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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이미 중국육조(中國六朝) 시대에 이루어졌다 하거니와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명종 때 문화류씨의 보(譜)가 효시(嚆矢)로 알려져 있다. 전주류씨와 문화류씨의 상계(上系) 내용(은) 구보(舊譜)에 밝혀있어 이에 생략하거니와 전주류씨 보첩(譜牒)의 창간은 임진(壬辰:1652)년으로서 전평군(全平君 : 류심)을 위시한 직(稷), 희잠(希潛), 원립(元立)의 공이 지대(至大)한 것으로 경상 감영(慶尙 監營)에서 간행되었으니 단권보(單卷譜)이다.
그 후 75년만인 병오(丙午:1726)에 선(選)께서 강원도 평창 임소(任所)에서 꾸미시었으니 사권(四卷)으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60년만인 병오(丙午:1786)에 의양(義養)께서 안동부 임소(任所)에서 십권(十卷)을 꾸미시었다.
90년만인 병자(丙子:1876)에 남규(南珪)께서 17권의 보첩을 간행하시었다. 그 후 여기저기 각파에서 파보는 간행되었으나 대동보는 이에 꼭 백(百)년 만에 꾸미게 되었다. [ 주) 병자보를 간행한지 48년 후 1924년에 영희(永熙)씨가 갑자보를 23권을 서울에서 간행하였는데 이를 모르고 100년 만에 꾸민 것이라고 한 것 같다]
십(十)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는데 하물며 백년이란 장구한 세월에 있어 서랴! 조선의 쇠망은 일제통치의 굴욕을 가져왔고 8․15광복의 기쁨은 동시에 6․25의 참화를 가져왔다.
혼란과 전화(戰禍)의 여독(餘毒)은 인심을 각박하게 만들어 자연 존조돈족(尊祖敦族:조상을 존경하고 동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의 정신이 희박하여 졌다. 피란(避亂)과 유리(流離)의 생활은 거소(居所)의 변동과 통신의 두절(杜絶)을 초래하여 종친 상호간의 왕래도 끊어지기 일수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선대에 힘써 만드신 족보의 정신을 후세에 전승(傳承)시키기 어려움을 통감(痛感)한 나머지 하루속히 전국에 산재(散在) 유리(流離)된 수많은 종원(宗員)들을 규합 정리할 필요성을 뜻있는 종친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해 온지 오래였었다.
다행히도 거년(去年:1975 을묘) 봄 고산(高山:전북 완주군) 향사(享祀) 때 종의(宗議)를 모아 이에 제오차보(第五次譜:제6차보가 맞는다)를 간행하게 되었다. 아직 통일의 비원(悲願)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북한땅 여기저기 수많은 동족들이 이 기회에 한데 모아 보첩을 같이 할 수 있는 기쁨을 나눌 수 없음은 유감 천만(遺憾千萬)의 일이어니와 전국 각지에서 요원(燎原:들을 태우는 불길)의 불길처럼 솟아오르는 종친애(宗親愛)는 마침내 심산벽지(深山僻地)에서 절해(絶海:바다 건너) 낙도(落島)에서 그간 소식이 단절되었던 종친들까지 수단(收單:각자의 족보 원고를 거두는 것)이 쇄도하여 보첩의 크기(가) 처음 3권으로 예상하였던 것이 5권으로 확대 되였으며 처음 4천여엽(頁:쪽) 예상이 5천여엽(쪽)을 훨씬 넘게되어 이 많은 종친들이 전국 각처에 맹활약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이제 한자리에 모여 이 뜻 깊은 보첩을 간행하게 되니 즐겁고 흔쾌(欣快)한 일이 이 이상 더 큼이 없다.
이 뜻 깊고 거창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서울의 경수(慶秀), 안동(安東)의 세희(世熙), 전주(全州)의 광근(光根) 제씨(諸氏)가 각기 그 지방의 종친을 대표하여 특히 수고가 많았고 전주(全州) 기정(琦諪)씨와 여수 두일(斗日)씨의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커다란 협조는 크게 도움된 바 있다.
때마침 음(陰) 십월중정(十月中丁) 국대부인(國大夫人) 향사(享祀)를 기하여 이 대동보가 간행(刊行) 배포(配布)하게 됨을 이중(二重)의 기쁨으로 생각하며 다시 한번 열렬히 성원(聲援) 협조해 주신 전국의 종친 여러분께 감사 드리며 아울러 이번 대동보(大同譜) 간행을 계기로 모든 종친들은 더욱더욱 선대(先代)의 유훈(遺勳)과 유덕(遺德)을 받들어 오직 존조목족(尊祖睦族:조상을 존경하고 동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하여 기리 영광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76년 병진 10월 일 전주시 인후동 시사재(時思齋)에서 18세손 청(靑)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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