍이 이 직임을 맡았었기 때문에 그대로 소 올리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습니다. -中略- 신구는 바로 준구의 동생으로서 류영경(柳永慶)의 여얼(餘헡)인데 그가 어떻게 감히 사류(士類)의 틈에 끼어서 사론(士論)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박자응이나 경유후 같은 자들이 거꾸로 이런 부류와 함께 역적을 토죄하는 일에 훼방을 놓았으니 그 마음속에 의도하는 바를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대개 류영경의 남은 패거리들이 이 소(疏)에서 영경을 화란의 우두머리로 할까 겁을 내고, 전은(全恩)을 주장한 집안의 자제들이 이 소에서 전은을 청했던 것을 죄목으로 삼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서로 이끌고 와서는 을러대며 앞으로 나와 한사코 혈전을 벌이며 꼭 저지시킨 뒤에야 그만두려 한 것인데, 이것도 알고 보면 의리가 어두워지고 공의(公議)가 없어진 탓으로 영경과 똑같은 수법을 구사하며 전은을 청했던 것을 옹호하려 한 데 불과하다 할 것입니다. -中略- 성인께서 《춘추(春秋)》에서 으레 손(孫)이라고 쓰셨고, 호씨(胡氏)는 《강목(綱目)》에서 장간지(張柬之) 등을 죄주었으니, 그 의리가 지극히 엄하고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신들이 군부(君父)를 위해 역적을 토죄하려다가 거꾸로 이 자들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이미 봉해 두었던 소를 공안(空案)으로 두고 물러 나왔는데 생각이 있어도 진달드리지 못하고 무력하게 척사(斥邪)하지도 못한 채 감히 다사(多士)의 뜻을 가지고 때우고 기운 소를 다시 올리면서 형벌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하니 답하기를,"소의 사연은 잘 았았다. 내가 불행하여 또 이런 변을 만났는데 공의(公議)가 아무리 지엄하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정리상 차마 못할 점이 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고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186 면

 

광해05/06/03(경인)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직제학 정광성(鄭廣成), 부응교 한찬남(韓纘男), 교리 민유경(閔有慶), 박정길(朴鼎吉), 부교리 오익(吳翊), 수찬 권흔(權昕), 부수찬 이민구(李敏求), 정광경(鄭廣敬)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삼가 지난 달 29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지진을 보건대, 고금의 막대한 괴변이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는 지진이 숱하게 일어났으나, 서울에 지진이 일어난 것은 역사에 보기가 드뭅니다. -中略- 지금 나라에 복이 없어 난적들이 잇따라 일어나 류영경에게서 이진에게, 김직재(金直哉)에게서 김제남에게로 이어졌는데, 김제남은 역적의 괴수이고 역적 이의는 적들의 기화입니다. 큰 역적의 괴수가 되었고 큰 역적이라는 이름을 짊어졌는데도 나라의 법이 거행되지 않고 공론이 펴지지 않았습니다. -中略- 서울은 임금이 계시는 곳이고 사방의 근본인데, 그 근본을 진동시키는 것은 임금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불행한 운을 만나 인륜의 변을 당하였으나, 공론이 이미 밖에서 시행되었으니, 이는 안에서 그 도리를 다한 것이 옛날의 성왕에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게 어찌 하늘에 응하고 땅을 섬기는 실지의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원전】 32 집 197 면

 

광해05/06/04(신묘)

윤효전은 즉 윤효선(尹孝先)이다. 유효선의 이름을 피하여 이름을 고쳤다. 일찍이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났는데, 과거에 급제하자 류영경과 기자헌에게 빌붙었고, 또 류희분, 박승종과 친하였기 때문에 비록 조정이 바뀌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화려한 벼슬을 하였다. 【원전】 32 집 197 면

 

광해05/06/22(기유)

 

진사 정창언(鄭昌言)이 상소하기를,"불량한 무리 조경기 등이 선비의 이름에 가탁하고 남의 지시에 따르면서 류영경의 꾀를 본받아 은밀히 김제남을 비호하였습니다. 이에 강상에 죄를 얻었다는 명목으로 역적을 토벌하는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웠으며, 관학의 유생을 무려 수십여 명이나 명부에서 삭제하면서 반드시 한 떼의 의로운 무리를 죄다 죽이고야 말려고 하니, 아, 참혹도 합니다.

이른바 강상이란 것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임금을 위하여 역적을 엄히 토벌하는 자가 적(賊)입니까, 임금을 배반하고 역적을 두둔하는 자가 적입니까? 그의 죄로 도리어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으니, 신들은 과연 누가 적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애당초 적신(賊臣) 류영경이 임금을 넘어뜨리려고 꾀한 것은 이의(李썃)를 위해서였고, 역적 이진(李콫)이 궁중에서 난을 만든 것은 이의에게 왕통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며, 김직재(金直哉)가 이태경(李泰慶)만 끌어댄 것은 이의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세 역적의 모의를 김제남이 모두 참여해 알고 있었으며, 세 역적이 역모를 꾸민 것 역시 김제남을 믿고 한 것입니다. 김제남이 국구의 자리에 웅거하고 대비의 세력을 끼고서 안으로는 역적 이의를 기화로 삼고 밖으로는 세 역적을 우익으로 삼았습니다. -中略- 오늘날의 신하는 선왕의 신하이자 전하의 신하입니다. 사직이 중하고 임금은 가볍다고 하는데 더구나 대비께서는 전하에게 삼종(三從)의 도리가 있지 않습니까.

전(傳)에 노나라 신하도 의리상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신하들 마음이야 어떠하겠습니까. 류영경의 남은 싹들과 김제남의 당류들이 아직까지도 조정에 있어 중요한 권한을 많이 쥐고 있습니다. 두 역적의 친속들이 안팎으로 연결되어 수컷이 울면 암컷이 반응하듯이 내통하여 머리와 꼬리가 한몸이 되어 있습니다. -中略- 미천한 선비와 이목이 있는 무리들 가운데 이위경․정조․윤인처럼 충의에 격분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단 말입니까. 이는 전하의 신하들입니다. 저 이위경․정조․윤인 등을 공격하는 자들은 류영경과 김제남의 잔당들인데, 이는 대비와 이의의 신하들입니다. 대비와 이의의 신하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의당 여러모로 힘을 다 쏟을 것입니다. 이위경, 정조, 윤인 등이 비록 흉악한 무리들의 손에 죽을지라도 종사를 위한 일이고 임금을 위한 일이므로 마음에 달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전하의 신하가 일망타진될 경우 전후 좌우가 모두 류영경과 김제남의 잔당들이므로 전하께서 고립되어 의지할 곳이 없을까 염려스러운데, 이렇게 되면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이항복이 이른바 '어찌 매우 적막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말을 앞으로 여기서 징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호오(好惡)를 밝히고 사정(邪正)을 분변하지 않아 귀신과 같이 괴상한 무리로 하여금 백주에 날뛰게 할 경우 시비가 밝혀지지 않고 역적의 무리와 순리를 따르는 사람이 구분되지 않아 난이 평정되지 않고 나라가 뒤따라 망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답하기를,"상소의 말은 잘 알았다. 조정에 저절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망령된 말을 하지 말고 물러가 독서나 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32 집 212 면

 

광해05/07/03(기미)

당시에 사론이 다 정조와 윤인의 논의를 공격하고, 박승종, 박이서, 남이공 등이 매번 류영경의 잔당으로 이이첨의 무리에게 공격을 당하였는데, 이이첨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박승종이 사론을 믿고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은 크게 성내어 무뢰한을 널리 모집하였다. 그 중에 혹은 정인홍의 제자라고 칭하면서 연속적으로 상소해서 흉악한 말과 패악한 말을 하였는데, 모두 만들어낸 말이었다. 그래서 왕이 의혹해서 이로부터 뜻을 결정하고 전적으로 이이첨의 무리를 등용하였다. 이이첨의 무리들도 역시 그 이름이 뒤에까지 미칠까 두려워하여 논의를 완화시킨 자들이 많았다. 【원전】 32 집 216 면

 

광해05/07/05(신유)

홍문관이 연차하여 이의를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청하고, 양사가 합사하여 연계하기를,"전하께서 임어하신 지 6년 동안 난신 적자가 잇따라 류영경(柳永慶) 다음에 이진(李콫)이 일어나고 이진 다음에 김직재(金直哉)가 나타나고 김직재를 이어 이의(李썃)에 이르러서 그 화가 더욱 확대되어, 밖으로는 난역의 상소와 안으로는 저주하는 일이 흉참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이의가 비록 어린아이라고는 하나 김제남 등이 반역을 도모한 것이 실로 이의로 말미암았으니 종묘 사직의 안위와 국가의 흥망이 이의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이의가 죽게 되면 인심이 안정되고 종묘 사직이 편안해질 것이며, 이의가 살아 있으면 인심이 더욱 두려워하고 종묘 사직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깊이 종묘 사직을 위한 계책으로 속히 법에 적용하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는 한갓 일시적인 사정에 이끌리어 만세의 공의를 돌아보지 않으시고, 상하가 서로 견지하여 날을 보내고 형벌을 오랫동안 계류하여 흉적이 살아 숨쉬고 있으니, 중외가 흉흉하여 조석도 보전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신들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의가 있고 없는 것과 종묘 사직의 안위가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볍습니까. 신들의 논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이니, 어렵게 여기지 마시고 속히 법에 적용하라고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내가 진실로 삼사가 법을 고집하는 분의의 정성을 알겠다마는, 다만 내가 재위하는 몇 년 동안 조종과 백성들에게 죄를 얻어 이 궁중의 막대한 참변을 만났으므로 마땅히 허물을 살피고 자책할 뿐이다. 어찌 감히 고인이 변란에 대처했던 도리로 오늘날 이의를 처치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덕이 박하나 차마 이 짓은 못하겠다. 마땅히 내 뜻을 체득하여 굳이 쟁집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2 집 217 면

 

광해05/07/15(신미)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전(箋)을 드리고 하례하였다. 대사면령을 내렸는데, 그 교서에 이르기를,"10악의 죄는 모반(謀反)이 먼저이고 5형 중에는 대벽(大?)이 무거운 형벌이다. 이미 죄에 자복한 율을 바로잡았으니 마땅히 석방시켜 주는 은전을 선포하기로 하겠다. -中略- 류영경(柳永慶)과 악을 같이 하여 무신년의 화를 이루었고 김직재(金直哉)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오늘날의 역모를 생각하였다. 대사동(大寺洞)의 택중에서 정협(鄭浹)과 남몰래 결탁하고 동작진(銅雀津)의 정자에서 서양갑(徐羊甲)과 은밀히 모의를 하더니, 불량한 무인(武人)을 끌어들이고 무례한 서자들을 불러들여서 재물을 많이 뿌려 3백 명의 장사를 얻으려 하였고 날쌘 자를 널리 수합하여 팔도의 노복들을 모았다. -中略- 과실과 죄를 용서하여 사면시켜 주는 것은 아울러 살게 하려는 인자함을 베푸는 것이요, 옛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태평 시대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하였다.【원전】32집 223면

 

광해05/07/18(갑술)

정언 배대유가 아뢰기를,"오늘 아침에 정언 조정립이, 엄성이 정거할 때 동참했던 사관을 논계할 일로 신에게 간통을 보냈기에 신이 '삼가 살펴보았다.'고 써서 보내고 그대로 대궐에 나아갔는데, 논의할 즈음에 동료들이 말하기를 '사관과 엄성은 마땅히 수종(首從)의 구분이 있으므로 마땅히 사판에서 삭거할 일로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관학 유생이 비록 삭적되었더라도 사관은 정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유첨(黃有詹)과 윤계영(尹繼榮)이 무신년에 반유(泮儒)의 삭적을 당한 류영경(柳永慶)을 구호하였으나 사관은 정거하지 않았고, 이신(李莘)도 무신년에 역적을 비호했다는 죄명으로 금년에 반적에서 삭제되었으나 사관은 역시 정거하지 않았는데, 유독 한희(韓?)만을 문득 정거하여 부도하다는 말로 죄목을 삼았으니 동참한 사관은 모두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장한 자는 엄성이고 탑전에서 거짓으로 아뢴 자도 엄성입니다. 부회한 죄는 당연히 구분이 있기 때문에 드디어 사판에서 삭거하자는 논의를 따른 것입니다.

또 대사헌 윤효전이 말하기를 '선비들이 팔방에 호소한 것이 진실로 놀랄 만한 죄이기는 하나 그러나 종신토록 금고시키고 성문 밖으로 내쫓는 것은 성대한 세상에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마땅히 논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사간 및 동료의 논의가 다르기도 하였는데, 신은 말하기를 '금고와 출송에 관한 일을 만약 아뢴다면 사관들이 정거한 유생에 대하여 정거를 해제할 일도 아울러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동료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고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언관의 자리에 버티고 있겠습니까. 신의 관직을 체척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225 면

 

광해05/08/08(계사)

영의정 이덕형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삼가 생각건대, 신이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환절기에 질병을 무겁게 앓아 신음하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니, 이는 조정에 늘어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불쌍히 여겼던 바였습니다. -中略- 류영경(柳永慶)이 국정을 오로지하면서 방자하게 굴었는데, 능을 범한 왜적을 거짓으로 데려다 처형하고서는 강화를 맺어 외교의 일을 그르쳤습니다. 신이 수백 마디의 의견을 올려 그의 잘못을 하나하나 헤아렸는데, 류영경이 신에게 노여움을 품고 배척한 일이 많았습니다. 역적 이진과 류영경의 성세가 치열하던 날에 신이 상소를 올려 그의 원망을 받았던 것은, 조정에 있는 인사들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엷음을 안타깝게 여겨서였지, 어찌 화복을 돌아보고 본심을 기만한 것이었겠습니까.-中略- 신의 이 말은 한자 한자가 모두 진심에서 나온 정성으로, 만약 채택된다면 공사간에 거의 유익할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으레 하는 사퇴로 보지 마소서."하였다. 답하기를,"나라의 위급함이 지난 번보다 더 심하니 나같이 혼미하고 열등한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다. 한밤 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항상 몹시 근심해 왔다.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고, 경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보통의 인정보다 월등함을 알았으니, 매우 가슴이 뭉클하다.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과 은혜를 온전히 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은 서로 모순없이 병행하는 것이니, 경의 의견 또한 옳다. 그러나 이의를 무신년의 일에 비기기까지 한 것은 옳지 않다. 그때 차관(差官)이 와서 조사한 일은 또한 나의 부덕한 소치였지만 참으로 예전에 없던 변고였으니, 부끄러움과 쓰라림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현재 인심이 각박하고 모지니 춘추의 의리를 아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내가 이미 신민들에게 덕택을 베풀지 못하고 신인(神人)에게 한갓 죄를 얻기만 하여 변고가 갖가지로 나타나니, 임금노릇 하는 게 즐겁지 않다. 떨리고 두려워 사태가 어느 곳에 이르게 될지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신하로서 후환을 염려하는 자들을 어떻게 깊이 꾸짖을 수 있겠는가. 나의 견해는 이와 같으니, 말 그대로만 가지고 뜻을 해치지는 말라. 경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빨리 출사해서 옥사를 의논하여 처리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235 면

 

광해05/08/11(병신)

상이 일찍이 은밀히 묻기를 "폐모론이 발론되었다가 중지되었으니 어쩌면 천명이 이의에게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대비가 복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하자, 이이첨이 아부하여 아뢰기를 "박승종(朴承宗)이 류영경(柳永慶)의 족당으로서 거의 무신년에 죄를 얻을 뻔하였는데 신과 사돈간인 데 힘입어 풀려나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총애를 입게 되어서는 은혜를 배반하고 혐의를 낚아 오로지 신이 하는 것들을 파괴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습니다. 무릇 큰 논의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이 사람이 저지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은밀히 그 글을 박승종에게 보이자, 박승종은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변명하였으나 오히려 큰 논의를 그르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상 또한 삼창(三昌)을 일체로 인척이라고 하여 박승종을 총애하고 대우하는 것이 이이첨의 버금이었는데, 다만 그의 당파들만 소외시켰다. 이로부터 이이첨이 비록 힘을 다하여 폐모론을 담당했다 하더라도 매번 류영경과 박승종이 저지한다고 해명했는데, 상은 끝내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폐모론이 완수되기를 기대하면서, 그가 건의한 바를 들어주고 그가 천거하여 등용한 자들을 믿어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요로에 배치한 자들은 모두 그의 당파였는데, 박자흥(朴自興)과 류충립(柳忠立) 등 몇 사람만이 겨우 그 사이에서 용납되었지만 권력은 약하였다. 【원전】 32 집 238 면

 

광해 069 05/08/18(계묘)

홍문관 교리 박정길(朴鼎吉), 부교리 이창후(李昌後)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이덕형의 음흉한 작태는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바이며, 탐욕스럽고 더러운 정상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어려운 바입니다. 다만 그 동안 쌓아 온 위엄에 겁을 먹고 사람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가 한결같이 방자하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굴면서 임금과 나라를 잊고 저버렸던 것은 그 조짐이 점차 보여 왔던 바인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임금을 길가는 사람만도 못하게 보면서 도리어 가지고 놀며 무함하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당당했던 수백 년 종사가 장차 이덕형의 손에서 엎어지게 되었으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류영경과 당을 맺어 성상의 공을 가려 왔던 자가 이덕형이며, 역적 이진을 두둔하며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가 이덕형입니다. 그리고 류영경의 흉악한 모의를 권간(權奸)이라고 칭했으며, 기축년 정적(鄭賊)을 몽매한 탓이었다고 하여 뒷날 신구할 여지를 남겼던 자가 또한 이덕형입니다. -中略-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그의 간악한 정상을 통찰하시고 공론을 쾌히 따르시어,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라 빨리 명하소서."하였는데, 삼사에 답한 것과 같은 내용으로 답하였다. 【원전】 32 집 239 면

 

광해05/08/19(갑진)

홍문관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들었는데, 사형으로 의율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분부하셨습니다만, 신들은 의혹이 늘어만 갑니다. -中略- 류영경과 당을 맺어 성상의 공을 가렸고, 삼사가 정청할 때는 악을 숨겨주며 은연중 두둔했습니다. 역적 이진을 순화군(順和君)에 비교하고 류영경을 권간(權奸)이라 지목하였으며, 정적(鄭賊)을 무지한 탓으로 돌려 훗날 신구해 줄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中略-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가녀린 신들의 충정을 굽어 살펴 공론을 쾌히 따르시어,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라 빨리 명하소서. 그리하여 신하로서 역적을 두둔하고 임금을 위협하는 자들을 경계시키소서."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원전】 32 집 240 면

 

광해05/08/30(을묘)

또 차자를 올려 아뢰었다."이덕형의 마음에 대해서는 길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이며, 이덕형의 죄에 대해서도 길가는 사람들이 또한 아는 바입니다. 신들이 며칠 동안이나 쟁집했지만 하늘의 들음은 막연하여 단지 그의 직책을 파직시키기만 한 채 충분히 공의를 메웠다고 여기시니, 신들은 나름대로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덕형의 죄는 실로 종사와 관계된 것으로, 성상의 공을 가리고 자신의 죄를 숨겼습니다. 류영경에 대해서는 관대하여 권신(權臣)이라 하고 류영경을 높여 상신이라고 했으며, 역적 이진을 순화군(順和君)에 비기고 정여립(鄭汝立)을 사리에 어두웠다고 지척했으며, 김제남에 대해서 팔의(八議)에 해당된다 하고 역적 이의를 옮겨 놓자고 하였으며, 끌어낼 때에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정청을 했다가는 멈추고 '편리하다'는 글자로 농간을 부렸으며, 모후를 원수로 여기고 모후와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무함하여, 팔방에 통문을 띄워 공갈 협박하게 하였습니다. 또 비유할 수 없는 무신년의 일을 인용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무원(撫院)의 말을 끌어대었으며, 자기 죄에 대해서 분소(分疏)하고 여러 재신들에게 책임을 미루었는데, 패만한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후 역적을 두둔하고 임금을 협박한 죄는 분명하여 가릴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통촉하고 굳건하게 단안을 내리어 빨리 유사에게 법을 적용하라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중국 관원이 서울에 머무는 때에 어찌 억지로 논하여 대궐 뜰에 소요를 일으킬 필요가 있겠는가. 일에는 상도와 권도가 있는 것이니, 우선은 멈추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원전】 32 집 246 면

 

광해05/10/28(임자)

이호의(李好義)를 좌부승지로, 이극신(李克信)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이극신은 사람됨이 험악하고 탐욕스러우며 비루하였다. 일찍이 류영경(柳永慶)에게 붙어서 이조 좌랑이 되었는데, 최유원(崔有源)이 탄핵하여 내쳤다. 류영경이 패한 뒤에는 기자헌에게 붙어서 추천을 받아 부윤이 되었다.】【원전】 32 집 255 면

 

광해 071 05/10/29(계축)

류영경이 정인홍을 공격할 때 선조가 한창 동궁에게 노여움을 가졌으나, 빈이 변명을 하여 풀어졌다. 【원전】 32 집 256 면

 

광해05/12/12(을미)

이이첨이 또 자신을 일찍이 류영경(柳永慶)의 모함을 받아 먼 곳에 귀양갔었다는 이유로 아울러 충신의 무리에 편입시키고는 찬양하는 글을 극도로 하여 드러냈는데, 그것은 다 문인을 시켜 짓게 한 것이었다. 난리에 부인이 병화로 죽은 자가 비록 많더라도 본래 왜놈들이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으므로 까닭없이 칼을 맞아 죽은 자에게는 기록할 만한 절의가 없는데도 그 문족(門族)들이 그 일을 크게 만들려고 장황하게 거짓말로 보고하는 자들이 있었다. 【원전】 32 집 267 면

 

광해06/03/23(을해)

류영경(柳永慶)이 용사할 때를 당하여 동석에서 그를 따르기만 하고 가타부타함이 없었고, 또 유교(遺敎)를 받아 일곱 대신의 반열에 있었기 때문에 등용에서 제외된 채 있다가 죽었다. 【원전】 32 집 292 면

 

광해06/05/26(정축)

장령 박재가 아뢰기를,"정언 류효립은 일 만들기를 좋아하고 경박한 자로서 힘을 다하여 한찬남을 공격하였으니, 신은 삼가 괴이하게 여깁니다. 한찬남은 본디 충의로 인한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서 역적을 토벌하는 상소와 차자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와서 대의(大義)가 밝게 드러나고 왕법(王法)이 행해질 수 있게 하였으니 논의를 달리하는 무리가 이를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 무신년에 몰래 류영경에게 부탁하여 충신과 현인을 해치고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면서 둘 사이에 양 다리를 걸치고 후일을 도모한 자가 조정에 꼬리를 잇는데, 류효립은 이것은 놓아두고 논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역적을 토벌한 사람을 공격하는 데 급급하여, 아침에는 한찬남을 공격하고 저녁에는 정원을 침범하니 전하의 국가가 언제 안정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정원이 논한 것은 충직한 기운이 하늘을 찔러서 사람들이 감히 범할 수 없는데, 장령 박경업(朴慶業)은 위세를 두려워하여 모호하게 처치하여 까닭없이 언관을 체직하도록 논했습니다. 머리를 내밀고 사세를 관망하는 쥐새끼와 같은 정언 김진의 무리는 참으로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 이미 정언 류효립의 무리와 논의가 같지 않으니, 양사는 한 몸인데 형편상 구차스럽게 합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313 면

 

광해06/05/26(정축)

정언 류효립이 아뢰기를,"신은 타고난 성품이 우둔하고 세태(世態)를 익히지 못하여, 한찬남의 상스럽고 비루한 정상을 목도하고 또 도감 군졸들의 원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고서 악을 미워하는 마음만 품고, 당여(黨與)가 조정에 포진하여 떼로일어나 칼을 어루만질 줄은 헤아리지 못하고 규찰하여 바로잡으려고 이것을 발론했던 것입니다. -中略- 박재는 지난번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신의 동생 충립에게 논박을 입었으니 소신을 배척하는 일은 혐의스러워 할 수가 없는 것인데 장황하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아 역적 류영경을 토벌한다는 등의 말로 임금을 현혹시켰습니다만 그의 불초하고 어리석은 말은 따질 것조차 없습니다. 역적은 천하에 제일 악한 것이니 사람마다 누구나 토벌을 청할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신의 처지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국가의 화복에 신이 먼저 참여하니 신이 비록 불초하나 국가를 위해 역적을 토벌하는 정성이야 어찌 이들보다 못하겠습니까. 간신의 무함을 현저하게 받았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버티고 있겠습니까. 파직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313 면

 

광해06/07/07(정사)

정언 정광경(鄭廣敬)이 아뢰기를,"우통례(右通禮) 이극신(李克信)은 본래 음흉하고 패악한 인물로 류영경이 반역을 도모할 때에 김대래(金大來)와 심복으로 결탁하여 흉적의 세력을 조성시켜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다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공론에 죄를 얻어 탄핵을 받고 외지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당들은 모두 쫓겨났으나 그만 홀로 법망에서 빠져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그것만도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판(仕版)에 버젓이 끼여 선비들을 더럽히고 있으므로 물정이 통분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직을 삭탈하라 명하소서. 연기 현감(燕岐縣監) 윤종린(尹宗쬧)은 사람됨됨이가 느리고 게을러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고 있어 온 고을이 마치 수화(水火)에 빠진 것처럼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그를 파직하라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한 바가 지나치다. 근자에 상황을 보니, 류영경을 가지고 남을 화에 빠뜨리는 하나의 함정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하고서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이극신에게 무슨 관작을 삭탈할 만한 죄가 있단 말인가.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근자에 수령을 등록문자(謄錄文字)로 논핵하는 일이 빈번한데 이는 아름다운 일이 아닌 듯하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원전】 32집 320 면

 

광해06/07/08(무오)

헌납 조존도(趙存道)가 아뢰었다."어제 이른 아침에 대사간 류경종(柳慶宗), 정언 정광경(鄭廣敬)과 함께 본원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신이 동료들에게 '우통례 이극신(李克信)은 본래 음흉하고 험악한 사람으로서 역적 류영경이 역모를 꾸밀 때, 김대래(金大來)와 심복으로 결탁하였다.'-中略- 신은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은 데다 광망(狂妄)한 습성까지 있지만, 항상 류영경이 몰래 도당을 결성하여 전하를 함정으로 빠뜨리려고 한 것을 통분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역적의 토벌이 엄중하지 않고 악의 뿌리까지 제거하지 않아 잔당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사판(仕版)에 끼여 있으니, 악을 미워하는 마음만 부질없이 품고 함께 조정에 서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곧바로 거론하여 탄핵하였는데 도리어 엄중한 비답을 받았습니다. 이극신의 죄는 관작만 삭탈해도 많이 용서해 준 것입니다. 인심이 복종하는 것은 오직 공론이 행해지는 데에 달려 있는데, 성명께서 의외의 엄한 분부를 내리고 이처럼 옳지 못한 자들을 포용하실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의 말은 실로 채용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되면 난신 적자(亂臣賊子)를 징계하고 치죄할 수 없고 언로(言路)도 이로부터 막힐까 두렵습니다. 신은 용렬한 자질로 구차하게 자리만 메꾸어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였으니, 간관의 막중한 직책에 어찌 뻔뻔하게 눌러 앉아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원전】 32 집 321 면

 

광해06/07/08(무오)

정언 정광경이 아뢰기를,"신이 대사간 류경종, 헌납 조존도와 함께 본원에 앉아 있을 때에 동료가 '이극신을 치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석상에서 발언하였는데, 그 말한 내용은 실로 한 나라의 공론이었기 때문에 신 또한 논계하는 데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아 보니, 류영경을 가지고 남을 모함하는 함정으로 삼았다고 하교하셨으므로 신은 지극히 두려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극신의 일에 대해서는 본래 공론이 있는데 신이 변변치 못하지만 어찌 근거없는 일을 꾸며 남을 모함하는 자료로 삼겠습니까. 이미 엄중한 분부를 받았으니 그대로 언관의 자리에 있기 곤란한 형편입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원전】32집 322 면

 

광해06/07/08(무오)

대사간 류경종이 아뢰었다.'이극신이 김대래와 친밀하다는 것은 신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이극신도 반드시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에 류영경을 가지고 남을 모함하는 함정으로 삼았다는 등의 말씀으로 답하셨는데, 신은 왕년에 류영경과 김대래 등에게 모함당한 사람입니다. 이미 엄중한 분부를 받았으니 마음과 행적이 혐의스러워서 태연히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사헌부가 아뢰기를,"대간은 임금의 이목으로서 일시의 공론을 주장하여 관리의 그릇됨을 살펴 탄핵하는 것이 그 책무입니다. 그런데 어찌 류영경을 가지고 남을 모함하는 함정으로 삼아 근거없는 일을 날조하여 남을 모함할 마음을 갖겠습니까. 더구나 이극신 한 사람을 논하는 것은 원래부터 풍색(風色)과 관계가 없는 일인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논의를 제기한 사람이나 동참한 사람은 모두 피해야 될 혐의가 없습니다. 비록 영경과 대래에게 모함을 당했다 하더라도 무슨 털끝만큼이라도 혐의스러운 행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상피 때문에 처치하지 못하는 것은 형편상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 이 때문에 경솔히 언관을 체직시킬 수 있겠습니까. 헌납 조존도, 정언 정광경, 대사간 류경종, 지평 유활 등을 모두 출사하라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원전】 32 집 322 면

 

광해06/08/25(을사)

대사간 류숙(柳潚)이 아뢰기를, "옥당의 처치한 말을 보건대, 남벌의 의논은 본원에서 제기되어 진위(眞僞)간에 이미 동참하였으니 사세상 처치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당연한 말입니다. -中略- 남벌은 류업(柳업)이 과장(科場)에서 과거를 볼 때 촛불을 잡았던 자이니, 류영경(柳永慶)의 남은 졸개로서 청반(淸班)을 보존하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어떻게 감히 간교한 꾀를 부려 이리저리 거짓으로 엮어서 국가와 고락(苦樂)을 함께 할 대신을 무함한단 말입니까. 단지 파직만을 청한 것은 특별히 가장 가벼운 죄에 처한 것입니다. 옥당의 처치가 이와 같이 종이 없어 신의 논의를 허위라고 하니, 어찌 감히 구차스럽게 출사하겠습니까. 파척하라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336 면

 

광해06/11/29(정축)

생원 이국량(李國亮)이 상소하여 어진 정승을 등용하고 원흉(元凶)을 빨리 죽일 것을 청하니,【어진 정승이란 정인홍(鄭仁弘)을 가리킨 것이다. 당시에 사흉 이악(四凶二惡)의 지목이 있었는데, 류영경(柳永慶), 김제남(金悌男), 허욱(許頊), 한응인(韓應寅)을 사흉이라 하고, 이유홍(李唯弘), 김대래(金大來)를 이악이라 하였다.】 <소장을 들였는데, 안에 머물려 둔 채 내리지 않다가 한 달 만에> 답하기를, "소를 읽고 잘 알았다. 이 사람들은 이미 참작하여 정죄(定罪)하였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하였다.【원전】 32 집 351 면

 

광해06/12/27(을사)

대사간 이성(李惺)이 아뢰기를,"신이 형편없는 몸으로 외람되이 삼사에 있은 지 무오년부터 지금까지 7년입니다. 불행하게도 계속 역변(逆變)을 당하여 그 논집한 것이 타당함을 얻지 못한 것이 많아서 누차 유소(儒疏)의 공격을 받았으니 전전긍긍 조심스러워 몸둘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신년의 일은 신이 실로 시종일관 그 논의에 참여하였으니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류영경(柳永慶)이 옹립하고자 하는 자는 역적 이의였는데 김제남(金悌男)이 그의 모주(謀主)였습니다. 먼저 영경을 징벌한 것은 곧 의의 우익을 제거한 것입니다. 영경이 비록 역모를 꾸몄으나, 한때 그 문에 출입하던 자가 필시 모두 다 역모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성상께서 늘 널리 파급시키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고 그 괴수만을 죽이고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를 다스리지 않는 것 또한 3대(三代)의 역적을 다스리던 대법이기 때문에 다만 김대래(金大來) 한 사람만 죽일 것을 청하였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한 다음 위로 종묘 사직에 고유하고 팔도에 하유하였습니다. 임자년에 이르러 영경을 추형(追刑)한 후에는 그 잔당이 위기에 놓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中略- 오늘날 삼사의 신하 중 신처럼 그 직에 오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부끄러워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354 면

 

광해07/02/18(을미)

교서를 내렸는데, 이르기를,"흉당이 번성하여 이미 하늘에 치닫는 악이 여물었고, 역모가 스스로 밝혀지니 저자에 목베이는 벌을 피하기 어렵다. 이에 각자의 공초를 게시하여 사람들을 믿게 하노라. 역적의 괴수 김제남(金悌男)은 처음에 류영경(柳永慶)과 함께 이의(李썃)를 옹립하기로 모의하고 무신년의 화를 일으켰다. 급기야 흉계를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은밀히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 등과 결탁하여 밖에서 난을 일으키고, 남몰래 응희(應希), 금난(金蘭) 등을 통하여 안에서 요망한 일을 꾸몄다. -中略- 나라에 법이 있는데 어찌 귀신같은 자들의 음해가 용납되겠는가. 화와 복은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군신의 대의를 힘쓰기 바란다. 그러므로 이에 교서를 내려 보이니 의당 자세히 알 것이라 본다."하였다. 【원전】 32 집 361 면

 

광해07/02/19(병신)

대사헌 송순, 대사간 류숙, 집의 박재, 장령 윤인․최응허, 헌납 조정립(曺挺立), 지평 정준(鄭遵)․양시진(楊時晋)이 아뢰기를,"완평 부원군 이원익은 종척 대신으로서 의리상 휴척을 같이해야 하는데, 군신간의 분의를 헤아리지 않고 감히 항간에 떠도는 소문만 듣고는 근거없는 말의 씨를 야기하고 이어 차자를 올려 이르기를 '장차 자전(慈殿)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하였습니다. -中略- 병조 참판 남이공(南以恭)은 본래 품행이 방정치 못하여 간사하고 음특한 짓을 일삼았으며, 평생 동안 일을 좋아하고 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장기를 삼은 자로서 류영경(柳永慶)의 심복이며 이유홍(李惟弘), 김대래(金大來)의 모주입니다. -中略- 멀리 귀양보내서 위리 안치하여 화근을 막고 조정을 안정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이 천고에 없는 악명을 쓴 것은 실로 내가 평소 대비(大妃) 섬기기를 불효로 하고 대신 대접하기를 성실하게 하지 못한 소치이다. 자신을 반성하며 자책해보지만 용서받을 길이 없을 것 같다. 어찌 감히 남을 원망하겠는가. 완평의 차자가 비록 놀랍기는 하나 훈척 대신이라 삭출(削黜)할 수는 없으니 번거롭게 떠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남이공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혹시 전해 들은 것이 사실과 다른 것은 아닌가. 상세히 살펴 논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원전】 32 집 363 면

 

광해07/02/22(기해)

문창 부원군(文昌府院君) 류희분(柳希奮)이 상차하기를,"삼가 아룁니다. -中略- “이공이 류영경의 심복이며 이유홍, 김대래의 모주이다.”라고 하니, 더욱 해괴합니다. 적신(賊臣)이 국사를 맡아 권력을 부릴 때 이공은 죄를 입고 쫓겨난 지 10년이었고, 다시 일어나 발탁된 것은 실로 성명의 초기였으니, 심복이니 모주니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까. 中略- 성상께서 끝까지 곡진히 보전해주신 넓은 그 은혜를 신은 장차 구천에 가서도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차자를 보고 경의 간곡한 마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경은 안위를 함께하고 휴척을 같이하는 신하이다. 어찌 물러갈 의의가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 것이며 널리 흉금을 열어 서로 협심하여 시정의 어려움을 함께 구제하라. 이 일 말고는 없다. 경에게 많은 기대를 한다."하였다.【원전】 32 집 364 면

 

광해07/02/23(경자)

양사가 아뢰었다."군신의 분의는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며, 모자의 윤기는 천지의 변치 않는 도리입니다. -中略- 남이공은 본래 몹쓸 기운이 뭉쳐진 사람이며 재앙의 씨앗이 길러진 사람으로서 집에서는 효를 망각하고 나라에서는 불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앞서 임진년 난리 때에는 조모를 내쫓아 함께 피신하지 않았고, 어미의 상을 당하여서는 내방 출입을 삼가지 않고 손님 접대에 성찬을 진설하는 등 바른 행동거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사론(邪論)을 주장하면서 악을 행하고 화를 만드는 것으로 능사를 삼았을 뿐입니다. 무릇 공격하고 모함할 때에는 형체를 감추고 앉아 간인을 사주함으로써 비록 흉계를 꾸며도 그 자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턱으로 류영경(柳永慶)을 지시하고 이유홍(李惟弘), 김대래(金大來)를 부려 정인홍 등을 모함하여 귀양가게까지 하는 등, 불측한 지경에 빠질 뻔한 자가 모두 이 사람의 수단 때문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계책을 써 요행히 모면하여 목숨을 보전함으로써 그 해치려는 마음을 그만두지 않고 음모하기를 더욱 방자하게 하였습니다. -中略- 빨리 멀리 귀양보내 위리 안치하여 화의 근원을 막고 조정을 안정시키소서."【원전】 32 집 365 면

 

광해07/03/09(을묘)

관학 유생(館學儒生) 안전(安佺)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천하의 악명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천하의 지극히 원통한 것은 군부가 무고당하는 일보다 더 심각한 것이 없습니다. -中略- 남이공(南以恭)은 일개인의 간사한 역적입니다. 그 패륜과 추행을 다 이를 수 없고 그 탐재와 모리를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앞서 류적(柳賊)이 요직에 있을 때 이공이 비록 죄를 지고 물러나 있었으나 오히려 국권을 잡아 이유홍(李惟弘)과 김대래(金大來)가 끊임없이 왕래하였으며, 삼사의 선발이 모두 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임인년간 정인홍이 부름을 받아 상경할 때에 이르러서는 이공이 류영경(柳永慶)에게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사귀기 쉬우면 겉으로 존경하고 교화하기 어려우면 공격하여 쫓으라.' 하였으니, 그 영경의 심복이 됨은 이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中略-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쾌히 공론을 따라 국법을 바루어서 신민의 분개함을 풀어주고 모자의 천륜을 온전히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상소를 살펴 잘 알았다. 내가 평소 대비 섬기기를 불효하여 궁중의 망극한 참변을 당하였고, 대신 대접하기를 성실히 못하여 천고에 없는 악명을 입었다. 오직 밤낮 자책하며 땅으로 들어가 나라 사람들에게 사죄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어찌 감히 남을 원망하겠는가. 더구나 이원익은 이미 파직하였다. 어찌 삭출까지 하겠는가. 그대들이 나의 뜻을 알 것이니 조용히 조섭하는 날에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367 면

 

광해07/03/14(경신)

합사하여 아뢰기를,"모자는 천륜이고 군신은 분의이니, 이는 곧 천지의 떳떳한 도리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인 것입니다. -中略- 병조 참판 남이공은 본래 요기가 뭉쳐진 자이며 화태(禍胎)를 길러낸 자입니다. 가정에서는 효를 망각하고 나라에서는 충성을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 임진년 난리 때 그의 조모를 내쫓아 함께 피난하지 않았고, 어미의 상을 당하여서는 안방 출입을 삼가지 않고 손님 대접에 찬수를 베풀었으니, 행검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사의를 주장하고 악행을 자행하며 화를 만드는 것으로 능사를 삼았을 뿐입니다. 남을 공격하고 모함할 때에는 형체를 감추고 팔장끼고 앉아 간인(奸人)을 사주함으로써 비록 흉계를 꾸며도 그 자취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턱으로 류영경을 지시하고 이유홍과 김대래를 풀어 놓아 정인홍 등을 모함하여 귀양보내 거의 사지에 빠지게 한 것이 모두 이 사람의 수단이었는데, 계책을 써 다행히 모면하여 목숨을 보전함으로써 그 해치려는 마음이 그치지 않아 음모하기를 더욱 방자히 하였습니다. -中略- 멀리 귀양보내 위리 안치시키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이원익은 이미 파직하였으니 어찌 멀리 귀양보내기까지 하겠는가. 남이공은 체직하고 추문 처치하라."하였다.【원전】 32 집 368 면

 

광해 090 07/05/13(무오)

감찰 최공망(崔公望)이 상소하기를,"부싯돌에 불이 일면 반드시 타오르고, 뱀은 꼬리가 잘려도 다시 꿈틀거리는 법입니다. -中略- 서양갑(徐羊甲)과 김제남(金悌男)의 흉모를 조장하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서양갑의 초사(招辭) 중에 '서자를 폐하고 적자를 세우려는 것인데 누가 역적이라 한단 말인가.' 한 것이 있어서 난역의 무리들이 모두 이런 따위의 말을 가지고 잇따아 일어났던 것입니다. 효성이 감히 이들 역론(逆論)을 이어받아 주장하고 류영경(柳永慶)의 잔당에 빌붙어서, 마침내 '정비(正妃)'란 말로 지금 깃발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성명을 모함하고 한편으로는 공성을 능모하여 장래의 예측할 수 없는 화란을 빚어내고 있으니, 후일 종사의 역적이 될 자는 틀림없이 효성일 것입니다. -中略- 신은 너무도 분개스러움을 이길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였는데, 답하기를, "상소문은 잘 보았다."하였다.【원전】 32 집 381 면

 

광해07/07/08(계축)

사헌부가 아뢰기를,"원옥(췦獄)을 심리하는 것은 실로 성상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나, 죄가 국가에 관계되어 용서해서는 안 될 죄인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동지의금부사 박이서(朴彛敍)는 국법을 무시하고 한갓 같은 당파를 비호할 마음만 품어 동료들의 의견을 배척한 채 감히 이명(李溟), 김시언(金時言), 정복형(鄭復亨) 등을 임의대로 서계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죄상은 모두 임금을 저버리고 역적을 비호한 것으로서 분명하게 녹안(錄案)에 실려 있어 여러 차례 큰 사면령을 겪었어도 용서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국법을 중하게 여기고 역적을 토벌함을 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박이서는 본디 류영경의 여당(餘黨)으로서 원망과 분노를 머금고 틈을 타 흉계를 부림이 매번 이와 같았습니다. 그가 마음대로 하며 법을 무시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이서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中略- 모두가 조직을 비호한 죄를 면할 수 없으니, 이춘원, 윤길 및 금부의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금부 당상은 체차하여 추고하고 낭청은 추고하라. 박이서의 일은 지나치니 추고만 하라. 나머지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397 면

 

광해07/07/12(정사)

헌납 정준이 아뢰기를,"신이 이달 7일에 삼가 문창 부원군 류희분의 차자를 보건대 㰡형관에게 내려보내어 류숙․정준과 대면하여 따지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中略- 신이 류희분 형제에게 미움을 당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단지 남이공을 논핵하는 것을 굳게 고집해서일 뿐입니다. 이공은 바로 죽지 않은 류영경이고 다시 살아난 김제남으로, 이원익을 부추겨서 흉한 차자를 올리게 하였으니, 남이공의 죄는 원익보다 더 커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中略- 신은 남이공을 논핵하는데 시종 참여하여 굳게 고집하고 정지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러 차례 귀근(貴近)에게 미움을 당하였으며 대면하여 따지게 해달라는 청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척하라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399 면

 

광해07/07/22(정묘)

우부승지 한찬남이 아뢰기를,"신은 박이서에 대해서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그와 함께 반열에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류영경의 심복이 되고 류영경의 졸개가 되었기 때문으로, 그의 흉악스런 상황은 말하자면 깁니다. -中略- 신이 우연히 언급한 말로 인하여 간신(諫臣)이 인피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땅에 엎드려 황공하여 대죄합니다."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401 면

 

광해07/08/05(기묘)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사하여 아뢰기를,"전 참판 박이서(朴츺敍)는 본디 비루한 사람으로 류영경(柳永慶)의 심복이 되었는데도 요행히 죄를 면하였으며, 그의 기세를 믿고는 탐욕스럽기 그지없었으며, 염치를 돌아보지 않아 이끗만을 좇았습니다. -中略- 속히 잡아다가 국문하여 율에 의거해 죄를 정하라고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번거롭게 논하지 말라."하였다.【원전】32집 404면

 

광해 093 07/08/05(기묘)

사간원이 아뢰기를,전 병사 이응해(李應?)는 본디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로 류영경(柳永慶)의 심복이 되어 악한 짓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죄를 피하였으니, 실로 경전(輕典)입니다. -中略- 바라건대 속히 잡아다가 국문하여 율에 의거해 죄를 정하라고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이응해는 우선 사실의 조사를 기다려서 조처하는 것이 옳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하였다.【원전】32집 405면

 

광해07/08/13(정해)

전지(傳旨)를 내리기를,"전 참찬 남이공은 본디 여기(戾氣)가 모인 바이고 화태(禍胎)가 기른 바로, 가슴에는 비수를 품은 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아 마음은 뱀이나 전갈 같고 행동은 개나 돼지와 같았다. 평생토록 일을 일으키고 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장기로 삼았는 바, 류영경의 심복이고 이유홍(李惟弘)과 김대래(金大來)의 모주(謀主)였다. 임진란 때에는 처자식만 데리고 가고 할머니는 내쫓아 늙고 병든 사람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였다. 거상(居喪) 중에는 방사(房事)를 삼가지 않아서 한씨(韓氏) 집의 여종과 간통하다가 들통났고, 또 최완(崔췭)의 첩을 빼앗아 연애편지를 주고받고 멋대로 오갔다. 몸에 상복(喪服)을 걸치고서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손님을 마주하여 음식상을 차리고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이처럼 집안에 있어서는 효도를 잊어 윤기(倫紀)에 죄를 얻었다.

한편 몰래 류영경을 사주하여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는 선왕(先王)께서 편찮으시던 때에 대관이 '망령되이 잡약(雜藥)을 썼다.'는 이유로 류영경을 죄주려고 하자, 김대래를 불러 몰래 모의하여 그로 하여금 영경을 배반하고 해치도록 하였다. 정인홍이 차자를 올린 뒤에는 이유홍의 무리들에게 지시하여 국옥(鞫獄)의 논의를 주장하게 하였다. 일찍이 조경기(趙慶起)․정복형(鄭復亨) 및 그의 사위 이원진(李元鎭)을 사주하여 번갈아가며 사의(邪議)를 떠들어대게 하고, 이원익을 부추켜서 흉한 차자를 올리도록 권하여, 거짓을 날조하여 감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할 설로 임금에게 마구 뒤집어씌웠다. 이처럼 나라에는 불충한 짓을 하여 종사에 죄를 얻었다.

어질고 능력있는 이를 질투함은 이임보(李林甫)와 같았고 임금을 속임은 가사도(賈似道)와 같았으며, 화심(禍心)을 품고 있기는 원재(元載)와 같았고 남몰래 사주하기는 장돈(章惇)과 같아, 앞뒤로 거짓을 날조하여 임금을 모함하고 당파를 결성한 죄는 머리카락을 뽑아 헤아려도 다 따지기 어렵다. 그러니 삭탈 관작하고 중도 부처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406 면

 

광해07/08/14(무자)

이창록이 공초하기를,"일찍 부모를 여의어 불학무식하며, 난리통에 굶주린 탓에 실성하였는데다가 또 술을 좋아하여 인사를 살피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한답시고 강개하여 시를 지었는데, 말뜻이 황잡스러웠습니다. '초한의 건곤'이란 것은 국가에 분란이 있는 것을 가리킨 것이며, '비단 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면서도 마음에 부족한가.'라고 한 것은 진(?)과 의(?)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형을 죽였다.'는 것은 진(콫)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은 의(썃)를 가리켜 말한 것이며, '간당이 조정에 가득하다.'고 한 것은 류영경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착하지 못한 사람이 우리 임금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은 고어(古語)에 있는 말로 역적 진(진)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 글은 기유년간에 지었는데, 김제남(金悌男)의 흉모가 있었다고 들었으므로 듣고 본바에 따라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같이 의논하며 사주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술취한 김에 지어서 전년 9월에 성변규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뒤에는 그 글이 간 곳이 없었습니다. 이 뒤로는 다시 더 할 말이 없습니다."하였다. 【원전】 32 집 406 면

 

광해07/08#14(무오)

명국(鳴國)은 익산(益山) 사람으로 나덕윤(羅德潤)․김우성(金佑成) 등과 결당하여 사류를 배척하고 모함하였는데 위인이 흉패하고 불측하였다. 처음에는 류영경(柳永慶), 김대래(金大來) 등을 섬겨 극력 인홍을 공격하다가, 영경이 실패하자 다시 경희와 함께 이첨의 복심(腹心)이 되어 영경의 무리를 다시 공격하였다. 【원전】 32 집 418 면

 

광해07/10/19(임술)

양사가 합계하기를,"죄인 성준구는 류영경(柳永慶)의 심복이었기 때문에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안치하였으니, 국법이 지엄하므로 사사로이 고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풍천 부사(豊川府使) 정산뢰(鄭山雷)는 전에 남해 현령이 되었을 때 성준구를 위해서 큰 집을 지어 주고 위리(圍籬)를 철거한 사실이 경상 감사가 조사한 장계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수령이 어떻게 죄인을 위해 백성을 부려 집을 지을 수 있으며, 죄인이 어떻게 위리를 철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임금을 업신여기고 왕법을 멸시한 죄는 드러나는 대로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정산뢰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성준구는 북도의 아주 외딴 곳으로 옮겨 정배하소서."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429 면

 

광해07/10/19(임술)

사헌부가 아뢰기를,"단천 군수(端川郡守) 박효성(朴孝誠)은 죄인 이유홍(李惟弘)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이유홍은 류영경의 심복으로 먼 변방에 귀양갔으니, 사대부는 의리상 그와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히 역적의 당류와 일가가 되었으니 왕법을 무시하고 조정을 경시한 죄를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사판에서 삭제하라 명하소서."하니, 따랐다.【원전】32집 429면

 

광해07/10/20(계해)

양사가 합계하기를,"신들이 삼가 어제 성상의 비답을 보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전교하셨는데, 신들은 더욱더 의혹스럽습니다. 죄인 성준구는 류영경의 심복으로서 사형을 감면해 절도에 안치하였는데, 국법이 지엄하여 사사로이 고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풍천 부사 정산뢰는 전에 남해의 현령이 되었을 때 준구를 위해서 큰 집을 지어주고, 위리를 철거하였습니다. 수령이 어떻게 죄인을 위해서 백성을 부려 집을 지을 수 있으며, 죄인이 어떻게 위리를 철거하고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임금을 업신여기고 왕법을 멸시한 죄가 매우 놀랍고 분합니다. 일의 실상이 이미 본도 감사가 조사한 장계에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의심스러운 일이 무엇이 있기에 이처럼 망설이십니까? 정산뢰를 빨리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성준구는 북도의 아주 외딴 곳으로 옮겨 정배하라 명하소서."하니, 따르지 않았다. 연계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에 박엽의 일에 대해 답하기를,"천천히 결정하겠다."하자, 이내 잠시 정계하였다. 【원전】 32 집 430 면

 

광해08/07/25(계사)

양사가 피혐하며 아뢰기를,"신하가 역적을 토벌함에는 엄격함을 위주로 하고 임금이 역적을 토벌함에는 결단력을 용기로 삼는 것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큰 의리가 분명해지지 않고 임금의 위엄이 펴지지 않아서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 역적을 다스림에 엄격하게 하고 결단력 있게 하는 방도를 제대로 다하고 있습니까.

당초에 역적 류영경(柳永慶)이 궁위와 교결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려 했던 것은 이의(李썃)를 위해서요, 역적 이진(李콫)을 몰래 사주하여 일에 앞장서 난리를 꾸미게 했던 것은 의를 위해서였습니다. 김직재(金直哉)가 반역을 도모함에 미쳐서 단지 이태경(李泰慶)만 끌어들인 것은 사실은 의를 은폐한 것입니다. -中略- 김제남을 추형하자는 의논을 추국청에서 이미 회계하였는데, 신들이 즉시 의리를 거론하여 추형하지 아니하고 한갓 존호 올리는 일을 급선무로 삼았으니, 논한 바가 그 순서를 잃어서 역적의 괴수로 하여금 오히려 흉악한 해골을 보전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였으니 신들의 죄가 큽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하니, 답하기를,"사직하지 말라. 큰 의리를 밝히고 왕법을 바루는 일로 직무를 삼으라. 부질없이 과장하여 찬미하는 말을 하지 말아서 스스로 아첨꾼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498 면

 

광해08/07/25(계사)

양사가 합사하여 아뢰기를,"역적을 토죄하는 것은 그 법이 한 가지만이 아니니, 정형(正刑)을 시행하지 못했으면, 이미 죽었다는 핑계로 만세의 왕법을 폐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역적의 괴수 김제남은 국구라는 존귀한 신분으로 내전의 세력을 믿고, 어린 이의(李썃)를 기화로 삼고 류영경을 복심으로 삼아, 밖으로는 흉악한 무리들을 모으고 안으로는 요해(妖奚)와 교결하여 임금을 치는 흉악한 일이 곧 일어날 뻔하였고 저주를 하는 화란이 거의 성상께 미칠 뻔하였습니다. -中略- 이러한 때에 실상을 들어 아울러 일컫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을 어떻게 위로할 수가 있겠으며 마음을 다 기울이고 있는 신료들의 정성을 어떻게 다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윤허한다는 한 마디 말씀을 어서 내려 사람들의 소망을 굽어 따르소서."하니, 답하기를,"무릇 일이란 앞과 뒤의 차례가 있는 것이다. 어찌 거꾸로 시행을 하겠는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추형에 대한 일은, 어찌 나의 말을 인하여 시행할 수가 있겠는가. 논의를 멈추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498 면

 

광해08/09/18(병술)

대사헌, 대사간, 집의, 두 장령, 두 지평, 헌납, 두 정언이 아뢰기를,"신들이 모두 하찮은 자들로서 언론의 직임에 있으면서 조정을 보건대 잘못된 정치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것 중에서 하나를 가려서 논하였는데, 정성이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시행되지 못할 부질없는 말이 되었으므로 저들의 비웃음만 받게 되었고 죄만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위태롭게 한 류영경(柳永慶)의 파당 중에는 혹 죄는 무거운데 벌은 가볍게 받은 자가 있으며, 역적 이의(李썃)를 비호한 도당 중에도 죄는 같은데 벌은 다른 자가 있습니다. 형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역적들을 내버려 둔 지가 이제 9년이 되었으니, 전후로 난역을 평정하였으나 난역이 아직도 평정되지 않아서 국가가 안정될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은 허욱(許頊), 최천건(崔天健), 성영(成泳) 등 삼적(三賊)에게 법률 적용을 미진하게 하였고, 서성(徐픸), 신흠(申欽), 한준겸(韓浚謙), 박동량(朴東亮) 등 칠신(七臣)에게 법률 적용을 동일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이제 김제남에게 정형을 시행하고 존호를 올려 나라를 중흥시킨 성대한 공렬을 위아래가 모두 경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신들이 차례차례 논열하여 국시(國是)를 크게 정하고 부리를 영원히 끊어버릴 때입니다. 그런데 입을 닫고 말을 아니하여 물의가 흉흉하게 하였으니,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신들을 파직하라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원전】 32 집 517 면

 

광해08/09/20(무자)

양사가 합계로 비밀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㰡"라가 무신년 이래로 난역이 잇따라 일어나 거의 편안한 날이 없었는데, 이것은 대개 역적 토죄를 엄하게 하지 않아 왕법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악한 흉도들이 징계되는 바가 없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류영경과 김제남은 서로 안팎이 되어 나이 어린 이의(李썃)로 기화를 삼아 위란을 얽어 도모한 정상이 남김없이 밝혀졌습니다. 허욱(許頊)은 류영경을 아첨하며 섬겨 함께 정승의 지위에 올라서는 성상의 교지를 사사로이 숨기고 전수(傳授)를 막아 놓고는 심지어 17년 전에 이미 정해진 세자를 두고 책봉되지 않은 세자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였습니다. 최천건(崔天健)과 성영(成泳)은 모두 류영경의 심복으로서 정권을 쥐고 자기편 파당을 길러 성세를 펼쳐, 예측할 수 없는 화란이 거의 일어날 뻔하였습니다. 그리고 류영경이 임금을 협박한 세 번의 차자는 모두 최천건이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행히 형벌을 벗어나 아직도 목숨을 보존하여 혹 경강(京江)에서 지내기도 하고 혹은 경기의 농장에서 지내기도 하고 있습니다. -中略- 그리고 서성(徐성), 신흠(申欽), 박동량(朴東亮), 한준겸(韓浚謙), 한응인(韓應寅), 허성(許筬) 등은, 혹은 류영경과 같은 파당으로서 혹은 김제남의 심복으로서 궁금(宮禁)과 잇따라 인척 관계를 맺어 그 세력을 등에 업고, 어린 이의(李썃)를 보호해 달라는 글을 받아서 달가운 마음으로 뜻을 따라 사사로이 몰래 감추어 두고서, 성상께서 왕업을 물려받으신 뒤에도 오히려 해명하지 아니하고 뒷날을 기다려, 마치 형세를 관망하는 자와 같았습니다. -中略- 이제 류영경과 김제남은 이미 정형(正刑)을 받았으며 화란을 평정하고 존호를 올리게 되어, 나라를 중흥한 성대한 공렬을 눈을 닦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 불순한 잔당들을 그 사이에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허욱, 최천건, 성영은 멀리 귀양보내 위리 안치하고, 서성, 신흠, 박동량, 한준겸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한응인과 허성은 이미 죽었다고 하여 그냥둘 수 없으니 모두 관작을 소급하여 삭탈하소서."하였는데, 답하기를,"당초에 이미 참작하여 죄를 정한 것이니, 9년이 지난 지금에 죄를 더 줄 필요는 없다."하고, 비밀의 일에 대한 답은 봉하여 내렸다. 【원전】 32 집 518 면

 

광해08/10/10(정미)

교서에,㰡왕은 이르노라. 존호를 올리는 것은 찬양하려는 여망에 애써 부응함이요, 사면을 내리는 것은 은혜를 흡족히 하는 법전을 넓힘이다. 한(漢)나라의 기강은 왕망(王莽)을 죽인 데에서 떨쳐졌고 하(夏)나라의 역수(曆數)는 예(혬)를 죽인 데에서 창성하였다. -中略- 류영경(柳永慶)이 위란을 도모함에 폐간처럼 서로 짜고 꾸민 것이 징험이 되었고 김직재(金直哉)가 화란을 얽음에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반드시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中略-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기 바란다.㰡하였다. 대제학 이이첨이 지어 올린 것이다.【원전】 32 집 523 면

 

광해08/10/19(병진)

양사의 모든 관원이 아뢰기를,"신들이 세 역적과 여섯 흉도의 죄상을 가지고 한 달이 넘게 논열을 하였는데도 정성이 깊지 못하여 아직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아래로 이목(耳目)을 맡은 관원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리고 위로 듣기 싫어한다는 허물을 성상께 돌아가게 하여, 죄만 쌓은 채 뻔뻔스런 얼굴로 반열을 따라 출사하고 있습니다. -中略- 허욱과 최천건 등은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여 죄가 류영경과 같으니 어찌 지엽적이라고 하여 논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류성은 흉계를 꾸미고 반역을 한 정상이 가장 드러난 자인데 당초에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신들이 나약하여 직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을 논하기를 형편없이 하여 그렇게 된 것이니, 신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524 면

 

광해08/10/21(무오)

양사가 전계를 합계하였는데, 세 역적과 네 흉도에게 죄를 더 주기를 청하는 내용이었다. 또 아뢰기를,"죄인 류성(柳惺)은 류영경의 조카로서 크고 작은 흉역의 모의를 모두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이유홍(李惟弘), 최천건(崔天健), 김대래(金大來) 등과 결당하여 복심이 되어서는 밤낮으로 모여 차마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았습니다. 국본을 위태롭게 하고 양궁(兩宮)을 이간시키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으며 기세가 치성하게 되어서는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눈짓들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中略- 역적 류성의 흉역한 말은 류영경에게 부리를 두고 있으며 실상은 이유홍, 최천건, 김대래의 협조에서 나온 것이니, 류성의 죄상은 류영경이나 김대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초에 죄를 정할 때에 그들의 잔당들이 버티고 있었고 정론(正論)은 미약하였기 때문에 엄하게 주벌하지 못하여 법의 적용이 미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9년이 되도록 아직도 죽음을 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류성을 율대로 처단하여 신령과 사람들의 울분을 통쾌하게 하소서."하였다. 【원전】 32 집 525 면

 

광해08/11/10(정축)

대사헌 남근(南瑾), 대사간 정조(鄭造), 사간 윤인(尹휖), 장령 금개(琴乾), 임건(林健), 헌납 한옥(韓玉), 지평 정준(鄭遵)․남궁경(南宮툑), 정언 홍요검(洪堯儉), 채승선(蔡承先)이 아뢰기를,"역적 류성(柳惺)은 죄가 천지에 가득찼고 악이 김대래(金大來)보다 크므로 이미 사사(賜死)하여 조금은 여론의 울분을 풀었습니다. -中略- 류성은 류영경(柳永慶)의 조카로서 궁액(宮掖)과 교통하고 양궁(兩宮)을 이간시켰으며 반드시 사류(士類)를 궐정 추국하여 어진 재신(宰臣)을 죽여서 끝에 가서는 그 반역의 계책을 부리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상께서도 환히 아시는 바입니다. 류성의 죄악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누가 분하게 여기며 토벌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자들로서 언론을 맡은 자리에 무릅쓰고 있으면서 한 시대의 공론으로 하여금 논사(論思)를 맡은 옥당의 의논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신들이 나약하여 경시를 당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신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528 면

 

광해08/11/11(무인)

전한 이창후(李昌後), 부응교 이정원(李挺元), 부수찬 황덕부(黃德符), 정자 조유선(趙裕善)이 아뢰기를,"신들이 삼가 양사가 피혐한 것을 보니,'역적 류성을 사사하라는 명을 내릴 때에 옥당은 단지 한 번 차자를 올렸으니, 이는 신들의 논계를 성상의 뜻이나 받들고 마는 것으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몸이어야 할 삼사가 과연 이와 같단 말입니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역적 류성(柳惺)은 류영경의 조카로서 몰래 다른 마음을 품고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였으며 궐정 추국을 앞장서서 주장하여 양궁(兩宮)을 교란시켰으므로 죄악이 극도에 달하여 신령과 사람들이 모두 분통스러워 하였습니다. -中略-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죄합니다."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원전】 32 집 528 면

 

광해08/11/22(기축)

양사가 합계하기를,"류영경은 죄가 천지에 가득차 이미 정형을 시행하였는데, 허욱, 최천건, 성영은 그의 복심으로서 마땅히 이 율에 복죄되어야 함에도 삭직하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여 아직도 율문대로 형벌을 다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中略- 망설이지 말고 왕법으로 결단을 내리소서. 허욱, 최천건, 성영은 모두 먼 변방에 위리 안치하고, 신흠, 박동량, 한준겸은 모두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여, 형장(刑章)을 흔쾌히 시행하여 사람들의 울분을 풀도록 하소서."하니, 답하기를,"어디 갔다가 9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논계를 하는가? 이미 깊이 요량하여 처리하였다. 번거롭게 논집하지 말라."하였다.【원전】 32 집 530 면

 

광해08/12/18(갑인)

예조 판서 이이첨이 아뢰기를,"신은 질병과 비방이 모두 극심하여 사직하여 면직을 빌었는데, 윤허를 하지 않으시니, 일이 낭패스럽게 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中略- 성영(成泳)이 송상인(宋象仁)을 뽑았을 때에는 자표(字標)를 서로 통하였다는 말이 있었고, 최천건(崔天健)이 류영경(柳永慶)의 아들과 조카 세 사람을 뽑자 책두(策頭)를 써서 들였다는 말이 있었으며, 박이서(朴彛敍)가 정문익(鄭文翼)을 뽑았을 때에는 제목을 내어 미리 글을 지었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中略-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의 간절함을 굽어 살피시어 신의 본직과 겸대를 모두 개차하소서. 그러면 공사간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아뢴 말은 모두 잘 알았다. 이러한 때의 사람들의 말을 무슨 마음 쓸 것이 있겠는가. 경은 다시 사직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조리하며 직무를 보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535 면

 

광해08/12/22(무오)

정원이 아뢰기를,"신들이 삼가 보건대, 윤선도가 선류들을 일망타진하려고 올린 상소는 종이 가득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이 온통 무함하고 날조하여 간사한 의논을 일으켜 세우고 바른 공론을 해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흉인(兇人)의 망극함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입니까. 이이첨(李爾瞻)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몸바쳐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역적을 토벌하였습니다. 류영경(柳永慶), 이진(李진), 김직재(金直哉), 김제남(金悌男) 등의 역적들을 전후로 토벌하였으니, 그가 임금을 보위한 충성과 사직을 안정시킨 공로는 해와 별처럼 환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역적들의 잔당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참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中略- 신들이 임금과 가까이 지내는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이토록 큰 모함을 받아 장차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르게 되었으니, 편한 마음으로 직무를 볼 수가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하였는데, 답하기를,"흉악한 상소를 가지고 따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무에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539 면

 

광해08/12/23(기미)

양사가 합계하기를,"신들이 그저께 삼가 윤선도의 상소의 대개를 보았는데, 서로들 경악하고 괴이하게 여기면서 그 까닭을 몰랐습니다. -中略- 역적을 토벌하고 사론(邪論)을 배척하였으며 임금을 애호하였습니다. 류영경(柳永慶)을 토벌하고 이홍로(李弘老)를 주벌할 때에 그 일을 떠맡아 피하지 않았고 이진(李콫)이 왕위를 사양했다는 주본(奏本)을 올려야 한다는 말을 배척하고 골육의 은혜를 보존해야 한다는 말을 공격하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하였습니다. -中略- 흉악한 역도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의리를 환히 밝혔으니 이는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이며 신명(神明)도 알고 있는 바입니다. 참으로 가령 골육의 은혜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과 진이 왕위를 사양한 주본을 올려야 한다는 말과 영경과 제남의 역모가 앞뒤로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모두 역적을 토벌하는 큰 의리를 알고 있다면, 신들이 비록 역적을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사람을 공격하고자 하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中略- 신들은 모두 하찮은 자들로서 언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역적을 토벌하는 큰 의리를 밝히지도 못하고 도리어 여러 잔당들로부터 망극한 비난을 당하고 악명을 받았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모두 파직하 소서."하였는데, 답하기를,"흉악한 상소에 대해서 무슨 더불어 따질 것이 있겠는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540 면

 

광해08/12/24(경신)

홍문관이 아뢰기를,"신들이 삼가 지난번 윤선도의 상소를 보았더니, 대개 위복을 마음대로 농단한 이이첨의 죄를 먼저 다스리고 다음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류희분과 박승종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中略- 이이첨이 전후로 토벌한 역적들을 가지고 말해 보자면, 류영경(柳永慶)과 이진(李콫)과 김직재(金直哉)와 김제남(金悌男)이며, 이이첨이 공척을 한 사론(邪論)을 가지고 말해 보자면, 호민(好閔)과 이덕형(李德馨)과 이원익(李元翼)과 남이공(南以恭)과 심희수(沈喜壽)입니다. -中略- 신들은 경연에서 전하를 모시는 직임을 띠고 있는데, 이토록 심한 무함과 비난을 당하였으니, 무릅쓰고 있으면서 거듭 명기를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속히 신들의 직임을 삭제하여, 역적을 편들고 임금을 저버린 자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하소서."하였는데, 답하기를,"흉악한 상소에 대해서 같이 따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540 면

 

광해08/12/25(신유)

양사가 합계하였다."사과(司果) 윤유기(尹惟幾)는 본래 간사하고 사악한 인간으로서 성품이 뱀과 같고 행실이 개와 같습니다. 집안에서의 행실을 말하자면, 어미가 죽었을 때에 장례도 치르지 않았고 아비의 첩을 팔아먹었으며 재물을 다투다 형을 죽였습니다. -中略- 임금과 아비를 시해할 자들이라는 악명을 역적을 토벌한 사류들에게 더하여 하나의 함정을 만들어서, 류영경을 복권시킬 바탕을 만들었고 김제남의 옥사를 뒤집을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中略- 임금을 무시하고 왕법(王法)을 무시하고 역당을 옹호하고 조정을 모함한 죄는 아비와 아들이 똑같습니다. 윤유기와 윤선도를 먼 변방에 안치시키소서."【원전】 32 집 541 면

 

광해09/01/04(경오)

유학 이형(李泂)이 상소하였다."삼가 신은 성세(聖世)에 태어나 맑은 교화에 흠뻑 젖어들었으니 참으로 조금이라도 보답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中略- 저들이 이른바 '역당(逆黨)에게 큰 공을 세웠다.'느니, '류영경을 위하여 보복할 바탕을 마련하고 김제남을 위하여 옥사를 뒤집을 계획을 꾸몄다.'느니 하는 것은, 대개 성상의 총명을 어지럽혀서 반드시 언자(言者)를 불측한 지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中略- 삼가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의 간절한 마음을 굽어살피시고 윤선도의 충성스러운 말을 통촉하시어, 속히 이이첨이 위복의 권한을 마음대로 하고 흉한 기염을 더욱 돋운 죄를 바루고, 삼사와 정원, 관학이 악인을 편든 죄를 다스려서 종묘 사직의 억만년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이 되게 하소서." 【원전】 32 집 543 면

 

광해09/01/04(경오)

도승지 한찬남이 아뢰기를,"신이 삼가 이형(李泂)의 상소를 보건대, 신과 신의 두 아들을 무함하면서 못하는 말이 없었는 바, 성상께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中略- 신의 마음씀씀이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류영경과 같이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고자 하고, 김제남처럼 임금을 해치려는 자를 반드시 찢어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단단한 일념은 푸른 하늘에 징험하고 밝은 해를 꿰뚫을 수 있는 바,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中略- 바라건대 신을 파직하여 간사한 자의 사주를 받아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계사의 내용은 모두 알았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2 집 544 면

 

광해09/01/05(신미)

정언 한희가 아뢰기를,"류영경과 김제남이 역모할 때를 당하여 신의 아비 한찬남은 예조 판서 이이첨과 함께 앞장서서 정론(正論)을 발하고 의리에 입각해 주벌하였습니다. -中略- 신을 파직하라고 명하여서, 남몰래 사주하여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대간인(大奸人)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2 집 546 면

 

광해09/01/13(기묘)

홍문관 교리 강린(姜?), 부교리 임성지(任性之), 수찬 류약(柳약), 부수찬 황덕부(黃德符), 정자 조유선(趙裕善) 등이 상차하기를,"박홍도는 본디 사악하고 이상야릇한 사람으로서 청론(淸論)에 죄를 얻고 여러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中略- 그렇다면 가령 류영경과 김제남이 상소를 올려 자신에 대해 변명할 경우에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역적이 아니라고 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수백 년 이래로 없던 변고입니다. 그러니 정원에서는 급급히 내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였는데, 도리어 예전 규례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을 만들어 아뢰어서 그 흉소가 성상께 올려지게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수백 년 이래로 없던 일입니다. 양사가 인피한 것은 바로 그 일을 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동료들과 함께 피혐하지 못한 것은, 형세상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모두 인피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모두 출사시키라고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32 집 550 면

 

광해09/01/13(기묘)

평안도 관찰사 김신국(金藎國)이【류영경의 잔당으로 외람되이 방백으로 있었다.】 상소하기를,"신의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을 전하께 호소한 것이 서너 번만이 아닌데, 성상께서 들으심은 더욱 까마득해져, 지난번에는 중사(中使)가 내려와서 성상의 전지를 특별히 전하기를 '영정(影幀)의 봉안(奉安)이 2월 중에 있을 것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얼마 동안만이라도 죽지 않아서 영정을 봉안하는 성대한 거조를 본 다음에 은혜를 받아 체직되어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도 지금 또 5월로 늦추어졌습니다. 지금 신의 병이 이미 고질화되어 위태롭기 그지없기에 부득불 죽음을 무릅쓰고 애처롭게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죽음에 임박한 신을 불쌍히 여겨 신의 직을 파직하시어서, 신의 모자(母子)로 하여금 병든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 주소서."하였다.> 【원전】 태백산본

 

광해09/01/13(기묘)

성균관 생원 이전방(李傳芳) 등이 상소하기를,"신이 삼가 윤선도의 상소를 보건대, 대개 '먼저 이이첨이 위복(威福)의 권한을 마구 휘두른 죄를 다스리고, 다음으로 류희분, 박승종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中略- 류영경이 역모를 꾸며 위태롭게 한 뒤로 역적을 토벌함이 엄하지 않아,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잇달아 나왔습니다. 이에 역적 이진이 상중(喪中)에 역모를 꾸몄고 김직재(金直裁)가 해서(海西)에서 역적 모의를 하였으며, 김제남에 이르러서는 국구(國舅)의 위세를 믿고 궁위(宮?)들과 체결하여 변고가 바로 좌우(左右)에서 발생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까지 되었습니다. -中略- 지금 이이첨이 이들에게 무함을 받는 것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류영경을 우두머리로 삼고 있었는데 이이첨이 성상을 떠받들고 토벌하였으며, 이들은 역적 이진에 대해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한다 하고 김직재에 대해 살려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이첨이 성상을 도와 토벌하였기 때문입니다. -中略-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는 신들이 무고당한 원통함을 살피시어 「주역」에서 엄하게 토죄하는 의리를 다하여 속히 흉소를 불태우고 분명하게 호오(好惡)를 보이심으로써, 조정을 평안하게 하고 사류를 안심시키소서."하였다. 【원전】 32 집 551 면

 

광해09/01/27(계사)

합사해서 연계하여 세 역적을 위리 안치시키도록 청하니, 답하기를,"허욱(許頊)은 선조(先朝)의 대신으로서 스스로 죄를 지었을 리가 만무한 바, 류영경과는 차이가 있으며, 최천건(崔天健)은 기록할 만한 정성이 있으니, 결단코 위리 안치시킬 수 없다. 성영(成泳)은 이미 멀리 내쫓았으니 위리 안치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내가 이미 참작하여 죄를 정하였으니 번거롭게 고집부리지 말라."하였다. 【원전】 32 집 559 면

 

광해09/02/03(무술)

호조가 아뢰기를,"병조의 계사로 인하여 '이른바 역적의 집을 철거한 재목과 기와라고 한 것은 어느 역적의 집이며 어째서 철거하였는가?'라고 전교하시었습니다. 역적을 정형(正刑)에 처한 뒤에 파가 저택(破家?澤)함에 있어서, 본조는 단지 재목과 기와 및 재산을 적몰한 숫자를 파악하는 것만 관할하고 있습니다. 류영경(柳永慶), 김대래(金大來), 오윤남(吳允男), 서응상(徐應祥), 서순창(徐順昌) 등의 집은 의금부를 옛터에 새로 지을 때 이미 내려주어서 썼고, 최기(崔沂), 류성(柳惺) 등의 집은 사헌부 구기조성소(司憲府舊基造成所)에 제급하였으며, 기타 자질구레한 초가집 등의 재목은 공해(公?)에서 가가(假家)를 짓는 곳에 이미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제남(金齊男)의 집은 그의 아내가 들어가 살고 있어서 별장(別將)을 정해 수직하고 있으므로 아직 철거하지 않았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알았다. 역적의 집은 전부터 공신(功臣)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근래에 마음대로 철거하여서 임의대로 쓰니 몹시 불가하다. 지금 이후로는 일일이 아뢰라. 그리고 이미 철거한 집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하였다. 【원전】 32 집 562 면

 

광해09/02/13(무신)

도승지 한찬남(韓纘男)이 비밀히 아뢰고, 대죄하기를,"어제 고변한 사람인 손활(孫活)은 신의 여동생의 사위로 신의 조카 사위입니다. -中略- 그리고 신은 출신(出身)한 뒤로 십여 년 동안에 삼사(三司)에 출입하여 문사 낭청(問事郞廳)이 된 것이 1년 반이며, 해방(該房)이 된 것이 지금까지 3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류영경에서 역적 최기(崔沂)에 이르기까지 토벌한 역적이 몇 명이나 되겠으며, 여러 역적의 잔당들중에 신을 해치고자 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지금 또 손활과 박문근이 고변하였는데, 박문근은 신이 본디 모르는 사람입니다. -中略- 그리고 흉서에서 여러 차례 신의 이름을 거명하였기에 황공함을 금치 못하여 대죄합니다."하니, 답하기를,"역적을 토벌하는 대의는 지극히 엄한 것이다.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고 다시 직무에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원전】 32 집 567 면

 

광해09/07/04(병인)

사헌부가 아뢰기를,"병조 좌랑 정세구(鄭世矩)는 바로 죄인 이효원(李效元)의 사위인데, 이효원은 바로 역적 류영경(柳永慶)의 심복입니다. 류영경이 역모를 꾸미던 때 이효원이 하는 짓을 정세구는 의당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인 바, 조정의 반열에 끼어 있는 것만도 역시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中略- 군기시 직장 이경복(李景福)은 「대전(大典)」의 고강(考講) 때 패초(牌招)하였는데 아무런 까닭없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아뢴 대로 하라. 권주와 안대기의 일은 천천히 결정하겠다."하였다.【원전】 32 집 602 면

 

광해09/07/18(경진)

유학(幼學) 김시헌(金時獻) 등이 상소하여 정운공신(定運功臣)을 더 녹훈하기를 청하였는데, 답하기를,"녹훈을 감정할 때 의논하여 처리하라."하였다.【정운(定運)은 바로 정인홍이 류영경을 죽이기를 청한 데 대한 공신의 칭호이다. 정인홍의 뒤를 이어 상소한 자가 10인인데, 당초에 단지 3인만 녹공하였으므로 나머지 7인이 김시헌을 사주하여 따지게 한 것이다.】【원전】 32 집 606 면

 

광해09/08/01(계사)

최천건은 권흉(權凶) 황헌(黃憲)의 외손이다. 재주가 조금 있기는 하였으나 위인이 볼품이 없어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아 정사하는 반열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류영경이 집권하게 되자 천건이 제일 먼저 아부하였고, 영경에게 비밀 논의가 있을 때마다 천건이 참여하였던 까닭에 그를 끌어 올려 전장(銓長)이 되게 하였다. 무신년 초에 죄를 받았는데 이때에 와서 죽었다.【원전】 32 집 609 면

 

광해09/08/17(기유)

사헌부가 아뢰기를,"하늘의 도리가 지극히 인자하여 하루종일 격렬한 천둥을 울리게 하는 경우가 없듯이 국가에는 영원히 귀양보내거나 끝까지 버려두는 신하가 드무니, 이것이 어찌 성군(聖君)의 큰 도량이 아니겠습니까. -中略- 급제 기협(奇協)은 류영경에게 빌붙은 자이니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인데 도리어 훈적(勳籍)에 참여하였으며, 강도(江都)를 맡게 되어서는 역적 이의(李썃)를 은밀히 보호하여 다른 날 공을 세울 수 있는 길을 삼으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용서할 수 있는 죄이겠습니까. -中略- 국내에 말들이 자자하고 사람들의 노여움이 격렬하니 모두에게 내린 성명(成命)을 환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해 주소서."하니, 답하기를,"대사면을 누차 거쳤으니, 석방하고 직첩을 주는 것이 무엇이 안 된다는 말인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전】 32 집 612 면

 

광해09/08/17(기유)

사간원이 아뢰기를,"심희수(沈喜壽)는 두 조정을 거친 노신(老臣)으로 훈부(勳府)에 참여했으면서, 임금을 망각하고 역적을 옹호하여, 정경세에게 사적으로 서찰을 보내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는 말까지 하더니, 변무(辨誣)와 추숭(追崇)하는 문제가 거론될 때에는 끝까지 반대하여 병들어 있는 사람을 사주하고 심지어 맞지도 않는 편석(扁石)의 비유까지 들었습니다. -中略- 기협(奇協)은 류영경에게 빌붙어 그의 문하에서 노예처럼 굴었는데, 반역을 꾀한 일이 발각된 후에 사형을 용서받고 공로가 기록된 것은 참으로 정론(正論)이 펼쳐지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中略- 조존성(趙存性)은 역적의 무리를 군관으로 삼았고 요망스런 시를 기록하고도 즉시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았으니, 신하된 도리상 이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슨 속죄시켜줄 공이 있다고 도리어 석방시켜 주는 은전을 받게 하십니까. 이 세 사람에게 내린 성명(成命)을 모두 환수하소서."하니, 답하기를,"누차 대사면을 거쳤으니 석방시키고 직첩을 주는 것이 무엇이 안 될 일인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원전】32집 613면

 

광해09/12/01(임진)》

유학 이위(李偉)가 상소하기를,"삼가 생각건대 흉악한 기자헌은 김제남(金悌男)의 충신이고 서궁(西宮)이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中略- 역적 기자헌이 나라를 배반한 죄는 류영경보다 작지 않은데, 류희분과 최관이 감히 백일하에 제멋대로 가서 만났으니, 그들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은 또한 불 보듯 명백합니다. 기자헌을 옹호하는 뜻은 바로 류영경을 옹호하는 뜻이니, 말에서 떨어져 다친 것은 하늘이 실로 미워한 것으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中略-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기미를 잘 살펴서 즉시 이항복에게 주벌을 가함으로써 화란의 주동자를 제거하고 속히 훌륭한 재상을 선출함으로써 대체적인 정국을 완결짓게 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하였는데, 의정부에 계하하였다. 【원전】 32 집 664 면

 

광해10/01/04(갑자)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행 지중추 박홍구(朴弘耈) 등이 아뢰기를,"역적을 토죄하는 일은 《춘추(春秋)》를 법으로 삼아야 하고, 변고에 대처할 때에는 종묘 사직을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中略- 역적 이의(李의)를 처음 낳았을 때 은밀히 류영경(柳永慶)으로 하여금 속히 진하(陳賀)하는 예를 드리게 하여 인심을 동요시켰고, 또 흉악한 점장이를 사주하여 지극히 귀하다고 칭찬하게 하는 한편, 날마다 요사스러운 경문(經文)을 외어 큰 복을 기원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첫번째 죄입니다. 선왕께서 건강이 좋지 못하셨을 때 자기 소생을 세우려고 꾀하여 역적 류영경과 결탁하여 안팎으로 상응하면서 언문으로 은밀히 분부를 내려 전위(傳位)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中略-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종묘 사직의 큰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온 나라의 여론을 굽어 따르시어 화의 근본을 제거하소서. 그러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운명까지 기구하여 무신년과 계축년의 변고가 모두 천륜(天倫)에서 나왔으니, 이 어찌 상정(常情)으로 볼 때 참아 넘길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종묘 사직이 중한 탓으로 애써 정신(廷臣)의 요청을 따르긴 했다마는 날이 가면 갈수록 애타고 아픈 마음이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이런 논을 듣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어쩌면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을 벗어 버리듯 인간 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저으며 멀리 떠나서 해변가에나 가서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 나의 진심을 살펴 연민의 정을 가지고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도록 하라."하였다.【원전】33집 2면

 

광해10/01/24(갑신)

봉길이 그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마침내 상변(上變)하여 고하기를 '류욱은 정협의 매부요 류영경(柳永慶)의 조카로서 나라를 원수로 알고 상을 원망하며 차마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할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대궐 뜰에서 그와 대질 신문을 받기를 청한다.' 하니, 왕이 류욱과 봉길을 모두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류욱이 공초(供招)하며 실상을 진달하고, 사련인(辭連人)으로 체포된 20여 인도 모두 류욱의 말이 올바르다고 증거를 대니 봉길의 말이 비로소 막혔다. 류욱이 이에 죽음을 면하고 사련인들도 모두 풀려났는데, 봉길에게 역시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하지 않았다. 【원전】 33 집 13 면

 

광해10/04/07(을축)

부제학 정조, 교리 이잠, 부교리 한희, 부수찬 최호가 아뢰기를,"신들이 삼가 곽영이 어제 올린 상소를 보건대, 이이첨을 간적(奸賊)이라고 하며 임금을 업신여기고 부도(不道)한 짓을 했다고 하는가 하면 삼사가 그에게 아첨이나 하여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고 있다고 하면서 죄를 다스리라고 청하였습니다. -中略- 그런데 지금 적(賊) 곽영을 보건대, 그가 나고 자란 곳은 풍기(豊基)인데 풍기는 바로 류영경(柳永慶)의 처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의 아비인 곽진(郭?)은 마치 노예처럼 영경의 문에 드나들었는데, 그 역시 영경의 조카인 황유중(黃有中)․황유첨(黃有詹) 형제와 친형제 이상으로 절친하게 지내면서 영경을 위해 복수할 음모를 밤낮으로 꾸며 왔습니다. -中略- 지극히 황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을 삭직(削職)토록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원전】 33 집 58 면

 

광해10/04/18(병자)

합계로 연계하기를,"기준격의 소를 국청에 내리시자 국청에서 이에 대해 회계한 지 이미 며칠이 지났습니다. -中略- 이번에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시킨다면 류영경(柳永慶)․김직재(金直哉)․김제남(金悌男)의 무리들마저 살아날 길이 생길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中略- 국빈을 엄히 형신(刑訊)하고 율대로 정죄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알아서 헤아려 처리할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3 집 67 면

 

광해10/05/03(경인)

좌참찬 허균이 상소하기를,"지난해 대론(大論)이 일어났을 때 신의 원수 기자헌(奇自獻)이 제일 먼저 흉악한 차자를 올렸다가 귀양갔는데, 그 집에서는 신이 남몰래 중상했다고 의심한 나머지 신에 대해 골수에 사무치도록 원망하고 있습니다. -中略- 병오년에 주사(朱使)가 벽제(碧蹄)에 왔을 때 신이 역관(譯官) 박인상(朴仁詳)으로 하여금 본국의 세자 책봉에 관한 일을 극력 진달하게 하였더니 주사가 즉시 정문(呈文)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 대신에게 말하였더니 적신(賊臣) 류영경(柳永慶)은 달갑지 않게 여긴 반면 자헌과 심희수(沈喜壽)는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는데, 하여튼 온 나라의 민정(民情)을 조사(詔使)에게 진달함으로써 중국 조정의 천신(薦神)들에게 알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뒤 영경이 분노와 시기심을 품게 된 결과 자헌 등이 잇달아 벼슬자리에서 밀려났고 신도 곧바로 부처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게 되었습니다. -中略- 이런 말은 정신이상자도 감히 하지 못할 것인데 신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원전】 33 집 82 면

 

광해10/08/18(갑술)

허균의 공초에 이르기를,"신이 기자헌과 원수가 된 상황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中略- 신이 즉시 삼공을 만나서 말하자 류영경은 응하지 않고 자헌과 심희수는 모두 옳다고 하면서 힘써 정문하기를 쟁론하니 영경이 매우 화를 냈는데 얼마 뒤에 두 상공은 모두 면직되었습니다. -中略- 지난번의 대론이 아니었더라면 자헌이 어찌 감히 해칠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신은 오직 성명만을 믿을 뿐입니다."하였다. 【원전】 33 집 144 면

 

광해10/08/27(계미)

대사헌 남근, 대사간 윤인이 아뢰기를,"신 등은 단지 죄인이 이에 밝혀졌기에 정형을 행하기를 청할 줄만 알았지, 이에 가탁하여 허위를 날조하는 자들이 뒤에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中略- 근래 역모를 다스렸던 류영경(柳永慶)과 김제남(金悌男)도 모두 형장 한 번 치지 않고 말 한 마디 묻지 않고 사사하였는데, 이때 비국은 어디를 갔었기에 추관이 지레 처치한 죄를 청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두 역적의 죄가 허균보다도 아래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까. 저 무식한 무부가 병권을 주관하는 직임에 의거하여 감히 여러 재신들의 청을 도왔으니, 이 또한 전고에 없던 변입니다. 신 등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청에 동참하였는데 이런 망극한 남의 말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신 등의 직을 파척하소서."하였다. 【원전】 33 집 153 면

 

광해10/08/28(갑신)

판의금 이이첨이 아뢰기를, "신이 이달 25일 저녁에 비국의 분발(分撥)을 보았는데 병판의 분부로 인하여 의논할 일이 있으니 일찍 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中略- 과연 비국의 말대로 옥사를 다스리는 체모가 반드시 엄히 국문하고 끝까지 캐물은 다음에야 결안하여 형을 행해야 하는 것이라면, 류영경이나 김제남의 경우에 공초에 의거하여 모두 사사하였는데, 비국의 재신들은 그때 어디에 있었기에 엄히 국문하라는 의논을 발론하지 않은 것입니까. 전후 역적의 죄는 경중이 없고 법도 더하고 덜한 것이 없으니 오늘날 비국의 계사가 과연 공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中略- 신이 마침 병을 앓고 있었는데 또 이 일로 인하여 방에 엎드려 있어 세 번이나 명을 내리시게 하였으니 매우 낭패스럽고 황공하여 대죄합니다.㰡하니, 답하기를,㰡계사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경은 대죄하지 말고 더욱더 서로 공경하는 의리에 힘써 종사를 편안히 해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경이 만약 협동하고 화합하는 데도 알력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면 책임이 돌아갈 데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원전】 33 집 154 면

 

광해10/09/02(정해)

판의금 이이첨이 아뢰기를,"지난번 신이 심정을 하소연한 계사는 참으로 성상의 하교에 감격해서 화합하려는 본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中略- 그리고 류영경을 천거하여 발탁한 자가 있고 김제남을 천거하여 발탁한 자가 있으며, 영경과 제남에게 천거 발탁된 자가 또한 많이 있는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사람을 무함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역적 허균 등은 본래 신을 통해 천거 발탁된 것이 아니라 단지 변무(辨誣)한 한 가지 일로 스스로 경의 지위에 오른 것입니다. 지금 그런데 정협을 천거한 일을 이끌어 신을 마구 공격해대니, 더욱 놀랍습니다. -中略- 부르시는 명이 세 번이나 이르렀으므로 황공하여 대죄합니다."하니, 답하기를,"아뢴 내용은 모두 알았다. 어찌 서로 다툴 필요가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그리고 다시 더욱 직임을 살피라."하였다. 【원전】 33 집 157 면

 

광해10/09/14(기해)

도승지 한찬남(韓纘男)이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요즈음> 류희분과 예조 판서 이이첨이 서로 따지면서 차자를 두 번 세 번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中略- 나물이나 씹으면서 직무를 수행하여 병 때문에 몸이 곧 죽게 되었지만 그래도 역적을 토벌하는 것을 저의 임무로 삼아 류영경을 베고 김제남을 없애고 허균을 베면서 그칠 줄 몰랐습니다. -中略- 청컨대 신과 희분을 법을 담당하는 관원에게 내려 진위를 구분하게 해서 원통함을 시원히 씻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끝내 희분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아뢴 뜻은 모두 알았다.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원전】 33 집 164 면

 

광해10/10/09(갑자)

전 좌의정 허욱(許頊)이 졸하였다. -中略- 자못 청렴과 근면으로 칭찬을 받았다. 마침 그의 처당(妻黨) 류영경이 권력을 잡자 진용되어 그의 보좌역이 되었는데, 평안 감사를 거쳐 양전(兩銓)의 판서로 들어왔고 갑자기 정승에 임명받기가지 했으므로 물의가 비웃고 더럽게 여겼다. 영경이 무너지자 허욱도 또한 연좌되어 삭출당했는데, 꾸밈이 적고 행동을 삼가고 말이 적었기 때문에 모함을 당하는 화는 면할 수 있었다. 병진년에 이전의 일을 소급해서 논핵하여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졸한 것이다. 【원전】 33 집 174 면

 

광해11/04/25(무인)

찬집청(撰集廳)이 아뢰기를, “모든 역적을 두고 말한다면 정여립(鄭汝立), 이몽학(李夢鶴), 이진(李콫), 류영경(柳永慶), 김직재(金直哉), 김제남(金悌男), 이기(李沂), 허균(許筠) 등의 추국안을 마땅히 차례로 엮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여립에 관한 문서는 임진란 후에 잃어버려서 지금 <안팎으로> 구입하여 모으고 있으나 아직 책으로 완성하지 못하였고, 이몽학과 김직재의 문서는 이미 초안을 잡았으나 미처 정서하지 못하였으며, 진과 류영경의 문서는 모두 정서하여 교정하였고, 김제남과 이기의 문서는 국가에 일이 많아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적 허균은 그 옥사가 완료 될때를 기다려 수정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진과 류영경의 문서를 먼저 입계한 것입니다. 마땅히 정여립에 관한 문서를 먼저 인쇄해야 하겠습니다마는, 구입하여 모으기 전에 이몽학, 이진, 류영경, 김직재 등에 관한 문서를 차례로 인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몽학의 문서는 앞으로 정서하여 입계할 것입니다. 《무정보감》 및 《속무정보감》은 다시 내려주시기로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반드시 속히 내려주셔야만 공역을 폐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자(鑄字)로 인쇄해 내는 일은, 《속무정보감》 3책 1백 8건을 이미 목활자로 인쇄해 내었으므로 다르게 할 수 없으니 그대로 목활자를 사용하여도 무방할 것 같기에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33 집 231 면

 

광해11/07/03(갑신)

사헌부가 아뢰기를,"팔도의 심약(審藥)은 조정에서 차출하여 보냈으니, <사람이 비록 미천하더라도 본래> 그 신분이 본도의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과 매우 차등이 있습니다. -中略- 류영경(柳永慶)이 종사를 넘어뜨리려고 도모할 때 붓을 잡고 있는 것을 기화로 그 사이에서 손을 써 사사로이 성지(聖旨)를 숨겼는데, <당시에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고 지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中略- 고금 천하에 방어책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피하는 것만 위하여 궁인과 환시를 먼저 보내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소(一笑)거리에 지나지 않으니> 조찬한을 파직하라 <명하소서.>"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원전】 33 집 243 면

 

광해12/01/29(무신)

사헌부 대사헌 한찬남(韓纘男), 집의 최호(崔濩), 장령 채겸길(蔡謙吉), 지평 신칙(申?), 황중윤(黃中允), 대사간 남근(南瑾), 사간 정도(鄭道), 헌납 이지정(李志定), 정언 민심(閔쉱)이 합사하여 아뢰기를,"군신의 분의(分義)는 지극히 엄중한 것입니다. -中略- 정온이 현자(賢者)의 문하에서 종유했는데, 그 스승이 류영경(柳永慶)을 성토하면서 '제왕은 바로 우리 동궁이다.'하였습니다. 그 스승은 전하를 제왕에 비하였는데 정온은 역적 의를 제왕으로 여기고 있으니, 의를 제왕으로 여긴다면 전하는 어떤 곳에 둔 것입니까? 그-中略- 이대기를 빨리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하라 명하시어 강상을 세우고 정론(正論)을 붙들어서 <남의 신하와 아들이 된 자로 하여금 근본을 화해(禍害)한 책임을 질 줄 아는 경계로 삼게 하소서>"하였다. 【원전】 33 집 296 면

 

광해12/06/15(신유)

헌납 권의가 아뢰기를,"삼가 병조 판서 류희분(柳希奮)의 <사직하는> 계사를 보니, 전적으로 성우길(成佑吉)과 이극신(李克信)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어서 그들이 지은 죄의 경중과 대간의 탄핵이 정지되었는지의 여부는 반드시 살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中略- 극신은 비단 류영경(柳永慶)의 잔당일 뿐만이 아니라, 그의 행실이 극악한 것은 《피생전(皮生傳)》에 자세하게 실려서 바야흐로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으니, 다시 진술하여 입을 더럽힐 필요가 없습니다. 병조의 낭관으로서 류창문(柳昌文) 같은 자는 일찍이 영경을 위하여 소를 진달하고자 하였다가 10년간이나 정거(停擧)을 당하였으니, 과연 이 사람이 조정의 사체를 대략이라도 아는 자이겠습니까. -中略- 신은 마침 병에 걸려서 이제야 비로소 와서 피혐하였으니, 잘못이 더욱 큽니다. 신의 직을 파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성우길과 이극신이 비록 범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영원히 폐기하는 정도에 이르겠는가. 극신이 원흉의 잔당이라면 어디 갔다가 이제야 비로소 운운하는가. 더구나 어제 정원의 계사를 보니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것이 없는 듯하다. 병조 판서가 이미 대간을 무시하고 대간을 혁파하려 한다는 논박을 입었으니, 명초하라는 분부를 인하여 한 번 계사를 올려 사직하는 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런 위급하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때를 당해서는 더욱 공손히 힘을 합하는 뜻에 부지런히 해서 나랏일을 구제해야 할 뿐이니, 말을 많이 늘어 놓아 중신(重臣)을 배격하고 시끄러운 단서를 여는 것은 옳지 않다. 사직하지 말라."하였다.【원전】 33 집 326 면

 

광해12/07/20(을미)

대사헌 한찬남(韓纘男), 대사간 이창후(李昌後), 장령 곽천호(郭天豪), 지평 정결(鄭潔)이 아뢰기를,"<신들이> 삼가 <어제> 옥당의 차자를 보건대 '양사가 합사하여 정계하고는 간통을 띄우지 않았다' 하고, 또 '잠깐 아뢰었다가 곧바로 정계하여 마치 책임만 면하려는 듯한 점이 있었다.' 하고, 또 '입을 다물고 세월만 보내어 물의가 시끄럽다.'라고 하였으니, 신들은 삼가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中略- 신들은 류영경(柳永慶)과 김제남(金悌男)의 예에 의하여 국문하지 않고 형벌을 시행하였으며, 정문익(鄭文翼)과 이태경(李泰慶)의 예에 의하여 논의를 정지하고 귀양을 보냈으니, 어찌 그 사이에 완급이 있었겠습니까. -中略- 신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분명하게 헐뜯음과 배척을 당하였으니 <신들의 직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하였다.

 

광해12/07/22(기유)

사간 최호가 아뢰기를,"신은 일생 동안 우직하여 환란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벼슬하지 않고 선비로 있던 때부터 군신의 의리를 대략 밝혔으며, 류영경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고 있을 때를 당해서는 이정원(李挺元) 등과 함께 역적을 치기를 도모하다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역적들의 손에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였습니다. 김제남이 흉계를 부릴 때에 미쳐서는 이위경(李偉卿) 등과 함께 또 역적을 치는 글을 올려서 오랫동안 삭적(削籍)되어 과거 응시를 정지당했습니다. 심지어 역적 허균이 세력을 떨치고 기승을 부릴 때에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신은 또한 옥당에 있으면서 국문하도록 청하는 논의를 맨 먼저 발의하여 끝내 사형당하게 하고 같은 무리들을 모두 제거하였으며, 무릇 그 사이에서 끼여 있던 자들도 모두 새매가 참새를 쫓아버리듯 다 내쫓았습니다. 신이 보잘것 없음으로 인하여 관직을 거듭 욕되게 하였으니, 파척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원전】 33 집 335 면

 

광해12/11/23(병신)

형조 판서 한찬남(韓纘男)이 아뢰었다.'삼가 전라 감사 류색(柳穡)의 상소를 보건대, 있는 힘을 다해 신에 대한 말을 낭자하게 늘어 놓았으니, 신은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中略- 무슨 혐의를 잡고 사람을 모함하는 것은 크게 간특하기가 류영경(柳永慶)과 같은 자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류색은 영경의 조카입니다. -中略- 신의 위태로운 신변이야 비록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정경(正卿) 자리를 욕되게 하고 있으면서 수치스럽게도 역족들과 조정을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빨리> 신을 직에서 파면하고 내쫓도록 명하소서."【원전】 33 집 355 면

 

광해13/04/04(을해)

정결이 유생 시절에 상소를 올려 모후의 폐위를 청한 공로를 스스로 진술하고, 이어서 양필을 류영경(柳永慶)의 잔당이라고 배척하였는데, 조사가 앞으로 나오게 되었으므로 비밀로 아뢴 것이라고 한다. 【원전】 33 집 372 면

 

광해13/07/19(무오)

사간원이 아뢰기를,'<세상에는 바른 논의와 사특한 논의가 있는 것인데, 이를 제대로 가려 바른 것을 붙잡고 사특한 것을 누르는 것은 당시의 인군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효릉 참봉(孝陵參奉) 박중진(朴重振)은 강개하게 항소를 올리고 대궐의 뜰에서 통곡하였으며, 의리에 분기하여 봉장(封章)을 올리고 힘을 다해 류영경(柳永慶)을 쳤습니다. 그 밖에 그는 일생 동안 추원(追遠)의 마음으로 6년이나 국상(國喪)을 당해 최복(衰服)을 입었으니, 그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논의를 붙잡고 추잡한 행실을 물리치느라 논의한 일이 비록 직분을 넘었지만 그의 본심은 나라에 대한 걱정이 간절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언관이 감문(監門)에서 나오기도 하였으니, 재랑(齋郞)이 과감하게 말했더라도 규계하는 데에 있어서 하등 해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사특한 논의에 모함을 받아 먼 곳으로 귀양보내자고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지금까지 공론들이 원통한 일이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서서히 살펴 처리하고 있는 중이니, 속히 처치하여 사특한 것과 바른 것의 <한계를> 판별하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원전】 33 집 390 면

 

광해13/08/23(임진)

대사헌 윤인이 아뢰기를,"엊그제 영남 유생 김시추(金是樞) 등의 상소를 보았습니다. <대개는> 흉측한 말을 만들어 군상을 기망하고 대관들을 비난하는 내용이어서, 신들은 분개해 하고 있습니다. 유성증이 한강에 왕래한 사실은 여러 사람들이 보았으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지난 무신년에 역적 류영경(柳永慶)이 세자를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던 때, 우도(右道)의 여러 선비들은 열읍에 통문을 보내 의를 떨쳐 토벌하였으나, 좌도(左道)의 유생이라고 하는 자들은 한 사람도 호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中略- 더구나 역적 허환과 조우인 등은 천고에 없는 역적들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은연중에 구원하고 비호하니,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시세를 엿보고 있는 꼴이 더욱 통탄스럽습니다. 신은 이미 추잡한 비난을 받아 <형세상 직임에 있을 수 없으니,> 신의 직임을 체차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원전】 33 집 397 면

 

광해13/09/15(계축)

장령 박광선(朴光先)이 아뢰기를,"보잘것없는 소신은 영(嶺) 밖에서 생장하였는데 외람되이 발탁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니, 의당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은혜에 보답했어야 했습니다. -中略- 전에 류영경(柳永慶)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하던 때에 몸을 돌보지 않고 의거한 이첨과 토벌할 것을 청한 정인홍이 없었다면, 오늘날 종묘 사직이 보존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中略- 그런데 요사이는 정사(呈辭)의 법을 각별히 밝혔으니, 미혹해 잘 살피지 못해 잘못한 것이 크다 하겠습니다. 지금 추고를 받고 있어 이런 저런 이유로 결코 직임에 있을 수 없으니, 신을 체직시키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원전】 33 집 405 면

 

광해13/09/26(갑자)

집의 최호(崔濩), 장령 김륜(金崙), 지평 민심(閔쉱), 정언 임기지(任器之), 정담(鄭湛)이 아뢰기를,"근래 남을 모함하는 흉악한 자들이 매양 과거장의 일을 함정으로 삼고 있어, 신들은 매우 통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中略- 과거장에 가득찬 선비들이 붓을 놓고 서로 쳐다보며 하는 말이 '이는 이미 누구누구가 오래 전에 짜놓은 시제이다.'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시제를 내놓고 자신들의 아들과 사위 그리고 혼인한 집안 사람들을 모두 합격시켰습니다. 이런 일은 류영경(柳永慶)도 굳이 거절하였으나, 이정귀(李廷龜)는 하였습니다. -中略- 신들이 의당 바로 논열했어야 하는데, 마침 산재(散齋)하는 날이라 신들이 곧바로 발론하지 않아 유생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신들의 직임을 체차하소서."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윤인, 사간 채승선, 지평 안응로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원전】33집 407면

 

광해14/10/21(계미)

박홍구는 간사스럽고 비루한 인물로서 젊었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영합하여 좋은 벼슬을 줄곧 차지하였다. 류영경이 득세했을 때에는 그와 결탁하여 편당이 되어 양전(兩銓)에 출입하였고, 영경이 패하자 또 삼창(三昌)들에게 빌붙고 궁인들과 체결하여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원전】33집 480면

 

인조01/03/14(갑진)

박승종(朴承宗)이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과 함께 달아났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승종은 선묘조(宣廟朝) 때 출신하여 재간과 기국이 있는 자로 일컬어졌고 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류영경(柳永慶)과 결탁하여 오랫동안 요로에 있었는데, 광해 때에 이르러 그 아들 자흥의 딸이 폐세자(廢世子)의 빈(嬪)이 됨으로써 권세가 날로 성해졌다. 7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아첨으로 총애를 굳히며 오직 탐욕만 부려 전택(田宅)을 널리 점유하였다.【원전】 33 집 504 면

 

인조01/03/15(을사)

김신국(金藎國)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신국은 명민하고 재주가 있으나, 성품이 본래 교활하여 기회를 보며 시류에 영합하기를 잘하였다. 처음에는 류영경(柳永慶)에게 빌붙어 국정을 어지럽혔고, 광해 때에는 류희분, 박승종과 결탁하였고 게다가 폐모의 정청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기었다. 일찍이 서도에 임명되어 자못 민심을 얻었었기 때문에 이에 이르러 이 직을 제수받게 되었다. 그러나 물의는 그것이 구차한 처사임을 비난하였다.【원전】 33 집 505 면

 

인조01/03/17(정미)

이선행(李善行)을 봉교로, 박해(朴海)를 대교로, 류흠(柳흠)을 검열로 삼았다. 이선행과 박해는 선묘(宣廟) 말년에 류영경(柳永慶)의 추천으로 사관직(史官職)을 제수 받았었는데, 영경이 실각하자 모두 연좌되어 물러났다가 이 때에 와서 다시 서용되었다. 【원전】 33 집 508 면

 

인조01/03/19(기유)

이이첨은 간신 이극돈(李克墩)의 후예이다. 사람됨이 간교하고 독살스러워서 젊어서부터 하는 일이 오로지 속임과 가식만을 일삼았다. 3년 동안 시묘를 살면서 거짓으로 죽을 먹는다 칭하고 남몰래 성중에 들어와 제 집에 머물러 있었다. 유생으로 반궁(泮宮)에 있을 때에 이미 부정한 기미가 있었는데 급기야 벼슬길에 오르자 오로지 혼란만을 일삼았다. 선조가 그의 간교한 정상을 밝게 보고 오랫동안 외방으로 내쫓았었는데, 무신년에 정인홍(鄭仁弘)과 음모하여 상소해서 류영경(柳永慶)을 공박하며 광해(光海)를 부호할 바탕으로 삼았다. 선조가 곧 멀리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는데 출발하기도 전에 광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로부터 총애가 날로 두터워져서 끝내는 요로에 오르게 되었고 요로에 오른 뒤에는 오직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일삼았다.【원전】 33 집 509 면

 

인조01/09/11(무술)

경세가 아뢰기를, "촉각제(燭刻製)는 그 문장이 상시의 제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상례인데도, 그때의 제술이 모두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글들이 남의 손을 빌어서 미리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광해 때 류영경(柳永慶)이 역모를 하였다는 이유로 추형(追刑)까지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억울하다고 합니다. 반정한 뒤에 그의 억울함을 풀어 준 것이 좋으나 복직까지 시킨 것은 옳지 못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억울하게 죽었는데 복직시키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하였다.【원전】 33 집 550 면

 

인조02/12/17(정유)

간원이 아뢰기를,"장령 류항(柳恒)은 명망이 드러나지 않아 풍헌(風憲)의 직에 합당하지 않으니 체차를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류항은 류영경(柳永慶)의 형의 아들이다. 【원전】 33 집 662 면

 

인조04/05/05(병오)

대사간 정온(鄭蘊)이 상소하기를,"신은 천성이 오활하고 어리석으며 말하는 것이 경망하여 전후 다섯 번 간원에 있었으나 모두 망령된 말 때문에 낭패를 당했습니다. -중략(中略)- 그러나 시양이 '인홍이 신 및 이첨과 함께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을 공격했다.'한 것은 없는 일입니다. 이 외의 이야기야 다 따질 것도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의 불초함을 모르시고 간관의 열에 발탁하여 두시었으므로 아는 일은 모두 말씀드렸으며 일에 따라 논열(論列)하여 총애하시는 데 있어 만에 하나라도 저버리지 않고자 한 것이 신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강자와 맞서 스스로 위험과 모욕을 취하니, 이는 신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버티고 있으므로 해서 남에게 경시를 당한 소치입니다. 빨리 직명(職名)을 삭제하라 명하시어 시골집에 귀양(歸養)할 수 있게 해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하니, 답하기를,'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김시양이 기승(氣勝)함을 면치 못하고 말을 분노에 차게 한 것이므로 내가 이미 책망하였다. 경은 직무를 보고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4 집 95 면

 

인조14/04/18(임진)

광성이 아뢰기를,"조정의 논의가 반드시 한가지로 나온 다음에야 나라의 체통이 비로소 높아지는 것입니다. 지난 선조조 계사년에 환도한 뒤에 류성룡(柳成龍)이 국정을 맡았을 때에는, 한 때의 논의가 모두 그에게서 나왔으며, 류성룡이 패한 뒤에 류영경(柳永慶)이 국정을 맡았을 때에도 류성룡 때와 같았습니다. 어찌 논의의 분열이 오늘날과 같았던 때가 있었겠습니까."하고, 목서흠이 아뢰기를,"붕당이 처음 갈라진 날부터 국가가 이미 불행해졌지만 지금와서는 더욱 심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내 생각에는 사대부들이 화합하면 저절로 당파가 없어질 것으로 여겨진다."하였다. 【원전】 34 집 630 면

 

인조14/07/02(갑진)

백증이 아뢰기를,"옛날에 옷깃을 잡고 간한 자가 있었으니, 신의 소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단연코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지사(知事)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백증이 실언하였습니다. 류영경과 이이첨의 일을 어찌 오늘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옥한 거조는 지극히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체면으로 말하면 대신이 오명을 받았으니 그 또한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원전】 34 집 637 면

 

인조14/07/29(신미)

영의정 김류가 상차하기를,"신이 삼가 듣건대, 이조 참판 유백증(兪伯曾)이 조경(趙絅)을 구제하기 위해 한 말 중에 '신은 모두 홍서봉(洪瑞鳳)의 한때 동료들이니 그 헌의(獻議)는 당인을 비호한 데 불과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대신이 만일 공도(公道)가 있었다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류영경의 권세로도 정인홍을 가두지 못하였고, 이이첨의 방자함으로도 윤선도를 죽이지는 못하였습니다. -중략(中略)-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죄를 올바로 밝혀서 불충한 신하들이 경계를 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백증은 본래 성품이 과격하니, 경은 마음을 편히 갖고 개의하지 말라."하였다. 【원전】 34 집 642 면

 

인조16/03/08(신미)

남이공(南以恭)을 이조 판서로, 이목(李?)을 동지경연으로, 심동구(沈東龜)를 사간으로 삼았다. 남이공은 사람됨이 교활하고 사특하며 남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선조 때 전랑(銓郞)이 되어 사당(私黨)을 심고 선류(善類)를 내쫓아 조정을 혼탁하고 어지럽히자, 선조께서 그가 방자한 것을 미워해서 내쳤다. 이때 이이첨(李爾瞻)도 죄로 폐출되었었다. 뒤에 대신 류영경(柳永慶)이 이 두 사람을 거두어 쓰기를 청하자, 선조가 억지로 따르면서 '뒷날 국가에 반드시 화를 끼칠 것이니 그때는 내말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고, 이첨과 이공의 성명을 벽 위에다 써서 소인을 등용하지 말라는 뜻을 기록하였다. 【원전】 35 집 12 면

 

인조16/07/02(계해)

집의 심동귀(沈東龜)가 아뢰기를,"신이 삼가 듣건대, 이조 판서 남이공(南以恭)이 지난번 탑전(榻前)에 등대(登對)하던 날에 성교(聖敎)로 이공에게 면려한 것은 실로 범연한 일이 아닌데, 며칠도 되지 않아 사론(士論)이 허여하지 않은 류영경(柳永慶)의 손자 류심(柳淰)을 극히 잘 선발해야 할 전랑(銓郞)에 주의(注擬)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그것은 사적으로 끌어 쓰는 마음이고 전하께 보답하는 바가 아닙니다. -중략(中略)- 일개 류심을 논핵하는 것이 보합(保合)하려는 큰 기관에 저촉됨을 헤아리지 못하여 신의 몸은 이미 구덩이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사직하지 말라. 또 그대가 심정에게 비교하려고 한 것은 실로 지나치니, 동료가 곤란하게 여기고 따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하였다. 【원전】 35 집 25 면

 

인조16/07/07(무진)

비국이 아뢰기를,"근일 류심의 일로 인하여 삼사(三司)에서 의논이 분분하여 효상이 좋지 못하니, 신들은 그윽이 근심스럽습니다. 어제 삼가 성상의 전교를 보니, 일의 시비와 죄의 경중을 통찰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신들의 소견도 또한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류영경(柳永慶)이 7년 동안 국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당파를 심었으니 청의(淸議)에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기강이 대강 섰고 조야(朝野)가 대충 편안하였으며, 또한 사림(士林)들에게 화를 끼친 죄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종말이 잘못되어 혹독한 횡액을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가엾게 여겼으므로, 반정(反正) 초기에 특별히 죄명을 씻어주어 관작을 회복시켰습니다. 혹 벼슬을 회복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후한 처사라고 하는 자가 있었으나, 오직 그가 화를 가장 혹독하게 받았으므로 보시(報施)의 방도가 부득불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설령 오랫동안 권력을 잡아 끝내 뒷공론을 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허물이 증손(曾孫)에까지 미치지는 않기 때문에 류심이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에 선발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이의가 없었으니, 전랑으로 주의한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가령 경력이 많지 않은데 갑자기 극선(極選)에 주의했다고 한다면 신중히 하는 일에 다소 흠이 된다고 하겠으나, 이미 낭관을 다 뽑으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그때의 사세는 실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전일 낭관을 주의할 때에도 상의 전교가 있으므로 인하여 밖의 의논을 두루 묻지 못하고 다만 석상의 여러 동료들이 서로 상의하여 후보자를 추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젊은 사람이 지나치게 의심을 내어 장관과 여러 동료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기필코 자기 소견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실륜(失倫)에 비교하였으니 이미 부당하고, 그 중 한 조목의 말은 보합(保合)의 불가함을 극구 진술했으니 이는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하들이 화목한 것은 국가의 복이니, 다만 능히 보합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참으로 보합할 수 있다면 무엇이 이보다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동료들을 배반하고 홀로 의견을 내어 오직 좋은 뜻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겼으니, 극심한 당론(黨論)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전전되어 많은 파란이 야기되었습니다. 김진(金振)의 피혐은 성색(聲色)을 엄히 하였고 박수문(朴守文)의 피혐 또한 근래의 규정을 어겼으니, 옥당이 배척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새 규정에 관련된 일이고 형평을 잃은 말이 많아, 진정시키려는 사헌부 장관의 의논을 머뭇거렸다고 배척하고, 화평하게 하려는 사간원 장관의 거조를 부당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김진이 극심한 배척을 당한 것으로 말하면 감히 재피(再避)하지 못한 것이 무슨 대단한 잘못이기에 실정 밖의 비방이 이토록 극심합니까. 다른 사람이 준례 어긴 것을 질책하면서도 함께 한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홍문관의 유신(儒臣)이 일시에 죄를 받았으니 잘잘못을 막론하고 실로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발원은 잔을 띄울 만한 작은 것이었는데, 여파(餘波)가 하늘을 뒤덮은 것은 차츰 변해가는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종(鍾)은 스스로 울고자 하는데 막대기를 가지고 먼저 치면 종이 우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가지고 말하면 금일의 일은 아마도 전적으로 옥당만을 허물할 수 없을 듯합니다. 또 준례를 어기고 지나치게 한 잘못은 피차간 똑같으니 모두 체직시키고 서로 화해시켜야 진정시키는 방도에 맞을 것입니다. 이후로 만약 성상의 뜻을 본받지 아니하고 다시 소란한 단서를 야기시키는 자는 별도로 논죄하여 뒷사람들을 징계하는 것도 또한 늦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상께서 결단하소서."하니, 답하기를,"임금을 경시하고 법을 멸시한 죄는 체직에만 그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의논하게 하고 따르지 않는 것도 또한 타당치 않을 듯하므로 지금은 우선 따른다. 또 이 일은 심동귀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저 동귀도 또한 벌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파직시키고 서용치 말라."하였다. 【원전】 35 집 26 면

 

인조16/08/01(신묘)

부교리 류심(柳淰)이 상소하기를,"지난번 해조에서 신을 만부당한 지위에 주의(注擬)하였으니, 신의 마음에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겠습니다. 말한 자의 말에 무슨 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건대 신의 선조 류영경(柳永慶)은 선묘(宣廟)를 만나 특별한 예우를 받았는데 혼조(昏朝)에 이르러 흉악한 무리들에게 혹독한 모함을 당하여 끝내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하였으니, 당시의 사류(士類)들이 분노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온 나라가 원통하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지난날의 여론(餘論)이 성상의 조정에서 다시 발생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의 불초로 인하여 욕이 선조에게까지 미쳤으니 실로 목우(木偶)가 아니라면 어떻게 수치스러움을 안고 부끄러움을 참으며 태연하게 살겠습니까. 삼가 신의 체직을 허락하소서."하니, 답하기를,"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하였다.【원전】 35 집 30 면

 

인조19/02/12(정사)

대제학 이식(李植)이 상차하기를,"사기(史記)란 한 시대의 전장(典章)이며 만세의 귀감입니다. -중략(中略)- 심지어 그의 말년에 썼던 류영경(柳永慶)과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일은, 감히 일월의 밝음을 더럽히고 천지의 광대함을 엄폐시켜 마치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이 선인(宣仁)을 무함했던 것과 간궤(姦軌)가 동일하니, 이는 더욱 신하로 서는 차마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중략(中略)- 삼가 원하건대 묘당에 내려 자문을 구하시고 속히 재처(裁處)하여 주소서."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원전】35집 109면

 

명종 부록 신인본[新件] 선대 실록 편수관 명단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신 이덕형(李德馨)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신 윤승훈(尹承?)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전양 부원군 신 류영경(柳永慶) -以下省略-  【원전】 21집 1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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